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독일에 항복했고 페타르 왕은 그리스를 거쳐 최종적으로 런던에 망명 정부를 세웠다는 것은 이미 앞에서 밝혔다. 물론 발칸 반도는 독일을 비롯한 추축국들의 분할 통치 아래에 놓여졌다. 마케도니아는 불가리아의 지배 하로 들어갔고, 헝가리는 1919년 이전에 지배했던 보이보디나의 바츠카와 바라냐를 획득했다. 이탈리아와 독일은 슬로베니아를 분리해 지배했다.
베오그라드에 주둔한 제1기갑집단 소속의 장갑차
이탈리아의 무솔리니는 발칸 반도에서 가장 많은 소득을 올렸다. 오랫동안 탐냈던 아드리아 해안 지역의 달마티아를 송두리째 다 삼켜 버렸다. 한편 독일은 세르비아와 보이보디나 자치주의 대부분을 직접 지배했다. 크로아티아 자치국은 이탈리아와 독일이 각각 같은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합의했지만, 사실상 독일은 크로아티아를 이탈리아측에 맡겨 놓은 상태였다.
독일은 세르비아를 점령한 뒤 곧바로 밀란 네디치 장군을 수반으로 하는 괴뢰 정권을 수립했다. 또한 세르비아 파시스트 지도자인 디미트리예 료티치는 3천 6백 명의 파시스트 군대를 조직했다. 한편 몬테네그로에서는 니콜라스 왕을 추종하는 일단의 분리주의자들이 반란을 일으켜 권력 장악에 성공하나 1942년 6월 알바니아의 도움을 받은 이탈리아 군이 다시 몬테네그로를 점령했다. 그러나 몬테네그로의 저항도 만만치 않아서 이곳은 저항의 중심지로 변했다.
밀란 네디치 네디치의 절친이었던 디미트리예 료티치
세르비아 인 파시스트 군대 SVC
2차 세계대전이 발칸에 남긴 상처 가운데 가장 극심한 곳이 바로 크로아티아 자치국이었다. 크로아티아 자치국은 달마티아의 아드리아 해안 지역을 대부분 이탈리아에 할양당했지만,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의 숙원이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지역은 모두 손에 넣었다. 그런데 그 상처가 깊어질 수밖에 없었던 가장 큰 이유는 바로 파시스트 테러단 우스타샤 때문이었다. 추축국은 크로아티아를 점령한 1941년 4월 10일에 무솔리니의 사주로 이탈리아에서 조직된 파시스트 테러단인 우스타샤를 중심으로 자치 정부를 구성했던 것이다.
세르비아인들을 무참히 학살하여 악명 높았던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히틀러와의 협상에서 크로아티아 문제에 대한 양해를 얻은 무솔리니는 그 자신이 지난 12년간 자금 지원을 해가며 키워 온 우스타샤의 우두머리 안테 파벨리치를 크로아티아 자치국의 정부 수반으로 선택했다. 파벨리치는 수백 명의 부하를 이끌고 이탈리아를 떠나 금의환향하였다. 테러 단체가 일국의 정부로 변신했으니 그 파장이 클 수밖에 없었다.
안테 파벨리치
파벨리치는 자신이 죽인 세르비아 인의 눈알을 파내서 수집하는 취미가 있었다. 어느날 그의 사령부를 방문한 방문객이 그의 책상 위에 놓여진 그릇을 가리키며 달마티아에서 잡은 굴이냐고 묻자 파벨리치는 '아니오. 세르비아 인들의 눈알이오'라고 대답했다.
문제를 더욱 악화시킨 것은 바로 크로아티아의 복잡한 민족 분포였다. 당시 크로아티아의 총인구는 모두 650만 명이었다. 이 가운데 크로아티아 인이 340만 명, 세르비아 인이 190만 명이었다. 이밖에 약 70만 명의 회교도, 15만 명의 독일인, 1만 8천명의 유태인, 그리고 소수의 이탈리아 인이 거주했다.
우스타샤 정부는 이탈리아, 독일, 헝가리, 불가리아,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핀란드, 스페인, 일본, 버마 그리고 만주국의 승인을 받았다. 실제로 독립 정부를 표방했지만 우스타샤 정부는 이탈리아의 절대적인 영향력 아래에 있었다. 물론 자그레브에는 독일군이 주둔하고 있었지만 히틀러는 크로아티아에 관한 모든 권한을 무솔리니에게 일임해 놓은 상태였다.
