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국의 일원이었던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에 양군을 주둔시키기로 합의했다. 그 경계는 38도선, 이미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소련은 8월 초순에 한반도로 진격하기 시작했고, 만주를 비롯해 한반도 북부로 신속히 진군했다.
소련이 평양에 도착한 것은 8월 26일, 평양에 소련군 사령부를 설치했다. 9월 9일에 한반도에 첫발을 내딘 미군과는 한 달 이상의 차가 났음에도 그들은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그들은 러일전쟁 이전의 기득권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최우선이었다. 남사할린과 부속 도서의 환원, 홍콩과 대련의 자유항 인정, 여순의 소련군항으로의 환원이었다.
그밖에도 한반도 38선 이북지방을 차지함으로써 미국으로부터 어떤 대가를 얻는 것을 바랬는데, 어차피 미국에게는 일본의 지배 확보와 한반도의 일부분을 얻는 것이 목표였던 것이었으므로, 수도인 서울을 얻은 미국에게는 그다지 문제가 될 것이 아니었다.
어찌되었던 평양에 진주한 소련군은 첫 포고문을 제시한다. 포고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조선 인민들이여! 붉은 군대와 연합군 군대들은 조선에서 일본 약탈자들을 축출했다. 조선은 자유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신조선 역사의 첫 페이지일 뿐이다. 화려한 과수원은 사람의 땀과 노력의 결과이다.
이와 같이 조선의 행복도 조선 인민이 영웅적으로 투쟁하며 꾸준히 노력해야만 달성할 수 있다. 일제의 통치하에서 살던 고통의 시일을 추억하자! 담 위에 놓인 돌맹이까지도 괴로운 노력과 피땀에 대해 말하지 않는가?... 이러한 노예적 과거는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진저리쳐지는 악몽과 같은 그 과거는 영원히 없어져버렸다..(이하 생략)"
이렇듯 소련군의 포고문은 소련군이 점령군이 아닌 해방군으로써의 모습을 보이려고 애썼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입장은 8월 8일 소련이 대일전에 참여하면서 극동군 사령관 바실리예프스키가 발표한 호소문에서도 보인다. 호소문의 내용은 소련군의 대일전쟁 참여를 정당화하고, 조선민중이 대일전에 참여할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태도는 9월 9일에 한반도에 진주한 미군과는 완벽하게 상반된 태도였다. 환영하는 조선민중을 총으로 위협사격까지 하면서 진주한 미군의 포고령은 그야말로 살벌한 글일 뿐이었다.
"포고"니, "엄중한 처벌"을 운운한 이 글은 조선민중으로부터 앞으로 미군정이 결코 순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예고한다. 비록 같은 점령국이라고 하지만 소련군정은 북한 민중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3년 동안 남한의 모든 것을 처리했던 미군정과 달리 소련군정은 가급적 조선민중 스스로의 힘으로 조선 국가를 건설하도록 힘을 쏟았고,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