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각 분산 배치된 러시아군 독립분견대에게는 순수한 방어임무가 부여되었다. 노기 장군의 부대를 상대하기 위해 집결된 러시아군의 주력은 전투에 투입되지 않았다. 쿠로파트킨은 112개 대대와 대포 366문 이상을 집결시킨 뒤에야 공격에 나선다는 계획을 세웠지만 그만큼의 군사력을 예정된 기간 내에 집결시키지 못했다.
2월 20일 각기 다른 연대에서 급조된 12개 분견대를 통합한 3개의 공격종대(게른그로스, 토포르닌, 체르비츠키)가 편성되었다. 게른그로스는 우익종대를 담당했으며, 제1시베리아군단, 비테의 분견대, 바실리예프의 혼성사단 등으로 편성되었다. 중앙종대는 토포르닌이 담당했다. 본 종대는 일본군이 후퇴하기를 기다리다가, 일본군의 후방을 위협하면서 공격하기로 되었다. 체르비츠키는 여러 사단에 소속된 연대병력이 로추린, 루사노프, 페트로프 등의 분견대로 재집결되어 구성된 좌익종대를 지휘했다. 그 외 20개 대대로 구성된 게르셸만과 쿠즈네초프의 분견대는 훈허(渾河) 강 좌안에 포진했다. 8개 대대로 구성된 예비대는 가녠펠드의 지휘하에 집결해 있었다.
러일 전쟁 당시 만주로 떠날 준비를 갖춘 일본 의료부대의 모습
부대의 재편성을 마친 쿠로파트킨은 일본군 제3군을 격퇴하여 전선을 강화한다는 계획을 마련했다. 공격시기는 서로 달랐다. 게른그로스의 부대(49개 대대, 대포 115문)가 제1차로 공격에 나섰다. 위 부대가 적에게 주공격을 가하고, 그 성공 여부에 따라 토포르닌의 부대(16개 대대, 대포 48문)와 체르비츠키의 공격종대(34개 대대, 대포 100문)가 공격하기로 약속되었다.
게른그로스의 공격종대는 포병의 공격준비 포격이 있은 후, 공격에 나섰다. 자폴스키의 분견대는 2개 포병중대(대포 16문)의 지원을 업고서 일본군을 공격하여 적 선봉부대를 격퇴했다. 이후 비테와 바실리예프 등 일부 주거지역을 점령 중이던 분견대가 공격에 나섰다. 그러나 다른 지역에서는 대부분의 포병이 지원 포격을 이행하지 않았다. 일본군은 러시아군 지휘부의 우유부단함을 이용하여 보병부대를 한곳으로 집결함으로써 러시아군의 전진을 막을 수 있었다.
다음날 레쉬 대령의 분견대가 공격에 투입되었다. 비테를 비롯한 도브보르-무스니츠키, 자폴스키 및 크루제 등의 분견대는 레쉬 대령의 분견대가 진지를 점령하면 공격에 나서기로 되었다. 공격에 나선 레쉬의 부대가 진지를 점령하자, 일본군은 제1, 제9보병사단을 투입하여 러시아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그곳을 수복했다.
레쉬와 비테, 자폴스키 등의 합동공격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러시아 제2군의 잔여 부대는 그들을 지원하지 않았다. 엄격한 지휘력의 부재로 임시연합군의 통제가 매우 곤란했으며, 따라서 공격도 지체되었다. 단일 참모부도 없었던 데다가 정찰부대 역시 부족하여 우회중인 노기 장군 부대의 군사력이나 이동방향 등에 관한 제대로 된 정보가 부족했다. 합동작전을 지휘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던 카울바르스는 쿠로파트킨의 명령에도 불구하고 공격하지 않은 채 측면방어에만 몰두했다.
일본군 지휘부는 러시아군의 소극적 태도를 이용했다. 오쿠 장군은 전선에서 러시아군을 공격하는 동시에 2개 사단을 훈허(渾河) 강의 우안으로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러시아군의 우측 전황이 점점 악화되었다. 일본군의 우회를 차단하려고 대규모의 군사력을 집결시키려던 러시아군 참모부의 의도는 성공하지 못했으며, 노기 장군의 제3군은 2월 19일에 이미 봉천(奉天) 북쪽의 철도에 약 12㎞의 거리까지 근접했으며, 오쿠 장군의 제2군 역시 봉천(奉天)으로부터 그 정도 거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때까지의 일본군 점령지역이 그렇게 깊지 않았기 때문에 큰 위협이 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군 지휘부의 입장에서는 일본군의 포위작전을 중단시킬 수 있는 단호한 대책을 강구했어야만 했다.
