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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 및 후기] 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 (정재윤, 2021, 푸른역사)

작성자Red eye|작성시간24.07.31|조회수213 목록 댓글 5

 


무령왕, 신화에서 역사로
정재윤 저자(글)

푸른역사 · 2021년 10월 09일
정가: 18,500원


목차

책을 펴내며
프롤로그-5~6세기 한반도의 전운

I부 백제사의 역주행, 무령왕릉 발굴
1. 1,500여 년 만에 드러난 무령왕릉
운명의 그날, 삽자루에 걸린 벽돌|무령왕릉 발굴, 우연인가 필연인가|무령왕릉 발굴 이후
2. 백제 문화의 진수를 보여주다
정교하고 화려한 금속공예품|무령왕릉 발굴의 성과

II부 탄생과 설화
3. 위기의 백제를 구하라-왜로 간 곤지
개로왕 즉위의 일등 공신 곤지, 좌현왕에 임명되다|곤지가 왜로 간 까닭
4. ‘섬’을 이름으로 가진 아이
무령왕 탄생 설화는 어디까지 사실일까|무령왕이 태어난 가카라시마의 위치|무령왕의 이름은 왜 사마였을까
5. 곤지, ‘가와치 신화’를 창조하다
백제인들이 정착한 가와치 지역과 아스카|가와치 지역에 보이는 백제인들의 흔적|백제와 왜, 전략적 동반 관계 구축-곤지 파견의 목적
6. 홀로된 사마, 섬을 무대로 성장하다
사마는 누구의 아들일까-출생의 비밀|섬을 무대로 활동한 ‘도군’, 사마|이와이의 난을 통해 본 규슈 지역 백제계 세력의 실체|사마, 백제 중흥의 뜻을 세우다
7. 천험의 요새 웅진으로
개로왕, 무모한 패장인가 시대의 희생양인가|500년 도읍지 한성이 불타다|웅진, 위기에 빠진 백제의 새로운 터전이 되다

III부 국인공모國人共謀
8. 곤지의 귀국과 죽음, 혼돈의 시대로
곤지는 어떻게 귀국하였나|곤지의 죽음-자연사인가 음모인가|혼돈의 극치, 문주왕 시해
9. 모대와 사마의 입국
삼근왕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모대의 입국|사마의 입국|동성왕 즉위 배경|동성왕의 정치적 기반|동성왕 즉위와 사마의 역할
10. 사마의 국내 활동
동성왕의 왕권 강화 노력과 한계|사마, 위기를 반등의 기회로
11. 동성왕 몰락과 사마의 결단
파국으로 치달은 권력 투쟁|동성왕의 몰락|동성왕 몰락의 전조|사마는 어떻게 살아남아 왕이 되었는가
12. 동성왕 시해와 정변 주도 세력
동성왕 시해 사건의 전모|동성왕 시해와 무령왕의 역할|강에 수장된 역적

IV부 갱위강국更爲强國
13. 준비된 개혁군주
제도적인 왕권 강화로|무령왕 가계의 골족의식|귀족들의 서열화
14. 위민정치의 실천
무령왕의 위민의식|국가 주도의 제방 축조|백성들의 귀환과 호적 정비|백성의 나라임을 선언하다
15. 강을 열고, 바닷길을 잇다
흔들리는 백제의 위상|백제의 기지개, 가야와의 알력|남방 정책, 섬진강 유역을 장악하다|동아시아 교역로를 주관하다
16. 갱위강국의 선포
무령왕 정권의 지향점|숙원인 고구려를 격파하다|《양직공도》에 보이는 백제의 위상|갱위강국을 만방에 선포하다
17. 사마, 잠들다
한성 순무, 시작과 끝|마지막 고뇌, 신라와 가야|웅진 땅에 잠들다

에필로그-무령왕, 끝나지 않은 신화

참고문헌
찾아보기



<후기>

이 책을 읽게 된 이유는 한국 고대사 중 저로서는 매우 취약한 백제사에 대한 최신 업데이트를 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는 한성백제가 개로왕의 전사로 무너져 신라로 구원병을 청하러갔던 문주왕이 왕위를 계승하고 웅진으로 긴급히 천도?하면서 시작됩니다. 부여족과 한성귀족들이 남하하면서 웅진지역과 마한계통 토착귀족들이 지배권을 가지고 다투게 되고 해씨의 반란, 진씨의 반란으로 문주왕, 삼근왕이 차례로 시해되는 매우 혼란한 정치적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습니다.

