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 잊었네요.^^
세이이타이쇼군 가문인 아시카가 가문의 무로마치 막부가 명목상 존재하고 있었으나 많은 다이묘들, 특히 교토에서멀리 떨어진 다이묘들은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이 시기까지 중국과의 무역이 늘어남에 따라 경제적 발전을 이룩하였고 화폐의 사용이 늘어났으며 상업도시들이 탄생하였으며, 농업과 소규모 제조업의 발전이 이루어짐에 따라 지방의 자치권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져갔다. 특히 15세기 초의 지진과 기아와 같은 자연재해들은 채무와 조세에 시달린 농민들의 봉기로 이어져 센고쿠 시대로의 이행을 가속화했다.
경제적 문제에 쇼군 계승 논란이 겹쳐져 일어난 오닌의 난(1467년-1477년)은 일반적으로 센고쿠 시대의 서막으로 간주된다. 이 전쟁에서 호소카와씨가 주축이 된 동군과 야마나씨가 주축이 된 서군은 교토 근방에서 11년간 교전하였으며 다른 구니들로 곧 전쟁이 확산되었다.
하극상
이러한 전쟁의 확산은 중앙 정부을 더욱 무력하게 만들었으며 이 권력의 공백을 지역 영주인 다이묘들이 메웠다. 이 권력 이전 과정 속에서 가마쿠라 막부와 무로마치 막부 아래에서 이미 성장을 이룩한 다케다나 이마가와 등과 같이 센고쿠 다이묘로 거듭난 이들이 있는가 하면 능력있는 신하들에게 권력을 찬탈당한 다이묘들도 많았다. 이러한 능력주의적 풍조 하에서 능력있는 가신들이 봉건 영주들을 무너리는 게코쿠조(下克上) 현상은 1493년 호조 소운이 이즈를 점거하는 것에서 시작되었다.
교단 역시 이 시기에 다이묘에 대항하여 농민들을 결집, 봉기를 유도하여 정권을 획득하기도 하였다. 정토종은 무수한 농민 봉기를 이끌었으며 가가에서 성공적으로 다이묘를 제거하여 100여년간 독립을 유지하기도 하였다.
통일
1세기에 달한 정치적 불안정과 내전에 이어 일본은 오다 노부나가에 의해 통일에 가까워졌다. 오다는 현 아이치 현의 일부인 오와리의 이름 없는 영주에서 일본 중부를 지배하는 세력으로 성장하였으나 1582년 부장인 아케치 미츠히데의 배반으로 죽었다. 오다 가의 졸병으로 출발하여 노부나가의 신뢰받는 부장으로 성장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이것을 기회로 삼아 노부나가의 후계자가 되었다. 도요토미는 남은 다이묘들에 대한 통제를 확립했으며, 천한 출신 때문에 쇼군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하였으나 간바쿠로서 다스렸다.
1598년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은 다시금 정치적 혼란에 접어들었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것을 기회로 삼았다. 히데요시는 죽기 전에 도쿠가와, 우키타, 마에다, 우에스기, 모리의 다섯 장수를 5대로(五大老)로 임명하여 그의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섭정으로 삼았다. 1599년 마에다 도시이에가 사망하기 전까지 5대로의 견제 속에서 불안한 평화가 유지되었으나 후에 이시다 미츠나리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가에 불충하다는 탄핵으로 내란이 재개, 세키가하라의 전투로 이어졌다. 세키가하라의 승리자가 된 이야에스는 도요토미 지배를 끝내고 스스로 쇼군의 직위에 올라 일본의 마지막 막부가 된 에도 막부를 건설하였다. 에도 막부는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 유지되었다.
지역별 판도
도호쿠 (東北)
도호쿠 지방의 센고쿠 다이묘는 가마쿠라 시대부터 대대로 토지를 소유해온 내력을 가진 가문이 그대로 센고쿠 다이묘로 되는 경우가 많았다. 예외로는 와카사 다케다 가문(若狭武田氏)의 후예인 가키자키 가문(蠣崎氏)으로, 쓰가루 해협연안의 중소호족을 통일했다.
