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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역사 - 29. 전쟁의 주역, 유고 인민 해방군 해부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2.09.08|조회수1,608 목록 댓글 0

유고 인민 해방군(이하 연방군)은 유고 내전의 한가운데에 있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도 연방군과의 교감이 없었다면 결코 전쟁에 돌입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왜 연방군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대통령과 발맞추어 발칸 반도를 전쟁으로 몰아갔는지를 밝혀내야만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유고 내전의 성격을 이해할 수 없다.

구 유고슬라비아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군의 복장

 

제일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바로 유고 연방군의 인적 구성이다. 직업 군인(장교) 가운데 세르비아 인이 70%를 넘는다. 따라서 연방군은 그 이름에 관계없이 세르비아와 같은 배를 탈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바로 이데올로기적 천연성이다. 이 이데올로기는 공산 체제가 신봉해 온 사회주의이며 실제로 군장성을 비롯한 대부분의 직업 군인은 공산당원이었다. 1990년 이후 사회주의 체제 유지를 강력히 밀고 나갔던 곳은 바로 세르비아였다.

세 번째, 연방 기구와 막대한 연방 예산을 유지하는 데에 세르비아와 연방군의 의기가 투합되었다. 즉 유고가 한 조각으로 살아남아야만 연방군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고 막대한 예산을 계속 쓸 수가 있었다. 이 점은 80% 이상의 공무원이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출신인 연방 정부에게도 동일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티토의 주도 하에 형성된 연방군의 성격이다. 즉 연방군은 티토의 일당 독재 체제를 떠받치는 중요한 버팀목이었다. 군은 바로 이 체제를 유지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다민족 간의 통합을 유지하는 역할을 해왔다. 티토 사후 10년간은 바로 유고 연방군이 헌법이 규정한 테두리를 점차 벗어나 군의 영역을 확장해 온 기간이었다.

유고 연방군 장성들, 중앙은 티토

 

이러한 여러 가지 요인 가운데 연방군을 세르비아측으로 견인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연방군이 가진 조합적 이익을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전쟁은 그 결과였다. 일단 성립된 군이나 관료 조직은 결코 스스로 축소되지 않는다. 예컨대 어떤 군대라도 그 지도부는 군비 축소를 원하지 않는다. 그 명분이 세계 평화에 도움이 된다 하더라도 군비가 줄면 별자리가 줄어들고 승진할 기회도 줄어들 수밖에 없다. 또한 군 예산은 점점 더 줄어들고 마침내 군대의 광범위한 특권마저 사라져 버린다.

연방군이 해체될 경우 지금까지 누려 왔던 모든 특권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라는 불안이 바로 연방군을 세르비아 쪽으로 경도시키는 역할을 해왔다. 후에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전쟁 초기에 연방군 측의 작전은 적어도 전쟁이 종결되어도 연방의 골격은 그대로 유지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세워진 것이고, 그것이 군 작전의 최대 목표였다. 유고 연방군은 연방이 존속한다는 것을 전제로 해야 다음과 같은 조합적 이익을 가질 수 있었다.

 

1. 광대한 군 조직 유지(그래야 장성도 많아져 승진도 할 수 있으며 정부 예산을 많이 받아 쓸 수 있다.)

2. 정부 자산에 대한 광범위한 특권

3, 광범위한 내부의 자율성(연방이 다민족 국가이기 때문에 통합성을 유지하는 중요 기관으로서 그 자율성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4. 전 국가 체제에 대한 광범위한 감시 기능

5. 어떤 민간 기관도 도전할 수 없는 압력 단체

6. 방위 산업을 중심으로 한 군수 산업 복합체에 대한 전면적인 통제권과 그 이익

 

이런 이해관계 때문에 연방군 수뇌부는 1990년 12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서 강력한 연방 존속을 주장하는 공산당이 승리를 거두자 노골적으로 이를 환영했다. 특히 벨리코 카디예비치 당시 국방 장관은 성명을 통해 선거 결과에 대한 공개적인 환영 의사를 밝혔다.

벨리코 카디예비치

 

티토가 사망한 1980년에는 연방군의 수가 22만 명에 달했으나 계속 감소 추세를 보여 1992년의 비공식 통계에 따르면 15만 명에 불과했다. 10년 만에 7만 명의 정규 병력이 줄어든 것이다. 군 병력 감소의 가장 큰 원인은 1980년대의 불경기를 반영한 예산 부족이었다. 게다가 1990년 이후 각 공화국이 공화국 소속 장정의 연방군 충원을 중단시키거나 거부함으로써 이 흐름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1991년 3월 7일 슬로베니아는 슬로베니아 출신 장정의 연방군 입대를 중단시켰으며 다만 자원자에 한해 이를 허용하는 조치를 취했다. 물론 크로아티아도 바로 이에 합류했다.

