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에리니 형제들이 마르세유를 지배하는 동안 코르시카인들은 이탈리아 마피아 및 미국 마피아와 연합하여 1972년까지 20년간 미국의 헤로인 시장을 장악했으며, 미국 내의 소비량 중 80% 이상을 공급했다. 이들이 미국으로 보낸 헤로인은 헤로인 제조소에 보내져 소매나 거리 판매에 맞게 희석되고 재포장되었다. 1970년대 이들이 장악한 거리와 주변 지역은 ‘플레전트 에비뉴 커넥션’이라 불려지며 헤로인 도매시장의 역할을 하였다. 이곳의 건물들은 대부분의 헤로인 희석 작업장이었으며, 건물 안에서는 무장한 경비원의 감시 속에 벌거벗은 여자들이 헤로인을 희석하고 무게를 달아 작은 소매용 봉투에 넣는 작업을 했다. 이 소매용 헤로인은 거리에서 5달러에 팔렸다. 건물 밖에서는 성인 범죄조직을 흉내내는 십대 운반책들이 구매자의 차량에 순수한 헤로인을 옮겨 싣고 있었다. 이들은 1주일에 2,000달러 정도의 많은 돈을 받았다.
헤로인 운반이 이렇게 공공연하게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뉴욕경찰국 특별조사단(SIU)의 부패한 경찰들이 묵인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플레전트 에비뉴 커넥션은 특별조사단을 배제한 상태에서 특별히 구성된 경찰과 연방정부의 대대적인 수사에 의해 1973년 폐쇄되고 말았다.
이와 함께 미국 마피아 일부는 시실리안 커넥션으로부터 헤로인을 직접 수입했다. 그리고 시실리 마피아의 전통주의자들과 새로운 현실주의자들 사이에 불화가 생기자 이 틈을 이용해 새로운 헤로인 조직을 꿈꾸는 마피아 일당이 탄생하기도 했다.
헤로인의 확산으로 인해 프랑스에서도 중독률이 급증했고, 미국 경찰은 닉슨 대통령에 의해 주도된 마약과의 전쟁에 고무되어 1971년부터 마르세유 작전을 대폭 확대시켰다. 이 작전에서 엄청난 양의 마약이 압수되었고 수많은 밀거래꾼들도 체포되었다. 1972년에는 세사리에 의해 운영되던 여섯 개의 정제소가 적발되었고, 같은 해 터키 당국은 미국 정부의 압력에 의해 양귀비 재배를 금지했다. 이런 일련의 조치들은 마약과의 전쟁에서 중요한 승리였다.
이렇게 되기까지는 복잡한 국제적 관계가 얽혀 있었다. 터키에서는 수세기 동안 양귀비가 재배되었으며, 정부가 강제적인 구매 계획을 도입한 1923년까지 별다른 제한 없이 수출될 수 있었다. 1964년에는 비록 특정 지역에서만 양귀비를 재배할 수 있도록 법령을 정했지만, 실제로는 별다른 제약 없이 생산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당시 터키는 국제협약에 의해 의료용 아편을 수출할 수 있는 소수의 국가들 중 하나였다. 그래서 양귀비 재배 농부들은 정부가 지정한 양보다 훨씬 많은 양귀비를 재배한 뒤, 밀매업자들에게 높은 가격에 판매하고 있었다.
미국 정부는 오래 전부터 터키산 아편이 미국으로 밀수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밀매조직을 뿌리 뽑느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에 미국 정부는 터키로 하여금 아편을 생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했다. 미국은 군사와 경제적인 원조를 줄이겠다는 위협을 가해 프렌치 커넥션의 루트를 차단했다. 그리고 차츰 아편 생산을 줄이고 양귀비 농장을 완전히 폐쇄하도록 요구하였다.
이 협상으로 터키는 아편 생산을 포기하는 댓가로 미화 3,570만 달러를 미국으로부터 받았다. 이 액수는 터키가 요구한 것의 10분의 1 수준이었고, 합법적으로 아편을 교역했을 때 발생하는 수익에 비하면 아주 적은 수준이었다. 미국은 터키와 협상을 통해 마약을 퇴치하기 위해 노력하는 도덕적인 자부심을 얻었고, 그 일로 닉슨 대통령은 정치적인 명성을 얻었다. 터키에서 양귀비 생산이 전면 금지된 지 2년 후, 터키의 국립전매공사는 양귀비 재배를 허용하는 법을 다시 정했다. 하지만 양귀비 시장은 예전 같지 않았다.
터키의 양귀비 재배가 금지된 기간 동안 프렌치 커넥션의 힘도 점차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마피아와 코르시카 갱들은 1970년대 후반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전역에서 헤로인 정제소를 설립해 거래를 다시 시작했지만, 미국 시장에서 그들의 지배력은 예전에 비해 훨씬 약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