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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84. 케산 전투(4)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4.29|조회수1,094 목록 댓글 2

케산 전투는 전사 상 단일 전투에서 가장 많은 화력이 지원된 화력전이었다.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은 케산 전투가 “적에게 포위된 부대가 지상 및 항공화력의 협조된 운용으로 숫적으로 우세한 적을 격파한 모범적인 전례”라고 자평하였으나 전쟁 중 한 지역에 미군과 같은 엄청난 화력을 집중할 수 있는 물량전이 가능한 나라 외에는 이를 무턱대고 모방할 수만은 없는 것이다.

미군의 화력 소모량은 포탄 159,000발, 근접 항공지원 24,000여 쇼티, B-52 2,700 쇼티, 폭탄 투하량 100,000톤이었다. 미군의 피해는 전사 205명이었고 북베트남군의 피해는 10,000~15,000명 수준으로 미군은 추정하였다. 적 장비노획은 대공화기 2문, PT-76을 포함한 차량 17대, 공용화기 207정, 개인화기 557정이었다.

케산 전투에 대하여 미 하버드 대학의 저명한 역사학자 슐레진저(Arthur Schlesinger Jr) 교수는 다음과 같이 논평하여 워싱턴 포스트 지에 게재함으로써 반전 여론을 부추겼다.

“케산은 적이 일단 포위한 상황 하에서는 인정이 있고 지성을 갖춘 지휘관이라면 병력을 즉각 철수시켰어야 할 지역이었다. 우리가 케산을 그대로 확보한 것은 군사적인 이유에서가 아니라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었다. 그것은 존슨 대통령이 케산의 확보여부의 미국의 명예가 걸렸다고 고의적으로 정치적인 의의를 부여하였기 때문이었고 또한 현재 실패하고 있는 웨스트모얼랜드의 소모전 전략에 따라 군사적인 관점에서 전략적으로 별로 중요하지도 않는 케산 기지에 병력을 투입하였고 이를 확보하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존슨 대통령은 자신을 링컨 대통령과 비교되는 것을 좋아하고 있으나 존슨은 링컨이 가지고 있는 능력 즉 전쟁에서 승리하지 못하는 장군을 해임시키는 용기를 가지지 못하였다.”

아서 슐레진저 교수

 

이에 대하여 웨스트모얼랜드는 “이것은 멀리 떨어져 있는 미국에서 책상에 앉아 피상적으로 판단한 결과이다. 슐레진저 교수의 판단과는 반대로 백악관의 어떠한 지침이나 간섭 없이 정치적인 이유 때문이 아니라 순수한 군사적 견지에서 케산 기지에 병력을 투입하였고 이를 확보하였다. 아마 그가 그렇게 판단한 것은 존슨 대통령이 합참에게 케산을 확보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자문을 구한 바 있었고, 합참은 확보가능하다고 보고한 후 대통령에게 케산 전투상황에 대하여 일일보고를 했기 때문인 것 같다. 케산 전투는 승리하였고 전략적인 가치가 있었던 전투였다. 북베트남군이 일방적으로 패배한 전투였고 지압의 신화가 깨진 전투였다. 슐레진저 교수는 소모 전략이 마치 내가 선택한 군사전략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그가 탁월한 학자라면 베트남전 수행에 대한 민간인 출신 고위층의 엄격한 통제와 존슨 대통령이 수차 공식발표한 대로 지상 작전범위를 남베트남 국경선 이내로 철저하게 제한하고 있다는 것쯤은 확실하게 파악하고 케산 전투에 대하여 평가를 했어야 할 것이다. 현재와 같은 여건 하에서 슐레진저 교수라면 과연 어떠한 전략적인 대안이 가능한지 묻고 싶다.”라고 항변하였다.

케산 전투 동안 미국의 여론은 케산에서 미군이 철수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한다면 미국의 언론이 그렇게 유도하였다. 오래 전부터 베트남전에 대하여 비판적이었던 미 언론은 계속 그 도를 더해가고 있었다.

케산 전투에 대한 미 TV의 보도는 너무나 일방적이었다. 케산 전투에 대한 뉴스 보도 시간에는 공수 보급 중에 적의 포격에 의하여 불타고 있는 미 항공기의 모습이나, 유류고가 불타는 장면, 적의 포격으로 어수선한 진지의 모습 같은 장면만 계속 방영되었다. 그런 화면만 보는 미 국민들은 아무리 미군이 강력한 화력공격으로 적을 격멸하고 있다고 주장하여도 병사들의 고생하는 모습과 곧 적의 공격으로 전멸당할 것 같은 불안감을 무의식중에 느끼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웨스트모얼랜드는 케산 전투 동안 제2의 디엔 비엔 푸를 자초하지 말고 케산 기지로부터 해병을 철수시키라는 미국 시민의 편지를 매일 받아보아야 했다. 이와는 반대로 디엔 비엔 푸 전투에 참전했던 프랑스인한테는 격려의 편지를 받았다. 남쪽 881고지를 방어하던 중대장 브리지 대위(Jack A. Brage, 당시 미 해병 1개 중대 병력은 200명 이상이었음)는 병사들의 사기를 증진하고 북베트남군에게 자기네들의 불타는 전의를 과시하기 위하여 매일 아침저녁으로 나팔소리와 함께 성조기를 게양하고 하기하였다. 북베트남군은 나팔 소리가 나면 포격으로 방해했으나 이 행사는 계속되었다. 이를 알게 된 기자가 북베트남군 포의 파편이 성조기를 훼손하고 있다고 보도하자 익명의 독지가가 매일 성조기를 우송해 주기도 하였다.

케산 전투동안에 전술핵 운용문제도 논의는 되었었다. 웨스트모얼랜드는 비밀리에 이 문제를 검토하였으나 존슨 대통령으로서는 불가능한 정치적 결단사항이었다.

웨스트모얼랜드는 그의 회고록에서 제2차 세계대전시 원폭투하로 조기에 일본의 항복을 받아낼 수 있었고 한국전쟁시도 핵무기 위협이 공산 측의 휴전을 수락한 한 가지 요인이 되었다고 서술하였고, 베트남전에서도 전술핵의 운용이나 운용 위협으로 종전을 가능하게 할 수 있는 대안이었는데 이 대안을 검토하지 못한 것은 실책이었다고 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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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ZEALOT | 작성시간 13.04.29 그랬다간 미군이 전쟁할때마다 전술핵 써댔을듯... 댓글 첨부 이미지 이미지 확대
  • 작성자웨버 | 작성시간 13.04.29 205명대 10000명이라 엄청난 교환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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