난부 가문(南部氏)으로부터 독립한 쓰가루 가문(津軽氏)도 예외로 둘 수 있다. 단, 쓰가루 다메노부(津軽為信)는 예부터 쓰가루 지방(津軽地方)을 소유한 난부 가문에 주살당한 오우라 가문(大浦氏)의 혈육인지 난부 가문의 혈육인지 애매하다. 도호쿠 지방은 간토 동란에 대부분 말려들지 않아 자연스럽게 중앙의 정쟁에 영향도 거의 받지 않았다. 전란이라고 말해야 15세기전반부터 난부 가문이 센보쿠(仙北), 가즈노로(鹿角)의 출병과 다테 가문(伊達氏)의 가호쿠(河北) 지방에서의 침입등, 영지 다툼이 눈에 띈다. 사사가와 구보(篠川公方)와 시즈쿠이시 어소(雫石御所)도 사라지는 등, 도호쿠 지방이라고 말해도, 무사평온한 상태는 아니었다. 또, 1522년 다테 다네무네(伊達稙宗)가오슈 단다이(奥州探題)인 오사키 가문(大崎氏)이 두었던 무쓰 슈고직에 오르는 등 하극상의 기미도 볼 수 있다.1542년 다테 다네무네, 하루무네(伊達晴宗) 부자간의 다툼이 일어나 다테 가문과 연이 있는 무쓰, 데와를 둘러싼 대란으로 발전하게 된다.(덴분의 난). 이 때문에, 다테 가문의 결속력은 저하되었고, 모가미 가문(最上氏)등 타 세력이 세력을 넓히게 된다.
1570년 이후, 모가미 요시아키(最上義光),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 난부 하루마사(南部晴政), 안도 지카스에(安東愛季), 쓰가루 다메노부(津軽為信) 등 도호쿠 지방에도 센고쿠 다이묘라고 불리는 인물이 등장하였고, 일대 판도를 구축한다.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그대로 그들의 영지를 인정한다. 일반적으로 안도 가문(安東氏)이 아키타 현을, 난부 가문(南部氏)이 이와테 현을 중심으로 아오모리 현 일부를, 오사키 가문(大崎氏)이 미야기 현중부를, 가사이 가문(葛西氏)이 미야기 현의 이시노마키 시로부터 북부를, 모가미 가문(最上氏)이 야마가타 현을, 다테 가문(伊達氏)이 미야기 현 남부와 야마가타 현 남부 그리고, 후쿠시마 현의 일부를 소유했으며, 아시나 가문(蘆名氏)이 후쿠시마 현을 다스렸다.
간토 (関東)
간토에서는 교토에서 일어난 오닌의 난 전부터 큰 대란이 연이어 일어났다. 고가 구보(古河公方)와 간토칸레이(関東管領)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山内上杉家) 그리고, 그 방계(傍系)인 오기가야쓰 우에스기 가문(扇谷上杉家)의 삼파전이었다. 이 틈을 파고 들어 호조 소운(北条早雲)이 이즈의 호리고에 구보(堀越公方)를 멸망시키고, 간토로 진출해 온다.
