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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술의 사상

작성자관중|작성시간17.09.22|조회수275 목록 댓글 1



일본에 문자가 생기지 않은 것은 절대왕조가 성립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성한 왕'을 핵심으로 하는 절대왕조가 생기지 않으면 문자가 생기지 않는다.

(우메하라의 가설에 따르면) 신성왕조라는 것은 이민족을 포함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이민족을 지배하기 위해서는 문자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양자강 유역에는 뛰어난 문화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문자가 없다. 이민족이 없었기 때문이다.

신성왕조는 여러 이민족들을 지배하기 위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가져야 한다. 그래서 왕은 스스로 신이 되어야만 한다. 신과 소통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신과 소통하는 수단이 바로 문자다.

이집트의 히에로글리프(신성문자)도 피라미드(왕들의 묘) 속에만 있다. 본래 문자는 현실적인 업무에는 사용되지 않았다.

현대인은 문자가 사람간의 소통을 위한 수단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없는 상태에서 문자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그런 눈으로 고대를 보면 모든 것이 달라진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기 위한 수단은 오랜 세월이 흘러 죽간이나 목간의 시대에 이르러서 비로소 생겨난다.


도道는 이민족의 잘린 머리를 가지고 걷는 모습의 형상문자다.


자기들이 지배하는 영역 바깥으로 나갈 때에 "거기에는 이민족의 신이 있다 .우리가 섬기는 영과 다른 영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영을 퇴치하면서 나아가야만 했다.

이민족의 머리를 들고 걸으면 이민족의 신을 퇴치할 수 있다고 믿음.

미개사회에서 해골을 늘어놓는 것은 모두 사악한 영을 쫓아내기 위한 주술적 행위다.

과거는 그렇게 악령이 득시글거리는 세계였다.


은나라는 대통일을 이룬 왕조가 아니었다. 엉성한 형태의 씨족 통합 국가였다. 여기저기에 자기의 왕자를 파견해서 분자봉건分子封建이라는 방식으로 통합에 필요한 정치력을 구축했다. 따라서 각 부족이 불만을 갖고 분리하면 곧바로 붕괴될 수 있었다. 정상적인 국가라고 할 수 없는 형태였다. 그래서 신이 절실하게 필요했다. 절대적인 신이 없으면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본래 청동기는 주진呪鎭이었다. (상대의 저주를 막기 위해 땅속에 묻은 주술적인 도구)


일본은 한자를 다양한 방식으로 읽는 특성이 있다. 이 특성은 현존하는 어떤 나라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백제 사람들이 일본에 건너갔을 때, 일본 사람들은 아직 문자를 사용하지 못했다. 일본으로 간 백제인들은 오랫동안 '기록관'에 봉직했다. 일본의 문자는 모두 그들이 만들었다. 일본 사람들은 거기에 참가하지 않았다. 백제인들은 한자어도 알고 일본어도 알았기 때문에 그 둘을 절충해서 일본어에 적합한 방법으로 읽는 훈독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백제인들이 훈독의 발명자일 것이다.

한국의 한문에는 약간의 버릇이 있다. 예를 들면, '팔월에'라고 할 때 '팔월 중中'이라고 쓴다. 그리고 '누군가가 죽었다'고 할 때 딱히 끝내는 말이 필요가 없음에도 문장 끝에 '지之'를 붙인다. 이렇게 '지'를 붙이는 한문은 없다. 백제식 한문의 습관이다. 이것은 일본의 초기 문장에서도 나타난다.

일본 사람들이 한문을 습득한 것은 아주 특수한 경우거나 아니면 율령제가 실시될 무렵이다. 전국적으로 목간을 통해 통달이나 기록을 해야 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기록관'의 양성이 필요했다. 그때야 비로소 일본 사람들이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묵가(墨家)는 집단성이 강한 기술자들이었다. 묵형(墨刑)을 받은, 지금으로 말하면 형벌을 받은 교도소 동료들이다.

본래 그들은 왕궁이나 거대한 신전과 같은 곳에 부속되어 있던 집단이었다. 자기들이 속해 있던 귀족 계급이 붕괴하자 독립을 하여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조직했다. 따라서 묵자의 입장에서 보면 신분 계층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공자는 눈앞에 보이는 적이었다.


공자는 가장 인간적인 냄새가 나는 사람이었다. 근거로 먼저 무리를 만들지 않았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는 교조로서 행동하지 않았다.

누군가 인간으로서 가장 좋은 삶의 방식은 무엇인지 묻는다면 공자는 이념적으로는 중용中庸을 지키는 인간이 가장 좋다고 대답한다. 중용이 가장 좋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중용을 잃지 않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 다음에 어떻게 사는 것이 좋은지 물으면 광견(狂狷)의 무리가 좋다고 대답한다. 狂은 진취적 사람이다. 狷은 죽어도 그런 일은 하지 않겠다는 식의 결벽증이 있는 사람이다.

