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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역사 - 13. 유고슬라비즘의 이론가들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2.08.06|조회수864 목록 댓글 0

유고슬라비즘은 말 그대로 남쪽 발칸 반도에 거주하는 모든 슬라브 민족의 대통일을 의미한다. 이 유고슬라비즘은 물론 각 슬라브 민족 간의 충분한 접촉과 상호 교류와 이해가 기초되어야 한다. 이런 측면에서 유고슬라비즘이라는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기초는 대단히 미약했다. 18세기 말까지 발칸 반도 내에서는 민족주의의 맹아라고 할 만한 민족 의식이 거의 없었을 뿐만 아니라 유고슬라비즘의 기초가 되는 민족 간의 교류도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도 유고슬라비즘의 지적인 선구자들은 슬라브 족의 언어 혹은 문화에 대한 깊은 집착을 통해 후일 유고슬라비즘의 토대가 되는 연구 업적을 남기기 시작한다. 세르비아에서는 앞에서 지적한 대로 세르비아 인의 모든 거주 지역을 통합하는 대세르비아주의가 대세였다. 자연히 유고슬라비즘을 잉태한 토대는 세르비아에서보다는 북쪽의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가 될 수밖에 없었다.

유고슬라비즘을 최초로 제기한 인물은 크로아티아의 카톨릭 수사였던 유라이 크리자니치(Jurai Krizanic)였다. 중세를 지나 근대에 이르기까지 종교인들이 연구의 중심에 있었던 것은 지극히 보편적인 일이었다. 학문 연구는 오직 그들만의 영역이었던 시절이었다. 물론 크리자니치가 제기한 유고슬라비즘은 종교적인 차원에 머물러 있었다. 그의 주장을 잘 요약하면 슬라브 인이 믿고 있는 두 종교, 즉 정교회와 카톨릭 교회는 적극적으로 화해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극히 제한된 형태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연합 운동이었지만, 그의 사상은 후일 유고슬라비즘을 신봉하던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그를 일컬어 유고슬라비즘을 ‘전도’한 사도라고 불렀다.

그 후 18세기 초에 이르러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가 서서히 눈을 뜨면서 유고슬라비즘은 크로아티아의 민족주의와 깊이 연결되기 시작했다. 즉 발칸 반도의 슬라브 족 통합은 크로아티아를 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논리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크로아티아의 수사인 파바오 리터 비테조비치(Pavao Ritter Vitezovic)였다. 그의 주장은 이른바 범크로아티아주의라고 후세의 사가들이 명명했는데 논리상 수긍하기 힘든 부분이 많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본래 모든 남쪽 슬라브 인은 모두 크로아티아 인이었다는 것이다. 세르비아 인도, 보스니아의 이슬람 교도들도 모두 크로아티아 인이기 때문에 ‘오리지널’인 크로아티아가 명실공히 중심에 서서 슬라브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문제 제기였다.

파바오 리터 비테조비치

 

발칸의 모든 슬라브 민족을 서술한 문헌은 18세기 중엽이 되어서야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 체계적인 연구의 첫 문헌은 역시 크로아티아 출신의 프란체스코 회 수도사 안드리야 카치치-미오시치(Andrija Kacic-Miosic)가 1756년 출판한 <라즈고보르 우고디니 나로다 슬로빈스코가(Razgovor Ugodini Naroda Slovinskoga)>라는 긴 이름의 책이었다. 그는 발칸 반도에 거주하는 모든 민족을 슬라브 인으로 묘사했는데 특이한 것은 최후의 일리리언이라고 밝힌 바 있는 알바니아 인까지 포함시켜 놓은 것이었다. 물론 이 같은 주장이 전혀 오류가 없지는 않았지만 당시까지 발칸 전역에 살고 있는 민족을 다룬 문헌이 없었다는 저을 감안하면 그의 연구는 대단히 역사적인 것으로 기억할 만하다.

