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3월 이전에 미군의 베트남 내 탄약보급 시설은 탄손누트(Tan Son Nhut)에 육군 항공부대의 탄약을 보급하기 위한 1,300톤 규모와 나트랑(Na Trang)에 미 제5특전부대 지원용의 800톤 규모의 시설뿐이었다. 동남아 지역 우발사태시의 탄약지원 계획은 전개부대는 기본 휴대량만으로 투입되고 이후 미 본토로부터 최초 180일 간의 탄약은 일괄 추진보급 개념으로 해상 수송하는 것이었다.
1965년 4월 지상군 전개 결정에 따라 탄약 저장목표는 남베트남 내에 60일분, 오키나와에 30일분으로 결정되었다. 남베트남 내 60일 분의 저장목표는 사이공, 캄란, 퀴논 창에 45일 분, 탄약보급소에 15일분이었다.
최초의 탄약보급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부대가 도착하기 전에 탄약이 먼저 도착하기도 하였고, 최초 계획된 작전지역이 변경되어 사이공 지역에서 작정중인 부대의 탄약이 캄란 항에 하역되어 있었다. 탄약을 수령, 저장, 불출, 청구할 탄약중대의 도착이 지연되기도 하였다. 육군부대로는 최초로 전개한 제173공정여단의 부족소요는 긴급공수로 해결하기도 하였다.
1865년 7월 MACV 예하로 주베트남 미 육군사령부가 창설되면서 제182 탄약 재고 통제반이 도착하여 탄약보급 질서를 확립하기 시작하였으나 역부족으로 1966년 2월부터는 제52 탄약단이 창설되고 군수지원사령부에도 탄약담당 대령참모가 편성되었다.
미 육군은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의 경험과 연구 분석, 워게임을 근거로 전쟁 시의 탄약 소모율을 결정, 이 소모율에 의거하여 전쟁지역에 미군이 전개하는 일자(미군이 주둔 시는 전쟁발발 일자)로부터 탄약이 생산되어 보급되기까지의 기간 동안 전투를 지속시킬 수 있도록 사전에 비축하는 전쟁예비 탄약재고를 항상 보유하고 있었다.
베트남에서의 탄약소모는 예상한 소모율을 훨씬 상회하여 미군 전체의 전쟁 예비 탄약재고가 크게 감소되고 예산 반영에도 차질이 발생하여 생산량이 소모량을 못 따라갔다. 1966년 6월에 육군성, 태평양사령부, 주베트남 미 육군사령부의 탄약 관계관이 회동하여 전투부대가 요구하는 소요 보급률을 충족시켜 주도록 결정하여 이 소요 보급률을 기준으로 저장량을 증가시키고 탄약 생산량을 증가시켰다. 또한 앞으로도 전술상황을 충족하는 탄약지원을 위하여 매 6개월마다 조정회의를 열어 수정작업을 하기로 하였다.
1968년 북베트남군의 구정공세 기간 동안의 엄청난 탄약 소모로 베트남내 탄약재고가 크게 감소하자 일률적인 소모기준으로 산정한 60일 분의 저장량을 수정하여 구정공세 같은 重전투 특별소모율에 의한 30일 분과 전투지구 특별소모율에 의한 30일분을 추가 저장토록 하여 탄약재고를 증가시켰다.
탄약보급량은 월 평균 1966년에 3만 6천 톤, 1967년에 7만 톤, 1968년에는 8만 톤이 보급되었고 구정공세 기간인 1968년 2월과 3월에는 9만 톤이 수송되었다. 베트남내 탄약저장시설은 1966년도에 7만 5천 톤, 1967년도에 약 25만여 톤을 저장할 수 있는 시설을 확보하였다. 1965 회계연도부터 1970 회계연도까지 미 육군, 남베트남 육군, 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한 탄약 예산은 다음과 같다.
단위 : 백만 달러
회계년도 |
전 육군 |
베트남전 |
비율(%) |
1965 |
338 |
303 |
90 |
1966 |
1,313 |
853 |
65 |
1967 |
1,329 |
1,007 |
76 |
1968 |
2,328 |
2,266 |
97 |
1969 |
2,913 |
2,719 |
93 |
1970 |
1,731 |
1,456 |
8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