시인과 같은 사람들이 광견의 무리라고 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보면 사물은 좌우로 진자운동을 하지 않으면 앞으로 나갈 수 없다. 로켓이 아닌 다음에야.


공자는 추방당했다. 추방된 사람은 죽여도 법에 저촉되지 않는다. 그것이 망명자들(盜)의 운명이다.


소동파는 매우 재능이 뛰어나고, 옳은 것은 옳다고 했다. 죽을 지경에 이르러서도 태연한 표정으로 뛰어난 시를 짓고 문장을 쓰고 서화를 즐겼다.

도연명은 좀... 깨달음이 지나쳤다. 시는 뛰어나지만. 40세까지는 시를 통해 이해할 수 있지만, 그 이후 죽을 때까지 20여 년 동안 무엇을 했는지 알 수 없다. 세상을 등졌다고 봐야 한다.


공자는 뛰어난 정치가가 아니므로 정치활동이 번번이 실패했다. 실패할 때마다 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고, 그 가르침을 널리 퍼트렸다.

플라톤 역시 정치가가 되려 했으나 번번이 실패했다.


전국시대의 사상가는 '천하'라는 말을 쓴다. 그들은 '국가'라는 말을 쓰지 않았다. 여러 개의 국가를 포함한 것이 천하다. 그런 상황에서 질서를 생각했다는 것이다.

맹자가 수레 수십 대를 거느리고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것은 일종의 정치운동이다. 만약 적당한 대우를 해주지 않으면 다른 나라로 가서 그 나라의 불리한 점을 모두 폭로하겠다는 식의 책동이다.

그 시대의 국가는 뛰어난 사상가들을 모아서 문화적인 힘을 키우려고 했다. 제나라의 직하학궁이 대표적.

당시의 학자는 단순한 연구자가 아니었다. 학문은 동시에 정치력이고 문화의 힘이었다.


묵자의 경우 묵墨은 문신이라는 의미로, 문신을 한 죄수를 가리킨다. 당시 죄는 신에 대한 모욕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죄수를 신의 노예로 삼아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소에서 봉사를 하게 만들었다. 거기서 여러 가지 일을 하게 되는데, 묵자는 물건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병기도 제작하고 성벽도 쌓는 기술자 집단이었다.

주周 왕조가 멸망하자 이들을 고용하는 사람이 사라졌다. 이들은 이때부터 여러 나라를 떠돌게 되었다. "우리는 이 성을 무너뜨릴 수 있습니다"라고 선전을 하면서. 그들은 결속을 하지 않으면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개인의 인격 형성이 기본인 유가와는 전혀 다르다.

물건을 만드는 사람은 모두 수호신을 가지고 있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이 홍수를 대비하는 치수 공사인데, 치수의 신은 바로 우禹다. 따라서 묵자는 우를 수호신으로 내세웠다.

처음에 유가는 주나라의 문왕 · 무왕 · 주공을 내세웠는데, 묵가가 우를 내세우자 유가도 요 · 순을 내세웠다. 그렇게 해서 요 · 순 · 우 · 탕왕 · 문왕 · 무왕 · 주공이라는 고대 성왕의 계보가 만들어졌다.

순은 은나라 신화에 나오는 신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태양신이다. 요는 토기를 만든 사람들의 신으로 추정된다. (시라카와의 추정)


묵가는 춘추전국 시대라는 혼란기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들이 가진 기술력을 팔려고 여러 나라들을 떠돌아다녔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매우 강력한 결사 조직을 유지했다.


옛 서적은 장章의 구분이 없었다. 죽간에 기록했기 때문.


은나라는 매우 고대적이고 종교적인 성격이 강한 왕조였다.

정식 명칭은 상商이다. 상은 도시의 이름이다. 자기들의 도시를 '상', '대읍상大邑商' 또는 '천읍상天邑商'이라고 불렀다.

은殷은 상나라에 대한 멸칭이다.

주나라는 '술만 마셔대는 혼란스러운 은나라를 멸망시켰다'고 말한다. 은나라가 술을 마신 것은 제사 때에 술을 사용한 것이지 매일 술을 마신 것은 아니었다.

은나라는 멸망해도 그들의 문화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다. 주나라는 아직 그 정도의 문화를 갖고 있지 못했기 때문에 천하를 손에 쥐고 호령하던 시대에도 '대방은'이라는 말을 쓸 수밖에 없었다. 무력으로는 지배했지만, 문화적 · 정치적으로는 아직 거기까지 가지 못한 상태였다.


