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5년 봄
계속되는 키예프와 전투에 지칠법도 했지만
서로가 서로를 도우며 튜토닉의 병사들을 한발씩 내딛었다.
스몰렌스크 남서쪽에서
스몰렌스크를 급습하려던 매복병이 발견되고
부관 힐데브란트는 그들을 간단히 격파한다.
힐데브란트는 강력한 지휘로 큰 승전보를 거두었고
이는 정식 기사단원에 들어 갈 수 있는 발판이 된다.
디트마르는 힐데브란트를 기쁘게 기사단원으로 맞이하여
그의 활약을 기대했다.
지토미르쪽에선 할리크에서 지원온 병력을 합친 게르하르트군이 계속되는 키예프 왕국의 공세를 막아낸다.
게르하르트의 1800명 병사들과 키예프 1300여명의 병사가 전투를 시작한다.
우중충한 날씨에 언덕에서 몰려오는 적들을 보는 그들의 마음은
긴장되고 흥분되어 있었고, 게르하르트는 그들을 잘 통솔하며
궁수를 전진배치 하되 보병들과 연이어 열을 바꿀 수 있도록 밀착 배치 하였고
적 보병들이 산개하여 돌격해올 때 궁수가 2열로 물러나고 보병들이 그들을 맞이 했다.
그러면서 양쪽 날개에서는 기병들이 활발하게 움직이며 적 기병이 보병분대에 돌격하지 못하도록 했고
게르하르트는 크게 우회하며 적 궁병들을 측면에서 격파한다.
게르하르트의 훌륭한 지휘에 100여명의 병사를 잃고 1300여명을 잡는데 성공한다.
크라코우와 할리크 동남쪽 지방에는 지속되는 불안한 바람이 불었고
가까운 시일 내에 불안한 바람이 피바람으로 바뀔 듯 했다.
1255년 가을
서유럽의 판도가 바뀐다.
서유럽을 지배했던 프랑스가 멸망햇다는 서신이 날라온다.
디트마르는 크게 당황하여 바로 서유럽의 정세를 알아봤고
프랑스는 북쪽 잉글랜드 동북쪽 덴마크 동남쪽 베네치아 서남쪽 아라곤 왕국에게 영지를 나눠서 먹히며
멸망했다는 첩보원의 소식을 받는다.
카탈루냐 지방의 아라곤 왕국이 점점 강력해진다는 것은 익히 들었지만
그 방향이 프랑스쪽일줄은 꿈에도 몰랐고 폴란드가 확장을 해야 될 시기에
덴마크가 끼어들어 그 영지들을 다 제압하고 중소 강국이 되버렸다.
프랑스의 멸망은 서유럽에 있던 전체 국가가 표적이 튜토닉으로 바뀔 수 있다는 증거였고
이제 노르웨이와 화친도 얼마 남았지 않았다는걸 증명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서유럽쪽의 판도가 바뀌는 동안 게르하르트는 지토미르와 키예프를 오가며 키예프 왕국의 병사들을 격파하는데 집중한다
이제 키예프 왕국의 병사들은 게르하르트라는 이름만 들어도 치가 떨릴 정도로 그는 연전 연승하며 자기 이름을 떨친다.
1255년 겨울
노르웨이가 선전포고를 한다.
비록 해군에서의 포위였지만 이는 대규모 상륙작전의 암시일 수도 있었기에 디트마르는 동쪽의 경계를 전체적으로 강화한다.
동쪽의 판도가 예사롭지 않을 때 모스크바로 지원온 힐데브란트는 랴잔을 포위하고 첩보원이 쉽게 성문을 열어줘
도브로 미실 장군뿐이 없는 라쟌을 급습한다. 도보르 미실의 직속부대는 동쪽으로 이동하여 노보고르드와 싸우고 있는 전선을
도와주러 간 타이밍에 기가막힌 급습이었다.
키예프 왕국의 손꼽히는 명장이 어이없게 죽기 일보직전이었고 그를 도와줄 키예프 왕국의 병사는 호위대 뿐이었다.