연방군 중 육군은 행정 구역과 일치하는 6개 공화국 2개 자치주에 각각 부대를 배치하였다. 예비군은 약 50만 명에 달했다. 육군이 보유한 무기 가운데 대부분은 허가를 받아 유고에서 자체 생산했다. 예컨대 육군의 기본 무기인 칼라시니코프(AK) 소총과 휴대용 로켓(RPG) 등은 소련에서 기술을 도입해 유고에서 자체 생산했다. 또한 다탄두 로켓, 권총을 비롯한 무기 등도 자체 생산하고 있으며 전투기도 일부 생산하고 있다. 그 밖에 해군이 보유하고 있는 미사일 잠수함 등도 자체 기술로 생산했다. 그러나 자체 생산 품목도 그 핵심 부품은 모두 서방에서 도입했다. 제트 엔진, 전자 부품 등이 대부분 수입해 조립한 것들이다.

중화기는 소련에서 직접 수입하거나 소련 기술로 다른 동구권에서 조립한 것을 수입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며 일부 품목은 자체 생산하고 있다. 탱크의 경우 M-54, M-55, T-72, M-84(T-72의 개량형) 등이고 공군기는 미그-21, 미그-29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헬리콥터는 MI-8, KA-25로 무장하고 있다.

슬로베니아에서 작전 중인 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M-84 전차

 

1941년 요시프 티토가 창설한 연방군은 그들의 정통성을 2차 세계대전 시기의 영웅적인 파르티잔 투쟁에 두고 있으며 창설일은 12월 22일이다. 유고 군의 공식 용어는 세르비아 어로 규정되어 있으며 군부 내 공산당원의 수는 최고에 달했을 경우 96% 수준을 유지한 적도 있었다. 게다가 연방군은 당관료를 충원하는 보고의 구실을 톡톡히 함으로써 이른바 ‘진정한 사회주의자를 교육해 내는’ 정치 사회화의 대표적 기관이었다.

연방군의 가장 큰 문제는 이미 1950년대부터 민간의 통제를 벗어나 광범위한 자율성을 누리는 특권 기관으로 변해 갔다는 점이다. 창설 때부터 문제가 되었지만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출신들이 군의 다수로 등장해 연방군의 성격이 세르비아 공화국의 군대처럼 된 것도 큰 문제였다. 연방 헌법 242조는 연방군 충원을 이렇게 규정해 놓았다. “유고슬라비아 인민 해방군의 장교와 그 승진은 각 공화국과 자치주의 인구 비율에 따른다.” 헌법 규정은 겉으로 보기에는 합리적이지만 실제로 많은 세르비아 인이 세르비아 밖의 각 공화국, 자치주에 흩어져 살고 있었고, 특히 소득이 낮은 남쪽에 사는 세르비아 인의 지원이 많았다.

1981년을 기준으로 유고슬라비아 인구와 연방군의 직업 장교 분포를 다음 표를 통해 비교해보면 이 같은 경향을 확실히 파악할 수 있다.

민 족

연방 인구 대비(%)

전체 직업 장교 대비(%)

몬테네그로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이슬람

슬로베니아

알바니아

헝가리

민족을 결정할 수 없는 유고슬라비아 인

기타

2.5

39.7

22.1

5.8

8.4

8.2

6.4

2.3

1.3

 

3.3

6.2

60.0

12.6

6.3

2.4

2.8

0.6

0.7

6.7

 

1.6

 

각 공화국별로 설치된 지역 방위군은 바로 1968년 소련의 탱크에 의해 무너진 ‘프라하의 봄’이 만들어 낸 작품이었다. 1956년 헝가리 혁명 진압에 이어 1968년 소련이 체코를 대규모로 침공한 작전은 티토로 하여금 소련을 의심하게 만들었다.

유고는 바로 방위력을 강화하기 위한 군 체제 개편에 들어갔다. 유고 연방군이 유고 내의 유일한 군대였으나 1968년 마침내 연방군의 무력 독점 체제는 깨졌다. 6개 공화국 2개 자치주에 지역 방위군이 설치된 것이다. 물론 지역 방위군은 경무장만 할 수 있도록 했지만 자체 조직과 예산, 그리고 각 지역의 언어를 공용어로 사용토록 했다. 지역 방위군은 연방군의 통제를 받으며 사령관 임명권을 1980년까지 연방군 최고 사령관인 대통령이, 티토 사후에는 집단 지도 체제인 대통령 위원회가 가졌다.

주요 지휘관은 연방군에서 제대한 직업 군인들이 많이 기용되었고 전체 병력은 적게는 연방군의 4배, 많을 때는 5배 정도 되었다. 특히 지역 방위군 조직법에 따르면 지역 방위군은 소총을 기본 화기로 하는 경무장만 할 수 있었으며 그나마 지역 방위군 전체 예산은 연방군 예산의 12분의 1에 불과했다.