일본군 제2, 제3군이 러시아군의 우익을 포위하면서 성공적으로 우회할 동안 일본군 제, 제4군은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며 러시아 제1군과 제3군을 우익으로부터 유인했다. 만약 러시아 제2군이 전황을 복잡하게 만들면서 일본군 2개 군의 압박 하에 보다 더 우익을 접었더라면, 제1군과 제3군은 좌익으로부터 러시아 전선을 포위하려 했던 일본군 제5군의 공격을 물리치고 자신의 진지를 고수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자신의 포위영역을 잃어버리고 푸슌(撫順, 랴오닝 성 북부에 위치한 봉천에서 약 45km 떨어져 있는 탄광도시) 방향으로 진격할 수 없게 된 가와무라의 부대는 이동을 멈춘 상태였기 때문에 일본군의 포위작전이 실현되기 힘든 상황이었다. 따라서 러시아군의 좌익이 반격에 나섰다면 완전한 승리를 기대할 수 있었을 것이지만, 쿠로파트킨이나 리녜비츠 그 어느 누구도 이런 가능성을 이용하려 들지 않았다.
전투의 주도권은 일본군의 수중에 있었다. 일본군 제3군의 제5 및 제8사단은 아침부터 공격을 개시하여, 저녁 무렵에 목적을 달성했다. 즉 오쿠의 제2군은 정면에서 러시아군의 발을 묶었으며, 노기의 제3군은 러시아군의 모든 전선을 깊숙이 포위하기 위해 기동을 완료했다.
돌격하는 일본군
2월 21일 공격을 계속하려던 카울바르스의 계획은 군사력의 약 1/4만이 공격에 투입되면서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2월 22일 카울바르스는 방어로 전환할 것을 명령했다. 러시아군 지휘부의 우유부단함은 재차 일본군의 이용물이 되었다. 오야마의 예비대(2개 예비여단)로 증원된 노기의 부대는 계속해서 러시아군 후방으로 우회했다. 쿠로파트킨은 일본군이 봉천(奉天)으로 우회할 것에 대비해서 24개 대대, 5개 백인중대 그리고 대포 52문으로 새로운 분견대를 편성했다. 이 분견대의 라우니츠의 지휘 하에 봉천(奉天) 북쪽으로 이동하여 제2군 지휘관에 배속된 후 제2군의 측면을 방어하는 것이었다.
일본군 제2군이 쉼 없이 계속된 수일간의 전투에서 많은 인명피해를 입었으며, 탄약의 대부분을 써버린 상태라서 본연의 임무(러시아 제1군을 정면에 구속시킴으로써 노기의 부대가 러시아군 후방으로 손쉽게 우회하도록 도와주는 것)를 완수하기 힘들었던 만큼 러시아군이 단호하게 군사행동을 취했다면 대승을 기대할 수 있는 상황에서도 러시아군 지휘부는 소극적 방어에 주력했다.
2월 22일 일본군 제3군은 결정력을 보여주지 못했다. 즉, 제1사단은 적과 거의 마주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더디게 이동했으며, 일본 기병대가 철도노반을 파괴했지만 1시간 만에 완전 복구되었다. 당일 일본군은 진지에 주둔하고 있었던 게른그로스의 분견대를 적극적으로 공격했다. 아침부터 시작된 포격은 게른그로스의 분견대가 주둔중인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10시 일본군 제1사단에 소속된 부대는 자폴스키 분견대를 공격했으며, 제7사단은 레쉬의 분견대를 공격했다. 보충병 대대 위주로 편성된 자폴스키의 분견대는 일본군의 강력한 화력 하에서 어렵게 진지를 고수하고 있었다. 러시아군 진지에 대한 포격과 사격이 17시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때까지 일본군 보병은 공격에 나서지 않았다. 방어하고 있었던 러시아군 연대는 일본군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일부 대포를 방치한 채 퇴각했으며, 저녁 무렵 2개 촌락으로부터도 후퇴했다.
같은 날 유후안툰이라는 촌락 근교에서도 토포르닌 장군의 혼성군단과 오시마(大島義昌)의 일본군 제3사단에 소속된 남부(南部辰丙) 여단(본 여단은 유후안툰의 정면에 위치한 지역에 포진하고 있었으며, 36문의 대포가 보강되었다) 사이에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다. 오쿠 장군은 노기의 우회작전을 지원하는 동시에 제5, 제8사단 및 제3사단 소속의 1개 여단을 동원하여 체르비츠키와 게르셸만의 분견대를 공격했다. 제3사단의 나머지 여단, 즉 남부(南部辰丙)의 여단에게는 러시아 제2군과 제3군 사이의 중간지점을 공격하여 둘 사이를 차단하라는 제3사단장의 명령이 하달되었다.
