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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ps]미디블2의 각나라.민족들의 역사[에이지2에서 발췌]

작성자의열단|작성시간06.11.26|조회수1,193 목록 댓글 6

 

 

브리튼족(500- )


약 400년 경 로마 군대가 갈리아(현재 프랑스) 지역으로 철수한 후 영국 제도는 몇 세기 동안 암흑 시대

 

에 빠졌으며, 이 시기에 대한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습니다. 400년간의 로마 통치 시대에 만들어진 로

 

마식 영국 문화는 야만족의 무자비한 침입과 이주를 통해 사라졌습니다. 아일랜드의 켈트족(스코티라는

 

부족 이름에서 영국 북부 지역을 일컫는 스코틀랜드라는 이름이 만들어짐), 독일의 색슨족과 앵글족, 지

 

금의 네덜란드 지역의 프리지아인, 지금의 덴마크 지역의 주트족이 영국 제도에 침입했습니다. 600년

 

경까지 앵글족과 색슨족이 지금 영국 지역의 대부분을 지배했으며, 800년 경까지 지금의 웨일즈 지역과

 

스코틀랜드, 그리고 서부 콘월 지역만이 켈트족의 지배를 받으며 남게 되었습니다.

 

이 새 거주민을 앵글로색슨족(앵글족과 색슨족)이라고 불렀습니다. 앵글족이라는 이름에서 이 새로운

 

문화를 일컫는 이름이 만들어졌으며(England는 Angle-land에서 유래함), 이들이 사용한 게르만어인

 

영어가 원주민의 켈트어와 이전에 유입된 라틴어 대신 쓰이게 되었습니다. 이후에 또 다른 침략과 군사

 

적 정복을 당했지만 영국 본토의 남부와 동부 지역 및 그 지역 주민과 언어를 이때부터 잉글랜드라고 불

 

렀습니다.

 

865년 잉글랜드에 새로운 세력이 침입하여 한동안의 평화를 깨뜨렸습니다. 프랑스와 독일을 침입한 덴

 

마크의 바이킹족이 영국으로 눈을 돌렸던 것이었습니다. 그로부터 10년 후 앵글로색슨 왕국 대부분이

 

패배했거나 항복했고, 서부 색슨족(현재 웨식스)만이 후에 '대왕'이라고 불린 유일한 영국 통치자 앨프

 

레드의 통치 하에 남아 있었습니다.

 

이후 영국은 거의 200년간 바이킹족과 서부 색슨족, 그리고 몇몇 소수의 영국 왕국으로 분리되었습니

 

다. 이 바이킹 중 절반을 데인족 법의 적용을 받는다는 의미로 데인로라고 불렀습니다. 바이킹족은 평화

 

를 유지한다는 명목으로 데인족의 금화를 뜻하는 데인세라는 거액의 세금을 징수했고, 데인족의 종교가

 

기독교가 되면서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영국인들은 이내 데인족에게 반기를 들었으며, 결국

 

954년 요크 지역의 마지막 바이킹 왕은 살해되었습니다. 영국은 웨식스 출신 영국 왕의 통치 하에 처음

 

으로 통일을 이루었습니다.

 

1066년 "국왕의 추밀원"인 위턴이 웨식스 백작의 아들 해럴드에게 왕위를 넘겼습니다. 이 때, 노르웨이

 

왕인 하랄 하드라다('엄한 통치자'라는 의미)와 노르망디의 윌리엄 공작이 이 왕위가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노르웨이 군이 요크 지방 근처에 먼저 상륙했지만 스탐포드 브리지 전투에서 하랄에게

 

패배했습니다. 이 전투에서 승리한 하랄은 그 즉시 군대를 남쪽으로 파견하여 헤이스팅즈에서 윌리엄

 

공작의 군대와 맞서게 되었습니다. 이 전투는 하루종일 업치락 뒤치락 하면서 승부가 나지 않았지만, 해

 

질 무렵 하랄이 눈에 화살을 맞는 치명상을 입고 죽으면서 윌리엄의 승리로 끝이 났습니다. 이후 2년간

 

'정복자' 윌리엄이 영국 점령지를 통치했습니다.

 

중세의 나머지 기간 동안 윌리엄의 후계자들은 프랑스에 있는 점유지를 확장하거나 방어하기 위한 일련

 

의 대결과 전쟁으로 국가를 피폐시켰습니다. 영국과 프랑스 간의 100년 전쟁이 바로 1337년부터 1453

 

년까지 계속된 갈등의 한 예입니다. 이 전쟁은 영국 왕이 혈족 결혼을 빙자하여 프랑스의 왕위를 주장한

 

것을 계기로, 수익이 좋았던 모직물 무역 통제권과 프랑스가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지원한 문제를 놓고

 

갈등이 계속되었습니다. 전쟁 초반에는 화려하게 무장한 프랑스 기사들을, 멀리 떨어진 곳에서 소탕하

 

는 영국 장궁병 덕분에 영국이 계속해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영국은 전쟁을 종결시키지 못했고 프랑스가 다시 힘을 회복했습니다. 신의 보호를 받는다고 했

 

던 농민 소녀 잔다르크에 의해 고무된 프랑스가 저항을 시작했고, 이 전쟁은 1453년에 보르도가 체포되

 

면서 종결되었습니다. 그리고 영국은 칼레 지역만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도 오래가지 못했습

 

니다.

