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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역사 - 4. 스테판 두샨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2.07.19|조회수1,391 목록 댓글 2

발칸 반도의 동쪽, 현재의 베오그라드 중심에 자리잡았던 세르비아 인은 여느 다른 슬라브 인과 마찬가지로 부족 시대를 열어 살아가고 있었다. 당시 부족장을 ‘추판’이라고 했는데 세르비아에서도 그 권력의 중심음 바로 이 추판에서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세르비아에서는 12세기에 들어설 무렵 네 아들을 둔 한 부족이 매우 강성해졌다. 네 아들은 후계 구도를 둘러싸고 피의 투쟁을 벌였는데, 결국 네만야라는 아들이 권력을 잡게 되었다. 1169년의 일이었다.

네만야는 대권을 손아귀에 쥔 뒤에도 여전히 추판이라는 칭호를 사용했다. 중세 시대에는 왕이 되려면 어떤 형태로든 로마 교황으로부터 추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이 작업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아 추판 앞에 ‘위대한’이라는 수식어를 썼다. 네만야는 1169년 권력을 잡은 뒤 27년간 세르비아를 사실상 통치한 왕이었지만 공식적으로 왕이 되지는 못한 셈이다. 그러나 뒤이어 그의 후손들이 차츰 왕으로 등국하면서 역사가들은 이 왕조를 네만야 왕조라고 명명했다.

네만야가 죽자 그의 아들 간에 후계 전쟁이 치열하게 벌어졌다. 아버지를 통해 배운 것이라고는 결국 절대 권력을 어떻게 잡느냐는 전략 전술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역시 큰아들인 스테판이 최종적으로 승리하여 마침내 후계자의 자리에 올랐는데, 이때가 1196년이다.

스테판 네만야

 

스테판은 권력을 보다 공고히 하기 위해 신생 네만야 왕조에 대한 로마 교황의 추인을 받으려 시도했다. 스테판은 선왕보다 훨씬 정치적 사고를 폭넓게 한 인물이었다. 동로마와 서로마의 경계선에 위치한 세르비아로서는 당시 유럽 대륙을 사실상 지배하고 있던 로마 교황으로부터 왕권을 인정받는 것이 무엇보다도 절실한 일이었다.

스테판은 이를 위해 당시 로마 교황이었던 호노리우스(Honorius) 3세에게 줄을 대서 필요한 때마다 사신을 보내는 등 우여곡절 끝에 왕권을 인정받는 개가를 올렸다. 스테판은 한 걸음 더 나아가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신생 네만야 왕조를 추인받기를 원했다. 이 문제를 해결해 준 장본인은 바로 그의 친동생 라츠코(Ratsko)였다. 그는 삽바스[Sabbas: 세르비아 어로는 사바(Sava)]라는 이름으로 아토스라는 곳에서 정교회 수사가 된 인물이었다. 사바라는 이름은 베오그라드를 가로질러 다뉴브 강과 만나는 강의 이름으로 아직까지 남아 있다.

 

사바 라츠코                                          사바 강            

 

라츠코는 정교회 수사라는 자신의 신분을 이용하여 비잔틴 제국의 황제를 설득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스테판이 로마 교황으로부터 왕권을 인정받은 것이 걸림돌이 되었지만 세르비아 인이 모두 정교회 교인이니만큼 동방 정교의 독립 교구로 승인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 같은 외교적 노력 끝에 형 스테판은 로마로부터 왕위를 받았고 동생은 형의 재위 기간인 1219년 마침내 비잔틴 황제로부터 세르비아 정교회 초대 대주교로 임명되었다. 이 ‘용감한 형제’의 활약으로 이제 네만야 왕조는 정치적으로 로마로부터 인정을 받으면서도 그 영향력을 전혀 받지 않게 되었고, 종교적으로는 비잔틴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으면서도 독립 교구로 자치권을 획득하는 쾌거를 이룩했던 것이다. 이들의 성과는 네만야 왕조가 발칸의 대제국으로 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스테판은 31년간 장기 집권한 끝에 1227년 사망했다.

