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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슬라비아]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역사 - 33. 영토 전쟁, 크로아티아로의 확전(擴戰)(일부 혐짤 주의)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2.09.16|조회수3,322 목록 댓글 3

유고 내전의 전투 형태는 크게 두 가지로 구별할 수 있다. 우선 유고 연방군이 펼치는 정규전 형태와 현지에 거주하는 세르비아 인이 세르비아와 연방군이 지원한 무기로 민병대를 만들어 펼치는 비정규전이 그 두 번째 형태이다.

비정규군은 정규군과는 달리 그들이 실제로 민족 감정의 희생자인 데다 정규군에게 적용되는 군법도 없어 현지 지휘관의 일방적인 명령으로만 움직이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큰 전투에서는 연방군의 지휘를 받지만 작전의 세세한 부분은 민병대장의 권한이었다. 따라서 세르비아 민병대가 개입한 전투는 그만큼 더 잔인해질 수밖에 없는 현실이었다.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전투가 계속된 지역 중에서도 민병대가 활약한 지역의 전쟁이 더욱 참혹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내전 당시 상황 사진(부상당한 세르비아 민병대원이 동료의 부축을 받으며 이동하고 있다)

 

그렇다면 왜 북방 지역인 크로아티아에 많은 세르비아 인이 거주하고 있는지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 만약 크로아티아가 슬로베니아에서처럼 각 민족이 섞여 살지만 않았더라면 전쟁은 보가 가볍게 끝났을 것이다. 초기에 치른 슬로베니아와의 전쟁이 쉽사리 끝을 맺은 사실로도 검증이 된다. 슬로베니아는 대부분 슬로베니아 인으로 구성되어 있어서 일시적으로 전쟁은 있었지만 그 후 별다른 문제는 생기지 않았다.

또 하나 중요한 사례가 체코슬로바키아 연방의 분리 협상 과정이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유고처럼 양쪽 인종이 섞여 살고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양측의 민족주의 지도자들이 연방을 조각내어 딴살림을 차리고 정치적인 공방전은 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로 불이 붙었지만 실질적으로 양민족 사이에 유혈 분쟁이 생기지 않았음을 주의 깊게 들여다봐야 한다.

유고의 북부 지역에 거주하는 세르비아 인을 추적하려면 우선 한 세기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초까지 발칸 반도에서는 몰락해가는 노제국 오스만 투르크와 새로이 융성해 가는 합스부르크 왕가와의 한판 승부가 예고되고 있었다. 크로아티아는 합스부르크의 최전선이었고 세르비아는 오스만 투르크의 최전선이었다.

오랫동안 오스만 투르크의 철권 통치를 받아 온 세르비아는 말 그대로 오스만 투르크의 식민지 정책 때문에 제대로 된 학교 하나 없는 문맹의 나라였다. 연구가들에 따르면 당시 교육 기관이라고는 세르비아 내에 있는 초등학교 두 개가 전부였다. 이 두 개의 초등학교를 제외하고는 중등학교나 대학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뿐만 아니라 문화를 전파할 수 있는 인쇄소도 없었다. 그나마 세르비아에 있는 초등학교에서는 세르비아 어를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 어를 공식 언어로 교육하고 있을 정도였다. 이웃 몬테네그로의 상황은 더욱 열악했다. 블라드카 니예고스라는 사람이 1834년 초등학교를 세울 때까지 교육 기관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블라드카 니예고스의 밀랍 인형

 

그러나 합스부르크 왕가의 지배를 받은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의 경우는 전혀 다른 상황이었다. 이미 1767년의 통계를 보면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를 합쳐 모두 24개의 초등학교가 설립되었으며 1790년에는 76개나 되었다. 특히 슬로베니아의 경우 1849년 초등학교는 이미 1천 개를 넘어설 정도였다.

오스만 투르크의 지배를 받고 있던 세르비아 인은 국경 넘어 바로 이웃에 살고 있는 크로아티아나 슬로베니아의 소식을 가끔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이 저 국경선만 넘어가면 잘살고, 좋은 교육을 받을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당연한 일이다.

세르비아 인은 이런 생각으로 잘사는 선진국인 합스부르크 왕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물론 국경을 넘는다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때로는 국경을 넘다 오스만 투르크 군 국경 수비대에 걸려 아까운 목숨을 빼앗기는 경우도 많았고, 눈치 빠른 사람들은 뇌물을 주고 손쉽게 국경을 통과하기도 했다.

이런 추세가 계속되면서 합스부르크 영내로 엄청나게 많은 세르비아 인이 쏟아져 들어왔다. 세르비아 인은 북쪽 길이 서서히 막혀들자 동쪽의 알바니아 쪽으로 이동해 가기도 했고(현재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또 어떤 이들은 동북쪽의 살기 좋은 달마티아로 들어가기도 했다. 아무튼 양제국이 접경하고 있는 합스부르크 국경선의 경우 세르비아 인이 전체 거주민의 3분의 1에 달하게 되었다.

