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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42. 골칫덩이 남베트남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2.27|조회수1,210 목록 댓글 2

점점 긴박해지는 상황 가운데에서도 남베트남 정국은 계속 소용돌이 속에 있었다. 통킹 만 사건의 와중에서 칸(Khan) 장군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대학생과 불교도들이 들고 일어나 8월 23일 사이공 방송국을 점령하였고, 25일에도 사이공에서 수만 명의 대시위가 있었다. 칸 장군은 양보하여 민정 이양의 기미를 보였다. 그러자 카톨릭, 극우파 장교들이 이에 반대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하고, 안정을 요망하는 미국의 강력한 압력으로 후옹(Huong)을 수상으로 하는 민정이 들어섰으나, 한 달 반 만인 1965년 2월 19일 다시 극우파 장교들이 쿠데타를 일으켰고, 다음 날 역 쿠데타가 있었다.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이었으며 임시 혁명정부(PRG)의 법무장관으로 활약하다가 남베트남 패망 후 보트 피플로 남베트남을 탈출한 트룽 누 탕(Truong Nhu Tang)의 수기 <베트콩 해방전선>과 베트남에 5년 동안 억류되었다가 석방된 이대용 주베트남 한국 대사의 <사이공 억류기>에 의하면, 이와 같은 연속적인 쿠데타에 여러 번 앞장섰던 남베트남 육군대령 팜 곡 타오(Pham Ngoc Tao)가 북베트남첩자였다는 것이었다.

트룽 누 탕

 

타오 대령은 과거 베트민군의 소좌로 대프랑스 항전에 참전하다가 남베트남으로 전향하여, 아버지가 디엠의 형인 뚝(Thuc) 신부와 친구인 관계로 디엠과 누의 신임을 받다가 1963년 11월 1일 디엠 정권을 무너뜨리는 쿠데타에도 참가하였고, 칸이 정권을 장악하자 칸의 공보실장이 되었다. 1965년 2월 19일 타오 대령은 1964년 9월 13일 쿠데타에 실패했던 람 반 팟(Lam Van Phat) 소장을 지도자로 하여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2월 20일 역 쿠데타가 일어나 1일 천하로 끝나고 말았다. 도주한 타오 대령은 다시 쿠데타 기도를 모의하다가 체포과정에서 사살되었다. 많은 카톨릭 교도들과 남베트남인들은 유능한 반공장교를 잃었다고 타오의 죽음을 아쉬워했으나 남베트남이 패망한 후 타오는 소련의 거물간첩 조르게와 맞먹는 천재 간첩임이 드러났다.

람 반 팟 소장

 

팜 곡 타오(군복을 입은 사람)

 

혼미를 거듭하던 남베트남 정국은 1965년 6울 19일 구엔 카오 키(Nguyen Cao Ky) 공군사령관이 주도하는 군사정권이 들어서, 명목상 국가원수격인 국가 지도위원회 의장에 티우 중장을 세우고 키가 수상으로 실권을 장악하였으나 계속되는 데모와 압력으로 1967년 9월 3일 대통령 선거가 실시되어 키와 권력투쟁에서 성공한 티우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후 정권은 안정되었으나 이를 반대하는 데모와 혼란은 끊이지 않았다.)

구엔 반 티우

 

부하들과 작전을 검토하는 구엔 카오 키

 

 

이와 같은 남베트남 정국의 혼란은 미 정책 수립자들에게 깊은 충격을 주었다. 1964년 9월부터 12월까지의 남베트남 정국에 실망한 미국은 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심각하게 논의하였으나, 일단 호랑이 등에 타고 달리기 시작하면 내릴 장소를 찾기는 어려운 것이다. 지킬 가치가 없는 국가일지라도 일단 개입한 이상 손을 떼면 패배라는 의식을 떨칠 수 없었다. 대통령 선거 전에나 후에도 존슨은 전쟁에서 최초로 패배하는 대통령이 되기 싫었으며 통킹 만 사건 후 보복폭격 결과에서도 나타난 바와 같이 지상군을 개입시키지 않아도 북폭만으로도 사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자신이 있었다. 또한 미국이 손을 뗀다면 동남아가 공산화될 위험성이 있고 우방의 신뢰가 상실되기 때문에 철수계획은 보류됨으로써 미국이 남베트남에서 손을 뗄 마지막 기회는 사라지게 되었다.

1964년 11월 1일 베트콩들은 사이공 북방 비엔 호아(Bien Hoa) 미 공군기지를 공격하여 미군 2명과 남베트남군 4명을 전사시키고 B-57 5대와 기타 다수의 항공기와 헬기를 파손하였다. 베트콩들의 미군기지에 대한 최초의 직접 공격이었다. 적의 도발에 대해서는 즉각 보복폭격을 하다는 우발계획 OPLAN 37이 4월에 승인되어 통킹 만 사건 시에는 즉각 보복을 하였으나 지난 9월에는 보복공격을 하지 않았었고, 이번에도 바로 2일 후에 있을 대통령 선거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여 보복 폭격을 하지 않았다.

비엔 호아 기지와 F-5C 전투기

 

베트콩들은 11월 3일 탄 손 누트 공항의 스낵바를 폭파하여 미국인 18명이 부상당하였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사이공 시내 미군 숙소인 브링크(Brink) 호텔을 폭파하여 미국인 2명이 사망하고 미국인 66명을 포함하여 100여 명이 부상하였다. 이번에도 미국은 보복을 하지 않았다. 차후 노획된 문서에 의하면 밥 호프(Bob Hope, 미국의 유명 코미디언)를 단장으로 하는 위문단 일행이 그날 밤 브링크 호텔에 투숙하기로 되어 있어 이를 노린 폭파였으나 위문단 일행은 탄 손 누트 공항 사정에 의해 도착이 지연되었다.

폭파된 브링크 호텔

 

밥 호프

 

밥 호프의 위문공연

 

1964년 말부터 북베트남 정규군이 남베트남에 투입되고 있다는 정보가 확인되기 시작하여 미국과 남베트남 당국을 긴장시켰다. 처음에는 개인, 소부대로부터 나중에는 연대까지 확인되었다. 이렇게 되면 전쟁의 성격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미국의 지도층이나 국민들도 아시아 지역에서 미 지상군의 개입은 하고 싶지 않은데도 상황이 점점 긴박해지고 있는 것이다.

한국전쟁 이후 남베트남은 정말 미국의 골칫덩어리였다. 미국의 딜레마는 1950년대부터 계속되었다. 디엠 대통령이 국민들의 지지를 잃게 되어 디엠 대통령을 지원하여 승리할 수도 없었고, 그나마 디엠 대통령이 없으면 정치적 안정은 깨지므로 디엠 대통령이 없어서는 승리할 수도 없었다.

디엠 대통령 이후 남베트남 정국의 혼란은 극에 달했고 1964년 말에 이르러서는 미국의 전면지원 없이는 남베트남은 지탱할 수 없게 되고, 미국의 지금까지의 개입에도 불구하고 북베트남의 시도는 성공적이므로 이제는 미국의 지원 없이는 전쟁을 계속할 수도 없게 되었고 미국이 지원해도 승리할 수 없는 전쟁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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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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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프리드리히대공 | 작성시간 13.02.27 첨부터 시망 분위기였군요 씁 ㅡㅡ
  • 작성자카이사르 마그누스 | 작성시간 13.03.04 시작부터 지옥스타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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