 

 

비잔틴족(476-1453)


비잔틴이라는 이름은 흑해와 에게해를 연결하는 전략적 항로인 보스포루스에 있는 고대 도시 비잔티움

 

에서 왔습니다. 로마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4세기에 이 지역을 콘스탄티노플이라고 개명하고 이

 

도시를 로마 제국의 자매 도시로 삼았습니다. 동로마 제국은 서로마 제국에 비해 1000년 이상 지속되면

 

서 페르시아, 아랍 및 터키의 침략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했습니다. 콘스탄티노플은 성벽으로 잘 둘러싸

 

여 있으며 바다로부터 필요한 물품을 공급 받을 수 있었기에, 이 비잔틴 제국은 오랫동안 지속될 수 있

 

었습니다. 6세기 정절기에 이른 비잔틴 제국은 이베리아 반도(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갈리아(현재

 

의 프랑스), 영국을 제외한 원래의 로마 제국을 대부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7세기 중엽, 아랍

 

인들에게 대부분의 영토를 빼았겼으며 그때부터 주로 발칸 지역과 현재의 터키 지역에서 활동하였습니

 

다.

 

비잔틴 제국의 첫번째 황제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482-565)였습니다. 그는 옛 로마 제국을 회복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거의 성공하는 듯 하였습니다. 그 시대 최고의 장군이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

 

세의 오른팔이었던 벨리사리우스는 제국을 가로지르며 동쪽의 페르시아, 북아프리카의 반달족, 이탈리

 

아의 동고트족, 발칸 지방의 불가리아인과 슬라브족을 쳐부수었습니다. 군사적 확장 외에도 유스티니아

 

누스 1세는 강력한 법률과 관리 체제를 마련하고 기독교를 보호함으로써 미래를 위한 기초를 닦았습니

 

다.

 

콘스탄티노플은 아시아, 유럽, 흑해, 그리고 에게해의 무역로에 자리잡고 있어 비잔틴 제국은 수세기 동

 

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습니다. 이곳이 바로 중국에서 시작된 실크로드의 주요 목적지 중 하나였습니

 

다.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주된 금화인 노미스마는 거의 800년간 지중해 지역 화폐의 기준이 되었습니

 

다. 하지만 콘스탄티노플의 전략적인 입지는 결국 이탈리아 도시 국가의 질투와 적개심을 사게 되었습

 

니다.

 

비잔틴 제국의 장점이라면 로마, 그리스, 고트 및 중동 지역의 전쟁에서 얻은 풍부한 경험을 바탕으로

 

한 우수한 군대였습니다. 군대의 핵심은 경보병(궁사)와 중형 보병(무장 검병)의 지원을 받는 중형 기병

 

력이었습니다. 이 군대는 부대로 조직되어 전술과 작전 훈련을 받았으며, 무관들은 군대의 역사와 군사

 

이론을 배웠습니다. 훈련을 받지 않은 전사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지만 뛰어난 전략과 완벽한 기강 덕분

 

에 비잔틴 군대는 우세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군대는 적의 계획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고 침략자를

 

매수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침략자의 생각을 흐트려 놓는 스파이와 비밀 요원 조직의 도움도 받았습니

 

다.

 

비잔틴의 해군은 통상 항로를 열어 두고 공급로를 확보하여 도시가 포위되었을 때에도 식량 부족으로

 

항복하는 일을 피할 수 있었습니다. 8세기 육로 및 해로를 통한 아랍의 공격을 받았을 때, 비밀 무기인

 

그리스 화약으로 이를 무찔렀습니다. 그 혼합 성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이 화학 무기는 호스를 사용해

 

분무하는 일종의 네이팜탄이었습니다. 아랍 해군은 이 그리스 화약 때문에 바다에서 참패를 당했습니

 

다.

 

7세기와 8세기 무렵, 아랍 민족이 이집트, 중동, 북아프리카, 그리고 스페인 지역을 차지하면서 이 지역

 

은 비잔틴의 지배로부터 영구히 벗어나게 되었습니다. 1071년 만지게르트에서 터키군이 승리를 거두면

 

서 비잔틴 제국의 가장 중요한 곡물, 가축, 말 및 병사의 공급지인 소아시아 지역이 황폐화되었습니다.

 

1204년 콘스탄티노플은 십자군의 조종을 받은 베니스 총독의 배신으로 약탈당했습니다.

 

14세기, 유럽을 침입한 터키는 아드리아노플을 점령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우회한 다음 발칸 지역에 자리

 

를 잡고서는 1396년 니코폴리스에서 대규모 십자군을 무찔렸습니다. 그리고 1453년 5월, 터키의 술탄

 

마호메트 2세는 대포를 사용해 방어가 약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습니다. 이 도시가 함락되면서 비잔

 

틴 제국도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켈트족(500-1500)


켈트족은 고대 북유럽 원주민으로 5000년 전에 스톤헨지를 세웠습니다. 줄리어스 시저가 갈리아 지방

 

원정 시 전투를 벌인 사람들이 바로 이 켈트족입니다. 로마 제국은 결국 켈트족으로부터 영국과 스페인

 

의 대부분을 빼앗았으며, 고대 로마 제국 말기에 켈트족이 점유한 지역은 프랑스 북서부, 아일랜드, 웨

 

일즈, 그리고 스코틀랜드의 일부 지역에 불과했습니다. 중세를 지나면서 켈트족은 스코틀랜드 지역의

 

지배력을 강화하고 영국의 다른 지역으로 세력을 넓히기 위한 몇 차례의 시도를 했습니다.

