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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92. 미군의 진통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5.10|조회수1,157 목록 댓글 3

미 국내 사정이 어수선한 가운데 미군의 미라이(My Lai) 학살사건이라는 전쟁의 악재가 표면화되었다. 1969년 4월 베트남전에 참전한 후 제대한 리드나워(Ronald L. Ridenhour)라는 사람이 백악관과 관련부서에 미라이 학살사건에 대한 조사를 요구하는 투서를 함으로써 이 사건에 대한 조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 사건은 1968년 3월 16일 미 아메리칼 사단 20연대 1대대 C중대가 남베트남 쾅나이(Quang Ngai) 성 성도 근처 자유사격지대에 있는 미라이 마을에 착륙하여 베트콩 소탕작전을 전개하면서 일어났다. C중대는 착륙 후에 베트콩들의 저격과 부비트랩에 의해 많은 피해를 입어 병사들은 격분하여 복수심에 불탔었다. 캘리(William L. Calley) 중위가 지휘하는 소대는 미라이 마을을 점령한 후 마을의 부녀자, 노약자, 어린이 등 347명을 중대장 메디나(Ernest Medina) 대위의 묵인 하에 학살하고 가옥을 파괴하였다. 당시 전과는 베트콩 사살 128명, 소화기 3정 노획으로 MACV까지 보고되었다.

로날드 리드나워

 

미라이 학살의 지휘관 켈리 중위

 

미라이 학살 사진

 

아메리칼 사단의 패치

 

중대장 메디나 대위

 

미 육군은 이 사건에 대하여 자체조사를 진행하다가 미 언론에 보도되어 논란이 일어나자 베트남에서 미 제1야전 사령관을 역임한 피어스(William Peers) 중장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사단을 구성하였다. 이 조사단은 1969년 11월부터 1970년 3월까지 군, 민간인 400여 명의 증언을 청취하고 면밀한 조사를 통하여 다시 사단장 코스터(Samuel Koster) 소장을 포함하여 15명의 장교에게 그 책임이 있다고 결론지었다.

아메리칼 사단장 코스터 소장

 

윌리엄 피어스 중장

 

책임이 있다고 인정된 장교들은 군법회의에 기소되어 1971년 3월 29일 고급장교들은 가벼운 처벌로 그쳤고 캘리 중위는 무기징역을 선고받았으나 이후 20년, 다시 10년으로 감형되었다가 1974년 11월에 석방되었다.

피어스 조사위원회의 조사결과로 미라이 사건 외에도 같은 날 50여 명의 민간인 사상자를 낸 사건이 있었고 영관장교들이 작전절차나 전장에서 일어나는 일에 대하여 무관심하였고 잘 알지도 못하였음이 드러났다. 또한 군 기관, 민간기관을 불문하고 나쁜 보고, 좋지 못한 결과보고는 꺼리고 좋은 결과보고는 확인하지도 않고 그대로 보고하는 지휘계통의 경직성도 지적되었다.

구정공세 시 베트콩들이 후에(Hue)에서 2,800여 명을 학살하여 집단 매장한 사건은 그냥 지나쳤지만 이 사건은 미 언론 및 반전운동 그리고 남베트남 국민에게까지 엄청난 파문을 일으켰음은 물론이다.

1969년도에 미 언론과 의회에서 논란이 많았던 또 하나의 전쟁 악재는 5월 14일부터 5월 20일까지 6일간의 햄버거 힐(Hamberger Hill) 전투였다.

햄버거 힐

 

햄버거 힐은 아샤우(A Shau) 계곡에 있는 압비아(Ap Bia) 산을 말한다. 이 압비아 산은 아샤우 계곡으로부터 다낭(Da Nang)과 후에로 통하는 북베트남군의 침투로를 감제하는 고지(937m)로서 라오스 국경으로부터 1마일 떨어져 있다. 원래 이 고지는 미군의 특수부대가 원주민들을 훈련시켜 방어해 호고 있었으나 1966년 3월 북베트남군 2개 연대가 완강하게 이 기지를 공격해오자 미군은 그대로 철수했었다.

미군 대위의 인솔하에 작전중인 소수민족 특수부대

 

아샤우 캠프가 왜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지도

 

그러나 미군은 이후에도 아샤우 계곡 일대에 적의 침투를 저지하기 위한 작전을 계속 실시해 왔었다. 1969년 5월에 압비아 산에 규모 미상의 북베트남군이 점령하고 있는 것을 정찰한 미 101공정사단은 적을 격멸하기 위해 이 고지를 공격하였다.

미군에겐 울부짖는 독수리, 북베트남군에게는 무서운 닭부대로 알려진 101공정사단의 모습이다.

 

미군 1개 대대와 남베트남군 1개 대대가 투입되어 공격을 하였으나 북베트남군은 지금까지 통상적으로 국경선 너머로 철수하던 방식과 달리 완강하게 저항하여 미군은 탈취에 실패하였다. 이후 6일간에 걸쳐 8차례의 피아간에 혈전이 거듭되었고 결국 북베트남군은 라오스로 철수하고 말았다.