남부(南部辰丙)는 유명한 남부 권총의 설계자로 알려져 있다. 영화 '퍼시픽'을 보면 이 남부 권총을 노획하기 위해 미군들이 아귀다툼을 벌이는 장면이 나올 정도로 2차대전떄 미군에게 남부권총은 독일군의 루거 권총 만큼이나 인기가 있었다. 그러나 실제로 남부 권총은 2차 대전때 사용된 권총 중 가장 안전성이 떨어지는 위험한 권총이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안전장치를 해제하는 과정에서도 오발이 일어나는 경우가 있었다.
유후안툰 진지는 촌락에서 남쪽에 위치한 다면보루까지 이어졌으며, 전투 직전에 진지보강이 이루어졌다. 거주지 역시 방어에 적절하게 설비되었다. 본 진지에는 분견대의 예비대로 선발되었다가 나중에 합류한 1개 연대를 뺀 제25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다.
남부(南部辰丙)는 1개 연대를 북쪽으로 파견하고 다른 1개 연대는 유후안툰 부락으로 파견하여 남쪽으로부터 유후안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는 새벽이 시작되기 훨씬 전에 공격에 나섰다. 일본군은 유후안툰 촌에서 발사되는 대응포격을 받으면서도 야간공격을 실행하여 육박전으로 전투를 종결지었으며, 일부 농가에 남아있던 러시아군도 격퇴했다. 이 외에도 일본군은 유후안툰의 남쪽 중 일부를 점령했다. 토포르닌의 군단에 소속된 부대가 다음날 새벽에 빼앗긴 진지를 수복하기 위해 반격했다. 러시아군의 포격에 남부(南部辰丙) 여단이 막대한 손실을 입었음에도 반격은 실패했으며, 전황은 변하지 않았다.
쿠로파트킨은 유후안툰 촌을 ‘핵심 지역’이라 부르며, 그곳의 방어에 큰 의미를 부여하고, 그곳으로 지원군을 파병하기 위해 일련의 명령을 하달했다. 카울바르스와 게른그로스도 이에 동의했으며, 체르비츠키는 자신의 병력 중 일부를 토포르닌의 지원군으로 파견했다.
유후안툰에 도착한 카울바르스는 토포르닌과 합동으로 유후안툰을 수복하기 위해 반격을 준비했다. 그들은 때맞춰 도착한 예비대를 이용하여 급습했으나, 견고한 구조물 내에 엄폐해 있던 일본군은 소총사격과 수류탄 투척으로 유후안툰을 방어했다. 일본군의 구조물을 파괴하기 위해 포격을 가했지만 이 역시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유산탄만으로는 짚을 섞은 점토와 돌로 만들어진 구조물을 파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후안툰으로 운송된 2문의 피스톤식 대포 또한 아무런 효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유후안툰을 공격한 러시아 분견대의 군사력은 저녁 무렵 35개 대대까지 증강되었다. 러시아군은 어둠이 시작되자 공격을 자제하였으며, 남부(南部辰丙) 여단의 잔여병력은 이를 이용하여 개별적으로 후퇴했다. 쿠로파트킨과 카울바르스는 본 전투에서 승리한 후에도 공격으로 전환하지 않았다.
유후안툰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병력손실은 5,409명(장교 143명, 병사 5,266명)에 달했다. 남부(南部辰丙) 여단은 4,200명의 병력 중 437명만이 탈출하였으나 본연의 임무를 완수할 수 있었다. 즉 본 전투에서 러시아군 35개 대대를 유인함으로써 노기 장군의 이동을 손쉽게 해주었으며, 일본군이 북부전선에서 게른그로스의 선봉대를 격퇴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러시아군 지휘부가 일본군 1개 여단을 상대로 대규모의 군사력을 투입한 이유는 유후안툰 촌의 전략적 가치를 과대평가했기 때문이었다.
유후안툰 전투에서 거둔 부분적 성공으로는 군사력이 부족했던 러시아 제2군의 상황을 개선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우익의 북쪽에 위치한 새로운 진지를 점령했으며, 일본군 제3군은 계속해서 포위작전을 수행했다. 쿠로파트킨은 이런 상황을 고려하여 전선의 길이를 줄이기로 결정했으며, 그런 목적에서 러시아 제1군과 제3군이 2월 23일 아침 훈허(渾河) 강으로 후퇴했다. 그 결과 군사력을 북부전선에 할당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곳의 전투는 거의 종결된 상태였다. 러시아군 이런 이동이 전황을 바꾸지는 못했다. 오쿠 장군의 적극적인 공격이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으나 일부 일본군 부대가 러시아 제2군의 후방을 위협하고 있었다. 러시아군 지휘부가 제2군 소속의 부대로 혼성분견대를 급조하여 수차례에 걸쳐 반격을 시도했으나 일본군의 우월한 군사력에 의해 간단하게 격퇴되었다.
포위되기 전에 후퇴하자. 후퇴 한두번 하는 것도 아닌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