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콩들이 군사적 활동을 할 수 있는 여건은 충분하였다. 프랑스와 항쟁 시 사용했던 무기와 탄약이 곳곳에 은닉되어 있었다. 특히 사이공 서북방 캄보디아와 접경지역인 타이 닌(Tay Ninh) 성이 본거지가 되었고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된 후에는 하노이에서 적어도 2명 이상의 장군이 파견되어 작전을 직접 지도하였다.
타이 닌 성
그들의 혁명전쟁 이론에 의하면 투쟁에는 정치적 투쟁과 무력적 투쟁이 있으며 이 양개 투쟁의 적절한 균형 또는 결합으로 혁명이 성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정치와 군사는 밀접한 결합으로 상호 기여해야 했다. 이 양개 투쟁은 그들이 일관되게 수행하였으나 표면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디엠 정부의 말기인 1962년을 기점으로 그 이전에는 정치투쟁이 중시되었고 이후 남베트남군도 증강되고 미군이 개입하게 되자 이에 대응하는 무력투쟁이 중시되었다.
1955년 1956년 남베트남 총선거가 실시되었을 때부터 부분적이나마 피난민 정착촌에 방화, 투표함 압수, 투표 참여자 테러 등의 방해운동을 하였다. 이에 디엠 정부는 대대적인 공산주의 고발운동을 벌여 동조자, 무기탄약 은닉소 등을 색출하였다.
어린 베트콩 포로가 총소리를 듣고난 후 울고 있다. 이 소년은 게릴라들의 연락병이였다.
이에 대응하여 어느 정도 정비를 끝낸 베트콩들은 1957년 중반부터 서서히 그들의 무력 투쟁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의 무력행동 유형은 대략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어떤 유형의 무력행동을 하든지 그들은 정치, 심리적인 효과를 노렸으며 소규모 혹은 열세한 병력으로 기습적으로 치고 도주하는 Hit and Run 전법으로 수행되었다.
1) 습격
주요 시설이나 정부군 경계초소, 병력이 증강된 후에는 적 기지 공격, 정치, 심리적인 효과를 노린 어떤 특정지역의 일시적 점령 등의 작전을 수행하는 것으로서 주로 야간에 기습적으로 타격을 실시하고 신속히 도피하였다.
초기에는 전투력이 미약한 지방군과 민병대 병력이 근무하는 경계 초소를 목표로 하여 무기와 탄약을 노획하는 이중 효과를 노린 작전을 많이 수행하였다. 또한 소규모로 촌락을 습격하여 정부군을 사살하고 전단을 살포함으로써 정부에 대한 주민의 신뢰를 떨어뜨리고 위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대담한 공격도 서슴치 않았다. 1960년 8월 쾅 남(Quang Nam) 성, 히엡 둑(Hiep Duc)에 있는 전초기지에서 80여 명의 지방군 중대가 도로와 수로를 통제하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 기지는 포병 화력지원 거리 밖에 위치하였고 자체 내 자동화기와 60㎜ 박격포를 장비하고 있었다. 약 100여 명의 베트콩이 공격을 하자 내통하고 있던 첩자가 출입구를 개방하여 베트콩들은 손쉽게 점령할 수 있었다. 주변의 촌락 게릴라도 동원되어 폭죽을 터뜨리고 하여 정부군은 최소한 대대 규모 이상의 공격을 받고 있다고 판단되어 제대로 저항하지도 못하였다. 수 시간 점령 후에 지원 병력이 오기 전에 철수하였다.
1959년 9월에는 남베트남군 23사단 소속 2개 중대가 사이공 서측방의 갈대가 우거진 평야지대에서 도주하는 베트콩을 추격하던 중 2개 중대 규모의 베트콩에게 기습을 받고 15분 정도 저항하다가 전부 투항하고 말았다. 1960년 1월에는 남베트남군 21사단 32연대의 지휘소가 습격을 받아 무기와 장비를 피탈당하였다.
1961년 가을에는 푸옥 롱(Phuoc Long) 성의 성도(省都)를 점령하고 성장(省長)을 참수하였다. 전 남베트남 관리와 국민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참사였다. 이곳은 추후 1975년 1월 미국의 반응을 살피기 위하여 시험공격을 한 성이다.
2) 매복
매복은 베트콩의 가장 효과적인 공격전투의 하나이다. 매복의 목표는 주로 이동하는 부대, 베트콩 습격지역의 증원부대, 보급지원 차량, 정찰대 등 다양하다.
매복 작전으로 정부군의 군사 활동을 방해함은 물론 병사들을 불안과 공포에 떨게 만들며 그들은 대중으로부터 고립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었다. 심지어 어떤 행사를 치르고 귀가하는 민간인들을 사살하고 구원 병력까지 공격함으로써 주민들에게 위력을 과시하고 행사의 의의를 감소시켜 다음의 행사참가를 주저하게 만들며 주민들이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느끼도록 하는 심리적 효과까지 노렸다.
3) 교란
전략촌은 거의 다 베트콩의 교란사격 목표였다. 특별한 피해는 없었으나 야간을 이용하여 간헐적으로 교란사격을 함으로써 전략촌의 의미를 상실하게 만들며 주민에게 불안감을 조성하는 것이다.
적의 기지나 도시, 정부기관 등에 대한 야간 포격 또한 전형적인 수법이다. 그들의 존재를 알리고 우리가 이렇게 건재하다는 것을 과시하는 수법인 것이다. 어떤 특정 일자에 전국적으로 실시하는 포격은 전 세계 매스컴을 타는 효과까지 있었다.