이 호조 가문(北条氏)과 두 우에스기 가문(上杉氏)과의 싸움은 1546년 일어난 가와고에 성 전투(河越夜戦)에서 호조 가문이 이기면서 두 우에스기 가문은 쇠퇴하기 시작한다. 1552년 호조 가문이 고가 어소(古河御所)를 제압하고 고가 구보를 장악하였다. 그리고,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가문이 고즈케로 쫓겨 나가오 가게토라(후에 우에스기 겐신(上杉謙信))을 의지하면서 호조 가문과 나가오 가문(長尾氏)이 간토의 패권을 다투게 된다. 간토칸레이를 승계한 우에스기 겐신은 잠시나마 호조 가문의 거성이었던 오다와라 성(小田原城)을 포위했지만, 함락할순 없었다. 이 우에스기 가문과 호조 가문간의 전투는 간토의 호족들을 이분화 시켰다. 호조 우지야스(北条氏康)와 사토미 요시아키(里見義堯)간의 고노다이 전투(国府台合戦)를 시작으로 양진영의 전투가 계속되었다. 1579년 우에스기 겐신이 죽자 히타치의 사타케 가문(佐竹氏), 아와의 사토미 가문(里見氏) 등은 호조 가문의 공세에 대항해보지만, 호조 가문의 세력 신장을 막을 수는 없었다. 더욱이 오슈의 다테 가문(伊達氏)의 남하해 옴에 따라 사타케 가문의 남북 양면의 공세에 따른 압박으로 궁지에 몰리게 된다.
하지만, 천하 패권을 쥔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다이묘끼리의 전투를 금하는 명령을 내렸고, 이에 맞서 호조 우지마사(北条氏政)는 오슈의 다테 마사무네(伊達政宗)와 미카와의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동맹을 맺어 대항한다. 하지만, 히데요시의 압도적인 병력 앞에 호조 가문은 무릎을 꿇게 된다. (오다와라 정벌). 1590년 음력 8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간토로 전봉되어 에도 성(江戸城)에 입성한다. 그 후 도요토미 정권으로부터 에도 막부성립에 과정에서 사타케 가문과 사토미 가문등 종래 간토 세력들은 전봉 혹은 영지가 몰수 되어 간토에서 모습을 감추게 된다.
고신 (甲信)
가이 국에서는 가이 슈고 다케다 노부토라(武田信虎)가 가이 전토를 통일한 후, 그 여세로 시나노 공격을 기획하고 있었다. 하지만, 중신들이 적자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을 추대해 쿠데타를 일으키고 노부토라를 추방한다. 이 신겐이 스와 가문(諏訪氏), 오가사와라 가문(小笠原氏), 무라카미 가문(村上氏)을 물리치고 시나노 북부 일부를 제외하고 시나노 전역을 장악한다.
1572년 신겐은 미카와, 도토미의 도쿠가와 가문(徳川氏)을 미카타가하라 전투(三方ヶ原の戦い)에서 격파하고 오다 가문(織田氏)의 미노, 오와리를 압박한다. 하지만, 신겐은 병사하였고 뒤를 이은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頼)가1575년 나가시노 전투(長篠の戦い)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에 패하여 다케다 가문(武田氏)의 위세는 꺽기게 된다. 1582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다케다 가문의 소령으로 공격해 온다. 이에 여러 호족들이 호응을 하였고, 다케다 가문은 다이묘로써 멸망하게 된다.
이후, 다케다 가문의 옛 가신들은 하치오지(八王子)에 머물렀고, 이들을 하치오지센닌도신(八王子千人同心)라고 한다. 예부터 시나노는 시나노 중부에 오가사와라 가문(小笠原氏), 기소 지방의 기소 가문(木曾氏), 스와 지방의 스와 가문(諏訪氏), 시나노 동부에 사나다 가문(真田氏)이 할거했었다. 이 때문에 가이의 다케다 가문이 시나노의 여러가문을 각개 격파하여 시나노를 장악할 수 있었다. 1582년 다케다 가문을 멸문시킨 오다 노부나가가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에서 죽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가 시나노로 세력을 넓힌다.
하지만, 곧 도요토미 가문(豊臣氏)이 패권을 잡자 도쿠가와 가문은 옛 호조 가문의 영지인 간토로 전봉되었고, 사나다 가문을 제외한 시나노 여러 호족들도 간토로 이동하였다.
