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베트남군은 플레이쿠(Pleiku) 25마일 서북방에 있는 플레이메(Plei Me)를 공격하여 이를 점령하고 예비 연대가 증원되면 플레이쿠 일대를 점령하려고 하였다. 즉 북베트남군 325사단 예하 33연대가 플레이메를 공격하고 적 증원부대 격멸을 위해서 32연대(북베트남군 1개 연대 병력은 약 2,000명으로 추정)가 매복하여 증원 병력을 격멸한 후 33연대와 합류, 미끼로 남겨놓은 플레이메를 점령한 후 라오스로부터 강행군으로 합류하게 될 66연대의 증원으로 계속 공격을 실시하는 것이었다.
플레이메 기지
10월 19일 미 특수부대 요원 12명의 지도하에 몽타냐(산악부족) 400여 명이 방어하고 있는 플레이메를 북베트남군은 동틀녘을 기하여 포격을 개시하였다. 참호는 구축되었으나 피해가 늘어났다. 적의 최초 공격은 격퇴되었다.
몽타냐 족들을 훈련시키는 미군 교관
플레이메 기지에 있던 미군 특수부대원들
남베트남군 2군단장 빈 록(Vinh Loc) 소장은 허겁지겁 증원군을 파견하다가 적의 함정에 빠지는 우를 범하지 않고 증원군을 준비하였으나 신중하게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첫 번째 공격은 적의 주공격이 아니었기 때문에 함정이 있으리라고 판단하였다.
남베트남군 2군단장 빈 록 소장
10월 20일 미군은 강력한 항공지원을 실시하여 하루 동안 696쇼티, 750톤의 폭탄을 투하하였고 B-52도 폭격을 실시하였다. 적의 포격과 공격도 계속되어 필사적인 재보급과 의무지원을 실시하였고 플레이메 기지 내 막사는 흔적도 없어지고 기지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10월 21일 미군 1개 대대를 공중기동으로 플레이메에 증원하여 기지를 지탱하도록 하고, 빈 록 소장은 미군 지역사령관 스탠리 라손(Stanley Larson) 중장과 협조 하에 플레이메와 연결 작전을 개시하여 기갑부대를 선두로 하여 적 기습에 철저히 대비하면서 플레이메 전방 5㎞ 지점에서 적 32연대를 격퇴시키고 10월 23일 연결에 성공하였다.
의도가 무산된 북베트남군은 최후의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10월 26일부터 철수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북베트남군이 철수하기 시작하자 웨스트모얼랜드는 사단장 해리 킨나드(Harry Kinnard) 소장에게 북베트남군을 탐색, 격파하여 작전의 주도권을 확보하라는 임무를 부여하였다.
제1기병사단장 킨나드 소장
킨나드 소장은 2차대전에서 바스토뉴 방어전에 참전한 바 있다. 당시 101공정사단 부사단장 맥콜리프 준장과 함께 찍은 사진.
1여단은 사단 수색대 등 전 역량을 동원하여 4일 동안 수색을 실시하였으나 적의 기동을 추적할 수 없었다. 적을 발견하여 공중기동으로 접촉을 유지하려고 하면 적은 이미 접촉을 단절한 후였다. 다행히 전사한 북베트남군 장교 소지품 중에서 2개 연대 기동로가 그려진 지도가 발견되었다. 전쟁에서 행운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미군은 11월 3일부터 6일 동안 계속해서 적의 철수로를 선점하여 적을 공격하였고 북베트남군 33연대는 미군의 공격을 받으면 계속 우회하여 추 봉(Chu Bong) 지역에 도착하였다. 2,200여 명 중에 싸울 수 있는 인원은 700여 명에 불과하였다. 10여 일 동안 미 제1기병사단은 압도적인 화력, 기동력의 우세를 이용, 근접전에서도 과감하게 포병지원과 근접 항공지원을 받으면서 북베트남군을 공격하여 피해를 강요하였으나 화력지원이 곤란한 정글지역으로는 북베트남군을 추격하지는 않았다. 피해를 입을 위험도 있었으나 기병사단은 아직 정신적, 육체적으로 베트남전쟁에 적응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킨나드 장군은 1여단과 3여단의 임무를 교대하기로 하였다. 교대로 인한 1여단의 철수를 미군이 작전을 종료한 것으로 판단한 북베트남군 325사단장 추 후이 만(Chu Huy Man)은 지금까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새로운 66연대를 주공으로 플레이메를 재공격할 것을 결심하고 부대를 수습하여 11월 16일 공격을 개시하려고 하였다.
북베트남군 325사단장 추 후이 만
그러나 새로운 미군 부대가 출현하자 이를 먼저 각개격파하기로 하고 거미가 거미줄에 먹이가 걸리기를 기다리듯이 추 봉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미군 3여단은 적의 탐색에 실패하고 지역 내에 적이 철수한 것으로 판단하고 추 봉 서쪽으로 이동하였고, 이를 후속하여 2여단의 제1대대가 11월 14일 아침 추 봉에 착륙하였다. 북베트남군 66연대와 피해를 입은 33연대의 바로 코앞에 착륙한 것이다.