 

아일랜드는 중세 초기까지도 작은 무리 형태로 남아 있었지만, 800년 경에는 레인스터, 먼스터, 코노트,

 

얼스터 4개 지역이 '위대한 왕'의 통치 하에 권력을 갖고 있었습니다. 795년 바이킹족의 침입이 시작되

 

었고, 9세기 중반이 되면서 바이킹족이 이 지역에 정착했습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지역이 더블린이었

 

습니다. 약 1000년 경 브라이언 보루가 아일랜드 전체의 최초의 위대한 왕이 되었습니다. 1014년에 브

 

라이언 보루가 전사했지만 아일랜드 군대는 클론타프에서 더블린의 데인족을 무찔렀습니다.

 

중세 초기 스코티라는 이름의 아일랜드 부족이 현재의 스코틀랜드 북부 지방에 침입하여 정착하고 스코

 

틀랜드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이들은 로마를 남쪽으로 몰아냈던 이 지역의 원주민인 픽트족을 밀어내

 

고 이들을 흡수하였으며, 11세기가 되면서 지금 형태의 스코틀랜드 왕국을 형성하지만 영국의 간섭을

 

받았습니다. 이에 맞서기 위해 스코틀랜드는 프랑스와 "구 동맹"을 맺게 되었으며, 이 동맹은 향후 몇 세

 

기동안 스코틀랜드 외교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1296년 영국 에드워드 1세는 스코틀랜드를 합병했습니

 

다.
 
윌리엄 월리스(브레이브 하트)는 스코틀랜드 폭동을 주도하여 1297년 스털링 다리 전투에서 사실상의

 

독립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다음 해 폴커크에서 패배한 후로 1305년 배신을 당하고 체포되어 처형될 때

 

까지 계속해서 게릴라전을 펼쳤습니다. 로버트 드 브루스는 자신의 라이벌을 죽인 뒤 자신을 스코틀랜

 

드의 왕이라고 선언하고, 1314년 배넉번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영국을 몰아냈습니다. 영국의 에드워드 3

 

세가 1328년에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승인하지만 스코틀랜드와 영국간의 전쟁은 수세기 동안 계속되다

 

가 중세가 끝나고 한참 후인 1603년에 가서야 두 나라의 왕위가 하나로 통합되었습니다.

 

웨일즈 지역에서는 이 지역을 통일할 만큼 강력한 왕이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13세기 말 웨일즈 지역의

 

가장 강력한 공국 중 하나인 귀네드의 통치권을 이양 받은 에드워드 1세는 이 지역을 효과적으로 영국의

 

지배하에 두기 위해, 웨일즈 지역에 5개의 커다란 성을 짖기 시작했습니다.

 

 

 

프랑크족(509- )


프랑크족은 게르만족의 일족입니다. 라인 강 유역에 거주하던 프랑크족은 5세기 초 남쪽으로 확장을 시

 

작하여 로마가 통치하던 갈리아 지방(현재 프랑스)까지 내려왔습니다. 하지만 다른 게르만족과는 달리

 

프랑크족은 원 거주지를 완전히 벗어나는 대신 다른 지역을 합병하는 방식을 택했습니다. 프랑크족의

 

족장인 클로비스가 갈리아 지방에서 마지막 로마 군대를 무찌르고 509년에 프랑크족을 통합하면서 서

 

부 유럽의 대부분을 지배했습니다. 이후 1000년간 프랑크 왕국은 점차 근대 국가 프랑스로 변모했습니

 

다.

 

클로비스 왕조는 클로비스가 죽은 후 관습에 따라 그의 네 아들이 나누어 맞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몇 세기에 걸쳐 왕위 계승을 주장하는 자들 간에 내전과 분란이 끊이지 않게 되었으며, 7세기 말이 되면

 

메로빙 왕조의 왕(클로비스의 후손)들이 명목상으로만 통치자의 자리에 있게 되었습니다. 8세기 초 찰

 

스 마텔이 궁정의 시장이 되면서 실질적인 통치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는 프랑크 기병대를 조직하여

 

훌륭히 전투를 치루었고, 그래서 적들은 그를 망치 찰스로 불렀습니다. 732년 푸아티에 전투에서 프랑

 

크 기병대가 스페인에서 위쪽으로 진격해 오는 이슬람 침략군을 대파시킴으로써 남서쪽에 있는 이슬람

 

의 공격을 영원히 잠재웠습니다.