호쿠리쿠 (北陸)
에치고 국의 우에스기 가문(上杉氏), 가가 국의 정토진종의 혼간지(本願寺), 노토 국의 하타케야마 가문(畠山氏), 에치젠 국에 아사쿠라 가문(朝倉氏), 엣추 국에 진보 가문(神保氏)과 시이나 가문(椎名氏)이 지배하고 있었다. 에치고 국에서는 슈고다이인 나가오 가문(長尾氏)이 실권을 장악하였고, 1576년까지 호쿠리쿠 지방의 대부분을 제압하였다.
가가 국에서는 정토진종의 혼간지 세력이 가가 슈고 도가시 가문(冨樫氏)을 멸하고 가가 국 일대를 지배하여 100년간 자치권을 행사하였다. 엣추의 진보 가문은 적대했던 정토진종의 승려 세력과 결탁해 보지만, 에치고의 우에스기 가문과 노토의 하타케야마 가문 그리고, 주가(主家)인 엣추 슈고 하타케야마 가문의 연합군에 패해 그 세력을 잃었다
. 그후, 정토진종의 혼간지 세력은 우에스기 가문과 아사쿠라 가문 등과 대립을 계속해 오지만, 1570년 ~ 1580년에 걸친 이시야마 전투(石山合戦)에서 패하여 그 세력을 잃게 된다. 에치젠의 아사쿠라 가문은 본거지인 이치조다니(一乗谷)에 귀족들을 맞이하는 등 영화를 누렸지만,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와의 싸움에서 패하여 1573년 다이묘로서 멸망하게 된다. 노토 국에서는 슈고 하타케야마 가문이 중신들의 알력타툼에 그 위세를 잃었으며, 1576년 노토는 우에스기 가문의 손에 넘어가게 된다.
도카이 (東海)
스루가 국의 이마가와 가문(今川氏), 도토미 국의 시바 가문(斯波氏), 미카와 국의 마쓰다이라 가문(松平氏), 오와리 국의 시바 가문(斯波氏), 미노 국의 도키 가문(土岐氏)이 일국 일원(一国一円)으로 할거하였다. 시바 가문은 에치젠을 슈고다이인 아사쿠라 가문(朝倉氏)에게 빼앗겨 오와리를 거점으로 삼게 되었다.
그후 시바 가문은 아사쿠라 가문과의 에치젠을 두고 전쟁을 벌이지만 아사쿠라 가문에 패배하였고, 교토에서의 정쟁에서도 패해 그 세력을 잃었다. 도토미에서도 이마가와 가문의 공격을 받았으며, 오와리는 슈고다이 오다 가문(織田氏)이 장악하고 있었다. 마쓰다이라 가문은 마쓰다이라 기요야스(松平清康)가 당주로 부임했을 때 최대 판도를 구축하였지만, 1535년 오와리 국 가스가이 군 모리야마에서 가신에게 살해되었고, 그 후 마쓰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가문에 종속되었다. 이마가와 가문은 이마가와 우지치카(今川氏親), 이마가와 요시모토(今川義元)가 세력을 신장하였고, 가이의 다케다 가문(武田氏)과 간토의 호조 가문(北条氏)과의 삼국동맹을 맺어 공격 방향을 서쪽으로 정한다. 그러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덴가쿠하자마에서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군에 기습을 받고 전사하였고, 이마가와 가문은 점차 세력을 잃게 된다. 미노의 도키 가문은 가문내 내분을 틈타 사이토 도산(斎藤道三)이 주군을 추방하고 미노 국을 장악한다.
오와리에서는 슈고다이의 군다이 출신인 오다 노부나가가 슈고다이인 종가 오다 가문을 제압하고 오와리 일국을 장악한다. 그후, 이마가와 가문에서 독립한 마쓰다이라 가문과 결탁하였고, 미노 공략에 착수 한다. 5년후 미노를 손에 넣자 이나바 산성(稲葉山城)을 본거지로 삼아 천하패권에 한걸음 나갔다. 미카와의 마쓰다이라 모토야스(松平元康)는 오다 노부나가를 도우면서 미카와, 도토미를 평정하였고 이름을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로 개명하였다.