‘꿈의 별천지’ 합스부르크 제국으로 수많은 세르비아 인이 몰려들자 합스부르크 측은 이들을 적절히 이용할 방도를 찾았다. 우선 세르비아 인을 국경 수비대로 모집하여 실전에 배치했다. 세르비아 인은 제대로 된 직업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적은 임금을 받더라도 수비대에서 일하였다. 오스만 투르크와의 잦은 충돌 속에서 세르비아 인은 최전선에서 인간 방어벽이 되어 주었다. 합스부르크 제국은 세르비아 인을 오스만 투르크의 침략에 대응하는 전쟁 자원으로서의 역할과 함께 제국 내에서의 정치적 역할을 가진 세력으로 주목하게 되었다. 세르비아 인 용병들은 합스부르크 왕가의 토착지에 존재하는 주세력을 제압할 수 있는 유용한 도구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크로아티아나 보이보디나 혹은 헝가리 지역의 봉건 영주들이 민족주의를 앞세워 합스부르크 왕가에 반기를 들면 세르비아 인이 나타나 반대 세력을 무지막지하게 짓밟아 버렸다. 물론 황제에 대한 충성도 충성이지만 속을 한 꺼풀 벗겨 보면 전리품으로 받을 수 있는 토지 소유욕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실제로 합스부르크 제국은 이들의 충성심을 유도하기 위해 전리품으로 토지를 나눠 주었다.

그런데 세르비아 인은 지방 영주들이 비엔나 정부에 대항해 자신이 전리품으로 받은 토지를 다시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했다. 그러다 보니 토착 봉건 영주들의 입장에서는 세르비아 인의 존재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한때 기세를 올렸던 세르비아 인의 운명도 서서히 기울어 갔다. 특히 프란시스 2세(재위 1792~1835) 황제 시대부터 대오스만 투르크 전선의 첨병 역할뿐만 아니라 제국 내의 민족주의자를 처단하는 국내 정치용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는 세르비아 인의 역할이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국내외 상황이 급변했기 때문이다.

프란시스 2세

 

우선 국내적으로는 프란시스 황제의 집권을 계기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배경이 되었던 카톨릭 열기가 급격히 퍼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리스 정교회를 앞세운 러시아측의 정책 방향에 대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의구심이 급격히 고조되었다. 이 때문에 합스부르크 제국 내에서는 같은 정교회에 뿌리를 둔 세르비아 인에 대한 반감이 심각할 정도로 고조됐다. 당시의 유명한 재상 메테르니히는 이 세르비아 인을 개종시키는 정책을 구사하기에 이른다.

그 후 세르비아 용병들의 지위는 급격히 하락했고 그 숫자마저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낙후된 고국으로의 귀환을 마다한 채 이 북부 지방에서 뿌리를 내리고 살았다. 적어도 그들의 입장에서는 이 북쪽 땅이 제2의 고향이 된 것이다.

이런 역사적 상황 때문에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전쟁이 시작될 경우 그 양상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를 야기할 수밖에 없는 처지인 데다가, 슬로베니아 전투가 소강 상태에 빠지면서 결국 전장은 크로아티아 쪽으로 옮아가기 시작했다. 1991년 7,8월 두 달 동안 양측의 전투는 비교적 국지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물론 이 짧은 기간 동안 다섯 번의 휴전 협정이 체결되고 또 깨어졌지만 양측 지도자들은 전면전으로 전쟁을 확대하는 데에는 다 같이 주저하고 있었다. 전쟁의 결과를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기술적인 측면도 작용했다. 크로아티아의 주전력이던 지역 방위군이 전쟁 전 무장해제된 상태였기 때문에 가능한 한 전면적인 충돌을 피하면서 협상 쪽에 더 무게를 싣고 있었다. 또한 슬로베니아 전투의 쓰라린 경험을 안고 있는 연방군으로서도 좀더 신중히 대처할 필요를 느끼고 있었다.

크로아티아 지역 방위군의 무기를 회수하는 연방군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측이 3개월간 유예한 독립 시한은 10월 7일 자정이었다. 그 다음날 슬로베니아는 유고 연방 화폐인 디나르를 폐지하고 새 화폐를 도입했고 크로아티아 국회도 같은 날 연방법 무효를 선언했다. 세르비아는 결국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연방 탈퇴를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한 것이다. 이제 연방군의 작전은 초기의 연방 분리 저지에서 가능한 한 많은 영토를 확보한다는 전략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게 됐다.