4) 방어
베트콩들은 어느 지역을 확보하고 방어할 필요는 없기 때문에 정상적인 방어전술을 자주 운용할 필요는 없었다. 공격하는 적으로부터 이탈하고 병력과 물자의 은닉 기술이 그들의 방어행동이었다. 적과 접촉 단절을 위하여 소규모의 엄호부대는 주력이 철수할 때까지 필사적으로 저항하여 지연시키고 소규모 부대는 주민 속으로 잠적하였다.
바로 그유명한 죽창 부비트랩
병력 및 물자의 은닉은 천연동굴이나 치밀하고 견고하게 구축된 지하 동굴을 이용하였다. 이 기술은 역사적으로 오랜 항쟁기간에 걸쳐 계속적으로 보완되고 발전되어 왔다. 사이공 20마일 북방 ‘철의 삼각지대’라고 명명한 빈 두옹(Binh Duong) 지역에서는 1964년부터 1967년까지 3차에 걸쳐 작전을 하였으나 엄청난 지하 동굴을 다 찾지 못하고 발견된 것은 폭파하였으나 작전부대가 철수한 후에는 다시 보수하여 사용하였다.
베트남 전쟁 당시 사용됐던 땅굴의 모습
지하땅굴에서 끌려나오는 베트콩
그들의 작전기지가 공격을 받을 시에는 작전지역 전역에 광범위한 방어진지를 편성한 후 적이 공격 시에는 상호지원과 종심방어로 과감하게 적을 타격하는 수법을 운용하였다. 이 수법은 주로 남베트남군이 공격 시에 사용되었고 미군의 우세한 화력은 최대한 회피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5) 태업과 파괴
베트콩은 1차적으로 심리적 효과를 겨냥하여 태업(사보타지) 목표를 선정하였다. 주민생활과 직결되는 경제시설, 통신시설, 철로, 열차 등의 파괴는 당장 국민의 불편을 초래하므로 이는 정부의 무능을 입증해 주는 것이며 경제적 압력도 가하면서 정부의 신뢰를 떨어뜨릴 수 있는 것이다.
민간차량에 장착시키는 부비트랩 같은 대민 피해는 사회불안을 조장시켰다. 기상천외한 각종 지뢰, 부비트랩, 함정 등의 정교한 운용은 오랜 대외 항쟁기간 동안 이들이 발전시킨 또 하나의 기술이었다.
6) 테러
베트콩은 정치적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사람만을 테러 대상으로 선정하였다. 한 마을에 사는 사람이나 촌장, 관리들이 암살될 때에는 충격을 받고 공포를 느끼게 된다. 베트콩들이 테러를 자행할 때에는 그 이유를 현장에 써 놓거나 선전하였다.
마을에서 존경을 받고 지도력을 갖추고 있는 연로한 사람들로서 자기들에 동조하지 않고 반대세력을 형성할 구심점이 될 사람은 철저하게 처치하였다.
모범적인 관리도 부패한 관리도 다 암살 대상이 되었다. 부패한 관리의 암살은 주민이 수긍하며, 성실하게 모범적으로 근무하는 관리도 암살됨으로써 말단 관리까지도 정부의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을 인식시켰다. 이 같은 현상은 관리들에게 무사안일주의를 유발시키게 되는 효과까지 있었다.
어떤 때는 일가족을 몰살시키기도 하였다. 1963년 3월 후에(Hue)에서 주위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던 지도자의 전 가족이 몰살되었다. 야간에 몇 명이 잠입하여 노 부부, 아들 부부, 미혼인 딸, 남녀 하인, 심지어 개, 금붕어 등 살아있는 것은 모두 몰살시키고 사라졌다. 이 방법은 공포의 전염을 노린 것이다. 내가 저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는 베트콩 측에 동조하는 척이라도 하여야 생명을 보존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암살, 또는 납치는 1962년을 정점으로 서서히 감소하였다. 1962년 한 해 동안 9,000명이 납치되고 1,700명이 암살되었다.
군인도 테러대상이 됨은 물론이다. 빈 딘(Binh Dinh) 성 내 어느 지방군 중대가 베트콩 공격을 받고 중대장이 전사하자 트룽(Troung)이라는 하사가 훌륭히 지휘하여 격퇴하였다. 이 공로로 이 하사는 장교로 임관되었으나 베트콩들은 끝내 이 장교를 암살하였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이리야스필 작성시간 13.02.12 지독한 수법이군요. ㅎㄷㄷ...
-
작성자카이사르 마그누스 작성시간 13.02.12 인민들어쩌구하더니...오히려 공포를조성하기위해 인민들을써먹네요
-
작성자프리드리히대공 작성시간 13.02.12 이런걸 모르고 서양에서는 68혁명 때 학생시위대가 '호, 호, 호치민!!' 구호를 외치고 다녔죠. 심지어 어떤 시위에서는 베트남전을 우리 일상으로 가져오자(베트콩처럼 도시 게릴라를 통해 체제에 저항하자)는 말도 있었는데, 정치적 이상과 실제는 너무나 끔찍하게 다르군요
-
작성자Ironside 작성시간 13.02.13 인민이 어쩌구해도 본질은 결국 "우리가 권력잡는거 아니면 답은 없어, 반대하는놈은 죄다 죽어!" ㄷㄷㄷ...
-
작성자ksk45 작성시간 13.02.13 우리편 아니면 전부 적..참 잔혹한 놈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