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90. 전쟁의 흐름을 주도하는 미국 국내전선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5.07|조회수674 목록 댓글 0

존슨이 양보한 4자회담은 1969년 1월 25일 파리에서 열렸다. 회담대표는 미국의 롯지(Henry Cabot Lodge), 남베트남의 팜 반 람(Pham Van Lam)외상, 북베트남의 쑤안 투이(Xuan Thuy), 민족해방전선의 트란 부 키엠(Tran Vuu Kiem)이었다. 회담에서 쌍방은 8개항, 10개항 등의 해결방안을 제시하였으나 상호주장의 쟁점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

• 미국, 남베트남 측 : 북베트남군과 미군 및 연합군의 상호철수

                             쌍방 포로의 석방

                             국제 감시기구의 감독하에 총선 실시

• 북베트남, 민족해방전선 측 : 미군 및 연합군의 무조건 철수

                                         북베트남군의 철수는 베트남 민족의 자결사항

                                         선 연립정권수립(티우 퇴진), 후 총선

                                         포로교환과 미국의 배상문제간의 연계 협의

 

민족해방전선의 대표 트란 부 키엠

 

협상은 되풀이되었으나 북베트남측이 상호철수와 남베트남의 현정권 하에서의 총선거부로 회담은 교착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은 미국이나 남베트남도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주요 사안인 것이다. 북베트남은 결코 패배를 모면하기 위해서 협상을 하는 것이 아니라, 막대한 희생을 치루면서 일대 모험을 한 구정공세의 결과로 미국 측이 먼저 제안하여 타 전선으로 전환하기 위한 협상을 하기 때문에 그 자세는 당당한 것이며 협상의 주도권까지 행사하고 있는 것이다.

닉슨은 협상의 진전에 따라 미군을 단계적으로 철수시키려고 하였으나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먼저 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단행하기로 결정하고 1969년 6월 8일 티우 대통령과 미드웨이 섬에서 정상회담이라는 요식행위를 거쳐 공동성명 형식을 빌어 남베트남 정부에 대한 미국의 확고한 지지표명과 제1차 철군으로 8월말까지 25,000명을 철수시키며 베트남화의 진척과 군사정세에 따라 추가철군을 계속한다고 발표하였다.

이 발표에 앞서 미 뉴욕 타임즈 지는 미, 일간의 오키나와 반환협정에 관한 교섭내용을, 워싱턴 포스트 지는 미국이 남베트남을 포기한다는 인상을 내외에 주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티우와 정상회담에서 공동발표하도록 사전에 합의된 미군의 단계적 철수 결정 사실을 6월 3일 보도해버림으로써 외교정책 수행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미 국민의 “알 권리”와 “미국의 국익” 어느 것이 우선하는 가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북베트남도 미국의 언론과 같이 닉슨-티우 정상회담의 김빼기 작전을 추진하였다. 연립정부를 주장하는 북베트남으로서는 그들의 민족해방전선으로는 명분이 미약하여 강력한 인상을 풍길 수 있는 베트남 임시 혁명정부(PRG)를 수립하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6월 6일에 사이공 북방 캄보디아 국경에 있는 타이닌(Tay Ninh) 성에서 임시 혁명정부(이하 PRG로 통칭) 창립회의라는 것을 소집하여 6월 8일에 수상에 후인 탄 팟(Huynh Tan Phat, 민족해방전선 창립의 주도자로 부의장), 외상에 여성인 구엔 티 빈(Nguyen Thi Binh) 등의 내각을 발표하고 PRG 수립을 내외에 발표하였다. 행정, 군사적 권한은 전혀 없는 정부가 탄생된 것이다.

후인 탄 팟

 

구엔 티 빈. 영화 <인도차이나>의 주인공 롤모델이기도 하다.