이 시점에서 유고 내전은 전선을 따라 흩어져 있던 유적의 파괴 문제로 다시 한 번 세계 여론의 집중을 받게 되었다. 이른바 문화재를 볼모로 한 ‘문화재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특히 유엔이 제정한 인류가 보존해야 할 문화재 중 중요한 것들이 바로 크로아티아의 달마티아 해변 주변에 흩어져 있어 이 같은 세계적 유산이 보존될 수 있을지 각국이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아드리아 해의 자다르(Zadar)에 있는 13세기에 지어진 오랜 교회들이 연방군의 공격을 받아 교회 지붕에 구멍이 나는 사건이 크로아티아측의 TV로 생생히 공개되었다. 자다르 바로 아래에 있는 시베닉(Sibenik)에는 아드리아 해안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이름 높은 ‘성 야곱 성당’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성당 역시 지붕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시베닉 성 야곱 성당

 

물론 문화재 파괴의 일차적 책임은 무차별 공격을 퍼부은 연방군과 세르비아 민병대에 돌아갔지만 크로아티아측 역시 문화재를 총알받이로 이용했다는 비난을 동시에 받았다. 예컨대 자다르 시의 크로아티아 방위군 본부는 합스부르크 시절 군기지로 사용했던 유서 깊은 건물에 입주해 있었다. 또한 시베닉에는 성 야곱 성당 바로 앞에 크로아티아 방위군의 방공포가 설치되었다. 크로아티아측은 일단 중요 문화재가 있는 곳에 핵심 방위 본부를 설치하는 전략을 세웠다. 세르비아측이 이를 알고 공격할 경우 문화재가 파괴될 수밖에 없고 세르비아측은 당연히 문화재 파괴의 주범으로 낙인찍힐 것이고, 이 때문에 세르비아측이 공격하지 못할 것이라는 계산이었다.

그래도 세르비아측이 공격해 문화재를 훼손하기만 하면 준비했던 TV 카메라로 찍어 세계 각국의 언론사에 신속히 공급했다. 크로아티아의 카톨릭 사제인 듀로 신부는 한 서방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우리 카톨릭 교회는 이미 크로아티아 정부에 대해 교회를 더 이상 군사적 목적으로 사용하지 말 것을 촉구했다. 그러나 나는 세르비아 인이 크로아티아 국민의 생활과 밀접히 결부되어 있는 카톨릭 교회를 파괴하려 한다는 사실 또한 믿어 의심치 않는다.”

크로아티아 군

 

문화재 보존이라는 세계적 관심이 그 절정에 달한 때는 1991년 10월 초부터 시작된 두브로니크(Dubronik) 공방전이었다. 아드리아 해에서 가장 아름다운 해안 성곽(城郭)인 두브로니크는 주변 경관이 몬테네그로 인에 의해 대거 파괴된 특이한 경우이다. 10월 2일 연방군 소속의 몬테네그로 군은 국경을 넘어 크로아티아로 진격해 들어왔다. 특히 몬테네그로 인은 용맹심이 넘치다 못해 무자비한 것으로 유명했다. 그들이 지나가는 곳에는 폐허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두브로브니크

 

고현정이 모델로 나온 맥심 아라비카 커피 광고의 배경도 두브로니크였다.

 

세르비아 인을 진정한 친구로 여기는 몬테네그로는 다소 특이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들은 스스로를 ‘전투 민족’이라고 자랑스럽게 부른다. 예를 들어 내전 기간 중에 베오그라드에서 징집에 응하는 세르비아 젊은이들은 15%에 불과했다. 나머지는 대부분 잠적해 버렸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몬테네그로에서는 징병 기피자가 별로 없었다. 싸움을 멀리하는 자는 남자가 될 수 없다는 것이 몬테네그로의 전통적 관념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 같은 몬테네그로 인의 심성은 몬테네그로가 처한 자연 환경과 역사에 그 뿌리가 닿아 있다. 어떤 민족을 알기 위해서 가장 먼저 살펴볼 것은 그 민족의 건국 신화이다. 몬테네그로의 건국 신화를 보면 이 지역이 얼마나 험한 산악 지역인지 잘 나타나 있다.

“신이 이 세상의 창조를 다 끝마쳤을 때 신은 자신의 가방 속에 아직도 많은 흙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는 이 흙 전부를 세계의 한 모퉁에에다 통째로 부어 아주 열악한 환경을 만들었다.”

몬테네그로의 자연풍광

 

이곳이 바로 오늘의 몬테네그로였다. 본래 몬테네그로라는 지명은 ‘검은 산’이란 뜻인데 이탈리아 어에서 차용해 15세기부터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이토록 험한 지형 때문에 발칸 반도를 말발굽으로 짓밟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도 이 지역만은 완전히 점령하지 못했다. 그 후 요시프 티토가 주도하는 공산 파르티잔도 그 본부를 주로 몬테네그로에 설치, 독일군의 추적을 피했다.

