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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 38선 충돌과 전쟁의 형성(정병준 저) - 2

작성자관중|작성시간19.06.24|조회수320 목록 댓글 3


여순사건은 한국전쟁으로 향하는 1948년의 동력학을 만들어냈다. 그것은 미소 점령기의 좌우충돌이나 정부수립기의 폭력사태와는 비교할 수 없는, 국가적 차원의 위기의식과 적대의식이었다. 한국정부는 북한·좌익·남북협상파에 대해 극도의 적개심으로 불타올랐다. 폭동-군 반란-빨치산으로 이어진 폭력사태는 한국정부의 존립을 위태롭게 했고 그 결과, 증오와 폭력에 기초한 적대의식이 생겨났다.

1948년 한국정부에게 가장 큰 분노의 표적은 남한 내 좌익이었다. 한국정부는 평양과 모스크바의 공산주의자들이 이들을 지원한다고 확신했다. 이들은 분명한 국가의 적이었고 체제 밖의 세력이었다. 도전과 반역이 명백했으므로 물리적 대처가 가능했다. 1948년 12월 제정된 국가보안법으로 남조선노동당 등 모든 좌익 세력은 불법단체로 규정되었다.

문제는 체제 내의 도전 세력이었다. 한국정부는 김구와 남북협상파, 원내의 국회소장파 들을 우려했다. 이들이 폭동·반란에 개입한 명백한 증거는 없었지만, 한국정부는 의혹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한국정부와 주한미군 정보 당국은 모두, 김구가 극좌·북한과 결합해 군사쿠데타를 감행할지도 모른다는 우려 섞인 분석을 본격적으로 내놓기 시작했다.

먼저 주한미군 정보참모부가 김구가 반란을 선동했을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다고 기록했다. 그 근거로 첫째, 경비대 내에 김구의 추종자들이 상당하며, 반란의 공격 목표가 현정부라는 점. 둘째, 사건 직전 김구가 전남 광주를 방문했다는 점. 셋째, 이범석 총리가 여수반란에 우익들이 개입했다고 발표한 점 등을 들었다. 주한미군 정보 당국은 김구가 군사쿠데타를 일으킬 경우, 개별적인 군사쿠데타나 공산당의 폭동은 진압할 수 있지만, 군사쿠데타와 공산당의 폭동이 동시에 발생할 경우 진압할 수 있을지 의문이라고 논평한 바 있다. 이와 함께 송호성 육군총사령관이 면직되었는데, 주한미군 정보 당국은 송호성이 김구의 사도(使徒)이며 김구가 송호성을 통해 국방경비대에 자신의 추종 세력을 투입한다는 소문이 있다고 분석했다.

극좌와 극우의 합작, 남북의 결합이라는 쿠데타 음모 시나리오는 신빙성이 없어 보이지만, 이는 1948~49년 남한 내에 만연했던 소문이자 근거있는 주장이었다. 여순사건 이틀 뒤(1948.10.21) 국무총리 이범석은 임정 계열의 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이 좌익 연루 혐의로 체포되자 14연대가 반란을 일으켰다고 발표했다. 다음날 김태선 수도경찰청장은 '혁명의용군사건'의 경위를 발표했다. 최능진·오동기 등이 남로당과 결탁하여 무력으로 정부를 전복하고 김일성 일파와 합작하여, "자기들 몇 사람이 숭배하는 정객(政客)"을 수령으로 내세워 공산정부를 수립하려고 공모한 후 쿠데타를 감행하기 직전 검거되었으며, 말단 세포분자들이 여순사건을 일으켰다는 것이다. 이범석은 국회 본회 보고(1948.12.8)에서도, 오동기의 체포로 "극우 극좌의 합작음모가 폭로"되자 여순사건이 일어났다고 했다. 시중에는 여순사건에 김구의 선동이 작용했다는 루머가 떠돌아, 김구는 10월 27일 기자회견에서 극우가 반란에 참가했다는 주장을 부인하는 발언을 해야 했다.

그런데 반란의 주역이던 14연대의 김지회, 홍순석은 971CIC파견대 출신으로, 안두희가 CIC 요원이었음을 밝힌 실리(George E. Cilley)가 쿠데타설의 진원지로 꼽은, 바로 4연대 출신이었다. 이 때문에 임정 계열 오동기의 체포, 14연대 좌익세포의 반란, 4연대의 극우 반이승만 쿠데타 모의 등은 정보 당국에서 거론해볼 만한 조직사건의 밑그림이 되기에 충분했다.

