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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88. 협상의 서막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5.05|조회수649 목록 댓글 1

미국과 북베트남 쌍방이 합의한 평화협상은 출발부터 회담장소를 합의하는데 한 달이 걸려야 했다. 미국은 회담장소로 제네바, 뉴델리, 로마 등 14개소를 제안했고, 북베트남은 프놈펜과 바르샤바의 공산국가 지역만 고집하였다. 결국 프랑스가 회담장소 제공 용의를 표명하여 5월 3일에야 파리의 국제회의 센타에서 5월 10일 예비회담을 갖기로 합의하였다.

이미 워싱턴에서는 반전 데모가 계속되었고 4월 10일에는 후임 주베트남 미군 사령관으로 부사령관이었던 에이브럼스(Crighton W. Abrams) 대장을 임명하고 6월에 교대시킨다는 발표가 있었다. 전쟁의 흐름이 바뀌는 변혁기였다.

에이브럼스 대장. 웨스트모얼랜드와 육사 동기생으로 그의 뒤를 이어 MACV 사령관이 된다.

 

협상을 앞둔 북베트남의 쇼가 시작되었다. 자기들의 전쟁목적을 달성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미국의 TV에 출연하기 위해서이다. 5월 5일과 6일에 120여개의 도시와 연합군 군사시설에 박격포와 로켓포 포격을 가하였고 사이공 지역에는 병력을 투입하였다. 미군들이 이 공세를 미니 구정공세라고 명명할 정도로 전국적인 규모의 포격공세였다.

미니 구정공세의 상황도

 

사이공 지역에서는 수개 대대 규모의 병력이 투입되었으나 곧 격퇴되었다. 그러나 4~5명의 베트콩들이 촐론(Cholon) 지역 일대의 건물에서 끝까지 저항하여 건물이 파괴되기도 하였다. 화염에 휩싸이기 쉬운 빈민가 일대에 포격을 가하여 방화하기도 하였다. 122㎜ 로켓포가 위력을 떨쳤다. 모두 미 TV에 좋은 뉴스감인 것이다.

미니 구정공세 때 폐허가 된 촐론 지역

 

미니 구정 공세 때 사살된 베트콩의 시체들

 

5월 13일 파리에서 제1차 평화회담(이하 파리회담으로 약칭)이 열렸다. 양국의 수석대표는 해리먼(Averell Harriman)과 쑤안 투이(Xuan Thuy)였다. 상호 주장 내용은 항상 같은 내용이었다. 미국은 북베트남의 병력 및 군수물자의 남파중지를, 북베트남은 미군의 전면 북폭 중지와 철수였다. 회담은 상호 주장만 되풀이하면서 지지부진하였다. 특히 북베트남은 민족해방전선을 회담에 참가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쟁의 주체도 아닌 그들의 위장단체에 불과한 것을 전쟁의 주체로 격상시키려는 것은 1954년 제네바 회담의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으려는 속셈인 것이다.

쑤안 투이

 

6월에 들어서 북베트남은 사이공에 1일 100발의 무차별 포격을 가하겠다고 위협하다가 미 국무장관 러스크(Dean Rusk)가 북베트남의 사이공 포격 중지를 협상하려는 태도로 간주한다고 하자 포격을 중지하였다. 6월 27일 미군이 미국 전의의 상징이었던 케산(Khe Sanh) 기지에서 철수하는 정치적인 제스추어를 하자 북베트남도 미군 조종사 3명을 석방시킨다고 이에 응수하였다. 8월에 들어서 북베트남은 자기들의 주장이 관철되지 않자 공공연하게 공세를 호언하고 하순에는 일제히 도시지역에 포격을 가하고 타이닌(Tay Ninh) 성(省)과 메콩 델타 지역에 공격을 하였고 연합군은 이를 즉각 격파하였다. 이제 일면 전투, 일면 협상이라는 지리한 전쟁양상이 시작된 것이다.

연합군은 계속해서 대대급으로부터 군단 규모급까지 멋있는 명칭이 붙여진 크고 작은 작전을 전개하여 지역 내 적을 소탕하였다. 평정 마을의 숫자가 점점 더 증가되었다. 많은 전과가 발표되고 있으나 이것은 북베트남의 전쟁의지에는 영향을 주지 못하였다. 물이 흐르는 샘을 찾아서 이를 없애지 못하는 한 흐르는 물만 계속 치우다가 치우는 사람이 지치기 마련인 것이다.

파리 회담은 그동안 28차까지 있었으나 북베트남의 전면 북폭 중지와 민족해방전선의 회담 참석 요구로 아무런 진전이 없이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이 교착상태는 아쉬운 측이 이를 타개하는 조치를 취하기 마련이고 이를 타개하는 방법에는 강력한 군사적 압력으로 적이 양보하도록 하는 방법과 아쉬운 측이 먼저 양보하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 것이다.

미 대통령 선거가 막바지에 접어든 10월 31일 존슨 대통령은 전면 북폭 중지를 단행하고 대신 DMZ 복원, 공산측의 남베트남 도시공격의 중지, 즉각 정치회담의 개최를 요구하는 등 3가지 사항을 요구하였다. 또한 그는 북베트남이 북폭 중지를 군사적으로 역이용할 경우에는 즉각 북폭을 재개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미국, 남베트남, 북베트남, 민족해방전선의 4자회담이 11월 6일부터 시작될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소위 제2의 극적인 양보선언이 나온 것이다.

존슨이 여론이 무서워 군사적인 강압 조치를 못하였다면 북베트남의 공세가 뒤따르기 마련이다. 북베트남의 공세는 미 여론을 더욱 자극시키고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될 4자회담에서 유리한 입장이 될 수 있는 일거양득의 효과가 있기 때문인 것이다. 북베트남은 11월 7일부터 다낭(Da Nang)을 비롯한 총 712개 지점에 포격을 가하면서 공세를 개시하였다. 이에 대해 존슨은 11월 20일과 21일에 DMZ 북방에 대하여 강력한 북폭을 단행하여 단호하게 응징을 하였으나 이미 대통령 선거가 끝났기 때문에 이 조치가 가능하였을 것이다.

11월 2일 티우(Thieu)도 민족해방전선과는 협상할 수 없다고 버티었으나 티우만은 미국이 얼마든지 설득시킬 수단을 가지고 있었다. 미국의 대폭 양보로 어렵게 이루어진 4자회담은 회담 장소의 좌석배열 등의 절차상의 의견대립까지 겹쳐 결국 1968년도에는 회담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북베트남으로서도 곧 퇴진할 존슨 정부와 회담할 필요가 없었다. 미 민주당 후보 험프리(Huber H. Humphrey)는 존슨의 극적인 제2의 양보로 전세의 역전을 노렸으나 공화당 후보였던 닉슨(Richard M. Nixon)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이제 베트남전은 닉슨 대통령에게 바톤이 넘겨졌다.

리처드 닉슨

 

민주당 대통령 후보 험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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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리야스필 | 작성시간 13.05.05 언론의 힘이 역시 대단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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