그는 키예프 왕국의 명장답게 60명을 도륙했지만 끝내 가슴이 꿰뚫려 전사한다.
게르하르트는 잠시 묵념을 이은 뒤 장례를 잘 치뤄주고 라쟌을 점령한다.
라쟌은 당시 키예프 왕국의 거대한 성채였으며 엘리트 병사들을 뽑을 수 있는 유일한 곳이었는데
튜토닉도 라쟌을 이용하여 리더브뤼터 하마 기사단을 양성할 수 있게 된다.
튜토닉 전체의 군병중 으뜸가는 엘리트 군단이었으며 그들의 갑주와 병장기는 다른 국가의 엘리트 보병들과도 차원이 달랐다.
그들은 북방 십자 기사단의 위엄을 알리는 거대한 뿔모양의 투구를 끼고 방패에도 갖가지 무서운 문양을 그려 적들을
공포에 질리게 했다.
게르하르트는 라쟌을 기점으로 삼아 튜토닉 전체의 군단중 으뜸이 되는 군단을 양성할 계획을 짠다.
하지만 리더브뤼터 하마 기사단 자체가 엘리트 집단이었기에 한 분대를 생산하는데도 3년이 걸렸다.
그래서 게르하르트는 그들을 꾸준하게 뽑아야만 했다.
같은 시각 게르하르트는 지토미르 북쪽에 있는 반란군을 섬멸한다.
노보고르드 쪽은 잠잠해졌지만 키예프쪽은 점령한지 몇해 지나지 않아 아직은 불안정 했고
게르하르트는 귀찮았지만 키예프와 지토미르가 전염병으로 안정화 될 때 까지 두 지역을 엄호하는 임무를 맡았다.
동쪽의 패자가 되가고 있었던 얀셀름은
브랸스크를 안정화 시키기도 전에 다시 군을 운용한다.
그의 지휘력은 날이 가면 갈수록 늘어났다.
얀셀름은 적당히 과감하게 적의 내부를 공략하며 키예프 왕국의 병사들을 괴롭혔고
키예프 전 지역에서 얀셀름,게르하르트의 이름을 들으면 혀를 찰만큼 짜증나는 존재였다.
그와 반대로 튜토닉 전 지역에서는 뜻을 펼치지 못한 하인케를 이어 동쪽의 수호자 두명의 등장에 환호했다.
같은 시각
크라코우 근방 교각 지역에서는 베니치아 대군이 헤르케군을 덮친다.
헤르케는 숫적 열세와 변변치 못한 보병들을 이끌고 전투를 시작한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사방에 눈사리에 흩날리고 시야가 보이질 않아 궁수들이 활시위를 당기는데 더욱 애를 먹었고
베네치아[베니스]군은 이 날씨를 잘 이용하여 전선을 유지하던 보병들에게 돌진한다.
담담히 그들이 돌격해오는 것을 지켜보는 튜토닉의 병사들은
자신들의 패배를 직감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물러나질 않았다. 이 교각에서 퇴각한다면 크라코우의 함락은 분명했기 때문에
그들은 필사의 각오로 교각을 지켜내려 했다.
적 보병들이 밀려올때까지만 해도 잘 버텼던 전선이
기병들의 돌격으로 한쪽에 구멍이 생김으로 인해 무너졌고
전선이 무너짐에 따라 병사들을 엉키어 더욱 불리한 지형에서 싸우다 전사한다.
교각을 사수하던 헤르케 마저 전사하고
남아있던 궁병들은 모두 퇴각하기 시작한다.
1255년 겨울
헤르케 군단은 180여명만이 크라코우로 돌아오고 전멸한다.
쓰라린 패배에 크라코우 내성 병사들은 슬퍼했지만 곧 그들이 포위를 해올것을 대비하기 위해 움직였다.
이 소식은 할리크와 모든 튜토닉 전역에 퍼진다.
'튜토닉이 처음으로 완패를 당하다.'라는 말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