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8월부터 군사적 총공세 단계로 전환했던 북베트남은 동 쑤안(Dong Xuan, 冬春) 전략이 미군의 신속한 증원으로 실패하게 되자 그들의 좌절감도 컸다.
프랑스의 식민통치에 항거한 기나긴 투쟁을 거쳐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후에도 8년간의 전쟁을 치렀고, 제네바 협정 이래 지금까지 전쟁을 계속하여 피를 흘려 조성한 호기를 다시 놓친 북베트남은 이제 승리를 기약할 수도 없게 되었다. 그것은 우세한 기동력과 화력을 보유한 미군과의 대결에서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의 가능성이 희박해졌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북베트남의 보 구엔 지압은 현재의 상황이 그렇게 비관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판단하였다. 그것은 미국에서 반전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남베트남의 정치적 불안정은 계속되며 미국은 코앞에 있는 라오스, 캄보디아 접경지역의 성역을 인정하고 증강병력은 각 지역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전략적 방어태세에 돌입하는 등 미국의 대응전략이 커다란 오류를 범하고 있으며 농촌지역에서 평정계획의 진도도 미미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현재의 상황 하에서도 결정적인 군사적 승리가 아니더라도 미국과 남베트남의 전의를 와해시킬 수도 있고 계속적인 미군의 전략적 오류는 장차 남베트남군의 군사적 승리를 가능하게 해 줄 소지가 있을 뿐만 아니라 약체인 사이공 정부는 자기네들의 활동으로도 붕괴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정세판단 하에 북베트남은 현재의 제반 여건을 최대로 활용할 수 있는 투쟁방향을 설정하였다. 앞으로 그들은 농촌지역을 중심으로 계속적인 군사적 압력을 가하면서 동시에 남베트남 도시지역에서 정치투쟁을 가일층 강화하고 국제여론과 미국의 반전운동을 부추기는 선전활동에 주력한다는 것이다.
1965년 말 북베트남의 대남투쟁 병력은 약 20만 명이었다. 북베트남은 1966년도에 들어와서 호치민 루트와 DMZ로 직접 침투하는 양개 침투로로 월 12개 대대 규모의 병력을 침투시켰다. 1966년도의 많은 손실을 보충하고도 남베트남 내 그들의 병력은 30만 명으로 증가되었으며 이외에도 수만 명의 북베트남 지지자, 비무장 지원인원, 생업에 종사하면서 필요시 군사적 투쟁을 벌이는 촌락 게릴라들이 있었다. 이 병력으로 북베트남은 국지적인 공세를 계속 강화해 나갔다.
도시에서의 정치투쟁은 사이공 정부에 대항하는 반정부 운동을 전개하여 사회를 극도로 혼란시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하여 민주화 투쟁이라는 대의명분으로 사회 지도층을 포섭하고 학생, 청년들을 배후에서 조종하여 극렬한 투쟁을 전개시키기 위하여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북베트남 노동당 제1서기 레 두안(Le Duan)이 1966년 사이공 시당위원회에 보낸 지시는 정치투쟁을 전개하는 구체적 지침이 포함되어 있었다.
“청년과 여성이 도시에서 정치적, 군사적 투쟁의 주요세력이므로 우리는 온갖 수단과 방법을 써서 그들을 고무하여 총동원하지 않으면 안 된다.
수많은 인민을 동원하여 조직화해 가려면 우리는 다수의 잠정적 조직을 편성하고… 우리가 투쟁에서 내건 슬로건을 일반 민중이 아무런 망설임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함과 동시에 우리의 핵심 조직이 공작활동을 성공리에 전개할 수 있도록 우리를 감추는데 있다."
호치민과 레 두안
북베트남의 대남 정치투쟁은 호치민의 지침에 따라 1945년도부터 끊임없이 전개되어 왔었다. 파리 유학시절 프랑스와 협상 차 파리에 왔던 호치민에게 포섭되어 사이공에서 민주, 평화운동가로 가장하여 정치투쟁을 전개하였고 민족해방전선 중앙위원, 남베트남 임시 혁명정부 법무장관으로 활약하다가 남베트남 패망 후 하노이 정책에 환멸을 느껴 1978년 파리로 망명한 트룽 누 탕(Truong Nhu Tang)의 북베트남 정치투쟁에 대한 폭로가 이를 입증해 주고 있다.
트룽 누 탕
1964년도에 미국이 테일러 대사와 웨스트모얼랜드 장군 체제로 남베트남에 본격 개입을 서둘자 위기의식을 느낀 북베트남은 사이공 정부의 정치적 취약성을 강력히 파고드는데 주력하게 되었다.
민족해방전선과 전혀 관련이 없는 것처럼 위장하고 사회 저명인사를 포섭하여 <베트남 민족자결 운동>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공공연하고도 합법적인 투쟁을 1964년도부터 전개하였다. 그들이 제작한 삐라는 오직 평화를 바라는 민족주의자들의 구호내용 바로 그것이었다.
“미국인에게는 미국을
베트남인에게는 베트남을
우리는 민족해방전선과 정부가 형제지간이라는 입장에서 평화교섭을 할 것을 원한다.
베트남은 그 장래를 결정할 권리를 보유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65년 초 북베트남노동당의 지시에 의하여 민족자결운동 본부 내에 <평화수호 위원회>를 발족시켜 민족해방전선과 평화교섭으로 내전을 종식시켜야 한다는 반정부 투쟁을 전개하였다. 전국에 삐라를 살포하여 이 운동에 참여하도록 요구하였고 학생 운동원이 직접 서명을 받으며 내 외신 기자회견을 하는 등의 투쟁이었고 사이공 정부가 그들을 체포하면 일약 민족주의 운동가로 명망이 더욱 높아가는 것이다. 이미 북베트남은 1964년도부터 정규군을 투입하여 군사적 총공세를 실시하기로 결정한 바 있었다.
1966년도에 들어와서 새로운 정치투쟁을 격화시키라는 지시를 접한 탕(Tang)은 젊은 불교도, 카톨릭 교도, 고교생, 대학생, 노동자 등의 청년운동, 학생운동 단체를 규합하여 <베트남 청년단 연합회>를 결성하였다. 민족해방전선을 지지한다거나 직접 혁명을 논하는 일 없이 베트남민족의 통일과 민주화를 위한 반정부 활동을 조종하면서, 일상생활은 가족과 별장으로 여행하거나 테니스와 수영을 즐기면서 자신의 신분을 위장하였다.
1966년 5월 수도 사이공에서 열린 반전시위 장면이다.
1967년 중반까지 정치투쟁과 병행하여 강력한 군사적 압력으로 미군과 직접 대결하는 전략을 시행한 결과 미군의 우수한 화력과 기동력에 의한 엄청난 사상자를 내게 되자 북베트남은 이를 타개할 수 있는 새로운 돌파구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