추축국 가담 당시의 크로아티아 국기
초기에는 이 단체의 이름을 제대로 아는 크로아티아 인이 많지 않았다. 게다가 이 정부는 행정이라는 이름도 들어본 적이 없었으며 제대로 훈련받은 군장교도 없었다. 유고슬라비아 왕국에서 유고 군은 세르비아 군이었기 때문이다. 자치국이 성립된 지 한 달 뒤인 1941년 5월 크로아티아는 자치 왕국을 선언했다. 이탈리아에 살던 아이모네 왕자를 왕으로 삼아 토미슬라브 2세로 칭하였으나 이 사람은 한 번도 크로아티아를 방문한 적도 없었다. 이 왕정 수립은 우스타샤 정권이 이탈리아 파시스트의 완벽한 작품이라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특히 히틀러는 크로아티아 문제에 대해 별다른 관심이 없어 문제의 관할을 무솔리니에게 맡겨둔 상태이고 그의 관심은 주로 세르비아와 그리스 쪽에 치우쳐 있었다.
크로아티아 국민의 분위기는 애초에는 어느 정도 무관심하였으나 우스타샤 정권이 국민의 민족주의에 호소하는 무기를 쓰자 분위기는 환영일색으로 변해 갔다. 그런 뒷면에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 편입이라는 떡고물이 주어졌음은 물론이다. 독일측으로부터 크로아티아 정부 수반을 제의받았으나 단호히 이를 거부한 크로아티아 농민당 당수 블라드코 마체크는 그의 회고록 <자유를 위한 투쟁>에서 이때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이때는 과거 1918년 크로아티아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으로부터 독립했을 때와 똑같은 민족주의 분위기가 고루 퍼지기 시작했다.”
블라드코 마체크
크로아티아 내부에서는 강력한 정치 세력이었던 크로아티아 농민당이나 카톨릭 교회는 모두 이 단계에서는 우스타샤 체제를 지지하라고 국민들에게 호소했다. 농민당 당수인 마체크와 크로아티아 카톨릭 수장인 대주교 스테피나츠(Stepinac)는 국민들에게 이 체제를 지지할 것을 호소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마체크는 그의 농장으로 은퇴했으며 나중에는 가택 연금을 당했다. 책임 있는 상당수의 인사들이 대부분 정치력을 상실하면서 국가 통제권은 이제 민족주의 열정에 광분한 일단의 극단 민족주의자인 우스타샤의 손으로 들어가고 말았다. 따라서 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크로아티아 농민당과 카톨릭 교회는 비록 개인이 우스타샤에 적극 협조하거나 반대한 경우는 많았지만 수동적인 자세를 견지할 수밖에 없었다.
파벨리치와 악수하는 스테피나츠 대주교. 많은 세르비아인 학살과 관련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훗날 그는 로마 교황청에 의해 성인으로 추앙되었다.
이 정권은 통치 기간 내내 무정부 상태를 연출할 정도로 무능했으며 결국 이들은 민족 지상주의를 대내외에 표방하면서 대학살극을 자행하고 말았다. 학살 목표는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 인이었다. 게다가 알렉산더 아래에서 모진 학대를 받았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이슬람 교도들도 좋은 기회라고 하면서 이 학살극에 참가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였다.