김구가 극좌/북한과 결합해 군사쿠데타를 감행할지도 모른다는 미군정의 우려는 1949년 김구 암살 당시 한국정부가 '안두희의 증언'을 통해 유포했던 암살의 정당성과 같은 맥락이었다. 한국정부는 김구의 암살을 전후해, 첫째 극우·극좌의 합작음모, 둘째 남북 결합의 군사쿠데타, 셋째 이승만 암살 계획의 동시 진행 등의 음모에 김구가 깊숙이 개입했다고 선전했다. 이는 정보 당국의 지속적인 관심사였고 암살과 관련해 공작차원에서 추진된 목표이기도 했다.

(236~239쪽)





한편 미국은 남한의 북진을 우려해 공격용 무기를 제공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제공격이 아닌 도발받은 '반공격'은 선호했다. 차이나로비(China Lobby)의 핵심인물로 이승만과 프린스턴 대학 동창이었던 중국 외교관 웰링턴 쿠(Wellington Koo)는 이승만의 정치고문이자 미국 OSS의 부처장으로 정보·공작 임무의 달인이었던 굿펠로우와의 대화를 이렇게 적었다.

북으로 올라가고자 열망했던 것은 남한인들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자신들이 잘 훈련된 10만 명의 군대(원문 그대로)를 보유하고 있다고 분명하게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남한이 하는 어떠한 도발도 저지하고자 아주 열심이었고, 굿펠로우가 바로 그 일을 하기 위해 최근 거기에 갔다. 나는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나 위험이 얼마나 큰지를 물었다. 미 정부의 입장은 이러했다. 남한측의 주도로 북을 공격하는 것은 어떻게든 피하라. 그러나 북한이 남한을 공격한다면 남한은 그 결과 3차 대전이 된다 할지라도 저항하면서 곧장 북으로 진군해야 할 것이고, 결과적으로 3차 대전이 일어날 것이다. 그 경우 북한이 공격을 시작했으므로 미국인들은 이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240~241쪽)


군사 지도자들의 오해와 증오

38선을 지키는 일선 군사 지휘관의 경우, 무력통일에 대한 미련과 상대방에 대한 뿌리깊은 적대의식, 증오심, 호승심 등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들이 상대방에 대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한 방식의 복수를 꿈꿀 정도로 상호 적대적이었다는 사실이다. 나아가 오해에서 비롯된 일제시기의 악연이 38선 충돌의 격화로 이어지는 비극적 상황이 일어나기까지 했다.

남한의 전선 지휘관들은 전형적인 반공 군인들이었다. 가장 전투가 치열했던 개성의 1사단은 김석원-백선엽이, 옹진의 17연대는 김백일(옹진지구전투사령관)-백인엽(17연대장)이 지휘관이었고, 그 맞은편에 위치한 북한의 38선 경비 제3여단장은 최현(崔賢)이었다.

그런데 최현을 비롯한 북한군 최고 수뇌부는 오해와 착각으로 김석원에 대해 원한과 적개심을 갖고 있었다. 간삼봉전투는, 김일성이 이름을 얻은 보천보전투 직후 이를 토벌하러 추격해온 일본군 제19사단 함흥 제74연대 150여명과 국민당 보안대 300여 명을 상대로 장백현 13도구 서강에 위치한 간삼봉에서 벌인 전투였다. 당시 함흥연대는 조선인이던 김모 소좌가 지휘했는데, 북한 지도부는 김 소좌를 김석원으로 믿고 있었던 것이다.

김일성 역시 김석원이 간삼봉전투시 자신들을 토벌하러 출동했던 함흥연대장이라고 믿고서, 일제의 앞잡이가 이제는 미국의 앞잡이가 되어 "38 분계선 이남에서 공화국 북반부를 반대하는 불장난질을 하고" 있다고 격앙되어 있었다. "지난날 백두밀림에서 그놈과 싸우던 우리 동무들이 오늘은 38분계선에서 또 그놈과 맞서 싸우고 있"다는 김일성의 발언은 당시 남한군 지휘부를 바라보는 북한측의 시각을 대변하는 것이었다.