개로왕의 동생인 좌현왕 ’곤지‘는 대왕명을 받들어 규슈의 백제계 도왜인들의 영역을 거쳐 ‘세토 내해’를 통해 야마토와 가까운 가와치에 가족을 데리고 정착하는데 왜국 내 백제계 도왜인들의 세력을 규합하고 대세로 떠오른 야마토 정권으로부터 군사적 협조를 얻어내기 위한 임무를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필자는 ‘곤지’가 개로왕으로부터 ‘좌현왕’이라는 직함을 하사받는데 이것은 흉노족들의 선우-좌현왕의 관계라고 설명하더군요.(좌현왕은 군사적 지휘권을 가진 작위로 삼국지에 나오는 ‘도독’의 지위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백제국 좌현왕이 가와치(쇼군토탈워를 해보신 분들은 어디인지 아실거 같네요)로 오는 여정에서 개로왕의 부인도 데리고 오는데 이미 아이를 임신하고 있었고 규슈의 가카라시마(아직 그 정확환 위치에 대해선 명확하지 않습니다.)에서 낳았으니 바로 무령왕 ‘사마’였습니다. 아직도 ‘영동대장군 백제국 사마왕’이 누구의 아들인지 명확하지 않지만 필자는 2가지 경우를 추론 설명 해주었네요. (아시다시피 개로왕의 아들인가? 좌현왕 곤지의 아들인가?) 곤지는 가와치로부터 본국으로 귀국하면서 자신의 가족을 대동하고 왔으며 그에게 적장자가 있었으니 이름이 ‘모대’로 훗날 ‘동성왕’이 됩니다. 본국 백제에서 대왕이 귀족들과의 세력다툼으로 시해되는 어지러운 상황에서 곤지는 자신의 아들 ‘모대’와 ‘사마’(조카? 아들?)를 대동하고 귀국하였을 것으로 추측하였고 그와 동시에 백제계 도왜인들 세력과 왜국의 세력들까지 데리고 입국하며 그 위세를 과시했을 것으로 보았습니다.

하지만 곤지도 살해당하고(누가 시해했는지 명확하지 않습니다.) 삼근왕을 시해한 진씨 가문이 ‘모대’를 왕으로 추대하니 그가 ‘동성왕’ 이었습니다. 문주-삼근왕이 했던 것처럼 집권초기 왕권강화를 위해 한성귀족가문들과 웅진 및 마한계통 토착귀족들간의 2인자 경쟁을 붙이고 골족인 부여족들을 남쪽 지방에 ‘왕’ ‘후’로 파견하여 지역안정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신라와는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탐라가 공물을 바치지 않는다는 명분으로 출병하여 마한지역의 무진주(지금의 광주광역시)까지 세력을 넓히기에 이릅니다. 하지만 말년에 왕권강화와 귀족들간 싸움붙이기에 몰두한 나머지 가뭄과 흉년으로 고통받는 백성들을 돌보지 않아 신하들의 간언에도 구휼하지 않았고 결국 위사좌평 백가에 의해 시해되었습니다.

동성왕의 견제로 백제 중심권부에서 멀어져 남쪽지역에 파견되어 있던 40대의 ‘사마’는(영산강 유역이었을 것으로 추정) 시해된 동성왕의 뒤를 이으니 그가 ‘무령왕’ 이었습니다.

성품이 온화하고 ‘타인의 말을 귀담아 들을 줄 알았던’ 무령왕은 한성귀족들의 오랜 염원을 들어주고자 한강유역 탈환을 위해 출병하여 고구려의 수곡성외 여러성을 깨트렸고 국가가 해야했던 의무였던 제방을 쌓아 대가야로 도망친 백제유민들을 불러들이고 섬진강 유역까지 진출하며 마한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기에 이릅니다. 야마토, 신라, 중국 남조를 잇는 바닷길을 열며 중국 양나라에 외교관계를 수립하고 고구려 장수왕이 가진 ‘정동장군‘보다 높은 ’영동대장군‘직까지 제수받아 ’갱위강국‘을 선포하기에 이르네요. 하지만 이것은 양면성이 존재하니 아래로는 가야연합국들과 신라에게 긴장감을 안겨주었고 고구려에게는 출병의 명분을 쌓게 하였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무령왕이 한강유역에 성을 쌓고 한달간 위무하며 웅진으로 귀환후 서거하자 고구려는 기다렸다는 듯이 출병하네요.

