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2월 13일 존슨 대통령은 북베트남에 대하여 지속적으로 북폭을 증대한다는 제2단계 확전을 승인하였다. 이는 제2단계의 3개 대안 중 3안으로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북위 19도선 이남의 군사목표에 대해서만 제한된 북폭을 실시하고 미군기가 남베트남 내에서도 공식적으로 남베트남군 작전을 지원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미 항공기 단독으로는 남베트남군 작전을 지원할 수 없게 제한되어 있었다. 남베트남군 조종사를 훈련시킨다는 명분하에 미 항공기에 남베트남군 조종사가 동승하여야만 지원이 가능하도록 되어 있었다. 남베트남군 조종사들의 대기상태도 엉망이어서 임무가 떨어지면 남베트남군 조종사들을 기다리느라 시간을 허송하여,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 항공지원에 대한 신뢰도는 떨어지고 신속 지원이 가능한 헬기 지원을 선호하였다.
이제는 북폭을 할 것인가 안 할 것인가의 논쟁은 지나갔다.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인 것이다. 민간인 정책수립진에 의해서 채택된 방식은 최초에 조금씩 조금씩 시작해서 점진적으로 북폭을 강화하면 북베트남이 결국 초토화를 막기 위해서라도 전쟁을 멈출 것이라는 것이다. 당시 국제문제 담당 국방 차관보 존 T. 맥노튼은 이를 서서히 목조르기 전략이라고 표현하고, 교향악에서 점점 더 강하게 연주하는 기법에 비유하여 전쟁 진행에 따라 작전의 방법, 강도를 미국이 적절하게 결정하여 북베트남이 전쟁을 그만 두도록 한다는 것이다.
존 맥노튼
제2단계 확전의 작전 명칭은 롤링 썬더(Rolling Thunder)였다. 작전 개시일은 2월 20일이었다. 그러나 2월 19일은 남베트남군 제7사단장 후인 반 톤(Huyn Van Ton) 대령, 타오(Thao) 대령 등의 카톨릭 장교단이 주동하는 쿠데타, 다음 날 공수여단장 두 쿠옥 동(Du Quoc Dong) 준장 등 반카톨릭 소장 장교들이 주도한 역 쿠데타가 성공하는 등의 정국혼란으로 작전개시는 연기되어 3월 2일부터 실시되었고 미군의 지상 작전에 대한 공중지원은 2월 24일부터 공식적으로 지원되었다.
공수여단장 두 쿠옥 동 준장
그러나 하노이 측 의지에 영향을 주기에는 너무나 미약한 강도였다. 북위 19도선 이남으로 엄격히 제한하고 표적, 출격횟수도 워싱턴에서 통제되어 주당 2~4회, 1회 출격대수 20~30대, 출격횟수 당 2~3개의 표적 공격이 고작이었다.
롤링썬더 작전을 수행하는 F-105 썬더치프
미국이 지상군 개입을 하지 않고 북폭 카드로 해결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남베트남 내 미 공군기지의 경계는 필수적이었다. 특히 다낭(Da Nang) 비행장의 경계가 취약하였고 남베트남군을 신뢰할 수가 없었다. 1965년 2월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다낭 비행장 경계를 위해서 3개 대대 규모의 해병여단 파견을 요청하였다. 워싱턴에서는 차후 철수를 고려할 때 중장비를 많이 보유한 해병보다는 경보병 부대인 173공정여단을 제시하였으나, 현재 해병 HAWK 대대, 해병 공병부대가 이미 다낭에 전개되어 방어 중이고 취약한 군수지원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상륙부대로서 자체 군수지원 부대를 보유한 해병이 이를 해결할 수 있고 차후 미 지상군 개입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는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으로서는 DMZ 일대에 해병부대를 운용할 복안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해병부대 파견을 고집하였다.
웨스트모얼랜드 대장
그렇게 망설였던 북폭 카드 결정에 비해 지상 전투부대 개입에 대해서 워싱턴은 의외로 쉽게 받아들여 3월 8일 해병 2개 대대가 다낭에 상륙하였다.
다낭에 상륙하는 해병대
비행장 경계부대는 기지방어의 임무만을 수행하는 것으로, 기지방어 외 일체의 공격작전은 실시하지 않는다는 기지방어 전략 개념 하에 미 지상군이 파견된 것이다.
비행장 경계를 위한 지상군의 투입으로 롤링 썬더 작전수행을 위한 조치는 완료되었다. 주저하고 주저하였던 존슨 대통령에게는 이 미약한 롤링 썬더 작전이 회심의 일타였는지 모르나 하노이의 의지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5월 10일 존슨 대통령은 롤링 썬더 작전의 중지를 명하고 소련에게 협상의 중재를 요청하였다. 소련은 거절하였다. 모스크바 주재 북베트남 대사에게도 협상의사를 전하였다. 아무런 응답이 없자 8일 만에 다시 폭격재개를 명령하였다.
