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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 전쟁사]러일 전쟁사 - 74. 봉천(奉天) 전투(6)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2.06.27|조회수730 목록 댓글 0

2월 24일 일본군 제1군은 봉천(奉天)의 동쪽에 위치한 러시아 제1군의 전선을 돌파했다. 러시아 제1군의 방어선 중에서 가장 취약한 지역은 방어병력이 단 9개 중대에 불과했다. 러시아 측은 그곳을 충분하게 답사하지 못했는데, 일본군은 2개 사단이 넘는 대규모의 군사력을 그곳에 집중했던 것이다.

일본군

 

약 12시경 일본군은 러시아군 진지로 접근했다. 일본군 제12사단은 훈허(渾河) 강을 도하한 후, 제2사단과 협동하여 러시아 제4군단(1개 사단을 전열예비대에 파견하여 전력이 약화되어 있었다)의 전선을 돌파했다. 일본군은 12㎞에 걸친 무방비 상태의 전선으로 거칠게 진입하면서 러시아 제1군과 총사령관 사이의 연락이 두절되었다. 러시아 제2군과 제3군은 실로 곤란한 상황하에서 군사행동에 임했다. 러시아 제4군단이 돌파되었다는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던 쿠로파트킨은 봉천(奉天) 근교에서의 방어대책을 고려하지도 않은 채 2월 25일 밤 후퇴하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포복으로 러시아군 진지에 접근하는 일본군

 

2월 26일 아침 일본군 제1, 제3군은 아직 도하하지 못한 일부 러시아군 부대와 수송대열을 중간에서 차단하였으나 대부분의 러시아군은 피해를 입지 않았다. 러시아 제2군과 제3군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 후퇴했다. 일본군이 러시아 제4군단 지역을 돌파함에 따라 러시아군은 지휘부의 명령에 의해 예정되어 있던 퇴각로를 변경해야 했다. 일본군의 공격으로 길을 잃은 러시아의 수송대열은 서로를 앞지르기도 하고, 일부 지역에서는 후퇴하는 보병과 서로 뒤엉키기도 하면서 도로를 가득 메웠다.

봉천 전투 이후 퇴각하는 러시아군. 완전 전의를 상실 한것 같다 .

 

이런 상황에도 불구하고 노기와 구로키의 연합부대는 조직적 추격을 끝까지 수행하지 않았는데, 이것은 일본군 역시 피로에 지쳤고 군사력도 충분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러시아군 잔여부대가 저지전을 펼친 결과이기도 했다. 2월 26일 저녁, 퇴각하는 러시아군의 선두가 뗄린에 근접했다. 러시아 제1군과 제2군이 2월 28일 차이허(紫河, 랴오허 강의 지류) 강을 따라 구축된 진지에 포진했으며, 제3군은 예비대에 편입되었다. 러시아군이 이동중일 때 쿠로파트킨이 직위해제되면서 그 후임에 리녜비츠가 임명되었다. 쿠로파트킨은 제1군의 지휘관 자격으로 전선에 남았다.

비록 러시아군의 패전이 쿠로파트킨의 책임이라는 점을 인정할지라도, 다음의 사실, 즉 러시아 극동군이 대규모 전투에 알맞게 훈련되어 있지 않았으며, 쿠로파트킨도 이 사실을 잘 인식하고 있었음을 지적할 필요가 있는 그는 이그나치에프와의 대담에서 부대의 전투능력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본 전쟁은 아군이 징병제로 편성된 후 맞는 최조의 전쟁입니다. 당연히 우리 측의 실수는 적절한 시기에 예비대 및 지원대의 전투준비에 충분히 신경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우리 문화의 후진성 또한 여러 원인 중의 하나라는 점을 인정하시지는 않습니까?”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점을 질문했다.

“극단적인 말씀이기는 합니다만, 당신 말이 옳다고 봅니다! 이그나치에프 씨, 근본적인 개혁이 필요합니다.”

 

짜르 정부는 보다 잘 훈련된 부대를 유럽의 국경선에 방치한 채 군사적으로 전혀 준비되지 않은, 단지 징병제 때문에 군인이 된 일반 농민들을 극동으로 파병했다.

봉천(奉天) 전투에서의 러시아군의 총 병력 손실은 전사자, 부상자 및 포로를 포함하여 약 9만 명에 달했다. 반면 일본군의 병력 손실은 7만 1천 명이었다. 그 중 사상자의 수는 러시아군이 5만 9천 명이었으며, 일본군은 7만 59명이었다.

포로를 심문하는 일본군

 

비록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오야마는 봉천(奉天)의 러시아군을 포위하기 위하여 일정한 계획을 수행한 반면, 러시아군 지휘부는 비계획적으로 행동했다. 포위작전을 두려워한 쿠로파트킨은 랴오양 전투에서와 같이 군대를 집결하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았다. 그는 일본군의 공격을 소극적으로 방어하는 것으로 일관했으며, 반격 역시 단호하지 못했다.