1965년 11월 14일 밤 이아드랑 전투의 상황도
착륙지점 X에 투입되는 제7기병연대 1대대
대대장 해롤드 무어(Harrold Moore) 중령은 선두 제대로 착륙하였다. 베트남전에 참전한 최초의 작전에서 큰 접전도 없이 적이 이미 캄보디아로 철수해 버린 것이 아닌가 하는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착륙지역에는 붉은 개미 떼가 우글거렸고 병사들은 개인호를 구축하기 싫어했으나 대대장의 예감으로는 큰 전투가 있을 것만 같았다.
이아 드랑 전투를 지휘한 해롤드 무어 중령
착륙지역 주변 수색중 비무장 북베트남군 낙오자 1명을 생포하였다. 그는 5일 동안 바나나 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이 일대에 적어도 3개 대대가 미군을 공격하기 위해 대기 중인데 아직 부대를 찾지 못했다고 진술하였다.
대대장은 B중대에게 착륙지역 동북방에 있는 감제고지를 신속히 점령하도록 지시하였다. 은밀하게 공격준비를 하고 있던 북베트남군도 그 감제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이동하다가 B중대와 12:45에 교전이 시작되었다. B중대장은 최소한 적 2개 중대와 접전 중이라고 보고하였다.
아직 완전한 공격준비가 안된 북베트남군도 교전이 시작되자 착륙지역에 포격을 개시하였다. 놀란 미군들은 즉각 개인호를 구축하기 시작하였고 헬기들도 긴급 대피하였다. B중대와 북베트남군이 서로 뒤범벅이 되는 혼전이 계속되어 B중대장은 중대를 착륙지역 주위로 철수하도록 명령하였으나 1개 소대(소대장과 병사 26명)는 철수할 수가 없었다. 소대장은 현 위치에 참호를 구축하여 전투를 계속하도록 지시하였다. 서측방에도 적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대대의 인가병력은 장교 23명, 사병 610명이었으나 기지 경계, 환자, 행정병 등을 제외한 장교 20명, 사병 411명만이 작전에 참가하여 신장 배치될 수밖에 없었다. 대대장은 즉각 병력증원과 근접 항공지원, 포병화력을 요청하였다. 2여단장은 우선 1개 중대를 공중기동시켜 대대의 예비대로 운용토록 하고 차후 병력을 더 증원하였다.
북베트남군은 아직 피해가 없는 66연대와 많은 피해를 입은 33연대의 병력으로 공격을 시작하였으나 이를 집중 운용하여 일거에 착륙지역을 유린하지 못하고 축차공격을 하는 우를 범하였다. 무어 대대장은 북베트남군의 축차공격에 대응하여 가용병력을 전환 운용하여 착륙지역을 지탱해 나갔다.
행운도 있었다. 포로를 획득하여 적의 의도를 사전에 간파하여 동북방 감제고지를 사전 점령하여 적의 공격준비 이전에 전투가 개시되어 적의 축차공격을 유발시켰고 연막지원을 요청하였으나 실수로 백린 연막탄이 지원되어 적에게 많은 피해를 줄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행운, 지휘관과 병사의 용감성보다도 적을 격퇴할 수 있었던 것은 압도적인 화력의 우세였다. 수천 발의 포병화력, 수십 회의 근접 항공지원, B-52 폭격 등의 지원으로 적의 공격을 격퇴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야간에 재편성을 한 북베트남군은 다음 날 여명에 재공격을 시도하여 치열한 백병전까지 전개되었으나 공격에 실패하였다. 11월 15일 오후에는 지상으로도 증원 병력이 도착하여 역습으로 고립된 소대와 연결을 하였다. 27명 중 8명은 전사하고 12명이 부상하여 소대장 이하 7명만이 전투 가능하였다. 북베트남군이 야간을 이용하여 후송을 많이 하였을 것으로 추정되나 아직도 40여 구의 적 시체가 주위에 발견되었다.
이아드랑 전투 랜딩존 엑스레이의 마지막날, 최종적인 수색정찰당시 모습
11월 15일 오전까지의 처절한 공방전을 끝으로 이 착륙지역 전투는 사실상 종료되고 야간에 산발적인 적의 공격이 있은 후 11월 16일 아침까지 북베트남군은 모두 철수하였다.
이 단일 전투에서만 북베트남군이 유기한 시체는 600여 구였고, 북베트남군 66연대는 2,000여 명의 병력 중 최소한 1,000여 명 이상의 손실을 입었을 것으로 추정되었다. 미군의 사상자는 79명이었다.
이 착륙지역에서 전투가 계속되는 동안 미군은 사이공 지역에 있는 남베트남군 5개 대대를 200여 마일 떨어진 둑 코(Duc Co)에 하루 만에 공중 기동시켜 적의 철수로 상에 매복 작전을 전개하여 철수하는 북베트남군을 끝까지 맹타하였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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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자우림 작성시간 13.03.07 영화가 괜히 만들어진게 아니군요...행운 + 능력 + 시기가 맞물렸나...흐음...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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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제국의명장 작성시간 13.03.07 하지만 같은 사단의 다른 대대는 상당한 타격을 입었다고 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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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3.07 주로 플레이메 기지를 구출하는 임무를 맡았던 1여단의 피해가 많았지요. 또 그만큼 무어 중령의 대대가 적절한 대응을 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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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카이사르 마그누스 작성시간 13.03.10 이게 영화의 진짜내막이였군요 ㄷ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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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3.10 영화에 나온 것은 전투의 가장 클라이맥스만 나온 거죠. 실제로는 그 전에 이미 플레이메 기지를 놓고 공방전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