장자 속에는 정치나 국가의 문제가 별로 나오지 않는다. 존재론이나 인식론과 같은 형이상학적인 철학적 논의가 많다. 이것은 당시 사제 계급의 상당히 수준이 높은 사변법이다. 신화같은 것을 잘 안다. 그런 것을 모르면 제사는 불가능하다.


그런데 노자의 경우는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와 같은 현실 문제가 격언풍의 운문으로 잘 정리되어 있다. 그것은 여러 가지 논의 끝에 도달한 결론이 각 조항별로 정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이다. 신비적인 것은 거의 없다.


제帝는 사물을 만든 조물주신이다.


사서오경 중 논어처럼 인간을 중심에 놓은 책은 없다.


초사(楚辭)는 초나라 무축들의 문학이다.

무축들은 멸망한 은나라에서 주나라로 옮겨 가고, 다시 주나라가 멸망하자 산서성의 진(晉)나라로 옮긴다. 춘추 시대 내내 진나라가 가장 강했기 때문에 주나라를 섬기던 악사라든지 여러 의례를 담당하고 있던 무리들은 더 이상 경제적인 도움을 받지 못하자 모두 진나라로 흘러든 것이다.

그런데 진晉나라가 셋으로 분리되어 한 · 위 · 조나라가 된다. 그러자 이번에는 당시에 가장 유력한 초나라로 몰려간다. 무축의 전통은 이런 경로를 거쳐서 최후에 초나라에 정착했다.

무축들이 진晉나라에 있었을 때 전해진 것이 국어(國語)라는 책이다. 무축의 무리는 오래된 이야기를 구전으로 남겼다. 그 고사들의 이야기를 글로 정리한 것이 국어다.

초나라가 멸망하자 무축들은 구의산에 있는 순의 사당을 향해 남하하던 도중에 집단이 붕괴되고 말았다. 그 과정에서 태어난 것이 이소(離騷)와 구장(九章)같은 초사 문학이다.


중국 문학은 거의 『초사』에서 나왔다. 한나라 때의 사부(辭賦)는 『초사』의 형식 그대로다. 따라서 초사의 중요한 부분을 알고 있으면 『문선文選』에 나오는, 어렵게 느껴지는 한나라 때의 부賦를 대체로 읽을 수가 있다. 구두법이나 표현 방식이 거의 같기 때문이다. 표준이 있어서 비교를 해볼 수가 있으니 읽을 수 있다.


공자는 형식을 배척했지만, 그 정신은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다.

따라서 전통에 대해 상당히 관용적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공자를 이른바 합리주의자라고 할 수 있으나, 그것은 불합리하다는 등의 자세로 각을 세우고 논리적으로 공격해들어가는 부류의 사람이 아니라, 그것으로 괜찮다면 그래도 좋다는 식의 관용이라고 할까, 일종의 순응적인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정치적인 자세는 매우 엄격했지만, 인간적인 측면에서는 솔직하게 살아가는 것, 중용이 가장 좋고 각을 세우지 않는 것이 가장 좋다는 말을 한다.


은나라에는 문신의 풍속이 있다.


송宋나라는 은나라의 후예들이 세웠다.

풍속이나 습관이 주나라의 후예인 다른 나라들과 상당히 달라서 특별취급을 받았다.

좀 멍청한 사람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송나라 사람이 주인공이다. 각주구검의 고사 등.


은殷은 상나라를 멸시하는 표현이다. 殷이라는 글자를 나누어서 보자면, 왼쪽은 임신한 모습이고, 오른쪽은 두드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임산부를 때린다는 것은 어떤 주술적인 행위로 보여진다. 임산부가 지닌 특별한 힘을 발휘하게 하기 위해 임산부를 때리는 것이다. '은'이라는 글자는 '번성하다', '격렬하다', '파괴'라는 뜻을 갖기도 하고, 피가 흐르는 경우에는 만리주은(萬里朱殷)이라는 식으로 만 리에 피가 덮였다는 뜻도 있다. 매우 격한 의미를 가진 글자다.

임산부의 배를 두드린다는 것은,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주술적 행위와 연관이 있지 않을까?


죽은 뒤의 의례에 쓰이는 거의 대부분의 글자에 의(衣)가 들어가 있다.

사람이 죽는 것은 옷에 해당하는 몸을 벗고 떠난다는 것.

의(依)라는 글자는 사람에게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혼을 옮긴다는 의미가 들어 있다.

빙의(憑依)는, 옷(혼령이 입는 옷 = 사람의 몸)에 혼령이 옮겨가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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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Dirus | 작성시간 17.09.23 재밋게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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