쿠로파트킨은 봉천 전투 이후 직위해제되고 한동안 기용되지 않았으나 1차 세계대전에서 북부전선군의 사령관을 맡아 다시 기용되었다. 그가 맡은 북부전선군은 비교적 큰 전투가 없어 종전까지 부대의 편제와 사기가 유지되었다. 또한 투르키스탄 군사총독으로 근무하였으며, 중앙아시아의 반란을 진압하였다. 러시아 혁명의 칼바람과 적백내전도 쿠로파트킨은 피해갈 수 있었으며 1925년 모스크바주 드미트로프에서 천수를 누리고 사망하였다.

 

러시아군 지휘부는 대규모의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았다. 봉천(奉天)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전투능력이 매우 약해졌다. 노기 장군의 포위 작전에 대응하기 위하여쿠로파트킨이 창설한 임시분견대는 원래의 목적과는 상관없는 부분적 임무만을 해결했을 뿐이어서 전투수행능력이 미약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러시아군 지휘부가 소극적 태도로 일관함에 따라 노기 장군의 부대가 러시아군의 후방으로 우회할 수 있었다.

봉천(奉天) 전투는 그 결말이 나지 않았다. 일본군은 커다란 전과를 올렸지만 러시아군을 괴멸시키지는 못했다. 일본군은 신규병력의 지원을 받지 못했으며, 특히 기병대가 새로이 보충되지 않았던 것이 큰 약점이었다. 반면 러시아군은 진지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군사력을 보충하는 등 확연하게 전투력을 회복할 수 있었다.

일본군이 봉천(奉天) 전투를 성공적으로 수행했다고 하지만, 본 전투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일본군 지휘부가 전술상의 새로운 경향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일본군의 우측 전선에는 차단된 지형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곳에서는 큰 전과를 거둘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았다. 길게 형성된 러시아군의 방어선을, 월등하지 못한 군사력으로 양 측면에서 포위하려 했던 것은 무리였다. 그것은 사허(沙河) 강 전투에서 러시아군의 미약한 저항에도 일본군 지휘부가 군사행동을 중단했다는 사실에서 증명된다. 러시아와 일본 양측 모두가 전체 전선에 걸쳐서 전투를 치를 만큼 대규모의 군사력을 보유하지 못했다.

1군 참모장 후지이 소장

 

 

랴오양(遼陽), 사허(沙河) 그리고 봉천(奉天) 전투는 남만주로부터 러시아군이 후퇴했음을 의미하며, 일본의 입장에서는 육상전이 사실상 종결되었음을 뜻한다. 일본군 본부에서는 앞으로의 공격을 위해 어떠한 조치도 취하지 않았으며, 단지 러시아군이 공격으로 전환할 경우에 대비하여 대규모의 방어작업을 수행하고 부대의 전개를 강화하는 선에서 군사적 행동을 자제했다.

진지에 주둔중이던 러시아군은 예비대가 도착함에 따라 계속해서 증강되었다. 1905년 8월 말 만주지역 러시아군의 총 병력 수는 78만 8천 명이었으며, 연해주와 후방에 위치한 병력은 15만 명이었다. 당시 일본군 병력의 정확한 수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러시아군 지휘부의 예상에 따르면 약 75만 명이었으며, 그 중 15만 명은 후방과 한반도의 북쪽에 배치되어 있었다.

봉천 회전 후 집합한 구로키 군의 사단

 

봉천(奉天) 전투 이후에는 대규모의 접전이 없이 방어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러시아군은 후퇴할 경우에 대비하여 쑹화(松花) 강 근처에 이르기까지 약 300㎞에 달하는 지역에 여러 개의 중간진지를 구축했다.

1905년 5월 4일에야 미트첸코의 기병대가 일본군 진지를 강습했는데, 이 분견대의 임무는 일본군의 주요 교통로 중의 하나인 잉커우(營口, 랴오둥 반도의 서북부, 랴오허 강의 하구 좌안에 위치해 있다. 서쪽은 보하이 만에 위치해 있고, 동북쪽에서 동쪽은 안산, 남쪽은 다롄에 접해 있다.) - 신민둔(新民屯, 요하의 상류인 거류하(巨流河)를 건너면 처음으로 마주하는 도시로 청나라가 심양에 도읍을 정한 뒤 새로 건설한 신흥군사도시) 노선을 교란하는 것이었다. 본 공격에는 54개의 백인중대가 대포 18문을 이끌고 참가했다. 5일에 걸친 미트첸코 분견대의 공격으로 일본군의 창고 여러 동이 소실되었다. 본 공격이 갖는 의미는 미약했지만, 러시아군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기에는 충분했다.

일본군 적십자 야전 병원. 위의 작은 그림에 보면 일본인을 구타하는 러시아군의 모습이 보인다.

 

만주에서의 모든 전투는 전략과 작전수행에 변화를 가져왔다. 이미 전투는 단기전이 아닌, 길이 150㎞에 폭 69㎞의 전선에서 수일간에 걸쳐 치러지는 장기전의 성격을 띠었다. 이는 새로운 통제방법과 수단을 요구하는 것이었으나 러,일 양측의 지휘부 모두 대,소규모의 전투에서 완벽한 지휘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완벽한 지휘력의 결여와 잘못된 정보로 인하여 전투 결과를 정확히 인식할 수 없었으며, 따라서 잘못된 결정이 내려졌다.

양측의 군사행동 방식은 차단된 지형 탓에 많은 측면에서 한정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진지전투가 전개되었다. 러시아군 지휘부의 방어적 태도는 축성술의 발달에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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