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의 돌격이 실패한 후 일본군 지휘부는 러시아군의 보루에 보다 더 접근하여 유리한 출발진지를 확보한다는 차원에서 대규모의 지하갱도작업에 의존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갱도전쟁이라 명명되어지는 새로운 시기이다.
갱도전에 착수한 일본군의 행동은 두 가지 측면에서 설명된다. 즉 주요 보루의 밑으로 지뢰매설용 갱도를 굴착하는 것과 그것을 폭파하여 상대의 방어망을 깊숙하게 돌파할 수 있는 통로를 육군에게 제공하는 것이었다. 갱도전과 동시에 일본 포병은 강력하고 체계적인 포격으로 요새의 보루를 파괴하고 수비대에게 가능한 한 최대의 인명피해를 주어야 했다. 새로운 돌격전은 그 이후에 실행될 예정이었다.
제3차 돌격전이 중단된 직후, 일본군 포위포의 상당수가 러시아군의 보루라인에 더 접근했다. 10월 19일 밤 12인치 해양포 6문으로 구성된 포대가 설치되었으며, 350㎜ 구포 2문이 추가 배치되었다. 야전포병 소속의 포병중대가 약 1㎞의 간격으로 보루라인을 따라 배치되었다. 돌격전으로 점령한 들린나야 산을 비롯한 고지의 요새와 교통참호에는 포격을 교정하기 위한 관측소가 배치되었다. 10월 20일부터 포대, 요새의 보루, 뤼순 시와 항구에 대한 강력한 포격이 시작되었다. 포병이 포격으로 항포격용보루 내부의 구조물을 파괴하는 동안 공병은 항포격용보루의 굴강을 점령하기 위한 작업과 그 굴강을 통한 이동로 구축에 착수했다.
뤼순 근교의 일본군 포위포
제3차 돌격이 시작될 당시 수비대의 식량사정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육류가 완전히 소비되어 9월서부터 병사들에게 말고기가 지급되었지만 그조차도 일주일에 2회뿐이었는데, 식량준비를 위한 시기를 놓쳐버렸기 때문이었다.
계속된 전투와 포격, 적에 의해 파괴된 방어구조물을 복구하기 위한 고된 작업 그리고 조악한 식량사정 등은 대부분 환자였던 사병과 장교들을 지치게 만들었다. 병원과 입원시설을 부상자와 환자를 모두 수용할 수 없었으며, 의사와 요양소, 의료장비, 응급치료시설 그리고 의약품 등의 부족으로 인하여 의료업무의 개선을 기대할 수 없었다.
일본군의 포격으로 폐허가 된 여순시내
포격으로 지붕이 무너진 시내 레스토랑
요새는 심각하게 파손되었으며 대부분의 포대와 대포가 사용불능 상태였다. 현실적으로 내항에 봉쇄되어 있었던 군함 역시 일본군의 계속된 포격으로 매우 비관적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일본군의 지하갱도작업에 대항한 러시아군의 적극적인 항갱도작업은 보루를 점령하려는 일본군의 계획을 여러 차례 무산시켰다. 당시 일본군은 참호 내에서 밀집된 형태로 러시아군으로부터 약 30보의 거리까지 접근했다.
당시 갱도 굴착의 모습
정확히 말하자면 제3차 돌격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갱도전쟁이 있었다. 그러나 본격적인 갱도전쟁은 10월 14일 항포격용보루 №.Ⅱ의 전방에서 러시아군의 항갱도에 의해 일본군의 갱도가 폭발한 사건에서부터 시작된다. 갱도전쟁은 요새가 함락되는 바로 그 순간까지 계속되었다. 일본 공병은 바위가 많은 토양에서도 항포격용보루 №.Ⅱ와 Ⅲ를 향하여 서서히 갱도를 굴착하여 보루를 폭파시키려 했다. 이와 동시에 일본군은 203고지를 목표로 하여 평행호와 근접갱도작업에 착수했다. 영국의 전쟁참관인 바틀렛은 일본 공병을 이렇게 묘사햇다.
한달 내내 좁은 콘크리트 밀폐실 안의 혼탁한 공기와 적군에 의해 파괴될 수 있다는 끊임없는 공포 속에서, 작렬하는 수류탄 속에서, 적의 탄환과 돌격에 의한 죽음이 공포 속에서, 세계와는 동떨어진 곳에서, 일본인들은 지하의 구조물로부터 집요한 적을 물리치기 위해 투쟁하고 있었다.
항포격용보루의 수비대는 일본군의 갱도작업을 적극적으로 방해했다. 일본군의 갱도에 대응하는 항갱도가 굴착되었다. 제3차 돌격전 이후 항포격용보루 №.Ⅱ와 Ⅲ 및 보루 №.3에서부터 항갱도가 굴착되었다.