개로왕부터 무령왕 시기까지의 기록이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서 상충하는 부분, 일치하는 부분이 있으며 역사학계의 복어같은 ‘일본서기’에서 과장되고 작자의 의도된 것들을 제하는 과정을 반복해야하고 기록들도 상대적으로 풍부하지 않아 작가는 일치되는 팩트들에서 앞뒤관계를 따져 추론하는 방식을 거쳐야 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몇가지 든 생각은

첫째, 복어같은 ‘니혼쇼키’와 함께 백제사를 연구해야하는 분들은 정말 어려운 길을 가시는구나하는 생각이 들었고 자칫 잘못 빠지면 일본극우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결론을 내릴수도 있으니 칼위에선 무당같은 느낌도 들었습니다.

둘째, 고구려나 백제나 노빠꾸ㅎ 아니 정말 뒤로 물러서는 사람들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요, 왕들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전투에 임하고 그것도 모자라 전투중 전사까지 하니 그 ’위무정신‘에 깜짝깜짝 놀랐습니다. 마치 거대하고 깊은 태평양을 죽을 때 까지 쉴새없이 헤엄쳐야하는 블루마린이나 북방 참다랑어가 떠올랐다고 할까요?

세번째로 백제는 수도에 고구려와 같이 전시와 평시때의 성을 가지고 있었고 한성을 빼앗긴 뒤로는 큰 위기감이 들었는지 지금의 일본 규슈에서 오사카 동부까지 백제인들이 이주하여 그곳에서 세력을 키우고 야마토정권으로부터 군사협조를 얻어내는 외교적 노력들까지 하며 제 3의 성까지 생각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게 되었고, 개로왕 전사에서 무령왕까지 그 복잡한 정치적, 역사적 이벤트들의 발생과 그 과정을 알게되어 저로서는 백제사의 큰 업데이트가 있었습니다.

넷째, 아무리 권력과 부, 군사력을 갖추고 있더라도 온갖 재난이나 외침으로부터 백성들을 돌보지 않는 국가지배층이나 리더들의 최후는 고금을 막론하고 유사하다는 생각이 들었네요. 그에 더해 국가총력전인 전쟁에서 패하면 내부적으로 어떠한 정치적 대혼란에 휩싸이는지 한성백제의 마지막을 보며 많은 것을 느꼈습니다.

다섯째, 이 책을 읽으면서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인 ‘무령왕’의 출생과 귀국, 대왕직을 계승하고 왕권을 강화하면서 위민정치를 펼치고 한성을 일부수복하며 죽기 전까지 한성순무하다 숨을 거둔 서사가 큰 영감을 주었고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그리고 70년대에 행해진 무령왕발굴과정의 허술함에 너무 안타깝고 안타까웠네요.

마지막으로 무령왕께서 중국 남조 양나라에 외교사신을 보내 선언했던 것을 소개하며 마치겠습니다.

累破句麗 更爲强國
(누파구려 갱위강국)

“고구려를 여러번 깨뜨려 다시 강국이 되었다.”

‘양직공도’에 기록된 백제국 사신


무령왕릉에서 발견된 지석 “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癸卯年五月丙戊朔七日壬辰崩到乙巳年八月癸酉朔十二日甲申安조 登冠大墓立志如左”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께서 나이가 62세 되는 계묘년(523년) 5월7일에 돌아가셨다. 을사년(525년) 8월12일에 안장해 대묘에 올려 모시며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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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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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Red eye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4.07.31 번외로 장수왕이 북위와 외교관계를 맺으려고 시도하는 백제를 보고 직접 3만 군세를 일으켜 기습적으로 한성을 박살내는 것을 보고 국제정세 파악하는 그 정무감각에 또한 놀랐습니다.
  • 작성자PANDA | 작성시간 24.07.31 인간은 개XX сука блять 인데 연구는 잘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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