즉 북한의 최고 지도부를 형성한 빨치산 출신의 임춘추, 최현, 김일성 등은 모두 김석원이 1937년 6월 간삼봉전투에서 자신들을 토벌하러 온 김 소좌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간삼봉전투에 출전했던 것은 김석원이 아니라 김석원과 일본육사 27기 동기생인 김인욱(金仁旭)이었다. 김인욱은 이은(李垠)의 시종무관을 지내기도 했으며, 간삼봉전투에서 다리에 부상을 입었고 1945년 4월 중좌로 예편했다. 해방 이후 평양에서 일본군 고급장교였다는 혐의로 소련군에 끌려가 중앙아시아 타슈켄트 제일감옥에 투옥되었고, 이후 생사가 묘연했다. 그런데 간삼봉전투 당시 신문에는 이름없이 다만 김 소좌라고 보도되었는데, 이것이 문제의 발단이 되었다.

이명영의 지적처럼, 1937년 당시 신문들은 단지 김 소좌라고만 썼는데, 그 때 김 소좌로 통한 사람은 1932년 중국전선에서 소규모의 전투에서 승리했던 김석원이었다. 물론 김석원이 확고한 명성을 얻은 산서성 동원전투는 1937년 하반기에 벌어졌으며, 김석원은 간석봉전투시 함흥에 주둔하지도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군 수뇌부는 자신들을 토벌하러 온 김 소좌를 김석원으로 착각했고, 이러한 오해는 해방 후까지 연결되었다.

문헌적 증거에 따르면, 북한에서 간삼봉전투의 김 소좌를 처음 언급한 것은 1946년 한설야(韓雪野)가 『로동신문』에 「英雄 金日成將軍」을 연재하면서 부터였다. 한설야는 1938년 여름 김일성이 왜군(倭軍) 소좌 조선인 김모(金某) 부대를 맞아 '김 소좌' 격파전을 벌였다고 썼다. 이후 김 소좌를 김석원으로 지목한 것은 1960년대 임춘추였으며, 이후 백봉(白峯), 최현 등이 모두 김석원을 간삼봉전투의 원흉으로 지적했다. 그후부터 북한의 공식적인 입장을 반영하는 『조선전사』 역시 19사단 함흥 제74연대장 김석원이 간삼봉전투에서 토벌군으로 참가했다 심한 다리 부상을 입었다고 썼다.

북한은 물론이고 서대숙·김세진·브루스 커밍스·와다 하루키 등 대부분의 학자들도 간삼봉전투의 김 소좌를 김석원으로 오해했다. 이미 1974년 이명영이 이를 바로 잡았으나 주목을 끌지 못했다. 이후 이재화·이종석에 의해 김 소좌=김인욱 설이 수용되었고, 중국 조선족들 역시 김인욱이 김 소좌였다고 쓰고 있다.

북한군 지도부는 친일파 김석원이 이제는 친미파로 변신해 일제시대의 항일유격대 토벌에 이어 대북공격을 시도한다고 생각했다. 항일 빨치산들의 일본군에 대한 두려움과 증오심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동북항일연군 1로군사령관 양정우는 400명의 부대원으로 1940년 1월 일본군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는데, 사망하던 2월 23일에는 혈혈단신이었다. 토벌군은 작두로 그의 머리를 자르고 또, 배를 갈라, 여러 날 식량 없이 피신하면서도 전투력을 보존할 수 있었던 사정을 알고자 했다. 양정우의 위 속에서는 마른풀, 풀뿌리, 나무껍질, 입고 있던 옷의 솜만 발견되었다. 일본군의 잔인함에 맞선 빨치산들의 행동 역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잔인했다.

일제시대의 원한과 잔인한 기억, 증오는 해방 후 남북한에 만연한 소문의 진원이 되었다. 심지어 일부 인사들은 김일성이 한국전쟁 당일인 6월 25일, '김석원, 내가 너를 잡으러 간다. 이제 너는 내 손아귀를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라고 라디오방송을 하는 것을 들었다고 증언할 정도였다.