 

닉슨은 7월 중순에 호치민에게 서한을 보내 비밀협상을 제의하여 8월부터 키신저(Henry Kissinger)와 수안 투이(1970년에 들어서는 북베트남 정치국원인 레 둑 토(Le Duc Tho) 간의 비밀협상이 시작되었다. 인간을 최초로 달에 착륙시켰던 아폴로 11호의 귀환을 환영하기 위해서 괌에 갔었던 닉슨은 7월 25일 앞으로 미국은 국지전 개입을 제한하고 자국의 방어는 일차적으로 자국이 책임을 져야 한다는 닉슨 독트린을 발표하고 남베트남도 방문하였다.

9월 3일에는 북베트남의 호치민이 사망하였다. 미국과 남베트남은 호치민 사망 이후 권력투쟁이 격화되어 협상에 큰 진전이 있을 것이라고 낙관하였으나 오히려 북베트남은 더욱 강경 노선으로 나왔다. 북베트남도 전부터 강경파(친소련파), 온건파(친중국파), 중도파로 분리되어 권력쟁취 암투를 벌였고 전선에서 병사들의 전투거부 사태도 있었으며 식량난까지 겹쳐 중국으로부터 쌀 70만 톤을 수입하는 등 곤경에 처하고 있었으나 그들은 체제상의 이점을 이용하여 일체 외부에 노출시키지 않고 호치민 사후의 체제를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

호찌민의 마지막 순간. 당시 정치국 위원이었던 베트남 혁명의 실세들이 이 자리를 지켰다.

 

닉슨은 이와 같은 분위기를 이용하여 9월 16일 제2차 철군계획을 발표하고 12월 15일까지 35,000명을 철수시키기로 하였다. 9월 하순에 닉슨은 북베트남에 대하여 압력을 가하기 위해 공화당 의원들에게 전쟁에서 패배하는 최초의 대통령이 되지 않겠다고 북베트남에 대한 강경한 대응을 시사하자 칼럼니스트 에반스(Evans)와 노박(Novak)은 닉슨이 하이퐁(Haiphong) 항의 봉쇄와 북베트남으로 진격을 검토하고 있다고 썼다. 반전운동에 불을 당긴 것이다.

10월 15일에 워싱턴에서 대규모 반전시위가 있었다. 시위에서 적대국 수상인 팜반동(Pham Van Dong)이 미국 국민에게 보내는 메시지라는 것이 낭독되었고 부통령이 TV에서 이를 반박하는 아이러니가 연출되었다. 25만 명이 시위에 운집하였다.

미국 내 반전운동

 

11월 3일 닉슨은 TV 연설을 통하여 베트남전에 대한 자신의 단호한 의지를 전 국민에게 표명하였다. 즉 미국의 정책이 가두데모에 의해 좌우되어서는 안되며 7월 25일 괌 선언에 따라 베트남으로부터 미군철수는 계속될 것이나, 전쟁은 평화협상으로 종결하거나 남베트남이 스스로를 방어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같은 닉슨의 베트남 정책 표명은 언론의 논박과 반전운동에 다시 불을 당겨 11월 15일 워싱턴에서 25만 명이 운집하여 반전시위를 하였고 이번에는 일부 과격파들이 법무부 청사로 진입하여 성조기를 불사르고 베트콩 기를 게양하는 난동까지 부렸다.

워싱턴의 백악관 앞에서 베트남 반전 운동을 펼치는 사람들

 

닉슨은 12월 9일 1970년 4월 15일까지 미군 50,000명을 철수시킨다는 제3차 철군계획을 발표하였다. 이제 전과 별 차이 없이 베트남에서 군사작전은 계속되는 가운데 미군철수, 협상, 미국의 반전 운동, 미 언론의 공격, 남베트남의 반정부 운동, 베트남화 등의 전쟁영향 변수들이 뒤엉켜 혼전하는 미국과 남베트남의 자중지란이 전쟁의 흐름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 자중지란은 전쟁의 극적인 전환점이 될 수 있었던 호치민 사망이라는 호재를 정치, 심리, 군사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고 북베트남에게는 위기를 극복할 수 있는 시간을 부여하였고 미군이 철수한 후 최후의 승리를 할 수 있다는 희망과 신념을 주었던 것이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 북마크
  • 신고 센터로 신고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