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6년과 1967년에 미 지상군, 연합군, 남베트남 정규군은 웨스트모얼랜드의 작전개념대로 2~3개 사단규모의 대부대 작전을 남베트남에 있는 적의 성역이나 보급기지, 확인된 적 부대에 대하여 계속 실시하였다. 적 규모에 따라 연대, 대대급 작전도 전개하였다. 이렇게 해서 지상에서는 적을 계속 분쇄시키고 공중에서는 북폭 지역이나 표적을 조정하여 북베트남으로 하여금 막대한 손실을 감수할 것인가 아니면 침략을 중지할 것인가 택일하도록 하는 기약이 없는 소모전이 이어지고 있었다.
수색작전 중인 보병
작전지역은 주로 중부 푸옌(Phu Yen) 성, 빈딘(Bin Dinh) 성에서의 작전을 필두로 중부 고원지대, DMZ 일대, 사이공 북서쪽 캄보디아 국경지대 등 지금까지의 베트콩 성역이라는 지역에서 탐색 및 격파 작전이 전개되었다.
푸옌 성
1966년 9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 사이공 북서쪽 캄보디아 국경에 인접한 타이 닌(Tay Ninh) 성에서 미 1보병사단, 173공정여단, 제4 및 25보병사단 예하 1개 여단, 남베트남군 등 약 22,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하여(OP. Attleboro, 애틀버러 작전) 최대 규모의 작전을 전개하였다. B-52까지 지원하였고 10,000여 발의 포병화력이 지원되었다. 베트콩 9사단은 격파되어 1,100여 명의 전사자를 남기고 캄보디아로 퇴각하였다. 그러나 이 사단은 캄보디아에서 재편성 후 다음 해 봄에는 다시 출현하였다.
1966년 애틀버러 작전에서 화력지원을 하는 미군 포병대
푸엔 성에서는 미 101공정사단 제1여단과 한국군 제2해병여단이 1966년 1월부터 2월까지, 빈딘 성에서는 미 제1기병사단(공중기동)과 한국군 수도사단이 1966년 1월부터 3월까지, 5월부터 8월까지는 미 제25사단, 미 제1기병사단이 중부 고원지대에서 탐색 및 격파작전을 전개하였다.
1967년 1월에는 사이공 북쪽 철의 삼각지대에서 대규모 작전(OP. Cedar Falls, 시더폴스 작전)을 전개하였고 1967년 2월 22일부터 5월 14일까지는 사이공 북서쪽 타이 닌 성의 캄보디아 국경선 부근에서 미군과 남베트남군 수개 사단이 참가하는 대규모 탐색 및 격파 작전(OP. Junction City, 정션시티 작전)을 전개하였다.
시더폴스 작전 기념 지포라이터
정션 시티 작전을 종군 취재한 베테랑 여자 종군기자 캐서린 르로이
정션시티 작전 중 보급품을 투하하는 수송기
이 지역에 있는 북베트남 노동당의 남부 위원회(COSVN, 베트남 남부의 정치, 군사 투쟁을 총지휘하는 북베트남의 전쟁 지도 야전 본부격임)를 격파하기 위하여 미군 22개 대대, 남베트남군 4개 대대 등 25,000여 명의 병력을 투입하여 적 사살 2,728명, 포로 34명, 적 귀순 139명, 5,000여 개가 넘는 적 벙커, 군사시설 파괴, 쌀 700톤, 50만 페이지에 달하는 적 문서 노획 등의 전과를 올렸다.
피해는 전사 282명, 부상 1,576명, 탱크 3대, APC 21대, 헬기 4대가 파괴되었다. 북베트남군의 전과 과장도 대단하여 추후 노획된 적 문서에 의하면 북베트남군은 이 작전에 적 13,500명을 사살하고 각종 차량 993대, 각종 포 119문을 파괴하였다고 보고되었다.
북베트남 노동당 남부위원회는 캄보디아로 철수하였으며 베트민때부터의 성역이 공격당하여 베트콩들에게 심리적 영향이 지대하였다.
지금까지 대규모 작전만을 예로 들었으나 이 외에도 무수한 작전이 전개되었다. 이와 같은 작전의 전개는 적 침투가 완전 봉쇄된 상태에서 2년간 이루어졌다면 적은 거의 분쇄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적의 침투는 계속되어 보충되고 부대는 캄보디아, 라오스, DMZ 북방에서 재편성 후 다시 침투하는 양상이 계속되어 적을 격멸할 수가 없었다. 우린 안에 갇힌 거인의 한계인 것이다.
웨스트모얼랜드의 이 대부대 작전은 대 게릴라전의 본질을 모르는 작전이었다고 일부에서는 비판하였다. 적 야전주력의 격파만이 전쟁에서 승리를 달성할 수 있는 것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 베트남전에서는 정치, 군사, 심리전의 3개 요소가 통합되어 유기적으로 수행되어야 하는데 나폴레옹식 기동과 화력전을 흉내내어 화려한 전술적 승리를 추구한다는 것이었다.
전술적인 견지에서 웨스트모얼랜드의 분쇄개념은 타당하였다고 볼 수 있으나 분쇄를 가능하게 하는 전투의 선택은 웨스트모얼랜드에게 있지 않고 북베트남군에게 있다는 것이 문제였다. 험준한 산악, 정글은 미군의 전력발휘를 제한하고 국경선 밖으로 북베트남군의 회피를 가능하게 하였기 때문에 밀고 당기는 주도권은 항상 북베트남군에게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