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에 들어와서 세르비아의 최대 맞수가 된 크로아티아 공화국 지역에도 역시 7세기부터 슬라브 인이 정주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지역은 지정학적으로 주변 열강의 각축장이 될 수밖에 없을 정도로 미묘한 위치에 있었다. 무엇보다도 동로마 제국 황제와 서로마 제국의 적자인 로마 교황의 이해가 맞부딪치는 현장이었다.
크로아티아
초기 크로아티아의 서부 지역인 아드리아 해 항구 지역은 비잔틴 제국의 주권 아래에 있었으나 차츰 북부 지역으로부터 프랑크 왕국의 샤를마뉴 대제가 영향력을 뻗치기 시작했다. 그러다 서기 806년에 북부 지역과 서부 해안 지역의 일부가 샤를마뉴 대제의 영토로 복속되기도 했으나 크로아티아의 많은 지역은 비잔틴 제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독립의 기회를 노려왔던 크로아티아는 10세기에 들어오면서 중요한 기회를 포착한다. 불가리아 인이 비잔틴 제국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면서 제국의 초점이 불가리아로 향하자 크로아티아는 기회를 놓칠세라 곧바로 독립을 선언해 버렸다. 반란이나 군사 쿠데타는 대체적으로 권력 이양기 때 나타나는 힘의 공백 상태에서 발생한다. 크로아티아가 독립 선언을 통해 도전장을 냈던 당시 비잔틴 제국도 권력 이양기였다. 비잔틴 황제 레오 6세가 912년 서거하자 불가리아의 지도자였던 시메온은 대대적으로 반란을 일으켰다. 생각보다 훨씬 도전적이었던 시메온은 아예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공격, 제국을 정복하겠다는 야욕을 가지고 있었다.
불가르 족 전사
당시 비잔틴 제국의 군대는 사실상 종이 호랑이에 지나지 않은 반면 시메온의 군대는 승전에 승전을 거듭했다. 드디어 시메온의 군대가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할 수 있는 지점에까지 이르자 콘스탄티노플의 가신들은 최종 수습안을 마련했다. 즉 비잔틴 제국의 후계자로 지명된 장차 콘스탄티누스 7세가 될 포르필로게네투스라는 소년을 시메온 왕의 딸과 결혼시킨다는 전략이었다. 물론 황제의 나이가 어린 만큼 장인인 시메온이 제국의 경영에 참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메시지도 함께 보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제관을 받는 콘스탄티누스 7세
그러나 콘스탄티노플 내에서도 이론이 분분했다. 이 같은 결정에 가장 격분한 사람은 어린 황태자 포르필로게네투스의 생모인 조에(Zoe)였다. 그가 반대한 이유는 어렵지 않았다. 즉 아들은 금명간 비잔틴 제국에서도 황제의 신분이 될 사람인데 어떻게 야만족 불가리아 인을 며느리로 맞이할 수 있느냐는 불만이었다. 조에는 아예 공개적으로 공격했으며 반시메온파를 만들어 사실상 시메온을 거부했다. 이에 격분한 시메온은 밀사를 보내 불가리아로부터 다시 군사를 끌고 와서 비잔틴을 폐허로 만들겠다는 통보를 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콘스탄티노플 측은 아르메니아 출신의 명장 로마누스 레카페누스라는 장군이 이끄는 세력을 황제 섭정권을 미끼로 꾀어 시메온을 상대하게 했다. 시메온과 로마누스 레카페누스 두 사람은 밀고 밀리는 전투를 계속했다. 결국 시메온은 927년 사망함으로써 불가리아 인의 대반란은 15년 만에 대단원의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비잔틴 군대를 공격하는 9세기 불가리아군을 형상화한 비잔틴 시대의 기록화
크로아티아 인은 바로 이 틈새 시장을 노렸다. 크로아티아의 주권자를 자임해 온 비잔틴 제국이 불가리아 문제로 속이 썩어 다른 곳을 돌볼 수 없을 때 독립을 선언해 버린 것이다. 역사가들은 잠깐 독립해 활개를 폈던 이 자치국을 크로아티아 공국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는 곧바로 헝가리에 다시 복속되고 말았다.
크로아티아가 헝가리에 복속된 것은 크로아티아로서는 엄청난 의미를 가진다. 크로아티아가 이때부터 유럽 문화권에 편입되면서 서유럽 문화권의 첨병 역할을 하게 됐기 때문이다. 이러한 서유럽 문화의 전통이 쌓여진 크로아티아가 동방의 끝에 있던 세르비아와 후에 한 나라가 된 것은 사실 비극의 시작이었다.