그래서 몬테네그로 인은 크로아티아 파시즘에 대항하지 않고 줄행랑부터 치는 베오그라드의 젊은이들을 경멸해 왔다. 그들은 또 이 두브로니크가 크로아티아 파시스트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몬테네그로 군대가 두브로니크 남쪽 지역을 점령했을 때 사실상 크로아티아의 두브로니크 방위군은 40년 된 대포 2문과 기관단총 한 정밖에 없는 절망적인 상태였다. 그 절망 속에서 세계 여론은 인류 문화재를 파괴하려는 연방군과 몬테네그로 군 쪽으로 쉴 새 없이 화살을 날려 보냈다.

현대의 몬테네그로 군

 

두브로니크 성은 바다에 접한 천연의 요새로 그 성의 절경은 사람의 솜씨가 아니라고 할 정도로 완벽하게 보존되어 오고 있었다. 중세 시대를 배경으로 한 상당수의 영화가 이 두브로니크 주변에서 많이 제작되는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다. 두브로니크 성은 본래 13세기에 건축되었다. 1667년 이 지역에는 대지진이 일어났고 성 역시 폐허로 변해 버렸다. 그 후 재건축된 성이 오늘날까지 보존되어 왔다. 시기적으로 20세기 후반, 그것도 문명의 요람이라고 자처해 온 유럽의 한 모퉁이에서 역사적인 문화재를 파괴하는 전쟁이 계속되고 있다는 점에 대해 온 유럽 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두브로니크는 1991년 세르비아 군으로부터 약 3개월에 걸친 총공격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 되였으나 1999년부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역사적인 기념물들은 복원되어 옛 명성을 되찾을 만큼 아름다운 해안 도시로 거듭나고 있다.

 

크로아티아 방위군은 일단 이 성의 앞부분에 포진하고 있었으며 만약 연방군이 무차별 공격을 해오면 성안으로 들어가 싸운다는 전략이었다. 성벽은 두께가 무려 4m였지만 훼손이 불가피했다. 이에 따라 문화재 보존의 책임이 있는 유네스코(유엔 교육, 과학, 문화 기구)는 직원을 이 전쟁터에 파견하여 조사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유네스코는 전인류가 보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유적 337곳을 정해 특별히 보호 활동을 펴고 있었다. 구유고 연방 내에는 모두 9개의 보호 지역이 있는데 그 대표적인 곳이 바로 두브로니크 성이었다. 문화재 보호를 위한 유네스코 협약은 유고를 포함해 세계 104개국이 서명했지만 전쟁터 속에서 유네스코가 할 수 있는 일은 세계 여론에 호소하는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전투로 훼손된 두브로니크의 종탑

 

연방군은 일단 국제 여론을 의식하고 두브로니크 성을 직접 공격하는 전략보다는 연방 해군을 동원하여 해안을 봉쇄하는 등 포위 전략으로 나갔다. 이 봉쇄가 풀리기까지 석 달 동안 이곳 시민들은 엄청난 고생을 감수해야 했다.

세르비아 군의 포격으로 불타는 두브로니크

 

연방군과 크로아티아 간에 가장 치열했던 전투는 아름다운 다뉴브 강 근처의 부코바르(Vukovar)와 드라바 강이 흐르는 오시예크(Osijek)를 연결하는 전선에서 일어났다. 특히 부코바르는 세르비아가 직할하는 보이보디나 자치주와 크로아티아가 국경을 접한 도시인 데다 시민의 상당수가 세르비아 인과 크로아티아 인으로 이루어진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세르비아 민병대와 크로아티아 방위군은 연방군의 슬로베니아 공격이 시작된 6월 말부터 곳곳에서 전선 없는 충돌을 계속하고 있었다. 9월 들어 연방군은 본격적으로 부코바르를 탈환 작전을 시작하였다.

전쟁 전의 부코바르 시가지

 

파괴된 부코바르 시가지

 

당시 전투 장면

 

연방군 지도자들은 부코바르를 공격하는 것이 결국은 문제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다는 전제 하에 9월부터 간헐적인 공격을 펴긴 했지만 전체적인 전략은 봉쇄로 일관했다. 이 석 달 동안 부코바르 시에 갇힌 5천여 명의 시민은 그야말로 죽음보다 더한 삶을 살아야 했으며 마침내 11월 23일 견디다 못한 부코바르의 크로아티아 방위군은 항복했다. 연방군은 봉쇄 작전을 편 12주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매일 폭격을 가했다.

세르비아 군인이 부코바르의 함락을 축하하고 있다

 

드라바 강은 오시예크 시를 관통한다. 강폭은 불과 30m. 그러나 이곳을 경계로 강북은 세르비아 인이, 강남은 크로아티아 인이 주로 거주했다. 전쟁이 시작되면서 이 강은 돌아갈 수 없는 죽음의 경계선이 되었다. 연방군의 절대적 지원을 받고 있는 세르비아 민병대와 크로아티아 방위군 간의 ‘서로 죽이기’는 오시예크에서만 140명 이상의 사망자를 내게 했다. 무차별 발사되는 박격포에 15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공격에도 살아남은 오시예크 중앙 성당의 지붕마저 내려앉았다.