북한의 대중선전 매체들은 김석원을 제외하고도 한국군 주요 지휘관들의 일본군 경력을 거론하면서 적개심을 고취시켰다. 북한 매체는 채병덕을 오시마(大島) 중좌, 이응준을 가야마(香山) 대좌라고 조롱했고, 순간(旬刊) 남한 소식지인 『태풍』·『로동신문』 등은 한국 지휘관들을 '친일 매국노'로 선전했다.

일본육사 27기 출신인 김석원은 중일전쟁의 산서성 동원전투에서 일본군 2개 중대로 중국군 1개 사단을 격파해서 유명해진 인물이다.(김석원 자서전 「노병의 한」 152~157쪽) 중일전쟁 출전 당시 계급은 소좌였으며 화북에 출전한 제20사단 예하 제40여단의 첨병 대대장으로 출전해, 북경 부근 남하촌 전투에서 분전, 용명을 떨쳤으며, 2차 대전 말기에는 대좌로 진급하여 평양병사구사령부 제1과장을 담당했다.

1939년 김석원이 귀국했을 당시 '김석원 부대장을 찬양하는 노래'가 제작되었고, 이후 그는 1년 동안 전국을 순회하며 '무용담'을 선전했다. "사실 그때가 어떤 시절이며 내가 놓여있는 입장이 어떤 위치였는데 감히 배일사상을 고취하고 다녔겠는가" 하는 김석원의 회고처럼, 그것은 유명한 황군선전이었다. 그에게는 훈3등 공3급 욱3등의 금사(金賜)훈장이 주어졌다. 김석원은 1940년대 초 일제의 학병동원에도 적극 관여했을 뿐 아니라 삼부자가 모두 일본군에 복무한 황군 가족이었다.

해방 후 김석원이 교장으로 있던 성남중학교는 최초의 반탁 학생시위를 주도했고, 그는 육해공군출신동지회 회장이자 군의 원로를 자처했다. 김석원에 따르면, 자신은 학병 권유를 하며 반일 발언을 한 적은 없었지만, 1948년 육해공군출신동지회가 결성될 당시 지원병 출신들이 '김석원이 일제시 우리에게 민족정신을 불어넣어준 사람'이라며 회장에 만장일치로 추대했다고 썼다.(김석원 자서전) 반면 해방 후 친일조사 단체는 그를 친일파 명단에 올려놓았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은 개성지구 1여단(곧 1사단으로 승격)장이 된 김석원의 자질에 의문을 갖고 있었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이 비꼬듯이, 그의 유일한 전술은 '반자이(만세)전술', 즉 '돌격 앞으로!'였다. 주한미대사 무초는 이렇게 썼다.

국방부장관, 한국의 참모들, 미 고문관 등 모두 김석원을 반대했다. 그들은 그를 훌륭한 군인이 아니라 허풍쟁이로 생각했다. 그들은 그의 구역에 있는 전선에서 북한군을 자극하고, 일본식 반자이 공격을 좋아하고, 적절한 예비 병력을 남겨놓지 않고 아주 위험한 방식으로 전선에 그의 병력을 배치시키는 등의 성향을 지녔다는 점에서 나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그들은 특히 그가 사령부를 무시하고 곧장 이 대통령에게 달려가는 것에 반대하였다.

자칭 타칭 한국군의 '아버지'인 제임스 하우스만(James Hausman)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승만이 채병덕을 참모총장에서 해임하고 김석원을 임명하려는 것을 자신이 직접 나서 로버츠 군사고문단장·무초 대사를 통해 무산시켰다고 증언했다. 무초 역시 김석원을 총장에 임명하면 "한국에 대한 모든 지원을 중단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는 것이다. 하우스만은 주한미군사고문단의 일개 대위에 불과했지만, 자신이 김석원 제1사단장을 파면시켰다고 공언했다. 김석원이 1사단을 임진강 서쪽으로 너무 많이 팽창시킨 탓에 북한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부대를 위험한 위치에 놓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김석원의 이름을 얻은 중일전쟁 시기 일본군에서 육탄3용사가 배출되었는데, 그는 송악산전투에서 이를 본뜬 육탄10용사를 만들어냈다. 1949년 5월 북한 강태무·표무원 부대원들은 김석원을 일제에 충실한 주구 '가네야마 대좌'라고 부르며 조롱했다. 심지어 1949년 10월 그가 현역에서 면직되었을 때 주한미군사고문단은 그의 해임이 한국군에게 이로운 조치라고 평가할 정도였다. 주한미군사고문단장 로버츠는 김석원의 "부정직, 타락, 관직의 오용, 장교가 구비해야 할 윤리·도덕의 완전한 무시"를 비난했고, "내가 입증할 수 있는 한 가장 극악한 일본 장교 계급의 추악상을 가졌으며, 일본군 장교의 진짜 직업적 장점 중 실질적으로 아무것도" 갖고 있지 않다고 맹비난했다.