크로아티아는 1102년 이래 헝가리 왕조의 실질적 영향력 아래에 놓여 있었고, 그 후 1526년 이후에는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이런 오랜 식민 기간을 거치면서 크로아티아 교회와 귀족들을 중심으로 크로아티아 국가 창설이라는 막연한 논의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탐욕스러운 부자는 아무리 많은 재산을 모아도 늘 부족하고, 권력욕에 사로잡힌 지도자는 아무리 독재를 해도 성이 차지 않는 법이다. 헝가리 왕조 아래서 어느 정도 기득권을 가지고 있던 교회와 귀족들이 헝가리가 아니라 자신들이 이 나라를 지배하면 더 많은 권력, 더 많은 재산을 향유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크로아티아 독립 국가 창설에 대한 생각은 적어도 초기에는 민족주의 각성이나 민족주의 부활과는 거리가 있었다.
크로아티아 귀족들은 특히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 아래에 종속되면서 헝가리 쪽에 큰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 독립된 국가이다가 합스부르크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 헝가리측이 크로아티아와 입장이 비슷할 것이라는 동병상련 때문이었다. 게다가 헝가리 귀족들은 때때로 합스부르크 제국에 큰소리를 치며 저항하기도 햇다. 이른바 헝가리 민족주의 운동이 크로아티아의 독립 국가 운동에 엄청난 파장을 미친 것이다. 이에 따라 크로아티아 내에서 헝가리의 문물을 받아들이자는 목소리도 점점 높아갔다.
급기야 크로아티아 의회는 1827년 크로아티아 내 학교 교과목 중 필수 과목으로 헝가리 어를 지정해 통과시킴으로써 헝가리에 대한 ‘변함없는 짝사랑’을 내외에 과시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의 이 같은 인식과 헝가리 인의 생각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헝가리 인은 크로아티아 인을 미개인처럼 경멸했으며 기회가 되면 아예 ‘내것’으로 만들겠다는 야욕도 감추지 않았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크로아티아 인은 말할 수 없는 배신감을 느꼈다. 이제 크로아티아 인에게 있어서 헝가리 인은 오히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형성하는 데 최대의 걸림돌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크로아티아 민족주의가 발흥한 데에는 일차적으로 헝가리의 영향력이 지배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는 1832년 한 권의 책이 출판됨으로써 그 첫발을 내디뎠다는 것이 크로아티아 역사학자들의 주장이다. 얀코 드라스코비치(Janko Draskovic) 백작이 저술한 이 책은 크로아티아 어(스토카얀 방언)로 쓰여졌다. 대개 유럽의 민족주의 부흥이 언어 운동을 기폭제로 했던 것처럼 드라스코비치 백작의 작품도 사실상 문화 운동의 범주에 속한다. 드라스코비치가 이 책에서 밝힌 주장을 정리하면 대략 이렇다.
얀코 드라스코비치 백작
1. 크로아티아 인민의 생활 언어로서 라틴 어가 아니라 크로아티아 어를 사용할 것.
2. 크로아티아, 슬라보니아(현재 크로아티아의 중부 지방), 그리고 달마티아(현재 크로아티아의 서부 해안 지방)를 통일하는 행정, 정치 체제의 설립
3. 피우메(현재의 리예카 지역)의 군사 경계선에 대한 크로아티아의 통제권 장악.
4. 슬로베니아와 보스니아의 궁극적인 합병.
5.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 일정한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경제적으로는 근대화해야 하고 교육에 대한 집중적인 투자가 이루어져야 한다.
우리가 여기서 눈여겨보아야 할 대목은 바로 넷째 항목이다. 전통적으로는 보스니아를 노려 왔던 세르비아와 보스니아의 합병을 근간으로 하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의 발흥은 결국 이 두 세력이 보스니아 문제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실제로 크로아티아는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의 괴뢰 정권이 들어섰을 무렵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복속시킨 적이 있고, 그 후 공산 정권 시절에는 세르비아가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이러한 역사적인 궤적은 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 벌어진 전쟁이 살육전으로 변했고 비인륜적인 인종 청소가 실시되었는지 그 단서를 제공해 준다.
나찌의 힘을 빌려 유고슬라비아의 맹주가 되려하였던 크로아티아군
크로아티아 인은 한때 짝사랑했던 헝가리에 대한 실망이 급속도로 확산될 무렵 남쪽의 ‘따뜻한 나라’ 세르비아로 눈을 돌렸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압제 하에서 자치 왕국을 세울 정도로 강력해진 세르비아의 성공에 크로아티아의 지식인들은 찬사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세르비아와 연합해서 유고 인을 위한 통일 국가를 세워야 한다는 논의가 크로아티아에서 거세게 일어났다. 이것이 바로 유고슬라비즘이 크로아티아라는 토양에서 꽃을 피우게 된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