 

이탈리아를 롬바르드로부터 방어해 준 대가로 교황은 찰스 마텔의 아들 피핀을 프랑크의 왕으로 임명했

 

습니다. 이에 따라 피핀은 카롤링거 왕조를 열었으며, 771년부터 814년까지 칼 대제 또는 샤를마뉴 대제

 

라고 불리는 위대한 통치자가 프랑크 왕국을 통치했습니다. 그는 프랑크 왕국을 제국으로 확대시키고

 

서구의 문화와 학문의 재생을 이끌어 내었습니다. 칼 대제의 제국은 그 손자들에 의해 분할된 후 다시

 

크게 두 지역으로 합체되었으며, 그 서쪽 지역이 프랑스 왕국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왕

 

은 프랑스의 정치적 권력을 점점 상실하게 되었고, 내전과 국경 분쟁, 바이킹의 침입으로 중앙 권력이

 

붕괴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주에게 이권을 주어야만 돈과 군대를 모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봉토는 세습

 

되었고 봉토를 보유한 자들은 자신의 봉신을 다스리는 영주가 되었습니다. 10세기 프랑스는 독립적인

 

세력을 갖춘 봉건 영토로 분열되었습니다.

 

987년 프랑스 귀족들은 위그 카페를 왕으로 선출했습니다. 그를 왕으로 선출한 이유는 파리를 중심으로

 

하는 그의 봉토가 작았고 위협적인 인물이 아니라고 판단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카페 왕

 

조가 세워졌으며, 이 왕조의 왕들은 2세기에 걸쳐 자신의 영지에 토지를 추가하고 무역을 장려하였으며

 

넓은 지역에 걸쳐 새로운 마을과 봉토에 특허장을 허가하면서 점차로 권력을 회복해 갔습니다. 카페 왕

 

조는 교회와의 제휴를 통해 강력한 도덕적 입지를 굳혔으며 교회의 문화, 정치 및 사회적 영향력 덕분에

 

많은 이익을 얻었습니다. 왕실 관료들은 왕에게 충성을 맹세했으며 중앙 관직의 세습제가 폐지됨으로써

 

이러한 충성의 맹세가 더 큰 효과를 발휘했습니다.

 

1180년 필립 2세부터 시작하여 3명의 뛰어난 통치자가 나타나 프랑스를 유럽에서 가장 중요한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이들은 지배권을 강화시켰으며 무역을 장려하였고 효율적으로 세금을 징수하였으며 봉

 

건 계급 조직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시켰습니다. 또한 3부회라는 의회가 만들어졌지만 실질적인 권

 

한은 전혀 없었으며 거의 무시되었습니다.

 

1337년부터 1453년까지 프랑스와 영국은 영국 왕이 물려받은 프랑스 내 영토의 소유권을 놓고 100년

 

전쟁이라고 불리는 긴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이 전쟁이 프랑스의 승리로 끝나면서 왕이야 말로 프랑스

 

에서 가장 강력한 정치권을 가진 존재라는 것이 확인되었습니다.

 

 

 

몽고인(1206-1405)


몽고인은 중앙 아시아 대초원 지대의 유목민이었습니다. 이들은 목초지를 놓고 서로 싸웠던 사나운 전

 

사들로서 동쪽과 남쪽의 발달된 문명을 침입하곤 하였습니다. 13세기 초, 몽고인들은 통합하여 정복 전

 

쟁에 나섰습니다. 이들은 수천년 전 선조인 흉노족의 자취를 쫓아 세계 최대의 제국을 세웠습니다. 이들

 

이 지나간 자리에 파괴와 전사자의 행렬이 줄지어 이어짐에 따라 몽고인은 "악마의 기수"로 알려졌습니

 

다.

몽고인은 지금의 몽고 지역인 바이칼 호 남쪽의 평야 지대에 거주하였습니다. 제국이 가장 크게 확장 되

 

었을 때는 아시아를 가로질러 유럽 러시아와 발트해 연안까지 그 세력을 떨쳤으며, 소아시아 대부분과

 

지금의 이라크,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티벳, 인도 일부, 버마 일부, 그리고 중국 전체와 베트남

 

일부를 차지했습니다.

 

13세기 초 칭기스 칸('위대한 통치자')이라 불린 테무친이 몽고인을 통일했습니다. 그는 태평양과 대서

 

양으로 둘러싸인 육지를 모두 통치하려는 야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야망을 거의 이루었습니다. 단지

 

25,000명의 군대로 시작한 그는 다른 유목민을 복종시키면서 세력을 넓혀 1211년에 북중국을 공격했습

 

니다. 그리고 1215년 약 3천만명의 중국인이 희생된 전투를 치른 후 베이징을 점령했습니다. 그런 다음

 

서쪽으로 눈을 돌려 1220년에는 실크로드에 있는 무역 도시인 부카라를 점령했습니다. 이 도시는 완전

 

히 잿더미가 되었으며 주민들 모두가 살해되었습니다.

 

1227년 칭기스 칸이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오가타이가 북중국을 완전히 점령하고 유럽으로 진격했습니

 

다. 1240년에 키예프를 파괴한 오가타이는 계속해서 헝가리로 진군했습니다. 1241년에 오가타이가 사

 

망하자 후계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전군이 철수했고, 몽고 통치자들이 중동과 남중국에 총력을 기울

 

임에 따라 유럽 국가들은 피해를 면할 수 있었습니다. 칭기스 칸의 손자인 훌라구는 이슬람의 "암살 비

 

밀 결사단"을 모조리 없애고 1258년 이슬람의 수도 바그다드를 점령했습니다. 이때 이 도시의 10만 주민

 

대부분이 살해당했습니다. 하지만 1260년 이집트의 노예병(상류층의 노예 전사)으로 구성된 이슬람 군

 

대가 몽고군을 무찔렀으며 그날로 이슬람과 이슬람 성지에 대한 몽고의 위협은 종결되었습니다.

