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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81. 케산 전투(1)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4.25|조회수1,901 목록 댓글 1

케산(Khe Sanh)은 라오스로 통하는 9번 도로상에 위치하여 라오스 국경으로부터 10㎞, DMZ로부터 23㎞ 떨어져 있는 조그만 촌락이다. 10월부터 4월까지의 이곳 우기에는 매일 안개가 끼며 낮에는 낮은 구름이 끼고 비가 내려 미군의 장기인 항공지원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게 하는 지역이다.

케산 기지 전경

 

1962년 미군 그린베레가 도착하여 이곳에 거주하는 200여명의 몽타냐(산악부족)를 훈련시켜 기지를 방어하고 있었으나 몇 년 동안 미군이나 남베트남군도 별로 관심을 두지 않은 지역이었다.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은 1964년에 이곳을 방문한 적이 있었고 1966년도에 들어서 이 지역에서 북베트남군의 활동이 증가하기 시작하자 미 제3상륙군 사령관(남베트남군 제1군단 지역 담당 미군 군단장 격)을 대동하고 이곳을 방문하여 대책을 숙의한 바 있었다.

몽타냐 게릴라

 

특전단 캠프.. 상당히 넓어 보이지만, 핵심 방어거점은  우측 중앙의 삼각형 모양의 방어진지다.  사진 아래 부분은 활주로인 것으로 보인다.

 

1967년 1월에 미 해병 제3사단이 그린베레로부터 케산을 인수하였고 그린베레는 랑베이(Lang Vei)로 이동하였다. 미 해병은 인수 후 기지 내에 활주로를 개설하여 C-130, C-7A, C-123 등의 고정익 항공기로 보급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9번 도로에 인접하여 강력한 거점을 편성하여 자체방어는 물론 북베트남의 침투를 차단할 수 있도록 하였다.

랑베이 기지의 모습

 

4월 하순 경에 미 해병은 북베트남군 325사단이 케산 주위의 861, 881고지 등을 점령하고 포격을 가하자 이 고지일대를 항공화력으로 무력화시키고 점령한 후 강력한 방어기지를 편성하였다. 또한 북베트남군의 랑베이 기지 공격도 강력한 화력지원과 몽타냐 족의 분전으로 격퇴한 바 있었다.

1967년 12월에 들어서 북베트남군의 활동이 증가하고 북베트남군 2개 사단 규모의 대병력이 확인되자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은 북베트남이 미군의 케산 기지를 공격하여 제2의 디엔 비엔 푸를 시도할 것으로 판단하고 방어태세를 강화하도록 하였다.

케산 전투 간 피아 투입부대는 다음과 같다.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은 케산 전투가 베트남 전쟁에서 중요한 전투가 될 것으로 판단하고 남베트남군의 명예를 위해 1개 레인저 대대를 참가하게 하였다.

남베트남군의 정예 레인저부대

 

 

※ 케산 전투간 피아 투입 부대

미 군

북베트남군

해병 제26연대(3개 대대)

해병 제9연대 1개 대대

남베트남군 1개 레인저 대대

105㎜ 곡사포 1개 대대

155㎜ 곡사포 1개 포대

4.2인치 박격포 1개 소대

175㎜ 평사포 18문(기지외부에서 화력지원)

※ 야포 46문

106㎜ 무반동총 10정

전차 6대

M-42대공전차(40㎜포 2문) 2대

M-55대공전차(50구경 기관총 4문) 2대

※ 총병력 6,000여 명

제304사단

제325사단

※ 152㎜, 130㎜ 야포 보유

※ 총병력 15,000~20,000 명

 

케산이 북베트남군의 집중공격을 받는다면 모든 희생을 무릅쓰고 필히 확보하여야 할 전략적, 전술적인 가치가 있는 지역인가에 대하여 미 국내에서도 논란이 많았고 주베트남 미군 내에서도 철수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다. 케산은 군사적인 측면에서 필히 확보되어야 할 가치가 있는 지역은 아니며 필히 확보되어야 한다면 그것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은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군사적인 측면에서 케산은 필히 확보되어야 할 지역이라고 주장하였다. 그가 주장하는 케산의 군사적인 중요성은 다음과 같다.

