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베트남이 공세준비를 하면서 대대적인 기만공세를 취하고 있는 동안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전과 다른 북베트남의 공세 징후를 포착할 수 있었다.
전국적으로 베트콩들의 조직을 재편성하고 강화하는 첩보가 입수되었으며 많은 노획문서가 각 도시에 대한 공격이 임박하였음을 암시하고 있었고, 포로나 죄수들도 몇 개월 내에 자기네들의 최후의 승리를 확신한다는 언동을 하였으며 귀순자까지도 격감하였다. 북베트남 신문들도 수개월 내에 그들의 승리를 호언하였고, 1967년 9월 지압도 공식석상에서 결정적인 전투로 최후의 승리를 예언하였다. 호치민 통로의 교통량도 전보다 2배로 증가되었다.
1967년 11월 25일 미군은 북베트남의 “새로운 상황과 새로운 과업의 이해”라는 소책자를 노획하였으나 이것은 적의 선전 및 교육용 책자로 판단하였다. 미 정보기관도 적의 공세가 임박하였다고 판단은 하였으나 시기와 장소는 판단할 수 없었다.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은 구정 직전인 1월 25일 전후가 될 것이라고도 판단하였고 MACV의 J-2(정보책임자)인 데이비슨(Davidson) 준장은 적이 구정공세 기간 동안 기동하여 구정휴전 후 공세를 취할 가능성이 많다고 판단하였다.
미 제5보병사단장에서 중장으로 승진하여 미 제2야전사령관(사이공 일대 담당)이 된 프레드릭 웨이안드(Frederick Weyand) 장군은 적의 동태가 심상치 않음을 판단하고 1968년 1월 10일 웨스트모얼랜드에게 푸옥 롱(Phuoc Long) 성(캄보디아 국경지대에 연하여 있음) 지역에 대한 작전을 취소하고 그의 병력을 인구 밀집지역에 집결 보유할 수 있도록 건의하였다.
프레드릭 웨이안드 장군
웨스트모얼랜드는 이를 승인하고 계획되었던 제1기병사단의 작전도 취소하였다. 또한 그는 적의 공세징후에 따라 티우 대통령과 카오 반 비엔(Cao Van Vien) 참모총장에게 금번 구정휴전을 취소하도록 요청하였으나, 티우나 비엔은 휴전의 전면 취소는 남베트남 국민과 군대의 사기에 영향이 크고 적의 선전에 호재가 된다고 하여 반대하고 최초 48시간으로 계획되어 있는 휴전기간을 36시간으로 단축하는데 동의하였다. 따라서 남베트남 정부는 구정휴전 기간을 1968년 1월 29일 18:00부터 1월 31일 06:00까지로 발표하였다. 케산(Khe Sanh) 지역은 제외되었다. 남베트남군은 휴전기간 동안 50%의 병력이 대기하도록 되어 있었다.
남베트남군 참모총장 카오 반 비엔
구정이 가까워 오면서 미 정보기관은 북베트남군이 라오스 국경지대인 아 샤우(A Shau) 계곡에서 후에(Hue)로 통하는 도로에 불도저를 투입하여 작업하는 있는 것을 포착하였다. 웨스트모얼랜드는 벙커(Bunker) 미 대사를 통하여 DMZ 직후방에 있는 2개 성 지역은 휴전을 취소하고 전반적인 북폭은 중지하여도 DMZ 북방지역은 북폭을 계속하도록 워싱턴에 건의하여 승인을 받았다.
엘스워스 벙커 주베트남 미 대사
이 발표는 북베트남이 대응할 수 있는 시간을 박탈하기 위하여 1월 29일에 남베트남 정부가 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1월 29일 오전에도 발표가 없자 웨스트모얼랜드는 남베트남 공보실에 독촉하려 했으나 이미 기자실은 폐쇄되어 발표할 수가 없었다. 티우 대통령도 미토(My Tho)의 처가로 떠나고 없었다.