 

칭기스 칸의 또 다른 손자인 쿠빌라이 칸은 1279년 중국을 정복하고 원 왕조를 세웠습니다. 1274년과

 

1281년에 일본을 침략하려다 큰 손실을 입고 퇴각하였으며, 1294년 쿠빌라이 칸이 중국에서 사망한 후

 

아시아와 다른 지역에 미치던 몽고의 힘이 점차 쇠퇴하다가 1368년 중국의 명 왕조에 정복되었습니다.

 

1370년대에 자신이 칭기스 칸의 후예임을 주장하는 투르크족 계통의 한 몽고 전사가 중앙 아시아의 몽

 

고 국가에서 지도력을 장악하고 몽고 제국을 복원하려고 하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티무르 랭(유럽에는

 

"절름발이" 티무르, 타메를란으로 알려졌으며 아시아에는 "파괴의 왕자"로 알려짐)이었습니다. 10만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그는 러시아와 페르시아로 진격하였으며 주로 다른 이슬람 국가들과 싸웠습니다.

 

1398년 델리를 점령한 그는 10만여 주민을 살해하였으며, 서쪽으로 돌격하여 시리아에서 이집트의 노

 

예 기병대를 무찔렀습니다. 1402년 그는 현재의 앙카라 부근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대군을 무찔렀으며,

 

오스만 제국을 완전히 파괴시키기 직전 갑자기 방향을 돌렸습니다. 1405년 중국으로 진군 도중 사망한

 

그는 생전에 안정된 통치권을 확립하기 보다는 부를 획득하는 것을 더 좋아한 대량 살육자였습니다. 이

 

때문에 사망 후 아들들이 물려받은 거대한 제국은 곧 분열되었습니다.

 

 

 

사라센족(613- )


사라센이라는 이름은 원래 현재의 시리아에서부터 사우디아라비아에 이르는 사막 지역의 유목민을 이

 

르는 말이지만, 좀더 폭 넓게는 중세의 모든 아랍인을 지칭하는 말입니다. 7세기 경 갑자기 출현한 사막

 

의 유목민들은 한 세기 반이 지나자 원대한 제국을 세웠습니다. 이들은 신앙과 높은 사기를 바탕으로 하

 

여 정복 전쟁을 치루었습니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가르침에 따라 전 세계의 종교 및 정치를 변화시킨다

 

는 기치 아래 이러한 전쟁을 단행한 것이었습니다.

 

613년까지 예언자 마호메트는 이슬람이라는 새로운 종교를 전파시켰습니다. 고향인 메카에서 무시를

 

당하고 메디나로 쫓겨간 마호메트는 그곳에서 강력한 지지를 얻은 다음 메카를 공격하여 점령했습니다.

 

632년 그가 사망한 후 그의 가르침을 모아 이슬람교 성경인 코란이 만들어졌으며, 634년 그의 추종자들

 

이 지하드라는 성전(聖戰)을 시작하여 5년만에 이집트, 팔레스타인, 시리아를 점령했습니다. 이들은 유

 

태교와 기독교를 허용하였기 때문에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종교적 박해를 받던 이 지역을 쉽게 정복할

 

수 있었습니다.

 

이후 60년 내에 이슬람교도는 서쪽으로는 북부 아프리카로부터 동쪽으로는 페르시아까지 장악하였습니

 

다. 그리고 8세기 초반, 탕헤르의 사라센족은 스페인을 침입하여 로마 멸망 이후 그곳에 세워졌던 서고

 

트 왕국을 정복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소아시아를 차지하고 수륙 양면 공격을 단

 

행하여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강력한 성벽 때문에 육상 공격은 실패하였으며 사

 

라센 해군도 대패했습니다. 그리고 서쪽으로는 프랑크 왕국의 찰스 마텔이 732년 프와티에 전투에서 사

 

라센의 현 프랑스 침략을 중단시켰습니다.

 

서쪽으로의 확장에 실패한 이슬람군은 동쪽으로 눈을 돌려 750년에 인더스 강 유역을 점령하고, 인도

 

북쪽에서부터 중앙 아시아를 거쳐 중국 국경 지대까지 진출했습니다.