안드리야 카치치-미오시치

 

크로아티아 교회의 일부 연구가들이 유고슬라비즘의 전통을 세워 가고 있긴 했지만 사실상 18세기 말까지 통합의 당사자인 크로아티아-세르비아 양민족간의 접촉은 거의 없는 상태였다. 그러다 18세기 말에 들어서면서부터 두 민족의 교류가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전장을 따라 옮겨 다니던 군인들, 그리고 여행을 많이 했던 지식인들인 성직자들이 교류에 한몫을 하기는 했지만, 실제 메신저들은 바로 보이보디나에 거주하던 세르비아 장사꾼들이었다. 보이보디나는 현재 세르비아와 헝가리 사이에 있는 세르비아 자치주이다. 이 세르비아 장사꾼들은 물론 돈이 모이는 곳이라면 어디든 찾아 다녔다. 일반 주민들에 비해 워낙 여행을 많이 했기 때문에 이들이 가진 정보는 사실 엄청난 것이었다. 그들은 그 동안 교류가 없던 각 민족 간의 교류를 활성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발칸의 ‘보부상’들이라 할 만하다.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접경지역이 보이보디나 주이다.

 

한편 세르비아에서는 역시 대세르비아주의가 압도적인 대세였지만 그렇다고 해서 유고슬라비즘의 뿌리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실질적인 힘을 가지고 있던 세르비아의 정치인들은 민족 이익을 지상 과제로 내세우는 대세르비아주의자들이었다. 따라서 유고슬라비즘은 당연히 일부 지식인이나 진보적 학생이 주도한 지식인 운동에 불과했다. 그나마 이 흐름은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철저히 이용당하고 말게 된다.

세르비아 인 중에서도 초기에 슬라브 외의 다른 민족에 관심을 가진 계층은 역시 공부를 할 수 있는 특권을 가졌던 세르비아 정교회 성직자들이었다. 이들 가운데 첫 주춧돌을 놓은 인물은 요반 라이치(Jovan Rajic)라는 정교회 수사였다. 처음에 그는 신학 이론 이외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직책상 자주 여행을 하게 되면서 그의 사고도 폭을 넓혀 가기 시작했다. 라이치는 두 차례에 걸쳐 러시아를 다녀왔고 그 밖의 서유럽 쪽으로도 많은 여행을 했었다. 이러한 실제 경험은 그의 사고를 신학적 이론엘서 현실적인 문제로 끌어내려 1794년 세르비아 지성사의 기념비로 간주되는 <슬라브 민족사, 특히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인을 중심으로>라는 책을 세르비아 어로 출판했다.

요반 라이치

 

이 책은 세르비아 인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 인을 비롯한 다른 슬라브 인에게도 그야말로 베스트 셀러가 되었다. 후대의 세르비아 역사학자들은 라이치의 기념비적인 이 책이 바로 10년 뒤 일어난 1804년의 세르비아의 농민 봉기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1804년 봉기를 주도한 블랙 조지 카라조르지예비치는 불행히도 문맹(文盲)이었다. 블랙 조지가 라이치의 책을 읽고 혁명을 주도할 수는 없었다는 것이다. 다만 블랙 조지가 글깨나 깨친 사람들로부터 귀동냥으로 이런 책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을 가능성은 있다. 다라서 세르비아 인이 이 책을 읽고 오스만 투르크에 대한 반란을 주도했다는 세르비아 역사가들의 서술은 다소 과장된 것으로 보인다.

라이치와 동시대 인물인 도시테이 오브라도비치(Dositej Obradovic)는 유고슬라비즘에 한 발 더 다가간 사람으로 평가된다. 라이치와 비슷한 생애를 살아간 오브라도비치는 보이보디나 출신의 세르비아 인이었다. 그 역시 17세 되던 해인 1760년에 정교회 수사가 되었다. 프랑스와 영국을 자주 여행했을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는 일정 기간 거주하기도 했다. 또 정교회 조직상 친연 관계가 있는 러시아도 자주 방문했다.

도시테이 오브라도비치

 

라이치와 차이가 있다면 그는 서유럽의 영향을 더욱 절실하게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그는 “우리 슬라브 인이 이러한 상태로 계속 방치된다면 결국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노예가 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이 같은 문제를 타파하기 위해 오브라도비치는 대개의 역사가 그러했듯이 문화 운동에 일로 매진하게 된다. 그의 작업은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세르비아 어를 다듬어 현대적인 문어체의 기초를 마련하는 데 집중되었고, 그 결과 세르비아의 공식 문어가 확립되었다. 그의 열정적인 연구 정신과 업적은 유고슬라비즘에 직접적으로 기여했다고 평가할 수는 없지만, 후일 세르비아 내에서 유고슬라비즘을 태동시킨 세르비아의 진보적 지식인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스승이 될 정도로 지대한 영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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