이와 같이 스스로 북폭을 중지하고 협상신호를 보내는 방식은 계속되었다. 중지기간이 너무 짧았다는 비판의 보도가 있었다. 헝가리, 루마니아, 폴란드 등이 협상에 대하여 하노이와 접촉하고 있었고 하노이도 중지기간이 길었다면 협상에 응할 용의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북베트남 측의 작전기도로 보아 이는 고도의 기만선전에 불과한 것이었다. 혁명전쟁의 제3단계에 돌입하였다고 판단하고 총 공세 준비에 여념이 없는 북베트남으로서는 이를 준비하고 병력을 침투시키는데 8일간의 기간이 너무 짧았는지 모른다. 다음번에 중지할 때는 좀 더 중지기간을 길게 해야 할 필요가 있기에 공산권 국가들이 일치된 목소리로 이를 뒷받침해 준 것이었다.
미국이 성공한 것은 그렇게 겁을 냈던 중국이 북폭에 대하여 아무 말이 없었다는 것이다. 일단 중국의 개입은 불러일으키지 않고 롤링 썬더 작전이 가능하게 된 것이다.
이 미약한 롤링 썬더 작전에 대하여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을 비롯한 미 합참의 장군들은 이를 통렬히 비판하였다. 점진적 확전압력 전략이란 전례에도 없는 것이며 이를 의도적으로 실시하는 것은 전사상 처음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전쟁이 준비 때문에 확전이 지연되었지 처음부터 점진적으로 확전한다는 것은 전쟁에서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일단 군사력을 운용하려면 강력하고 신속히 전투력을 집중하여 결정적인 목표에 치명타를 가해야 최소의 손실로 최대의 효과를 얻을 수 있으며, 강력한 무제한 개입 의지를 보여야만 적의 의지를 꺾을 수 있는 것인데 서서히 점진적인 압력 증가는 전쟁의지를 의심하게 되고 시간을 주게 되어 적으로 하여금 새로운 대응을 가능케 한다는 것이다.
북폭을 실시한다면 3일 내로 북베트남의 모든 비행장과 유류 저장고 등의 결정적인 목표를 공격하여 이를 일거에 쓸어버려야 하노이의 전쟁수행 의지를 말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를 권투경기에 비유한다면 넉 아웃 펀치로 강타하여야 상대방을 KO시킬 수 있지 잽 정도로 서서히 때리면 상대방은 저항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베트남전쟁이 워싱턴의 민간인 정책수립가에 의하여 북폭 목표, 출격횟수까지 통제되고 이후 지상군 개입 후에도 작전지역 제한 등 계속되는 통제에 대하여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민주국가에서 문민지배의 원칙에 따라 군을 통제하는 것은 바람직하나 전쟁수행 간 군사적인 문제만은 장군들에게 맡겨야 하며, 군사적 식견이 없는 민간인 임명관리들이 전장에서의 세부적인 군사작전까지 통제해서는 안 된다고 비판하였다.
민간관료는 임명된 기간 동안 정책을 수립하고 군을 통제하다가 끝나면 떠나 버린다. 그러나 장군들은 계속해서 변경된 정책을 수행해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그의 회고록에서 군사 전문가를 무시하고 전쟁수행을 일일이 통제하는 명문대학 출신 관료들을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미 국방 차관보 맥노튼은 북베트남이 구축중인 소련제 SA-2 지대공미사일 기지에 대하여 폭격을 건의하자, 그는 소련이 북베트남을 유화시키기 위해서 지원하는 것인데 우리가 SAM 기지를 공격하지 않으면 그들도 SAM을 운용하지 않을 것이므로 폭격을 해서는 안 된다고 MACV 예하 공군사령관 조 무어(Joe Moore) 장군에게 핀잔을 주었다. 명문대 출신 관료들은 적의 전력을 파괴하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는 비결이 있었던지, 아니면 요술로 해결할 수 있다고 판단하고 있었기에 그렇게 하였다는 것이다.
SA-2의 모습, 60년대를 대표하는 가장 유명한 미사일로서 최대 사거리 약 30km에 이르는 당시로서는 놀라운 성능의 미사일 이었다.
북베트남이 이해하고 받아들일 단 한 가지 언어는 강력한 군사적 압력이었는데도 북폭 제한, 북폭의 임의중지 같은 장난은 미국이 군사력을 운용할 줄 모른다는 표시밖에 되지 않으며 북베트남은 이에 코웃음치면서 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웨스트모얼랜드 장군은 자신은 정책 수행자이지 정책 수립자는 아니라고 항변하였다. 장군들을 신뢰하지 않는 존슨 대통령은 웨스트모얼랜드에게 제2의 맥아더 장군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고 언질을 준 바 있었다.
미 정보기관도 북베트남의 전쟁의지에 어떤 변화를 포착하지 못하였고, 북베트남은 공업국가가 아닌 농업국가로서 각 마을은 자립이 가능하여 북폭으로 북베트남의 전쟁계속 의지를 꺾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미국의 점진적 확전압력 전략은 출발부터 실패한 것이다.
북폭 효과에 실망한 존슨은 마침내 마지막 카드인 지상군을 개입할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