오시예크 시의 모습

 

싸이는 세르비아보다 크로아티아를 더 좋아하는 것이 분명하다.

 

오시예크는 다만 전선의 일부일 뿐이다. 크로아티아 공화국 내에 거주하는 60만여 명의 세르비아 인이 있는 곳, 그리고 연방군 기지가 있는 곳은 전후방 없이 전선으로 돌변했다.

연방군은 당시 15만 명의 병력, 1,500대의 탱크, 400대의 전투기와 전투 함대까지 지닌 가공할 만한 무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더욱이 군장교 대부분이 세르비아 인으로서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공감하고 있다는 사실이 사태를 더욱 심각하게 했다. 이에 반해 크로아티아는 2만명의 방위군, 약 200대의 탱크, 116대의 공군기, 2척의 해군 함정을 가지고 있어 연방군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전쟁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연방군보다는 바로 세르비아 민병대와 크로아티아 민병대 간의 충돌이었다. 특히 세르비아 민병대가 활동한 지역에서는 더 잔인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그 대표적인 곳이 크로아티아 동부 지역에 있는 보친(Vocin)이라는 곳이었다. 총인구가 2천 명 정도인 이곳은 크로아티아계 주민과 세르비아계 주민이 섞여 살던 곳이었다. 1991년 12월까지 이 지역은 세르비아 민병대 관할 하에 있었다. 연방군은 이곳 민병대를 보스니아 지역으로 투입하기 위해 12월 11일 철수 명령을 내렸다. 물론 세르비아 주민들에게도 철수 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그들은 철수하면서 크로아티아 인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이 마을에서 최소한 39명의 크로아티아 인이 12일과 13일 밤 총칼로 잔인한 죽음을 당했으며 일부는 건물에 갇혀 타죽기도 했다.

보친의 희생자

 

세르비아 민병대는 이 마을에 있던 450년 된 석조 성당을 무기고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무기고를 폐쇄하면서 이 성당을 폭파시켜 버렸다. 그것도 성이 차지 않았는지 크로아티아 인이 거주하던 주택의 3분의 1을 파괴한 후에야 그들은 이 마을을 떠났다.

파괴된 크로아티아인의 집에 세르비아인이 낙서를 해놓았다. 인종간의 전쟁은 유고슬라비아에서 증오와 불신만을 남기게 되었다.

 

폐허가 된 보친의 모습

 

생지옥에서 살아남은 크로아티아 주민들의 말을 종합해 보면 통칭 세르비아 민병대(militia)라고 부르는 세르비아계 게릴라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진다. 그 하나는 본래적 의미의 민병대로 현지에 거주하던 세르비아 인이 연방군의 도움을 받아 조직한 집단이다. 또 하나는 이들보다 훨씬 더 잔인한 체트니크(2차 세계대전 중 세르비아 인들로 조직된 반독일 게릴라들이라는 점은 이미 앞에서 자세히 설명했다)로서, 이들은 현지에서는 ‘살인 부대’로 불렸다. 이들이 바로 블랙 핸드의 네트워크였다.

세르비아 민병대

 

세르비아 민병대는 크로아티아가 연방으로부터 탈퇴하자 그들 독자적으로 크로아티아 공화국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크로아티아 방위군과 전선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살인 부대 ‘체트니크’는 전선을 넘어 적 후방을 자주 넘나들며 통신 교란, 살인, 강간까지 하는 특공대에 속했다. 보친의 크로아티아 주민들은 이 살인자들이 약 1백여 명에 가까운 대규모였으며 그나마 대부분이 술을 먹은 상태였다고 밝혔다. 보친 지역을 유린한 게릴라들이 민병대 소속인지 아니면 체트니크 소속인지 확인되지는 않았지만 대부분의 살인 후퇴하던 체트니크에 의해 저질러졌을 가능성이 더욱 크다는 것이 크로아티아 주민의 주장이다.

체트니크

 

전쟁 초기에 세르비아 정부와 연방군은 민병대 조직과 무장을 모두 장려했다. 이 임무를 실제로 담당한 인물은 연방 국방장관인 미하일 케르테스(Mihalj kertes; 1992년 9월 파시치 연방 총리가 새로 취임한 뒤 파면되었다)와 동료인 마르코 네고바노비치(Marko Negovanovic) 장군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네고바노비치 장군은 전쟁 발발 직후 세르비아 언론과의 회견에서 ‘세르비아 비정규군은 현재 연방군의 통제 하에 편입되고 있는 중’이라고 밝힌 적도 있다. 앞에서 지적했지만 민병대는 바로 밀로셰비치 측근에 의해 조직되어서 무자비한 살육전을 자행하도록 사주받았던 것이다. 그들의 목적은 바로 세르비아 인만의 위대한 대세르비아 건설이었다.