가이의 다케다 가문이 이마가와 가문을 멸하고 1573년에는 미카타가하라 전투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을 격파하는 등 그 위세를 떨치지만, 다케다 신겐(武田信玄)의 죽음으로 세력이 위축되었다.
더욱이 1575년 나가시노 전투에서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이 다케다 군을 격파하였고, 1582년 도쿠가와 가문은 도토미, 스루가를 영유하게 된다.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죽자 오다 가문의 영지였던 시나노를 공격해 영지로 삼았다. 1590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에 의해 천하가 평정되자, 도쿠가와 가문은 간토로 이봉되어, 에도를 본거지로 삼았다.
드디어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후 일어난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合戦)에서 승리해 에도에막부를 열었다.
긴키 (近畿)
센고쿠 시대 초기 긴키에 있어서 쇼군(将軍) 아시카가 가문(足利氏)과 간레이(管領)인 호소카와 가문(細川氏) 사이에 다툼이 반복되었다. 단 이 다툼은 오우치 가문(大内氏) 등의 지방세력이 아시카가 가문을 이용하여 중앙정치에 개입하는 측면이 강했다.
호소카와 가문이 내부의 권력투쟁으로 세력이 약해지자, 쇼군 가문인 아시카가 가문을 보좌한다는 명목으로 오미의 롯카쿠 가문(六角氏)이 막정(幕政)에 개입한다. 오미에 있어서도 사사키 가문(佐々木氏)의 분가인 오미 북부의 교고쿠 가문(京極氏)과 오미 남부의 롯카쿠 가문(六角氏)이 패권을 다투지만, 교고쿠 가문은 슬하에 있던 호족 아자이 가문(浅井氏)에 실권을 빼앗기게 된다. 이렇게 하여 아자이 가문과 롯카쿠 가문간에 다툼이 계속된다.
기본적으로 무로마치 막부가 임명한 슈고 다이묘가 각 지방의 센고쿠 다이묘로 된 경우가 많다. 그들은 호족들의 추대로 지위를 보장받으면서 가신들의 내분을 힘겹게 이겨냈다. 예를 들어 기이의 슈고 다이묘 하타케야마 가문(畠山氏) 등은 정토진종의 혼간지(本願寺) 세력의 봉기로 실권을 빼앗기는 등 매우 입지가 약했다. 하지만, 다지마 국의 야마나 가문(山名氏), 단고 국의 잇시키 가문(一色氏), 와카사 국의 다케다 가문(武田氏) 등은 주변 제세력의 침입과 가신의 내분을 힘겹게 봉합하면서 센고쿠 시대에 살아 남았다. 앞서 서술한 아시카가 가문(足利氏)과 호소카와 가문(細川氏)의 내분은 주변의 세력인 롯카쿠 가문(六角氏), 아카마쓰 가문(赤松氏), 우라가미 가문(浦上氏), 하타케야마 가문(畠山氏), 쓰쓰이 가문(筒井氏) 등에도 파급되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동란은 호소카와 가문 슬하의 미요시 가문(三好氏)이 정권을 장악한 이후이다. 미요시 가문은 아와 국을 비롯하여 사누키 국, 아와지 국, 셋쓰 국, 이즈미 국, 가와치 국, 야마시로 국, 야마토 국, 단바 국 등을 실력으로 지배하였고, 그 곳에 심복을 심어 지배하엿다. 그러나 얼마지나지 않아 각 지방을 완전히 통치하지 못했고, 미요시 나가요시(三好長慶) 사후, 미요시 가문의 세력은 쇠퇴하게 된다.
그 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가 상경해 미요시 세력를 제압했고, 쇼군 아시카가 요시아키(足利義昭)를 옹립해 실권을 장악한다.
주고쿠 (中国)
센고쿠 시대 초기에는 오우치 요시오키(大内義興)와 아마고 쓰네히사(尼子経久)간의 대립이었다. 오우치 요시오키는 대외무역을 장악해 세력을 신장시킨다. 잠시나마 주고쿠 및 규슈 7개국를 지배하였으며, 상경하여 쇼군 아시카가 요시타네(足利義稙)를 옹립한다. 이즈모 슈고다이 아마고 쓰네히사는 도다 성(富田城)을 빼앗고 슈고인 교고쿠 가문(京極氏)을 축출한다.