한국군 장성들의 김석원 평가도 엇갈리는데, 채명신은 김석원을 구식이지만 자상한 지휘관으로 평가한 반면, 유원식은 직접 제거를 생각했을 정도로 부하들에게 잔인했던 지휘관으로 기억했다.

한국군의 소방수로 여순사건과 빨치산 토벌로 이름을 높인 김백일은 만주국 간도특설대 중위 출신이었다. 한인 청년들로 구성된 이 특수부대는 8로군과 동북항일연군을 상대하기 위한 반공부대였으며, 백선엽·신현준·김석범·송석하 등이 이 부대 출신이었다. 대부분 서북 출신이자 일본군·만군 출신들이 38선의 주요 지휘관이었는데, 이들은 개인적 경험과 원혐(怨嫌)이 복잡하게 얽힌 반공의 투사들이었다.

일제 시기는 물론 해방 후까지 증오심으로 가득 찬 군사 지휘관들이 남북의 38선 지휘관으로 배치된 것은 한국인들에게 불행이었다. 남북한의 군사 지휘관들은 38선상에서 최악의 호전성으로 상대방을 공격했다.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잔인한 수단과 방법이 사용되었다.

북한 군사 지도자들의 호전성은 상상을 초월했다. 잔인하기로 소문났던 최현은 1949년 봄 옹진지구 국사봉에 100m짜리 전기 철조망에 남한군 시체 3구를 매달아놓거나, 그해 여름에는 백골부대(38유격대, 서울유격대를 지칭) 1개 소대를 습격해 총알이 아깝다며 32명을 삽으로 찍어 죽였다. 북한의 선전 매체에는 38선 이남에 있던 한국군 장교 다섯 명을 800m 거리에서 저격한 사병의 '공훈'을 대대적으로 칭송하는 글이 실리기도 했다.

상황은 남측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주로 서북청년단원들로 구성된 옹진의 38선 유격대 중 1개 소대 특공대가 38선 이북 850m 지점에 위치한 은파산을 야간에 습격해 북한군 1개 소대를 섬멸시켰다. 그러나 양측은 자신들의 38선 월경과 공격을 당연하게 여기고 미화했다. 공개적으로도 이들은 자신들의 호전성을 전혀 감추지 않았다.

최현·오백룡 : 그때 38선을 지키고 있던 우리들은 당장 서울, 부산으로 내달려 미제와 그 앞잡이놈들을 남해바다에 쓸어넣고 싶은 충동을 금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는 위대한 수령님을 만나뵙게 될 때마다 은근히 그런 의향을 말씀드리곤 하였다.
김석원 : (1949년 5월 17일 기자회견)(송악산전투에서) 만약 그때 허락이 있어 월북만 했더라면 한 놈 남김없이 잡았을 것이다.
남북한 군사 지휘관들의 호전성과 적개심은 자신들을 모두 호랑이로 자처하는 데 이르러 절정을 이루었다. 최현은 자신이 '38선 호랑이' · '부대장 아바이'로 불리는 데 만족했고, 북한의 선전 매체는 38경비대의 한 중대장이 '사랑과 존경'으로 '38호랑이'로 불린다고 썼다. 남한의 지휘관들 중에도 '호랑이'가 넘쳐났다. 여순사건의 잔혹한 진압으로 유명한 김종원은 자칭 '백두산호랑이'였고 김석원은 '38선총사령관'을 자처했다. 훗날 한국군 특무대장이 된 김창룡은 김종오가 지휘하는 호랑이부대 1연대의 정보주임이었다.

남한이 송악산 육탄10용사, 옹진 국사봉 육탄6용사(1949.5.21) 등 전투 과정의 영웅들을 창조해내자, 북한 역시 수류탄을 들고 진지에 침입한 국군에 대항해 폭사한 용사를 만들어냈다.