미하일 케르테스

 

작전을 협의하는 케르테스와 네고바노비치

 

크로아티아에서의 전쟁은 인류가 저지른 그 어떤 전쟁보다도 참담한 인권 유린이 이루어졌던 ‘더러운 전쟁’이었다. 1991년 12월 2일 세계적인 인권 단체인 국제 인권 위원회는 유고 사태 보고서를 공개했다. 그 처참한 내용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한 줄만 인용하자. “세르비아측뿐만 아니라 크로아티아의 전쟁 당사자들도 비무장 민간인에 대한 잔악한 고문과 살인을 멈추지 않고 있다.”

크로아티아 군에 의해 총살된 3살된 세르비아 소년

 

크로아티아 민병대인 네오 우스타샤에 의해 살해된 세르비아 민간인

 

인권 보고서가 발표된 지 이틀 후 크로아티아 내 전쟁 지역에 주둔해있던 유럽 공동체(EC) 휴전 감시단의 보고서가 서방 언론에 유출되었다. 이 보고서는 전쟁이 악화된 가장 큰 원인이 바로 연방군에 있다고 격렬히 비난했다. “연방군은 정규군이 아니라 비겁한 군대이다. 그들은 합리적인 원칙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의 기존 지위와 생존을 위한 본능적인 싸움만을 해왔다. 연방군은 바로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전쟁을 계속 확대시켜 왔다. 전쟁은 외부의 군사 개입으로만 멈추게 할 수 있다.”

세르비아 군의 만행

 

1991년 11월 24일 전쟁 개시 1년이 조금 넘어서 유엔 중재의 열네 번째 정전 협정이 발효되었고 그나마 30분 만에 위반 사례가 속출했지만, 이때부터 크로아티아 전쟁은 소강 국면에 들어갔다. 물론 전선에서의 잔악 행위와 충돌은 계속되고 있었지만, 대규모 충돌의 빈도수는 급격히 줄어들었다.

그 첫째 이유는 세르비아와 연방군이 전쟁 목표로 내걸었던 세르비아 인 거주 지역 확보가 부코바르 탈환으로 거의 달성된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연방군이 전쟁을 소강 상태로 끌고 간 두 번째 이유는 서방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독립 승이이 가시화되어 가고 있던 시점에서 필요 없는 무리수를 두어 세계 여론을 악화시킬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이미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의 독립 승인 분위기를 주도하고 있던 헬무트 콜 독일 총리는 1991년 성탄절을 최종 시한으로 못박아 이때까지 전쟁이 종식되지 않으면 두 개 공화국의 독립을 승인할 것이라고 선언한 상태였다. 프랑스를 비롯하여 영국, 이탈리아, 네덜란드 등도 모두 이 시점에서는 승인을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물론 처음에는 각국의 입장이 확연히 달랐다. 독일은 처음부터 조속히 두 공화국의 독립을 유럽이 인정해야만 연방군의 공세를 줄일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다. 이에 반해 프랑스와 영국은 오히려 독립 승인이 전쟁을 부채질할 것으로 전망해 독일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특히 독일 통일 후 외교 발언권을 확대하고 있던 콜 정부를 곱지 않은 눈길로 바라보고 있던 프랑스측은 노골적으로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있었다. 프랑스의 권위지 <르 몽드>는 사설을 통해 독일의 의도는 마치 2차 세계대전 때 크로아티아 자치국과의 관계를 연상시키는 것이라고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나섰던 것이다.

결국 다른 해결책을 찾지 못했던 유럽 공동체는 1992년 1월 15일 만장일치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승인했다. 유럽 각국이 그동안의 이견에도 불구하고 독립을 승인한 결정적 이유는 1월 8일에 발생한 충격적인 사건 때문이었다.

이날 유고 연방 공군이 유럽 공동체 휴전 감시단 5명이 탄 헬기를 격추시켜 버렸기 때문이다. 이 사태는 유럽 공동체 지도자들을 격노시켰으며 어떤 방법으로라도 그 반응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 했다.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승인은 어떤 의미에서는 가장 적절한 보복 조치였다.

게다가 영국이 독일의 승인 분위기 유도에 협조하기 시작했다. 가장 큰 원인은 1991년 12월 네덜란드의 마스트리히트에서 열린 유럽 공동체 정상 회담에서 콜 총리가 영국의 존 메이저 총리를 측면 지원해 주었고 메이저는 이 문제를 독일측에 사실상 일임했기 때문이다.