전성기때에는 주고쿠 9개국을 지배하였고, 오우치 가문과의 전투를 계속해왔지만, 결착은 나지 않았다. 두 세력의 접경인 아키 국에서는 호족출신인 모리 모토나리(毛利元就)가 아키의 여러 호족을 제압하고 센고쿠 다이묘로 탈바꿈하였다. 모리 모토나리는 아마고 가문(尼子氏)을 배반하고 오우치 가문(大内氏)에 협력하였다. 이 때문에 아마고 하루히사(尼子晴久)가 군을 이끌고 요시다 고오리 산성(吉田郡山城)을 공격한다. 모리 모토나리는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에게 원군을 요청하였고, 모리=오우치 연합군은 아마고 군을 격파한다.
오우치 가문내에서 중신 스에 다카후사(陶隆房)가 모반을 일으켜 오우치 요시타카를 죽이고 실권을 장악한다. [6]모리 모토나리는 역신 스에 다카후사를 이쓰쿠시마 섬에서 격파하여, 스오 국, 나가토 국을 장악한다
이즈모 국에 있어도 아마고 하루히사가 죽자, 아마고 세력은 위축되었다. 이에 모리 가문의 공세가 시작되었고, 난공불락이라고 불리는 갓산 도다 성에서 농성하던 아마고 가문은 병량부족에 시달려 결국 모리 가문에 항복하게 된다.
이로써 모리 가문(毛利氏)의 명실상부한 주고쿠의 패자가 되었다.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주고쿠 방면 책임자 하시바 히데요시(羽柴秀吉)가 미키 성(三木城), 돗토리 성(鳥取城),다카마쓰 성(高松城)을 차례차례 점령하여 모리 가문을 압박하지만, 1582년 혼노지의 변(本能寺の変)에서 오다 노부나가가 절명하자 하시바 히데요시는 모리 가문과 재빨리 화친을 하고 교토 인근에서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를 격파하였다.[9] 그후, 오다 가문의 실권을 장악하고 명실상의 천하패자에 군림하게 된다.
이 후, 모리 가문은 도요토미 가문(豊臣氏)에 협력하여 시코쿠 정벌, 규슈 정벌, 오다와라 정벌 등에서 활약하였고, 모리 가문의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고다이로로 취임하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가 죽자 도쿠가와 이에야스(徳川家康)와 이시다 미쓰나리(石田三成)가 대립하였고, 곧이어 세키가하라 전투(関ヶ原の戦い)가 일어난다. 모리 가문은 서군에 참진하였기 때문에 스오, 나가토 2개국 36만9000석으로 감봉되었다.
그 밖에 센고쿠 시대 주요 다이묘로는 비젠의 우라가미 무라무네(浦上村宗)와 그의 가신이었던 우키타 나오이에(宇喜多直家)등이 있다. 우라가미 무라무네는 하리마 슈고 아카마쓰 가문(赤松氏)의 중신이었지만, 아카마쓰 마사노리(赤松政則)의 죽음을 계기로 독립하여 아카마쓰 가문의 영지인 하리마 국, 비젠 국, 미마사카 국으로까지 그 세를 떨쳤다.
세력을 잃은 호소카와 다카쿠니(細川高国)를 도와 막정(幕政)에 관여도 해보지만, 미요시 가문과의 싸움에서 패하여 전사하였다. 우라가미 무네카게(浦上宗景)가 그뒤를 이었지만, 중신 우키타 나오이에의 모반으로 실권을 잃게 된다. 비젠을 장악한 우키타 나오이에는 선견지명이 있는 인물로 하시바 히데요시가 하리마 국 히메지 성(姫路城)에 입성하자 항복하였고, 자신의 적자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인질로 보내는 등 정치수완이 뛰어났다. 그러나, 우키타 히데이에는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서군에 참진하였기 때문에 유배형에 처해졌으며, 다이묘로써 우키타 가문은 멸문되었다.