남북한의 이러한 적대적 증오심과 역설적인 동화 과정은 1948년 정부수립 이후 본격화되었다. 점진적으로 남북 간의 충돌은 1949년 여름 임계점에 도달해 폭발했다.





한편 소련군 역시 북한에 무기를 제공했다. 특기할 만한 점은 소련은 북한에 구식 무기만을 팔았다는 사실이다. 최악의 전쟁 상황에서도 신무기로 북한을 무장시키지 않았다. 신형 스탈린 탱크, 152mm 곡사포 등 중포, 1950년 중국에 이양했던 제트 비행기 등은 없었다. 북한에 제공된 항공기 중 Yak-9기 21대, Il-10기 24대, Il-10연습기 9대 등은 모두 중고였다. 비행기 엔진 역시 고물이었고 비행기 중 19대는 수리 불능이었다. 북한은 이들에 대해 신형 항공기 가격을 지불했다. 또한 판매대금은 바로 그해 현물로 상환되었고, 금리 또한 국제 시세보다 비싸게 책정되었다. 스탈린의 결정에 따라 북한은 1948년도 소련군 및 소련군사고문단 급료에 해당하는 약 1억 원의 비용을 부담해야 했다.

(242쪽)

여기서 우리가 주목할 부분은 두 가지이다. 첫째, 소련이 제공한 군사장비는 무상원조가 아니라 차관 형식이었고, 북한은 이자를 붙여 이를 현물로 상환했다는 사실이다. 둘째, 소련이 북한에 대해 대남공격용 무장원조를 본격적으로 개시한 것이 1949년 6월부터라는 점이다.

원래 몰로토프가 작성한 협정서 초안에는, 북한은 1949년 6월 1일부터 1952년 6월 1일까지 3년 간 차관을 제공받은 후, 6개월마다 가산되는 연 2%의 이자를 포함해 1952년 6월 1일부터 3년 간 상환하도록 되어 있었다. 북한의 상환은 흑색금속, 화학제품, 기타 물품 등 현물로 하거나 금으로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런데 북한은 1952년 6월부터 상환을 시작한 것이 아니라 차관으로 군수물자를 받은 당해 연도에 현물로 상환했다. 1949년 6월에 제공된 군수품에 대해 북한은 1949년 10월 1일까지 3만 톤의 정미(精米) 및 기타 물품으로 상환했다.

또한 1950년도에 제공된 군수물자용 차관 1억 2,000만~1억3,000만 루블에 대해서도 북한이 1950년 내로 금 9톤(5,366만 2,900루블) 등 총 1억 3,805만 500루블을 지불하도록 했다. 북한은 1951년도분 차관 중 7,100만 루블을 1950년에 미리 끌어썼는데, 이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로 1950년 내 현물상환 협정을 맺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형제국' 북한에 대해 단 1루블도 무상으로 제공하지 않았으며, 그것도 대부분 중고 군수품을 제공한 뒤 당해 연도에 현물상환 방식을 요구했다.
(296~297쪽)


많은 연구들이 지적하듯이 아마도 김일성은 자신이 항일투쟁의 신화를 계승하고 있으며, '친일파/친미파/매국노들이 득실거리는 남조선'을 '미제'의 지배로부터 구해야 한다는 복음주의적 환상에 사로잡혀 있었을 것이다. 김일성은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이 된 이래, 자신의 주도로 남한을 '해방'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음이 분명했다.(...중략...) 1930년대 항일빨치산을 이끈 이래 김일성은 생존과 투쟁을 위한 고난의 행군을 계속했지만, 민생단 사건에 희생된 한인 공산주의자들이나 양정우 같은 동북항일연군 지도자보다는 운이 좋았다. 그는 살아남았다. 나아가 자신의 항일투쟁이 성공까지는 아니더라도 중국·소련 등 사회주의 형제국가의 지원으로 패배하지는 않았다고 여겼을 것이다. 해방 이후 김일성은 미국에 대해 별다른 두려움을 갖고 있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은 남한 군·정부 내에 충분한 첩자를 보유하고 있었고, 소련이 알지 못하는 한국정부의 내밀한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고 보인다. 후술하듯이 김일성은 한국군의 병력 규모, 무기 체계, 지휘 체제 등을 손금 보듯 훤히 꿰뚫고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김일성과 북한지도부는 일본에 대한 체험적 두려움과 증오를 갖고 있었다. 이는 마오쩌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구소련 문서에 따르면 김일성과 마오쩌둥은 한국전쟁을 개전할 경우 미국의 개입보다는 일본의 개입을 더 두려워했다. 이들은 모두 항일전에서 일본군에게 쫓긴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김일성·김일 등 북한지도부와 마오쩌둥·저우언라이 등은 일본군의 개입을 두려워했다. 반면 스탈린은 지속적·반복적으로 미국의 개입을 두려워했다. 경험의 차이가 전략적 입장의 차이를 가져왔을 것이다.
(244~245쪽)