 

656년 이슬람 세계는 수니파와 시아파 간의 내전에 들어갔습니다. 이들은 누가 칼리프(마호메트의 계승

 

자)가 되어야 하는 지와 코란 해석의 차이 등을 비롯한 몇 가지 점에서 의견 차를 보였습니다. 60년에 걸

 

친 전쟁 결과, 이슬람 세계는 분열되었으며 일부 지역은 수니파가(스페인), 그리고 다른 지역은 시아파

 

(이집트와 현재의 이라크)가 통치하게 되었으며, 이후 이 두 이슬람 국가는 서로 다른 국가로서 행동하

 

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이슬람교도가 지배하는 스페인은 중세 초기에 유럽 최대 국가 중 하나로 성장하였습니다. 이슬람교도,

 

유태인, 그리고 기독교도가 상대적으로 조화를 이루면서 함께 살았습니다. 이러한 다양한 영향 속에서

 

화려한 문화가 만들어졌고, 예술과 건축술 및 학문이 꽃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1000년이 되자 스페인 내

 

적대 파벌 간에 분열이 일어나고, 이 내전으로 작은 기독교 국가였던 카스티야와 아라곤이 서서히 이베

 

리아 반도를 재정복하기 시작해 1492년에 반도 전체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소아시아와 중동 지역은 11세기 초, 이슬람교의 투르크족에게 정복되었습니다. 이 투르크족은 기독교도

 

의 팔레스타인 성지 순례에 대해 비관용적인 정책을 취했으며, 따라서 이 지역으로의 이동이 매우 위험

 

해졌습니다. 이때 비잔틴 제국이 도움을 요청하자 유럽에서 일련의 십자군이 공격을 개시하여 투르크족

 

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되찾았습니다. 그리고 이 지역의 독립 이슬람 국가들은 1차 십자군 원정에서 팔

 

레스타인과 지중해 동부 해안 지역을 잃었습니다. 하지만 12세기 말경, 위대한 사라센 지도자 살라딘이

 

이집트, 시리아, 그리고 작은 나라들을 통일시킨 다음 예루살렘을 되찾았습니다.

 

이 이슬람 국가들은 중세 이후에도 계속해서 독립 국가로 남아 있다가 현재 중동 및 북아프리카의 아랍

 

국가들로 발전했습니다. 하지만 15, 16세기 유럽 국가들이 아시아로의 자체 무역로를 열자 이들 국가는

 

경제적인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튜턴족(919-1250)


독일의 기원은 80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인 칼 대제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칼 대제가 죽자 제국이 셋

 

으로 분열된 후 다시 둘로 나누어져 서쪽의 프랑크 왕국은 프랑스가 되었으며, 동쪽의 왕국은 독일이 되

 

었습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라는 칭호는 10세기 경 칼 대제의 일족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이 집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919년 색소니의 공작인 헨리가 그를 지지하는 공작들에 의해 독일의 왕으로

 

선출되었으며, 962년 그의 아들 오토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오토 1세가 통치한 신성 로마 제국은 독일 평원을 거쳐 북으로는 발트해까지, 동으로는 현재 폴란드 일

 

부 지역까지 그리고 남으로는 현재의 스위스, 오스트리아 그리고 북부 이탈리아까지 확대되었습니다.

 

처음부터 독일 황제들은 알프스 산맥으로 분리된 독일과 이탈리아라는 완전히 다른 두 지역을 통치해야

 

한다는 어려운 문제에 직면했습니다.

 

하지만 신성 로마 제국은 주요 구성 국가인 독일과 이탈리아가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기 때문에 처음에

 

는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당시 독일인들은 아직 야만성을 거의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칼 대제에

 

게 정복된 지 불과 100여년 밖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따라서 이들은 이탈리아 문화와 기술,

 

무역으로부터 상당한 이익을 얻었고, 이탈리아는 신성 로마 제국이 보장하는 상대적인 평화와 안정을

 

환영했습니다. 이탈리아는 거의 500여 년간 계속해서 침입을 받아왔던 것입니다. 제국의 보호 덕분에

 

로마 교황권을 보호할 수 있었으며, 이탈리아의 도시 국가들이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제국 군대의 일부는 제국에 봉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교회 토지의 소작인들 중에서 뽑았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중요한 부대는 농노 군대인 미니스트리얼스였으며 기사와 같이 최고의 훈련과 장비를 지급받

 

지만 이들에게는 자유가 없었습니다. 이들 군대는 지방 귀족과 소작농의 반란이나 간섭을 진압하거나

 

북쪽의 바이킹족과 동쪽의 마자르족의 침입을 막는 역할을 했습니다.

 

독일은 경쟁 관계에 있는 여러 개의 독립 공국이 모여있는 형태였으므로 독일의 무사들은 그 기량이 매

 

우 뛰어났으며, 용병으로 고용되어 십자군 원정에 파견되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독일 무사들이 바로 튜

 

턴 기사들로써 십자군 원정에 힘을 얻어 성전(聖戰)을 수행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은 발트 해 지역을

 

정복하여 기독교를 전파시켰지만, 결국 페이퍼스 호수 전쟁에서 알렉산더 네브스키에게 패함으로써 이

 

들의 활동은 중단되었습니다.