• 라오스 호치민 통로로부터 9번 도로를 따라 적의 침투와 지원활동을 차단할 수 있는 요지이다.

• 기지 내 비행장은 호치민 통로에 대한 정찰비행을 가능하게 한다.

• DMZ 남방을 방어할 수 있는 서측방의 진지로 활용될 수 있다.

• 호치민 통로 차단을 위한 지상 작전 시에 공격발판을 제공하는 기지이다.(웨스트모얼랜드는 이 9번 도로를 따라 라오스에 있는 호치민 통로를 차단하는 지상 작전이 겁 많은 존슨 대통령에 의하여 실시되지 못하고 있으나 언젠가는 수행되어야 할 것으로 보았고, 결국 1971년에 실시되었다.)

• 케산을 포기한다면 위와 같은 군사적 이점이 상실됨은 물론 북베트남군이 이 지역을 통하여 충분한 보급지원을 받을 수 있고 미군과 남베트남군은 충분한 보급을 받는 북베트남군과 인구가 밀집되어 있는 해안지역에서 전투를 하여야 한다.

 

주베트남 미군사령부 전사(戰史)부장 아르고(Argo) 대령은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례와 이와 유사한 다른 전례를 연구하여 참모회의 석상에서 웨스트모얼랜드에게 연구결과를 보고한 적이 있었다. 그는 디엔 비엔 푸나 다른 전례 모두 결국은 포위부대가 승리할 수밖에 없는바 그것은 방어측은 전투의 주도권을 모두 박탈당하기 때문이라고 결론지었다.

아르고 대령의 보고는 모든 참모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러나 웨스트모얼랜드는 단호하게 그의 결의를 나타냈다. “우리는 절대, 다시 말하자면 절대 패하지 않는다(We are not, repeat not, going to be defeated at Khe Sanh)."

웨스트모얼랜드는 케산과 디엔 비엔 푸는 여러 가지로 여건이 다르기 때문에 케산의 방어는 성공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미군은 방어 측이지만 막강한 항공 및 포병화력으로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다고 그는 생각하였다. 그가 주장한 케산과 디엔 비엔 푸와의 차이는 다음과 같다.

 

※ 디엔 비엔 푸와 케산 간의 차이

구분

디엔 비엔 푸

케 산

지 형

분지

고원지대

공군력

능력제한

B-52도 지원가능

공수보급능력

고정익항공기 지원능력 부족

고정익항공기 지원능력 충분

헬기

미보유

충분한 지원가능

철수로

도로망 및 철수수단 없음

공중철수 가능

지상연결 작전 가능

 

1968년 1월 21일 드디어 북베트남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은 케산 기지를 가장 잘 감제할 수 있는 861 고지에 공격을 가하면서 전 케산 기지에 치열한 포격을 가하였다.

861고지에서는 철조망을 파괴하고 공격해오는 북베트남군을 미 해병대대는 백병전으로 격퇴하였다. 기지에서는 포격으로 활주로가 파손되고 1,350톤의 탄약고가 폭파되었으며 18명이 전사하고 40명이 부상하였다.

케산 기지에서 미 해병대 소속의 탄약 적재 트럭이 폭발하고 있다.

 

미군은 즉각 활주로를 보수하고 악조건을 무릅쓰고 공중 재보급을 하였다. 활주로 조명시설은 복구가 안 되어 야간에는 조명탄을 사용하여 C-123 항공기로 보급을 계속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은 21일 이후 그리고 구정공세가 시작되어도 공격하지는 않았다. 북베트남군은 포위한 채로 간간히 포격만 계속하였다. 미군의 엄청난 화력이 이에 대응하여 케산 기지 주위에 작렬하였다. 지압의 기만효과는 충분히 달성되었다. 그러나 지압의 계회대로 구정공세는 성공하지 못하였다. 기습은 달성되어 도처에서 성공하는 듯 하였으나 즉각 미군과 남베트남군의 반격을 받아 패퇴하고 있었다. 더구나 민중봉기가 일어났다는 보고는 하나도 없었다. 성공한 곳은 후에뿐이었다.