이상에서 살펴본 남북한 병력 현황의 특징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49년 8~9월까지 남한은 정규군 수준에서만 최대 1만 명 이상 북한을 앞서갔다. 한국군의 급속한 병력 증강은 한국군에게는 자신감을, 북한군에게는 두려움을 자아냈을 가능성이 높다.

둘째, 한국군의 정규군 병력 규모는 1949년 8월 중순 10만 명 선에 달한 이래 한국전쟁 때까지 그 규모를 유지했다.

셋째, 북한군은 1949년 중반 이후 급격히 한국군의 병력 규모를 따라잡기 시작해, 1949년 9월 한국군에 거의 근접한 수준에 도달했다.

넷째, 1949년 9월 이후 북한군은 한국군의 병력 규모를 추월하기 시작했고, 중국인민해방군에서 단련된 노련한 고참병 3만 7,000여 명을 받아들였다. 전체 돌격사단의 절반 정도가 동북 한인 가운데에서 충원되었다. 북한군 돌격 사단의 절반 이상이 국공내전의 경험을 가졌으므로, 지휘관과 병사의 전투경험·훈련·사기 등의 질적 측면에서 북한군은 한국군보다 우월한 면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전 당시 남북한의 정규군 총 병력 규모는 현격하게 차이가 나지는 않았다.

다섯째, 개전 초 전선에 배치된 병력 규모는 2:1 정도의 차이가 있었다. 북한군은 돌격부대로 6개 사단, 1개 탱크여단, 1개 모터사이클 연대를 배치했고 예비대로 3개 사단을 동원했다. 당시 북한군이 보유한 사단수는 총 10개였는데, 이 중 완편된 6개 사단을 전선에 배치했고, 편성 중에 있던 3개 사단은 제2제대, 즉 예비대로 활용했다.

(332~333쪽)





군지휘관들 역시 1949년 상반기 내내 대북공격 발언들을 쏟아냈다. 나아가 한국정부·군의 최고 책임자들은 호전적 발언을 공개적으로 했을 뿐만 아니라 38선상의 여러 지점에서 공격을 선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발언들은 1950년 한국전쟁을 염두에 둘 대 불행이자 재앙에 가까웠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1949년 한국정부·군은 대북공격을 단행할 수 있는 실질적인 능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반공과 무력통일이라는 두 가지 점에서 공감대와 의지가 있었을지 모르지만, 병력·화력·무기·군수 지원이 부재했다. 병력은 1949년 중반까지 북한을 앞서 나갔지만, 압도할 수 잇는 수준은 아니었다. 한국군은 공격자가 최소한 갖춰야 할 병력·화력의 우위를 확보하고 있지 못했으며, 공격용 무기 또한 전무했다. 탱크나 전투기·폭격기도 없었고 공격용 전함도 없었다. 주한미군군사고문단은 105mm포의 포경을 빼앗아 보관하기까지 했다. 한국군 6만 5,000명에 대한 개인화기부터 공용화기에 이르는 모든 군수 보급은 미국에 달려 있었다. 미국의 경제원조 없이는 한국군 차량이 기동할 수 있는 석유를 획득할 수 없었다. 이 때문에 미국의 지원·승인 없는 대북공격은 불가능했다. 그런데 미국은 한국의 호전적 대북 공세에 대해 깊이 우려했고, 주한미대사관과 주한미군사고문단은 한국정부·한국군부를 억제시키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둘째, 한국군은 전면적 전쟁 계획을 수립할 능력을 갖고 있지 않았다. 대통령 이승만, 국무총리 겸 국방장관 이범석·신성모는 물론, 채병덕·김석원·김백일·백인엽 등 유명한 한국군 지휘관들은 연대·사단급 이상을 지휘할 능력이 현저히 결여되어 있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이들은 지위에 걸맞은 지휘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었고, 야전에서 정상적으로 단련되지도 못했다. 개전 초기 육군총장이었던 채병덕 소장은 군수병과 출신의 36세였고, 그의 후임 정일권 준장은 33세였다. 개전 당시 2사단장이었던 이형근은 "나는 중일전쟁 때 야포 중대장으로 싸웠기 때문에 작전에 대해서는 얼마쯤 알고 있었는데, 그는(채병덕 총장-인용자) 병기분야에서만 근무하여 소총탄의 세례조차 받아보지 못한 군인이었다"고 주장했다. 수도경비사령관이었던 이종찬 대령은 "채총장은 흔히 '권총탄이 날아오는 밑을 뚫고 나간 경험이 없다'고 말하여 오듯이 작전과 정보에 어두운 병기전문가였다. ……그는 신성모 장관이 '제1선을 독려할 필요성은 없는가?'라고 말하면 금방 찦차를 집어타고 의정부 방면으로 달려가는 식이었다"고 회고했다.