시코쿠 (四国)
시코쿠 동부인 아와 국, 사누키 국는 지리상으로 긴키(近畿)에 가까울 뿐만 아니라, 호소카와 가문(細川氏)의 세력기반으로 자주 긴키의 정쟁에 휘말렸다. 그러나, 시코쿠는 주위에 적으로 둘만한 세력은 존재하지 않았고, 조소카베 가문(長宗我部氏)이 시코쿠를 통일하기 전까지 대부분 영주는 그대로였다.
아와 국은 호소카와 가문이 지배하였고, 후에 호소카와 가문의 중신인 미요시 가문(三好氏)이 실질적으로 지배하였지만, 호소카와 가문 자체는 에도 시대까지 아와 야카타(阿波屋形)라는 호칭을 사용하였다. 센고쿠 시대 아와 국의 거점은 쇼즈이 성(勝瑞城)이었다. 사누키 국에서 사누키 동부는 슈고다이 야스토미 가문(安富氏)이 통치했지만, 후에 미요시 가문의 일문으로 맞아들인 소고 가문(十河氏)이 미요시 가문의 대관으로 이 지역을 통치하게 된다.
사누키 서부는 슈고다이의 가가와 가문(香川氏)이 주고쿠 지방의 모리 가문(毛利氏)과 결탁하여 미요시 가문가 대립하지만, 젠쓰지 전투(善通寺合戦) 이후 미요시 가문의 지배하에 있게 된다. 그러나, 미요시 가문이 쇠퇴하자 가가와 가문은 오다 가문(織田氏)에 복종하였다.
이요 국에서는 슈고 고노 가문(河野氏)이 이요 중부를, 우쓰노미야 가문(宇都宮氏)이 오즈 지역을, 사이온지 가문이 이요 남부를 지배하였다. 이요는 지리적으로 산악지대가 많았고, 주고쿠와 규슈에 가깝기 때문에 모리 가문(毛利氏)과 오토모 가문(大友氏)의 간섭이 많았다. 그러한 연유로 세력을 신장하지 못했다. 도사 국에서는 슈고 호소카와 가문(細川氏)이 있었지만, 시치슈고(七守護)라고 불리는 호족이 도사 중부에 할거했고, 구게 가문인 이치조 가문(一条氏)을 맹주로 따랐다. 이치조 가문은 시치슈고의 3배 정도의 강한 힘을 가졌고, 도사 국 정치에 관여한다. 후에 이치조 가문의 원조로 살아난 조소카베 구니치카(長宗我部国親), 모토치카(長宗我部元親) 부자가 시치슈고와 이치조 가문을 추방하고 도사를 통일하게 된다.
그리고,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협력으로 시코쿠를 통일한다. 아와지 국은 슈고 호소카와 가문이 통치했다. 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시코쿠 정벌에 의해 조소카베 가문은 도사 일국에 만족해야 했고, 나머지 지역은 히데요시 휘하 중신들에게 맡겨졌다. 아와 국은 하치스카 이에마사(蜂須賀家政), 사누키 국은 센고쿠 히데히사(仙石秀久), 이요 국은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가 다스리게 된다.
규슈 (九州)
규슈의 무가 가문은 다이라 가문(平家)의 피가 흐르기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를 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源頼朝)로부터 신뢰감을 잃었다.
