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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의 정치신학

작성자관중|작성시간18.08.15|조회수304 목록 댓글 2



예전에 인상 깊게 읽은 책인데, 메모해둔 부분이 있어 공유합니다.

몇 번 더 읽어서 완벽하게 저자의 의도를 이해하고 싶은데, 지식도 부족하고, 좀처럼 시간이 나질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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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야민에게는 강렬함이 있는데, 여기에는 내재적인 게 없다. 내재성에서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다.

건널 수 있는 다리는 건너편에서 온다. 그리고 우리가 이 다리를 건널 수 있을지 여부는 우리 자신에게 달린 게 아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영혼의 아파트 꼭대기까지 갈 순 있겠지만 그건 아무것도 아니다.

분명 막다른 지점(절벽)이 있을 테니까.

이걸 건널 방법이 없다.

건너편에서 우리에게 "너는 해방되었다"라는 음성이 들려와야 한다.

건너편에서 무슨 일인가가 먼저 일어나야만 그런 다음 우리가 그걸 볼 수 있다.

별빛이 우리의 눈을 찌른 뒤에야 그걸 볼 수 있듯.


스피노자의 예정설.

기도를 올리거나 탄원을 하더라도, 심지어 마법을 부린다 해도 바꿀 수 없는 모종의 법이 존재한다.

니체의 사유를 관통하는 주제는 합리성 · 이성 비판.

무엇에 대한 원한 감정? 사회에 대한.

한 때 그 사회 건설의 주도자였던 사제가 자신의 피조물격인 사회를 증오? 왜?




철학의 두 가지 방식

1. 고대적 방식

진리는 도달하기 어려운 것. 극소수만 접근. 그러나 어쨌든 진리는 존재한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2. 그리스도~헤겔 방식

진리는 정말로 도달하기 어려우며, 따라서 전체 역사를 통과해야 한다. 그러나 일단 통과하면 진리는 만인을 위한 것이 된다.

재능 없는 사람도 몇 번 죽었다 살았다를 반복할 정도로 고생하며 노력하면 → 합리적 이치를 얻을 수 있고

그 이치는 누구나 배우면 이해할 수 있는 것.



고대적 방식은 비교(秘敎)적이다. 선택적 영웅만 달성 가능한 진리를 주장.


니체는 이 곡선(그리스도~니체) 방식을 다시 부정.

니체가 본 인간성의 핵심은 지혜. (그리스적인 지혜)

인간을 초월하는 인간. 이 초월성 = 지혜 = 진화

소크라테스, 예수, 헤겔은 최상 도달(합리) 제시

바울은 발전의 한계를 지적

니체는 '무한'발전을 주장. 그런데 바울을 논파할 수 없어.


니체가 본 바울은 세계를 창조했으나, 자신이 만든 세계의 한계를 눈치 채고

무한 발전을 부정하고

한계를 인정하고 받아들여 겸양의 도를 깨우치게 하는 길을 열었다.


바울의 예정설. 로마서 중심 주제.

고린도전서 - 양심 등 겸양의 도의 총체. (니체가 격렬하게 거부한 것들)


죄 없이 십자가에 매딜리신 이(예수) = 고통

죄가 없는데 처벌 받는 그 억울함이야말로 최고 최악의 고통이며

인생이란 이런 불가항력적 고통으로 점철된 부조리의 총체임을 폭로.



니체가 바라는 지혜 = 인간이 인간종을 능가하는(초월하는) 것. = 진화. 영적 진화(무한발전)야말로 인간성의 핵심이라 봄.


니체는 말합니다. "그렇다, 그건 가치 있는 일이다! 현자가 존재하고 인간성이 현전한다는 사실 말이다. 왜냐하면 인간적인 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렇다면 인류란 하나의 동물 종種에 지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밖에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바울이 그의 구상을 망쳐 놓은 것입니다.


바울의 하나님은 주사위놀이를 합니다. 이 신은 어떤 이들은 축복을 주기 위해 선택하고 또 어떤 이들은 저주합니다. 칼뱅주의적 형식을 따르자면, 이건 주사위놀이입니다. 태어날 때부터 축복받을 것인가 아니면 저주받을 것인가가 이미 정해져 있는 거죠.

(주사위놀이 = 비합리. 부조리하단 뜻.)


십자가에 매달린 신(바로 이게 고린도전서의 핵심)은 삶에 대한 저주이다. 그리고 이 저주받은 것, 이것은 그러니까 삶 자체로부터 구원을 약속하는 손짓이다.

삶 자체로부터의 구원 = 삶에 대한 열정·집착을 포기하고 눈을 감는 것. 윤회의 중지. 해탈.

일원론적(내재적) 우주에는 탈출Exodus이란 게 있을 수 없다.


개체로서의 인간은 공동체에 부채(죄)의식을 갖고 있고, 자멸 = 스스로를 폐기처분함으로써만 그 고통을 끝낼 수 있다.



유대교는 세계를 내재적인 것으로 봄. 신은 완벽하다!(세계는 완벽하다!) 그런데 우리가 보기에 세계는 부조리해 보이네? → 죄의식 생성.


하나님의 아들 예수의 죽음 → 세계가 부조리한 게 맞구만! 으씨! (죄의식 해방)





구원이란 무엇인가?
구원은 상호성을 띄는 사건이다.

도대체 언제! 건너편에서 해방의 음성이 들려오는가?
먼저 이쪽에서 눈을 떠야 하고
그리고 저쪽에서 무슨 일이 벌어져야 한다.
그 후에 구원이 일어날 수 있다.
별빛이 눈을 찌를 수 있게 된다.


구원은 내가 겸양의 도를 체득한 후에 나를 초월하는 것이다.
나의 한계를 알아야 나를 초월할 수 있다.

니체는 한계를 부정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그의 무한한 초월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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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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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havoc(夏服ㅋ) | 작성시간 18.08.16 어, 덕국책이군요. 구해서 읽어봐야게씁니다. ㅎㅎㅎㅎㅎ
  • 답댓글 작성자관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8.16 좋은 책인데, 상당히 난해하네요. 이게 무슨 뜻일까 골똘히 생각하면서 나름의 해석을 메모한 거라... 그래도 배울 점이 많아서 좋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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