1941년 우스타샤에 의해 학살된 세르비아인 가정
크로아티아인들이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하기 위해 사용했던 칼
테러를 가하는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당원(左)과 학살되는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에서 독일군이나 이탈리아 군 때문이 아니라 바로 크로아티아 인에 의한 세르비아 인의 무자비한 학살이 계속되는 내전 상태에 돌입했던 것이다. 이때 모두 35만여 명의 세르비아 인이 피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 내에서는 세르비아 인의 통곡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다. 거기에다가 크로아티아 인들은 자신의 종교인 로마 카톨릭을 세르비아 정교회 교도인 세르비아 인에게 강요하기 시작했다. 이들의 폭력과 위협에 못 이겨 약 20만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세르비아 인이 카톨릭으로 개종한 것으로 알려진다. 그러나 개종 작업이 그들이 원한 만큼 충분한 실적을 올리지 못하자, 이번에는 아예 정부가 주체가 되어 크로아티아 정교회를 창설하고 세르비아 정교회 교도들을 끌어 모으기도 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유고슬라비아에서 일어난 학살 사건을 표시한 지도
사태는 끝없이 혼미 상태로 접어들었고 집단 학살에 이은 기근은 오히려 이 지역의 점령 세력인 독일군에게 엄청나게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독일군 지도자들은 우스타샤가 아닌 보다 책임있는 정부가 들어서기를 기대해 가택 연금 중인 마체크를 찾아가 정부를 맡아줄 것을 요구했으나 삼고초려에도 마체크는 응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독일 점령군 지도부 내에서도 이견이 팽팽히 대립하였다. 점령군 사령관인 에드문트 폰 글라이제 호르슈테나우는 이 같은 무정부적 테러 상태가 종식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당시 제국의 외무장관인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와 끈을 대고 있는 정치 장교 지그프리트 카세는 오직 우스타샤만이 독일이 신뢰할 수 있는 유일 세력이라고 치부하고 있었다. 권부에 줄을 대고 있는 카세가 계급을 훨씬 초월한 파워를 과시하고 있는 상태에서 사령관도 무작정 자신의 의견을 밀고 나갈 수만은 없었다.
에드문트 폰 글라이제 호르슈테나우 지그프리트 카세
특히 크로아티아 점령군의 목적이 사령관을 움직일 수 없게 했다. 점령군의 최대 목표는 군수송 시설을 보호하고 군수 물자 제조에 필요한 지하 자원을 확보하는 데 두고 있었다. 때문에 점령군은 이를 보다 효율적으로 시행키 위해 우스타샤 체제와는 별도로 수비대(Domobranci)의 강화에 보다 치중을 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우스타샤 체제는 사실상의 정부 역할을 수행하지 못하고 있었고, 우스타샤를 지탱해 주는 군병력도 제대로 갖추고 있지 않았다. 이전까지 군장교의 대부분과 모든 장군은 세르비아 인이었으며 크로아티아 인은 실전 경험이나 군사 훈련의 기회도 없었기 때문이다.
수비대(domobranci)
1943년 이탈리아가 연합군에 항복하자 크로아티아는 민족주의 이상의 하나인 대크로아티아를 만들어 냈다. 이탈리아가 점령했던 달마티아의 아드리아 해안 지역을 우스타샤 정권이 그대로 물려받았기 때문이다. 이후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의 광란 상태는 거의 극에 달했다. 가택 연금 상태에 있던 마체크는 그의 회고록에서 이 당시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나는 우스타샤 요원에게 네가 지은 죄를 보건대 하느님이 두렵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다. 이 친구는 대답하기를, ‘나는 내가 지은 죄가 무엇인지 완전히 알고 있다. 나의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지을 죄까지 생각해 보면 나는 분명히 지옥의 불길에 태워질 것이다. 그러나 나는 적어도 크로아티아를 위해 그 불길을 받아들일 것이다.’라고 했다”
우스타샤 수용소에서 구출된 세르비아 어린이들
세르비아 인 학살을 이끌었던 우스타샤는 그들의 발판이었던 전쟁이 끝나자 그들 역시 정해진 운명에 따라 죽음을 향해 줄달음쳐 갔다. 독일군이 철수하자 그들은 살길을 모색한 끝에 크로아티아 북부 지역을 점령한 영국군에 항복키로 했다. 그 숫자는 우스타샤 체제에 적극 활동했던 주동자뿐만 아니라 그 가족까지 합쳐 모두 10만 명이 넘었다. 그러나 이미 연합국은 이러한 일에 대비해 내부 규정을 마련해 놓고 있었다. 즉 포로들을 그들의 조국 해방을 위해 추축국과 싸운 정부에게 양도한다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영국군은 이들 모두를 반파시스트 투쟁을 벌여 온 티토의 파르티잔 세력에게 넘겨 주었다. 수많은 민간인들이 포함된 우스타샤들은 그 다음 몇 주 안에 죽거나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 중 살아남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반드시 피에는 피로 보복을 하는 운명이 발칸의 법칙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