요리토모는 규슈를 제압하기 위해 쇼니 가문(少弐氏), 오토모 가문(大友氏), 시마즈 가문(島津氏)을 측근으로 발탁하여 규슈 슈고로 임명한다. 이들은 요리토모의 연고인 간토에서는 무명에 가까운 가문들이었다. 지쿠젠 국, 히젠 국, 부젠 국은 쇼니 가문이, 지쿠고 국, 히고 국, 분고 국는 오토모 가문이, 사쓰마 국, 오스미 국, 휴가 국는 시마즈 가문이 통치하였고, 그 밑의 지토(地頭)로써 마쓰라 가문(松浦氏), 아키즈키 가문(秋月氏), 가마치 가문(蒲池氏), 기쿠치 가문(菊池氏) 등의 다이라 가문측 무가 가문이 그 지역을 통치하였다. 센고쿠 시대 초기에는 쇼니, 오토모, 시마즈 이들 세가문이 권익을 지키기 위해 자립하려는 호족들과 다투게 된다. 쇼니 가문은 규슈에 두었던 막부의 기관인 규슈 단다이(九州探題)와 대립하였기 때문에 무로마치 시대 후기에는 그 세력이 쇠퇴하였고, 지쿠젠, 부젠의 호족인 무나카타 가문(宗像氏), 아소 가문(麻生氏) 등은 주고쿠 지방의 오우치 가문(大内氏)의 영향하에 있었다
. 쇼니 가문은 히젠, 쓰시마의 병력을 이끌고 오우치 가문을 공격하지만, 오히려 오우치 가문으로 이반을 한 슈고다이 류조지 가문(龍造寺氏)의 하극상으로 멸문되었다. 류조지 가문은 오우치 가문의 당주 오우치 요시타카(大内義隆)가 그의 중신 스에 다카후사(陶隆房)에게 죽자 히젠에서 자립하였고, 지쿠젠과 부젠은 오토모 가문의 간섭을 받게 되었다. 후에 주고쿠의 패권을 줜 모리 가문(毛利氏)과 오토모 가문(大友氏)은 지쿠젠 북부를 두고 전쟁을 벌이게 된다.
오토모 가문은 분고를 거점으로 하였고, 그의 중신들은 지쿠고 남부의 호족 가마치 가문(蒲池氏)을 중심으로 지쿠고를 통치하였다. 더욱이 오토모 세력은 히고의 아소 가문(阿蘇氏)과 사가라 가문(相良氏) 그리고, 휴가의 이토 가문(伊東氏)까지 세를 떨친다. 또 오토모 요시시게(大友義鎮)는 기독교를 보호하였고, 남만무역을 장려하였다. 휴가의 이토 가문이 시마즈 가문에 쫓겨 오토모 가문에 의탁하였고, 곧 오토모 가문과 시마즈 가문이 휴가 다카조가와라(高城川原)에서 일전을 벌렸지만, 오토모 군은 패배하였다. (미미가와 전투(耳川の戦い)). 이 전투로 오토모 가문은 쇠퇴하였고, 히젠의 류조지 가문이 세력을 신장하였다.
잠시나마 류조지 다카노부(龍造寺隆信)가 당주로 있을 때 오토모, 시마즈 가문과 자웅을 겨룰정도로 세를 떨쳤지만, 시마즈 가문과의 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패배하여 류조지 가문은 세력을 잃고, 류조지 가문은 중신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에 의해 좌지우지 되었다.
센고쿠 시대 초기에는 시마즈 가문은 일족의 내부 권력다툼과 휴가의 호족 이토 가문의 공격 등 그리 순탄치는 않았다
. 그러나, 분가인 이자쿠 시마즈 가문(伊作島津家)의 시마즈 다다요시(島津忠良)의 아들 시마즈 다카히사(島津貴久)가 종가를 계승한 후 안정을 되찾았으며, 그의 아들 시마즈 요시히사(島津義久)의 지휘아래 이토 가문과의 기자키바루 전투(木崎原の戦い), 오토모 가문과의 미미가와 전투(耳川の戦い), 류조지 가문과의 오키타나와테 전투(沖田畷の戦い)에서 각각 승리하여 규슈를 제패하였다.
간사이 지방 = 긴키
주부지방 = 호쿠리쿠(15,16,17,18) + 고신(19,20,21) + 도카이도(23,22,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