이 같은 성과들이 축적되면서 마침내 세르비아 역사상 가장 위대한 왕이 나타나게 됐다. 네만야 왕조가 시작된 시절부터 1백여 년이 흐른 1331년 왕위에 오른 스테판 두샨이 바로 그 주인공이었다. 두샨은 발칸뿐만 아니라 당시 유럽의 강자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역사가들은 그래서 그의 별칭을 강자(强者)라고 불렀다. 그는 1346년부터는 아예 왕에서 한 단계 올려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발칸 반도의 대부분을 손아귀에 넣었다. 스테판 두샨이 차지한 땅은 오늘날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을 모두 포괄하고 있다. 스테판 두샨은 이제 세르비아 역사에서 세르비아 민족주의가 발원하는 샘이자 민족주의자들의지지 않는 별이 되었다. 유고 내전까지 치르면서 세르비아측이 차지하려고 했던 땅이 사실은 두샨이 다스렸던 중세 세르비아 제국의 영토와 같은 것은 우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스테판 두샨

 

아무리 위대한 영웅도 세월은 잡지 못한다. 스테판 두샨은 왕으로서는 비교적 젊은 나이인 46세 때(1355년) 콘스탄티노플에 갔다 오던 중 사망했다. 역사는 참으로 공평하기도 하고 또 심술궂기도 한 모양이다. 그토록 위대한 왕 스테판 두샨의 아들은 그야말로 네만야 왕조가 배출한 역대 와 가운데 가장 무능한 인물이었다. 그의 공식 이름은 스테판 우로스 5세, 역사가들은 이 거창한 이름 바로 뒤에 ‘약자’라고 별칭을 붙여 놓았다.

스테판 우로스 5세

 

약자 우로스 5세 치하의 세르비아 정정(政情)은 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1377년 오스만 투르크가 발흥해 세르비아를 공격하기 시작하면서 내부적으로 우로스 5세의 뒤를 이을 권력 쟁탈전의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 결정적 원인은 우로스 5세가 그나마 자식까지 낳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네만야 왕조는 찬란한 스테판 두샨의 영광을 과거에 묻은 채 서서히 몰락하기 시작했다. 왕은 허수아비가 되고 왕족들과 무력을 가진 영주들이 서로 권력 투쟁을 벌이는 가운데 무적의 오스만 투르크 군이 세르비아로 진군해 왔다.

우로스 5세 이후 네만야 왕조는 사실상 사라져 버렸다. 다만 권력에 눈이 어두웠던 세르비아 영주들이 막판에 정신을 차려 직계는 아니지만 네만야 왕조의 후손이었던 라자르를 중심으로 뭉쳤으나 역부족이었다. 1389년 6월 28일 라자르는 코소보에서 오스만 투르크 왕 바예지드 1세에게 잡혀 목이 잘려 죽었다. 바예지드는 그 자신이 위대한 검투사였으며 ‘천둥’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세르비아 왕 라자르                           바예지드 1세  

    

라자르의 목을 치면서 바예지드는 하늘을 우러러 통곡을 했다. 그의 아버지인 무라드 1세가 세르비아와 싸우다 전설적인 세르비아 기사 밀로스 오블리치의 칼에 맞아 그야말로 변사했기 때문이다. 그 동안 벼르고 벼르던 원수를 마침내 갚은 셈이었다.

무라드1세                             밀로스 오블리치          

              

코소보 전투

 

이후 세르비아는 소규모 영주들이 모라비아 강과 다뉴브 강을 따라 산발적으로 저항했으나 1441년 완전히 무릎을 꿇었다. 그 후 일부 세력이 산악 지대인 몬테네그로 쪽으로 들어가 제타라는 곳에서 어느 정도 자치를 피며 저항을 계속했지만 당시 영주였던 게오르그 크르노예비치(Georg Crnnojevic)가 1496년 망명함으로써 모든 것은 끝났다.

스테판 두샨의 개인적 역량으로 발칸의 강국이 됐던 세르비아 제국은 두샨의 죽음과 함께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그 이후 세르비아는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지배 하에서 19세기까지 피정복민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 때문에 스테판 두샨은 늘 세르비아 인이 언젠가는 이루어야 할 민족 국가의 표본이 되었다. 따라서 그 이후 세워진 세르비아 인의 국가는 반드시 두샨 제국의 모습을 따르려고 노력했다. 그래서 두샨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의 이상향인 동시에 대형(大兄)이었으며, 그가 건설했던 제국은 대(大)세르비아주의가 성취해야 할 최소한의 국경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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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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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Ave Fortuna | 작성시간 12.07.20 궁금한게 황제가 세르비아 독립교구를 인정해준거에ㅇ요? 그건 총대주교의 권한이 아닌가요??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7.20 총대주교의 권한이긴 하지만 실지로 황제의 입김이 막강해서 황제가 승락하면 거의 인정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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