 

주교 임명을 놓고 벌어진 황제와 교회 간의 대립으로 인해, 독일과 이탈리아에서 황제의 통치권이 약해

 

졌습니다. 로마가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일시적으로 파문시키고 로마와의 공공연한 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황제의 권한은 땅에 떨어졌습니다. 독일의 지방 군주들은 자신의 봉토를 관리하고 황제의 간섭이

 

나 도움을 받지 않은채 바이킹족의 침입을 물리쳤습니다. 한편 이탈리아에서는 도시 국가들이 연합하여

 

롬바르드 동맹을 결성하고 황제를 인정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독일과 이탈리아의 정치 권력이 황제에게서 지방 군주와 도시 국가로 넘어갔으며, 농노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주둔한 도시와 성을 점령하고 자유를 선언했습니다. 이탈리아를 되찾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는 동안 독일의 지방 군주들에게 더 많은 특권이 돌아갔습니다. 13세기 중엽이 되면 신성 로마 제

 

국은 명목상으로만 존재하게 되었으며, 20년간 왕위가 비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군주들은 자신의 봉토

 

만을 관리하였으며,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은 독일 통치자를 원치 않았고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을만큼

 

강력해졌습니다.

 

중세 후반에도 독일의 군주들이 황제를 선출했지만 이들은 명목상으로만 군림했을 뿐 일족의 사유지만

 

을 통치하는데 그쳤습니다. 그리고 이후 수세기 동안 독일은 유럽에서 그리 큰 힘을 차지하지 못했습니

 

다.

 

 

투르크족(1030- )


투르크라는 이름은 중동 지역의 서로 다른 두 이슬람 그룹, 즉 셀주크 왕조와 오스만 왕조를 일컫는 말

 

입니다. 셀주크 왕조는 카스피해 근처 스텝 지역의 유목민 출신으로, 10세기 경 이슬람교도가 되었습니

 

다. 약 7만여 명의 셀주크 투르크족들이 노예로 팔려가 바그다드의 칼리프(마호메트의 계승자)의 이슬

 

람 군대 사병이 되었습니다. 이 노예들이 이슬람의 수니파가 되었습니다. 1055년에 이들이 바그다드 칼

 

리프 배후에서 실권을 장악했고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했으며, 그 지도자가 "권력을 가진 자"라는 의미의

 

"술탄"이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습니다. 1100년이 되면 이들은 대부분의 아나톨리아(비잔틴에서 빼앗음)

 

지역, 팔레스타인, 페르시아만 주변 지역, 아라비아 성지, 그리고 동쪽으로 사마르칸트까지 지배하게 되

 

었습니다.

 

1071년 셀주크 투르크족은 현재의 터키인 말라저트에서 비잔틴 군대에 맞서 승리하면서 아나톨리아 대

 

부분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거의 동시에 이집트의 이슬람 지도자로부터 예루살렘을 빼앗는 데도

 

성공했습니다. 이 두 사건은 비잔틴 제국, 로마 교황, 그리고 유럽에 충격을 주었으며 그 결과 200년간

 

계속된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습니다.

 

팔레스타인 지배권을 회복했다는 점에서 궁극적으로 성공하긴 했지만 반복되는 십자군과의 전쟁으로

 

셀주크 투르크족은 많이 지치게 되었습니다. 동시에 이슬람의 이교 집단인 암살 비밀 결사단의 활동으

 

로 위협을 받았으며, 또한 수피 신비주의가 유행함에 따라 내부적으로는 자기 반성의 시기에 들어 갔습

 

니다. 이렇게 극도로 피로에 지쳐 나약해져 있는 동안 갑자기 몽고족의 침입을 받자 셀주크 투르크족은

 

붕괴되었습니다. 1258년 바그다드가 침입자의 손에 떨어졌으며 셀주크 제국은 사라졌습니다.

 

아나톨리아(옛 소아시아, 현재의 터키)의 이슬람교도들은 14세기 초 술탄 오스만 1세에 의해 통일된 후,

 

그를 기념하여 "오스만리" 또는 "오스만"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오스만 투르크족은 힘없이 무너지고

 

있는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지하드(성전:聖戰)를 맹세하고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여 발칸 지역과

 

그리스로 출정하였습니다. 1389년 세르비아를 무찔렀으며, 1396년 헝가리의 "십자군 전사"군을 패배시

 

켰습니다. 오스만의 성공은 티무르가 이끈 몽고족에 의해 일시적으로 중지되지만 티무르가 군대를 철수

 

시킴에 따라 오스만 제국은 다시 회복되었습니다.

 

술탄 메헤드 2세("정복자")는 1453년 5월 29일, 결국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습니다. 70개의 대포로 8주

 

에 걸쳐 공격한 결과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이 무너졌으며, 1만5천여명의 재니세리가 성공적인 급습을 감

 

행했던 것이었습니다.

 

오스만 왕조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후 유럽으로 진군하여 일종의 역 십자군 원정을 단행했지만,

 

1456년 헝가리 군대가 베오그라드에서 이들을 물리쳤습니다. 1529년과 1683년에 비엔나를 공격했으나

 

실패했습니다. 16세기 절정기의 오스만 제국은 그리스와 발칸 지역을 포함해 북으로는 유럽의 부다페스

 

트와 오데사까지 그 세력을 미쳤으며, 흑해 주변 지역과 소아시아, 레반트, 아라비아, 이집트, 북아프리

 

카 대부분 지역을 차지했습니다. 그리고 20세기 들어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할 때까지 세계적 강대국

 

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바이킹족(500-1100)


바이킹('북쪽 사람'이라는 뜻)은 유럽을 공포에 떨게 하여 로마인이 게르만족이라고 부른 마지막 야만족

 

입니다. 스칸디나비아 지역에서 확산되기 시작한 바이킹족은 드래곤 보트(선수와 선미에 조각된 용 머

 

리 때문에 그렇게 불렸음)를 타고 바다를 건너와 공격하였습니다. 이들은 처음에는 급습을 단행하여 무

 

장 저항이 이루어지기 전에 약탈한 후 철수하는 정도에 그쳤으나 점점 대담해져, 급기야는 유럽의 일부

 

를 차지하고 정착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종교가 없었기 때문에 성직자들도 가차없이 죽였으며, 교회의 소유물도 주저하지 않고 약탈하였

 

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무자비성과 흉악성 때문에 이들은 지옥에서 온 악마로 비유되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이들은 훌륭한 장인이자 뱃사람이었고, 탐험가였으며 무역 상인이었습니다.