미군이 발표한 전과는 북베트남군 사살 597명이었고 미군 피해는 전사 50명이었다. 고지를 탈취한 미군은 며칠 후 철수하였다.

햄버거 힐을 점령한 미군

 

사망한 101 공정사단 병사들이 착용하였던 전투화와 헬멧의 모습이다.

 

미 언론들은 이 전투를 혹독하게 비판하였다. 확보할 필요가 없는 이 고지를 그토록 피를 흘려가며 탈취한 이유가 무엇이며 이것이 바로 베트남 전쟁의 목적이 없음을 나타내는 증거라고 공격하였다.

에드워드 케네디는 미 상원에서 이 전투야말로 오직 미군의 군사적 오만을 충족시키기 위해 병사들의 생명을 희생시킨 무의미하고 무책임한 작전이었다고 비판하고 나섰다.

군대는 그 국가 사회의 일부분으로 그 사회의 기풍이 그대로 군대에 투영되기 마련이다. 1960년대 중반 이후 1970년대 초까지의 미국사회는 퇴폐풍조, 인종분규, 학원소요, 반전운동 등의 사회적인 문제가 뒤엉켜 혼란의 연속이었다. 따라서 이러한 사회의 소산인 군대도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베트남에서 전투하는 병사들의 기강이 해이되었다. 소부대의 전투효율이 문제가 되었다. 장교들의 질 저하, 경력관리를 하여 진급만 하려는 풍조가 문제시 되었다. 특히 베트남에서 돌아온 제대 장병들이 이와 같은 문제를 노출시켰다.

미군의 탈영병 비율이 1966년도 1.47%에서 매년 증가하여 1971년도에는 7.34%까지 증가하였다. 병사들이 장교나 하사관을 살해했거나 살해하려는 기도가 1969~1972년간에 공식적으로 집계된 것이 788건이었다. 병사들의 전투거부자 수는 공식적인 통계는 없으나 1970년에 미 제1기병사단에서만 35명이 있었다고 밝혀졌다. 마약복용은 1970년에 적발된 인원이 11,058명, 이중 1,146명은 중독자였고 귀국 시 병사들의 소변검사에서 헤로인이 검출된 비율이 5.5%였다.

제1기병사단에서 벌어진 전투거부 사례.  전투에 지친 병사들이 상관의 작전지시를 거부한 채 병영을 점령하였다.

 

장교 대 사병 비율은 제2차 세계대전 말인 1945년에 1:11.9, 한국전쟁 말인 1953년에 1:9.6, 베트남 전쟁 말이 1971년에 1:6.5로서 장교의 비율이 증가되어 장교의 질적 저하를 초래함으로써 미라이 학살사건 같은 사고가 일어나게 되었고 지휘 통솔력의 부족으로 소부대의 초급장교들이 군기를 바로잡지 못하였다. 더구나 전투경험을 많이 쌓고 형평을 유지하기 위하여 전투부대 지휘관직을 6개월 만에 교대시켜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켰다. 병사들과 위험을 같이 하고 부대의 단결을 이룩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제한된 기간 내에 경력을 때우거나 전과를 세우기에 급급하였다는 것이다.

또한 병사들은 장교 특히 고급장교들에 대한 반감이 대단하였다. 베트남전의 특성상 각 부대별로 기지에 주둔하게 되었고 이동이 없는 고급사령부나 군수지원 부대의 시설들은 전투부대의 시서로가 비교한다면 호화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병사들은 고급장교들의 호사스러운 생활을 보장하고 그들이 편히 침대에서 잠을 잘 수 있도록 밤새워 경계하여야 했고 오랜 작전을 끝내고 기지로 돌아왔을 때 많은 수행원들을 거느리고 나타나는 고급장교들과 그를 에워싸고 있는 수많은 장교들은 자기들이 당하고 있는 고통이나 위험과는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훈장이나 메달은 위험을 같이 하지 않는 고급사령부의 장교들이 더 많이 탔고 계급과 포상이 비례하는 데에도 불만이 있었다.

베트남에서 보급물자나 PX 물자를 취급하는 장병들의 부정행위도 문제였다. 특히 남베트남의 암시장에 나도는 각종 화기를 비롯한 군수물자, PX 물자 등은 남베트남군과 민간인까지 결탁하여 그렇지 않아도 부정이 만연하고 있는 남베트남 사회를 더욱 혼탁하게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주베트남 사령관 시절에 느낀 바 있었던 웨스트모얼랜드 대장은 참모총장이 된 후 미 육군 대학원에 장교단의 직업관, 전문성, 리더쉽에 대하여 실상을 조사, 분석토록 지시하였다. 1970년 2월 분석결과를 보고받은 웨스트모얼랜드는 충격을 받고 이를 비밀문서로 분류하여 장성급에게만 배부토록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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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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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모에시아 총독 | 작성시간 13.05.10 병사당 장교비율이 높은것을 제외하면 미군이 가진 문제점은 현 한국군이 가진 문제와도 일맥상통하는 면이 많네요.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5.10 한국군은 뭐든지 미군을 따라 가니까요.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05.12 고급장교들은 상대적으로 약한징계...... ㄲㄲ 어쩜이리 한국군과 똑같지......(한국이 미국과 똑같은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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