티토 사망 후 연방군은 사실상 연방 체제를 유지하는 책임과 권한을 행사하며 모든 지역 방위군을 연방군 통제 하에 넣는 작업을 시작했다. 1981년에 일어난 코소보 주 시위 사태는 알바니아 인이 대부분인 이 지역의 방위군을 철저히 재조직해 연방군의 통제를 강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민족주의 바람이 더욱 세차게 몰아치던 1990년이 되자 연방군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에 대한 통제를 확고히 하기 위한 전략을 세워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연방군은 우선 크로아티아 지역 방위군에 긴급 명령을 내려 지역 방위군 무기를 연방군 무기 수준으로 교체한다고 발표했다. 연방군이 슬로베니아보다 크로아티아 지역 방위군을 첫 공략 대상으로 삼은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지역 방위군의 주요 지휘관들이 세르비아 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연방군은 크로아티아 지역 방위군 무기는 받되 이를 대신할 연방군 장비는 지급하지 않았다. 연방군은 1990년 4월 17일부터 5월 15일 사이에 크로아티아 방위군이 소유하고 있던 소총 20만 정을 회수하는 데 성공했다. 게다가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해 여름부터 세르비아 인이 거주하는 크닌(Knin) 지역에서 계속되었던 세르비아 인의 소요를 진압하는 데 골머리를 앓는 바람에 지역 방위군을 크로아티아 공화국 명분에 맞게 개혁할 시간이 없었다. 게다가 경찰 병력마저 세르비아 측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크로아티아는 기댈 언덕이 없었다. 연방군이 무력으로 개입하면 도대체 무엇으로 그들을 막아야 할지 막막했다. 지역 방위군을 개편하는 시기는 이미 놓쳐 버렸고 경찰마저 세르비아 인 일색이니 결국 마지막 카드는 민병대를 조직하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정규 경찰 병력은 아니지만 준경찰 역할을 하고 있던 경찰 예비대를 무장시키기 시작했다. 정규 경찰은 세르비아 인이 다수였지만 경찰 예비대는 크로아티아 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크로아티아는 지역 방위군 무기마저 연방군에 거의 반납해 버린 상태라 무기 확보가 지상 명제로 등장했다.

크로아티아는 헝가리 쪽으로 손을 뻗쳤다. 이때 헝가리는 과거 공산 시절에 정규군 이외의 예비군이 보유하고 있던 총을 처분하지 못해 속을 태우고 있었다. 헝가리 정부는 유고 연방이 무너져야 세력 확대가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발 빠르게 연방 해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있었다. 때가 때인 만큼 헝가리 정부는 크로아티아 측 수입 회사인 아스트라사에 모두 6천 정의 칼라시니코프 소총과 권총 5천 정, 그리고 상당한 양의 탄약을 수출했다. 세르비아 측과 연방군은 헝가리 측에 공식 항의했지만 이 무기는 모두 무장 준비를 하고 있던 크로아티아 경찰 예비대에 분배되었다. 크로아티아 경찰 예비대, 민병대 등은 1991년부터 1992년까지 총병력 약 2만 명, 탱크 약 2백 대, 공군기 16대를 보유한 것으로 공식 확인됐고 프리기트함 2척도 보유하고 있었다.

크로아티아는 수입을 통해 무장화에 어느 정도 성공했지만 초반에 연방군에게 해제당한 전력은 엄청나게 상실해 있었다. 따라서 크로아티아는 존쟁 초기에 연방군 공격에 처음부터 완전히 열세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밀란 쿠찬이 이끄는 슬로베니아는 연방군의 지역 방위군 해체 전략을 적절히 되받아 치면서 조직을 지켜 이를 근간으로 슬로베니아 국민군을 만들었다. 연방군이 크로아티아에 앞서 전쟁 상대자로 고른 슬로베니아 군은 연방군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을 정도로 잘 싸웠고 잘 무장되어 있었다. 그 이유는 바로 지역 방위군을 연방군의 위협으로부터 잘 지켜내 공화국 군대로 전환시켰기 때문이다.

밀란 쿠찬

 

연방군은 크로아티아 지역 방위군 무기 수령 작업이 끝나가고 있던 1990년 5월부터 슬로베니아 지역 방위군에 대한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슬로베니아 정부는 즉각 지역 방위군 지휘관(세르비아 인)을 파면하는 한편 방위군 보유 무기를 다른 장소로 은닉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와 함께 슬로베니아는 유럽 및 아시아 각국, 특히 싱가포르로부터 많은 무기를 수입했다.

1992년 유고 내전때 당시 유고 연방군 소속인 슬로베니아군 모습으로 소총은 싱가포르제 SAR-80 소총이다.유고내전때는 싱가포르제 총기가 꽤 많이 사용 되었는데,울티맥스100도 크로아티아군에 의해서 사용 되었다.SAR-80은 싱가포르가  AR-18소총을 라이센스 생산 하면서 AR-18 생산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진게 SAR-80이다.

 

이 같은 노력으로 슬로베니아 지역 방위군은 명실공히 슬로베니아 공화국 군대가 되었다. 전쟁 직전 슬로베니아 군은 모두 8만 명에다 연방군에 손색이 없는 무기로 무장하고 있었다. 슬로베니아를 쉽게 제압할 것으로 생각하고 첫 공격 목표로 삼아 공격했던 연방군은 간담이 서늘하게 되었으며, 이 때문에 이곳에서의 전쟁은 비교적 빨리 끝나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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