 

바이킹족의 고향은 노르웨이, 스웨덴, 덴마크였습니다. 이들과 자손들은 일시적이긴 하지만 발트 해안

 

대부분 지역과 내륙 러시아, 프랑스의 노르망디, 잉글랜드, 시실리, 남부 이탈리아, 팔레스타인의 일부

 

를 통치한 적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825년 아이슬랜드를 발견하고는(아일랜드의 수사가 이미 그곳에 있

 

었음) 875년에 그곳에 정착하였으며, 985년에는 그린랜드를 식민지로 개척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이 콜

 

럼버스의 항해가 있기 500년 전에 뉴펀들랜드에 도달하여 북미 일부 지역을 탐험했다는 강력한 증거도

 

있습니다.

 

바이킹족은 6, 7세기 무렵 발트 해 동부 지역을 급습하여 그곳에 정착하기 시작했으며, 8세기 말경에는

 

현재 러시아의 강 남쪽 유역을 습격한 후 그 길을 따라 방어 요새를 만들었습니다. 9세기 이들은 키예프

 

를 지배하였으며, 907년 8만여 명이 20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습니다. 이 공격으

 

로 비잔틴 황제로부터 매우 우호적인 거래 조건을 얻어 냈습니다.

 

바이킹족은 8세기 말경 처음으로 서유럽 지역을 공격하였습니다. 데인족이 잉글랜드 북동 해안에 위치

 

한 린디스판의 유명한 수도원을 공격하여 약탈한 것을 시작으로 서유럽 공격이 계속되었습니다. 잉글랜

 

드, 프랑스 및 독일을 상대로 한 약탈의 규모와 빈도가 점점 증가하여 침략 수준에 이르게 되었으며, 차

 

후의 약탈을 위한 근거지로 삼기 위해 거류지까지 만들었습니다. 프랑스 북서부의 바이킹족 거류지가

 

노르망디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며, 그곳 거주자들은 노르만족이라고 불렸습니다.

 

865년, 대규모 덴마크 군대가 잉글랜드를 침입하여 2세기에 걸쳐 잉글랜드 대부분 지역을 지배했습니

 

다. 1066년 이전에 잉글랜드 전체를 지배한 마지막 왕 중 한 사람이 카뉴트 왕으로, 그는 덴마크와 노르

 

웨이 왕을 겸했습니다. 871년, 또 다른 대규모 선단이 세느강을 따라 내려와 파리를 공격했습니다. 이들

 

은 2년간의 공격 끝에 엄청난 현금을 받고 프랑스 서부 일부 지역을 약탈할 수 있는 허가를 얻은 후에야

 

돌아갔습니다.

 

911년 프랑스 왕은 기독교로 개종하고 약탈을 중지하는 대신 노르망디의 바이킹 우두머리를 공작으로

 

봉했습니다. 이후 노르망디 공국에서 1066년에 잉글랜드를 정복한 윌리엄 1세, 1060년부터 1091년 사

 

이에 아랍으로부터 시실리를 빼앗은 로베르 기사르 및 그의 일족, 그리고 예루살렘 십자군 왕국의 왕인

 

볼드윈 1세를 비롯해 무수히 많은 전사들이 배출되었습니다.

 

10세기 말이 되면서 바이킹의 기습이 점차 없어졌는데, 이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가 왕국이 된 후

 

왕들이 국가 운영에 전념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의 확산으로 옛 무종교 전사들의 가치관은 약

 

화되어 결국 사라졌으며, 노르웨이 또한 자신들이 침입한 문화에 흡수되었습니다. 잉글랜드 거주민과

 

정복자들은 영국인이 되었으며 노르만은 프랑스인이 되었고 러스인은 러시아인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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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큐핏 | 작성시간 06.11.27 호오... 역사시간에 맨날 졸았던 저로서는 상당히 흥미있는 내용이네요 감사합니다. ^^
  • 작성자이건우ㄷ | 작성시간 06.11.27 70개의 대포로 8주동안 성벽을 부수고 1만5천명의 예니체리가 급습을 하였다...
  • 작성자혈마[血魔] | 작성시간 06.11.27 타메를랑이 티무르란 말이었단 말인가 ㅇㅅㅇ)?!
  • 작성자시작형샤아 | 작성시간 06.11.28 너무 영문위주로 되어있네요.
  • 작성자농노출신병사 | 작성시간 08.12.14 몽골부분에서 3천만명이죽고 베이징이 점령됐다라는 부분이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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