존 메이저

 

유고 내에서도 그마나 이름밖에 남지 않은 유고 연방 정부를 이끌어 오던 안테 마르코비치 총리가 1991년 12월 전격 사임했다. 연방 정부의 1992년 예산 중 81%가 연방군에 배정되었다는 것이 사임의 이유였다. 물론 그의 사임은 사실상 연방 체제가 완전히 무너졌음을 내외에 공표하는 ‘마무리 작어’이기도 했다.

안테 마르코비치

 

그 동안 승인 문제에 철저히 반대 입장을 견지해 온 프랑스는 사면초가 신세가 되었다. 영국마저 입장을 바꿔 버렸고 내전 분위기를 봐도 승인이 대세였다. 프랑스는 승인을 하면서도 체면을 살리기 위한 전략을 마련하느라 골치를 썩이고 있었는데 마침내 한 가지 조건을 붙여 승인 쪽으로 돌아섰다. 그 조건이란 것은 크로아티아가 소수 민족에 대한 권리를 존중할 때까지 프랑스 외교 사절을 크로아티아에 파견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유럽 공동체는 승인에 앞서 이에 필요한 법률적 작업을 진행해 왔다. 로베르 바뎅테르(Robert Badinter) 프랑스 헌법 재판소 소장을 위원장으로 구성된 유럽 공동체 법률 자문단의 활동이 바로 그것이다. 이 자문단은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등이 유럽 공동체 협약에 규정된 승인 요건에 맞는지를 검토하는 작업을 했다. 자문단은 기본적으로 첫째 인권에 대한 존중 여부, 둘째 공통적인 문화를 가진 영토와 인구를 가지고 있느냐를 승인 기준으로 정해놓고 있었다.

로베르 바뎅테르

 

바뎅테르 소장은 최종 보고서를 제출한 자리에서 크로아티아의 헌법은 소수 민족에 대한 인권 보장이 너무나 미약해서 승인을 받을 수 없다고 단정했다. 최종 결론은 슬로베니아와 마케도니아는 승인 조건에 합당하지만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승인받을 요건을 갖추지 못했다는 지적이었다. 프랑스의 입장은 바로 법률 자문단의 입장을 수용한 것이었다. 물론 법률 자문단의 보고서는 현실하고는 동떨어진 부분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아무튼 이때부터 전쟁 상태를 종식시키기 위한 마지막 수단은 유엔 평화 유지군의 배치밖에 없다는 인식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전쟁 당사자들도 이 방안을 현실성이 있는 것으로 판단했다.

우선 전쟁의 핵심인 연방군은 크로아티아로부터 서서히 철수를 시작했다. 크로아티아 역시 연방군 기지에 대한 봉쇄를 풀어 연방군 병력이 세르비아로 귀환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이에 화답하듯이 연방 해군은 두브로니크 항을 마지막으로 아드리아 해의 8개 항구에 대한 봉쇄를 모두 풀었다.

당시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는 우선 평화 유지군을 배치하는 데 필요한 두 가지 전제 조건을 내세우고 있었다. 그 첫째는 전쟁 당사자 간의 절대 정전이 유지되어야 하며, 둘째 평화 유지군 배치 지역에 대한 양측의 합의가 도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평화 유지군은 전쟁 전의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국경선에 배치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온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이 ‘국경선과 위기 지역’으로 다소 탄력성을 보임으로써 합의 도출 가능성은 높아졌다.

프라뇨 투지만

 

문제는 ‘절대 정전’이라는 첫 번째 조건이 현실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우선 세르비아측 비정규군인 민병대는 크로아티아 영토로부터 철수한 연방군 편제에 포함되어 있지만 이들 지휘자가 연방군 지도부로부터 상당한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크로아티아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던 대표적인 세르비아 민병대 지도자 밀란 바비치(Milan Babic; 치과 의사 출신으로 서방 언론과 가장 많은 접촉을 한 게릴라 지도자)는 “세르비아 공화국이 우리를 배반했고, 유엔 평화 유지군 배치에 절대 반대한다.”고 밝혔다.

밀란 바비치(오른쪽)과 또다른 민병대 지도자 마티치. 바비치는 훗날 전범 재판에 회부되어 13년간 투옥되던 중 네덜란드 헤이그의 교도소에서 자살했다.

 

바비치를 비롯한 대부분의 게릴라 지도자들은 크로아티아측이 무기를 버릴 때까지 싸울 것임을 결의하고 나섰던 것이다. 연방군 현지 지도자들도 부정적인 반응을 보였다. 양측의 격전지였던 크닌(Knin) 주둔 연방군 사령관 라트코 믈라디치(Ratko Mladic) 장군은 평화 유지군 배치에 반대하며 만약 철수 명령이 내린다면 이 명령을 거부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라트코 믈라디치

 

유엔 특사 자격으로 일주일 동안 현지에 와서 당사자들과 협상을 가진 사이러스 밴스 전미국 국무장관과 케야르 유엔 사무총장 및 안보리 대표들은 최종 협의를 통해 대략의 평화 유지군 배치안을 마련했다. 이를 구체적으로 보면 다음과 같다.