1968년 1월 28일 퀴논(Qui Nhon) 시 외곽에서 남베트남군 보안부대가 베트콩의 은거 가옥을 습격하여 11명의 베트콩을 생포하고 녹음기와 녹음 테이프 2개를 압수하였다. 테이프의 내용은 티우와 키의 독재 파시스트 정권에 항거하여 남베트남군과 국민은 자기네들의 봉기에 합류하라는 것이었다. 생포된 베트콩들은 구정휴전 기간에 퀴논이나 다른 도시들을 공격할지도 모른다고 진술하였다.
그러나 이 진술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못했다. 구정휴전 기간 동안 베트콩들의 소규모 공격은 매년 있어 온 상투적인 것이었다. 1월 29일 남베트남 전국이 구정 이동 인파로 술렁대고 있었다. 북베트남의 공격 개시가 얼마 남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미군은 북베트남군에게 기습을 당하였다. 공세가 있을 것이라고 판단은 하였으나 그 공세가 구정에 있을 것이라고는 더구나 공세지역도 전국의 도시를 집중공격하리라고는 전혀 상상하지 못하였다.
베트남 전쟁 후 역사가들은 구정공세 시에 미군은 북베트남군의 완벽한 기습을 받았다고 분석하였다. 1944년도 독일의 아르덴느 공세나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공격과 같은 기습을 받았다는 것이다.
미군들은 그들의 강력한 화력 앞에 자살행위나 다름없는 대공세를 그것도 우세한 화력이 항상 대기하고 있는 도시지역에서 또한 몇 개의 도시가 아닌 전국적인 규모로 공세를 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다.
남베트남의 구정 전야는 전국이 이동하는 날이다. 전쟁 중이어서 구정기간이 아니면 헤어진 가족들을 만나기가 어렵기 때문에 구정휴전 기간을 이용하여 모두 다 이동하는 날이다. 초 만원을 이룬 버스는 문을 닫을 수도 없었고 3륜차인 람브레타는 10명 정도가 탈 수 있는데 20명 가까이 태웠다. 각 검문소도 차량들을 그대로 통과시키고 있었다. 검문할 수도 없었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오랜만에 마음 편하게 쉬고 싶었다. 더구나 1968년도 구정에는 베트콩들이 일주일 동안을 휴전하겠다고 발표한 바 있었다. 이동 인파가 다른 해에 비하여 더 많은 것 같았다.
람브레타
전국의 베트콩들도 이동하고 있었다. 그들의 이동은 1월 중순 경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신분을 위장할 수 있고 은거가 가능한 자들 그리고 사전정찰이 필요한 요원부터 도시로 잠입하였다. 가까운 거리는 당일 야간에 공세지점으로 이동하면 되었다.
무기와 탄약 수송이 문제였다. 장례식을 가장한 관속에 넣어 운반하였다. 꽃 수레, 채소, 과일 트럭 밑에 실어서 운반하기도 하였다. 나룻배 밑에 2중으로 만들어 수로를 이용하기도 하였다.
구정 이동 인파에 뒤섞여 이동하였다. 검문이 불가능한 초만원 버스가 많이 이용되었다. 대담하게 남베트남군 복장을 착용하고 지나가는 미군 트럭을 세우고 태워 달라고 하였다. 미군 트럭은 남베트남군이나 경찰의 검문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가장 안전하였다. 미군 트럭 운전병도 구정에 귀향하는 남베트남군 병사들을 도와주어서 기분이 좋았다.
북베트남은 모든 구정행사를 1월 29일에 마쳤다. 1월 30일부터는 그들의 공격이 시작되면 미군의 북폭이 시작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노이 라디오에서는 호치민의 신년사가 끝난 후 신년을 위해 그가 특별히 자작했다는 시가 흘러 나왔다.
“올해의 신춘(新春)은 다른 해의 봄과는 다르리라.
승리의 환희가 온 누리에 가득히 퍼지리니
남과 북은 우리 모두 하나였고 하나로 뭉쳐
미제 침략자를 응징하리라.
앞으로 진군하라. 승리는 우리의 것이다.”
모두가 호치민의 상투적인 선전으로 생각하였으나 이것은 총 공세, 총 봉기를 계획대로 결행하라는 호치민의 명령이자 신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