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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 도서]한권으로 읽는 고려 조선 왕조실록

작성자케벨로스|작성시간12.11.12|조회수371 목록 댓글 3

 

 

 

 

제1대 태조

신라의 통일이 당나라의 외세를 빌려 이룬 것이라면

고려의 통일은 민족 대화합적 차원의 자주적 민족통일이었다.

이 민족통일의 주도 세력은 왕건을 중심으로 한 고려 건국 세력이었다.

하지만 통일전쟁이 지속되면서 926년에 거란에게 멸망당한 발해 유민이 합세했고

또한 신라 왕실과 백성들도 이에 호응하여 연합군에 가담했드며

후백제를 세운 견훤까지 끌어안음으로써 명실공히 민족 대화합을 이룬 가운데 통일을 성사시켰다.

고려는 이처럼 한반도에서 우리 민족이 자주적으로 일궈낸 최초의 통일국가였다.

고려의 통일로 말미암아 한민족은 단일민족으로 단일문화를 형성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으며

한반도의 문화 중심지도 경주에서 개성으로 옮겨가게 되었다.

개성이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는 것은 경주를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던

신라 문화를 전국적으로 확대시켰다는 의미이자,

동시에 고구려 문화를 회복할 기회를 맞이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고려가 고구려의 '고토회복'이라는 명분을 내걸고

꾸준히 북진정책을 수행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했다는 것도 고려 건국의 성과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통일국가를 이룬 왕권에게는 두 가지의 중요한 과제가 남아 있었다.

첫째는 지방 호족 세력을 중앙으로 결집시켜 중앙집권적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일이었고,

둘째는 고려가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확인시키기 위한 고구려 고토회복운동을 전개하는 일이었다.

왕건의 후비는 총 29명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혼인정책은 그가 죽고 난 뒤 고려를 왕권다툼의 각축장으로 몰고 가게 된다.

각기 다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이복형제들을 전면에 내세운 호족들의 왕권 경쟁으로

고려 왕실은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에 휩싸이게 되는 것이다.

그 같은 미래상을 예상했음에도 불구하고 왕건은 혼인정책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다.

혼인정책은 강력한 통치체제를 갖추지 못했던 그가 그나마 고려를

하나의 통일된 국가로 유지할 수 있는 유일한 방책이었기 때문이다.

왕건은 호족들과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혼인정책 이외에도

호족들에게 왕씨 성을 내려 의제 가족관계를 형성하기도 했다.

통일 중심적인 정치이념과 유화적인 성격에 바탕한 왕건의 일관된 화합정책은

고려를 하나의 단일민족국가로 유지시키는 구심체였다.

따라서 왕건의 혼인정책은 단순한 호족달래기 차원의 정치적 수단을 넘어서서 민족대화합을 위한 최선의 선택이었다.

민족대화합책과 아울러 왕건이 추진한 또 하나의 숙원사업은 고구려 고토회복운동이었다.

왕건은 고구려의 옛땅을 회복하기 위해 말년까지 강력하게 북진정책을 추진했으나 만주를 회복하는 데는 실패했다.

하지만 고려의 강력한 북진정책은 서쪽에서는 청천강, 동쪽에서는 영흥 이북까지 여진족을 몰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비록 청천강에서 영흥에 이르는 일부 지역만을 회복한 것이지만

호족연합체 성격이 짙은 고려체제를 감안할 때 이는 획기적인 결과였다.

훈효십조


1. 불교를 진흥시키되 승려들의 사원 쟁탈을 금지할 것
2. 사원의 증축을 경계할 것
3. 서열에 관계없이 덕망이 있는 왕자에게 왕위를 이을 것
4. 중국풍습을 억지로 따르지 말고, 거란의 풍속과 언어를 본받지 말 것
5. 서경(평양)에 1백일 이상 머물러 왕실의 안녕을 도모할 것
6. 연등회와 팔관회 행사를 증감하지 말고 원래 취지대로 유지할 것
7. 상벌을 분명히 하고 참소를 멀리하며 간언에 귀를 기울여 백성의 신망을 잃지 말 것
8. 차령산맥 이남 공주강(금강) 외곽 출신은 반란의 염려가 있으므로 벼슬을 주지 말 것
9. 백관의 녹봉을 증감하지 말고,
병졸들의 사기진작을 위해 매년 무예가 특출한 사람에게 적당한 벼슬을 줄 것
10. 경전과 역사서를 널리 읽어 옛일을 교훈삼아 반성하는 자세로 정사에 임할 것


중국이나 일본 역사서들도 고려와 고구려를 같은 나라로 표기하고 있으며

일연의 <삼국유사>에서도 고구려를 고려라고 표기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근거로 볼때 코리아(Korea)나 꼬레(Core) 등의 알파벳식 명칭도

고려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 고구려를 지칭한 것으로 판단된다.

고구려시대에 이미 고구려는 고려라는 이름으로 인도나 티베트뿐만 아니라

중국 서쪽 세계에 알려졌을 것이기 때문이다.

 

 

PS " 고려조선왕조실록은 개정판 전의 책을 구매하였은데 각 당시 왕들의 정책 사건 인물들이

 

간략하게 나오지만 당시 왕 가족들의 관심이 있으시면 정보를 얻으시길여.................  "

 

 

 

출처 http://cafe.daum.net/pyungsanpa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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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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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마법의활 | 작성시간 12.11.13 같은 출판사의 조선 왕조 실록은 전반적으로 별로 평이 안 좋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골룸말종시대 | 작성시간 12.11.12 고구려백제신라왕조실록이 아니구여?
  • 답댓글 작성자마법의활 | 작성시간 12.11.13 그것도 그렇고 이것도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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