        

       사이러스 밴스                      하비에르 페레스 데 케야르

 

1. 연방군은 크로아티아 내 연방군 포스트인 크라이나(Krajna), 서 슬라보니아(Western Slavonia), 그리고 동 슬라보니아(Eastern Slavonia)에서 철수한다.

2. 양측의 비정규 민병대, 게릴라 병력은 무장해제한다.

3. 인종 분포에 따라 배분된 경찰 병력이 보안을 유지한다.

 

물론 평화 유지군은 향측의 완충 지역에 투입되어 예상되는 전투를 사전에 예방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안보리 일각에서는 ‘절대 정전’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을 들어 분쟁이 완전히 멈춘 지역부터 순차적으로 평화 유지군을 배치해야 한다는 절충안을 제시하고 있었다.

유엔 평화 유지군이 배치될 희망이 커진 가장 큰 이유는 세르비아측이 이에 대해 다소 유연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는 정치적으로 유럽 공동체보다는 유엔에 우호 국가들이 그나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더욱이 경제 상태는 전쟁을 계속할 수 있을지 의구심이 들 정도로 어려워져 갔으며, 이는 곧 세르비아 시민의 반전 분위기를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1991년 12월 말까지 연방의 총생산은 50% 이상 줄어들었고 유고의 공식 화폐인 디나르 화는 평가절하를 거듭했다. 세르비아에서는 은행에서 공식적으로 서방 경화(硬貨)에 대해 70%의 프리미엄을 얹어 주고 있는 형편이었다. 연방 외환 보유고도 급격히 줄어 38억 달러에 불과하여 외채 상환까지 중단되고 있는 상태였다.

0 이 수많이 붙은 유고 내전중의 화폐들

 

1992년 2월 9일 유고 현지에서 평화 유지군 파견을 위한 협상을 벌이던 유엔 대표단은 뉴욕의 유엔 본부로 ‘마지막 장애물 제거했으니 가장 빠른 시간 내에 평화 유지군을 파견할 수 있도록 준비하라’는 메시지를 급히 전송했다. 평화 유지군 파견에 가장 강경 자세를 보이고 있던 크로아티아의 크라이나(Krajna) 주둔 세르비아 게릴라 지도자들은 표결을 통해 유엔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결정한 것이다. 물론 이 자리에는 전쟁 초기부터 연방군 작전을 총지휘해 온 강경파 블라고예 아지치(Blagoje Adjic) 참모총장도 일시 방문 중이었다. 그는 표결이 바른 방향으로 진행되었다고 말해 우회적으로 평화 유지군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사를 분명히 했다.

블라고예 아지치

 

그러나 처음부터 평화 유지군 배치를 환영해 왔던 크로아티아측은 이때부터 돌연 태도를 달리해 유엔 협상팀을 애먹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세르비아에 빼앗긴 영토를 유엔 보호 하에 두되 그 통제권은 크로아티아에 넘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크로아티아가 초기의 태도에서 후퇴하게 된 데에는 부코바르 함락으로 극우 민족주의자들의 투지만 대통령에 대한 공격이 한층 거세어졌기 때문이다.

크로아티아 문제는 독일이 해결했다. 크로아티아에 대해 강력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던 독일의 한스 디트리히 겐셔 외무장관이 강력한 정치적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한스 디트리히 겐셔

 

유엔 평화 유지군은 제일 먼저 크로아티아의 3개 지역에 체크 포인트를 설치해 민병대의 무장 해제를 실시하고 연방군 철수를 유도하기 시작했다. 크라이나와 동슬라보니아 지역에서는 이런 작업이 비교적 순조럽게 진행되었지만 서슬라보니아에서는 그렇지 못했다. 평화 유지군 사령부는 향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수도인 사라예보에 설치될 것이라고 결정했다. 그러나 이때부터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간의 전쟁은 휴전 상태가 되었지만 연방의 아킬레스건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는 전쟁의 불길이 본격적으로 타오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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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Τιταυιζ | 작성시간 12.09.16 제가 어릴때 종교에 회의를 가지게 된 것이 이 크로아티아 전역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때 천주교계 신문인 평화신문에서 '기도하는 크로아티아군 병사들' 이라는 제목의 사진과 관련기사를 1면에 실었거든요. 사진자체는 별 문제가 없었지만...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2.09.17 2차대전때 양민학살에 관여한 대주교에게 성인으로 서품하는 일도 있었죠. 사람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종교를 위한 사람이 될 때 항상 문제가 됩니다.
  • 작성자▦무장공비 | 작성시간 12.09.17 아오 저 병신 우스타샤랑 체크니트-_-

    나찌독일도 기겁을 하게 만든 유서깊은 초병맛집단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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