육군본부의 참모부장 김백일 대령은 34세였고, 작전국장 장창국 대령은 26세였다. 모두 연소(年少)했고 전쟁 경험이 없었다. 국지적인 전투나 빨치산 토벌은 가능했지만, 병종 간·제대 간의 종합예술인 전면전 작전 계획을 수립할 수는 없었다. 장창국과 이종찬은 김백일에 대해, "과거 만주에 있을 당시는 주로 대작전부대에 근무하던 사람으로 비적 토벌이나 국지전에서는 자타가 인정하는 1인자였다. 담이 찬 강직한 사람으로 용기도 있었지만 유감스럽게도 전략을 논할 만한 위인은 아니었다. 그래서 그의 구상은 소규모 부대나 지휘하는 범위를 벗어나기는 기대하기 어려"웠다고 평가했다. 한국군의 다른 장군은 "서전(緖戰)에서 대패하게 된 중요한 책임은 김백일 장군의 무정견한 작전 지도, 말하자면 병력을 축차 사용한 폐단에 기인한 바가 크다"고 주장했다. 개전 당시 한국군 작전국 차장이었던 박임항 대령은, 전쟁 전 자신이 역습을 포함한 군의 방어 계획 수립을 명령받았지만, "해방 전까지만 하더라도 위관급 장교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이런 방대한 작업은 힘겨운 일"이었다고 회고했다. 주북한 소련군사고문단장이었던 라주바예프는 개전 초기 제1단계 작전(1050.6.25~7.2)을 총결하면서 한국군 전체 장교와 부대의 교육수준이 매우 낮았다고 평가했다.

또한 한국군은 병사·장교의 사기 및 훈련, 단위 부대의 기초 훈련, 각 제대간 통합 훈련, 지휘관의 전술 지휘능력 등에서 실제로 북한을 공격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49년 9월 한국군을 검열한 주한미군사고문단의 보고서는 한국군의 작전·훈련상 결점을 무려 17가지나 지적하고 있는데, 분대·소대 훈련의 일반적 결여, 장교·하사관의 지휘감독 능력 결여 및 지도력 불충분, 전술 이해 결여, 보안의식 결여, 위장·은닉 부적절, 참모 훈련 등을 지적했다. 주한미군사고문단은 1949년 9월부터 1950년 1월까지 대대·연대 훈련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대대 훈련은 288시간, 연대 훈련은 176시간이 배정되었다. 이는 한국군의 훈련 수준에서는 원활한 사단급 기동이 불가능함을 의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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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관중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9.06.24 오래전에 책 내용을 발췌해서 타자친 내용이라 좀 두서가 없을 수 있습니다.
  • 작성자heidegger | 작성시간 19.06.24 흥미롭네요 상대적으로 중무장된 북한군이 유리했겠네요
  • 작성자치우천 | 작성시간 19.09.28 한국전쟁은 어느쪽이든 단기간에 쉽게 끝낼 수 있었는데 장기전으로 번졌고..종전도 못하고 그냥 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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