포격 중인 북베트남군

 

그런데도 미 국민들은 야단이었다. 미 국민들에 대한 충격효과는 기대이상이었다. 케산 기지도 제2의 디엔 비엔 푸가 될 것인가, 안 될 것인가 야단이었고 스스로 제2의 디엔 비엔 푸를 자초하고 있는 것 같았다.

지압은 이러한 호기를 이용하여 케산을 점령하여 제2의 디엔 비엔 푸를 만들어 미국의 전의를 결적으로 꺾고 계속 공격하여 9번 도로를 점령함으로써 구정공세 실패에 대한 자신의 체면도 어느 정도 세울 수 있다고 판단하고 케산 기지에 대하여 집중 공격을 하도록 하였다.

2월 5일부터 북베트남군의 공격은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의 공격계획은, 제325사단은 케산 기지 주위의 감제고지를 점령하고, 이 감제고지에서 케산 기지에 대하여 정확한 포격의 엄호 하에 북서쪽으로부터 공격을 하며, 1954년 디엔 비엔 푸 전투에 참전하였던 제304사단은 랑베이 기지를 점령한 후, 케산 기지 남쪽에서 공격하여 제2의 디엔 비엔 푸를 연출한다는 것이었다.

목적달성을 위해서는 인명손실 같은 것은 고려하지 않는 지압과 막강한 화력으로 적을 격멸할 자신이 있는, 더구나 구정공세에서 당한 것을 조금이라도 설욕하고 싶었을 웨스트모얼랜드의 두 격류가 케산에서 맞붙게 되었다.

웨스트모얼랜드는 구정공세 이후 케산 전투가 끝날 때까지 MACV 상황실에서 잠을 자면서 신속한 지휘조치를 취하였다. 케산 전투나 후에 전투는 미 해병대, 해군, 공군, 육군의 모든 작전요소가 참가하는 합동작전으로 이들 요소간의 유기적인 협조가 요구되었으나 협조가 원활하지 못했다. 특히 동일한 지상 작전을 수행하는 해병대와 육군의 협조가 잘 이루어지지 못했다. 2월초에 웨스트모얼랜드는 후에 남방에 있는 푸바이(Phu Bai), MACV 전방 사령부를 임시 설치하고 그의 웨스트포인트 동기생으로 1967년 5월 초에 MACV 부사령관으로 부임한 크라이튼 에이브럼스(Creighton W. Abrams) 대장이 지휘하도록 하였다.

크라이튼 에이브럼스 대장. 2차대전시 패튼 휘하의 전차중대장으로 바스토뉴에 고립된 101공정사단을 구출하는 작전에서 가장 먼저 바스토뉴에 도착한 전차 지휘관으로 현재 미군이 사용하는 M-1에이브럼스 전차는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이다. 전차전 같은 정규전에서는 유능했지만 베트남전쟁 같은 비정규전이나 특수부대 작전에는 경험이 없었고 오만한 특수부대원들을 극도로 혐오하였다.

 

백악관 상황실에도 케산 기지의 모형도판이 만들어졌다. 케산 기지의 진지와 병력배치, 북베트남군의 위치도 표시되어 존슨 대통령도 수시로 전투경과를 확인하였다. 존슨 대통령도 정신적으로는 케산 기지의 참호에 해병들과 같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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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ZEALOT | 작성시간 13.04.25 야전 지휘관도 아니고 통수권자가 전투하나에 목을메는건 좋지않다고 보지만,그런 상황을 연출한건 여론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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