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정공세가 남베트남 정부나 국민들에게 미친 영향은 북베트남이 민중봉기를 점화하여 남베트남 정권을 붕괴시키고 연립정권을 세우겠다는 그들의 의도와는 거의 정반대로 나타났다. 구정공세가 남베트남에 미친 영향은 다음과 같다.
• 많은 남베트남인들 특히 농촌 지역 주민들은 이데올로기 문제는 관심이 없었고 오랜 전쟁에 지쳐 전쟁이 빨리 끝나주기만을 바랬다. 구정공세에서 남베트남 주민들은 북베트남군의 양민학살과 파괴활동을 목격하거나 보도나 소문을 통하여 알게 되었다. 많은 무관심자들이 남베트남 정부 편으로 돌아섰고 베트콩들의 귀순자도 증가하였다.
• 1967년 9월 3일 선거로 첫 민선 대통령이 된 티우(Thieu) 정권의 안정을 가져왔다. 북베트남 구정공세 이후 남베트남 국민들의 자성여론을 바탕으로 전쟁을 하고 있는 국가로서 늦었지만 1968년 6월 17일 국가 총 동원령이 공포되었고 의회는 7월 9일 티우 대통령에게 비상대권을 부여하였다.
• 남베트남군은 미군의 화력과 기동력의 지원을 받아 숫적으로 극히 열세한 베트콩이었지만 반격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도시 지역 작전 동안 야기될 수 있는 대민문제와 남베트남 국민들의 자존심을 고려하여 남베트남군에게 시가지 작전을 담당하게 하고 미군은 주로 외곽작전과 지원을 담당하도록 하였기 때문이었지만 지금까지 전투의 조역에 불과하였던 남베트남군이 당당하게 전투의 전면에서 주역으로 등장하여 승리함으로써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고 국민들로부터 신뢰를 얻기 시작하였다. 미군도 이제 전쟁의 베트남화에 대한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되었다.
• 각 지역 담당 베트콩들이 공세를 주도하여 지역별로 베트콩 하부조직이 노출되어 그 지하조직망을 소탕할 수 있어 평정계획을 원활하게 추진할 수 있었다.
• 공세 동안 발생한 이재민이 63만 여명으로 새로운 사회문제로 등장하여 이들을 방치 시에는 커다란 사회불안 요소가 될 것이며 작전 동안 피난민 문제가 장애요인이었음도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번 공세로 인한 이재민은 미국의 원조로 필요조치를 강구할 수 있었고 정착도 원만하게 실현되었다.
• 반면에 한 가지 간과해서는 안 될 문제는 남베트남 국민들이 받은 심리적 충격이다. 남베트남 국민들도 미군의 막강한 전력과 무진장한 물량을 보고 보도를 통해서 조금 과장된 것인 줄은 알지만 연합군이 획득한 전과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특히 도시지역 주민들은 연합군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군의 구정공세 규모는 엄청났다. 그들은 얼마든지 그러한 공세를 계속 취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막강하게 보이던 미군들도 어쩔 수 없는 것 같이 보였다. 과거에 프랑스도 그랬었다.
언젠가는 미군도 가고 결국 북베트남이 이길 수밖에 없다는 패배의식이 남베트남 국민들의 심리 깊숙한 곳에 내재하는 계기가 되었다. 사회 불만을 가진 자, 사회 소외계층들이 공산주의자들에게 포섭되었다. 스스로 민족주의자로 자처하는 많은 지식인, 학생, 노동자들도 포섭되었고 반정부 활동을 계속하였다. 공산주의자들은 그들에게 자신있게 말하고 다녔다. “우리는 언젠가 이긴다. 보라 구정공세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