11월 1일 항포격용보루 №.Ⅱ 근처의 항갱도가 폭발했다. 이 폭발은 성공적이어서 상기 보루를 향해 굴착되던 일본군의 모든 지하갱도가 파괴되었다. 다음날 같은 보루의 다른 방어구역에서 갱도가 하나 더 파괴되었다. 그러나 처음처럼 성공적이지 못해서, 이 폭발로 요새 엄폐호의 후방장벽은 물론 항갱도의 입구가 드러났으며, 마침 교통참호를 거치는 이동로를 굴착중이던 일본군이 그 입구를 통해서 즉시 침입해 들어왔다.
보루 밑으로 굴착된 땅굴을 공격하는 러시아 군
갱도 폭발로는 적을 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이 사건으로 밝혀짐에 다라 보루 №.3에서는 항갱도 굴착작업을 중단했다. 대신 일본군이 갱도작업을 계속하지 못하고 보루 №.3을 점령하기 곤란하도록 항갱도의 구멍을 막고 보루의 엄폐장치를 돌과 쇄석 등으로 채운 후, 그 위에 콘크리트를 바르도록 결정했다.
그러나 항갱도를 봉쇄하는 일이 폭발물과 참호용 공구의 부족으로 매우 곤란해졌다. 이에 러시아군이 내린 대안적 결론은 일본군이 항포격용보루를 공격할 때 폭파시킬 지뢰를 매설하는 이 항갱도를 이용하고, 교통로와 참호의 가로막이(적군의 종사(縱射)로부터 아군을 방어하기 위하여 흙이나 돌로 돌출되게 구축된 참호나 교통로의 가로막이)를 구축하여 그곳에 지뢰를 매설한 후, 보루를 방어하다가 후퇴할 때 그 지뢰를 폭파한다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항포격용보루 №.Ⅱ와 Ⅲ 사이를 돌파할 경우에 대비하여 그 후방에 제2의 방어라인을 마련했다.
러시아군은 일본군의 포위작업에 보다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흙주머니를 소각하기 위한 폭발물로 충전된 소이폭탄, 수류탄 그리고 압축 솜화약 등을 투척했다. 일본군은 불붙은 흙주머니와 수류탄의 도화선의 불을 끄기 위해 특수부대를 조직했다. 러시아군은 일본군이 투척하는 수류탄을 역이용하는 데에 촘촘한 철조망을 활용했다.
이 당시 러시아 포병은 일본군 교통참호를 파괴하고 11인치 유탄포 및 적 포병과의 포격전을 벌였으며, 요새 수비대의 기습적 침공을 지원하거나 적 병력을 살상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각 포대마다 일정한 포격대상이 지정되었다. 항돌격포병 및 야전포병의 주임무는 적군의 살상과 참호의 파괴였다. 대구경포로 구성된 요새포병은 일본군 포대를 압도해야 했다. 일본군의 장거리포를 압도하는 임무는 해안전선의 포병과 분함대 소속의 전함에게 부여되었다. 요새포병은 일본군이 건설한 포위구조물을 파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갱도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분함대 소속의 수병들도 보루수비대에 큰 도움을 주었다. 그들은 군함의 어뢰발사장치를 일본군의 지상진지 포격에 알맞게 개조했으며, 간혹 150㎏이 넘는 구형기뢰(求刑機雷)를 산 아래로 굴러 떨어뜨려서, 일본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포드구르스키 해군 중위는 보루로부터 매우 가까운 곳에서 포위작업중이던 일본군에게 초화면 기뢰를 투척할 수 있는 특별한 장치를 제작했다. 10월 28일 보루 №.3에서 이 장치가 최초로 시험 가동되었는데, 16㎏의 기뢰를 투척하면서도 거의 소음 없이 작동했다. 따라서 보루의 방벽에서 포위작업중이던 일본군에게 막대한 손실을 주었다. 11월 9일 203고지의 일본군지역에 6발의 기뢰를 투척했다. 매우 강력한 폭발로 혼란에 빠진 일본군은 사상자를 버려둔 채 도주했다.
요새수비대와 분함대 소속 수병의 적극적인 대응으로 일본군의 지하갱도작업이 현저하게 장애를 받고 있었으며, 경우에 따라서는 일본군의 모든 노력이 수포로 돌아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군은 11월에 항포격용보루 №.Ⅱ와 Ⅲ의 참호를 점령했으며, 그것을 지나는 이동로를 구축하여 보루의 굴강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일본군은 보루 №.Ⅱ의 흉장 밑에 언제든지 폭파할 수 있는 지뢰를 매설했다. 11월 4일에는 보루 №.3의 측면 방어시설을 파괴했으며, 7일에는 보루 №.Ⅱ의 측면 방어시설을 파괴했다.
노기 장군의 육전대에 제7사단이 편입되었으며, 공병부대와 포위포병도 보강되었다. 이전의 전투로 손실된 병력이 충원되었다. 부대의 병력 편성이 거의 완편에 이르면서 제3군의 병력이 10만 명에 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