닉슨 대통령의 적극 외교정책으로 1971년 4월 핑퐁외교로 표면화되기 시작한 미, 중국의 화해 무드와 미, 소 협력관계 개선 등의 국제정세는 북베트남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북베트남 노동당 제1서기 레 두안(Le Duan)은 중국이 미국 탁구 선수단의 입국과 미국 기자단의 중국 취재보도를 허용하는 발표를 하게 되자 1971년 3월 30일부터 한 달 반을 소련과 중국에 체류하면서 지원을 호소하였다. 1971년 7월 15일에는 닉슨의 중국방문 발표까지 있었다.
군인들을 치하하는 레 두안
마오 쩌둥과 만나는 닉슨
국제적으로 번지기 시작하는 데탕트 무드는 북베트남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피 흘려 싸워 온 전쟁의 결과가 열강 간의 정치적 흥정으로 자칫하면 1954년 제네바 협정의 상태로 원상 복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북베트남은 구정공세 이후 지금까지 공세다운 공세를 취하지 못하였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남베트남군은 증강될 것이기 때문에 조속히 대공세를 취하여 군사적으로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여야 한다고 판단하였다.
공세시기를 1972년 봄으로 예정하였다. 1972년은 미 대통령 선거의 해로 1968년 구정공세의 효과를 재탕할 수 있는 해이고 너무 늦거나 빠르지도 않은 봄이 적당하였기 때문이다.
북베트남의 공세준비는 대단하였다. 이제는 게릴라전으로서는 공세를 취할 수는 없었고 정규군으로 공격하여야 했다. 대대적인 신병보충이 이루어졌다. 자원이 부족하여 징집연령을 14세부터 45세까지로 늘렸다. 1971년도에 소련으로부터 350여척 분의 장비와 물자가 지원되었다. 각종 야포, 130㎜ 장거리 야포(130㎜ 야포는 평사포로서 사거리가 27㎞로 당시 남베트남군의 105㎜ 곡사포(사거리 11.2㎞), 155㎜ 곡사포(사거리 14.6㎞)보다는 사정거리가 길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도 32㎞의 사정거리를 가진 175㎜ 평사포를 보유하고 있었다.), 수백 대의 전차가 주종을 이루었다. 신병 훈련이 끝나는 대로 12월부터 본격적으로 호치민 통로를 통하여 부대를 투입하기 시작하였다.
130밀리 야포
보 구엔 지압은 1965년, 1968년도의 공세 경험과 미군의 항공지원을 고려하여 무리한 공세를 전국적으로 강행하지 않고 작전을 단계화하여 작전 진전에 따라 공세를 취하기로 하여 다음과 같은 4단계 공세계획을 수립하였다.
• 제1단계 : 남베트남의 국경선 지역에 연하여 있는 남베트남군 기지들을 구정공세의 기만공세 방식으로 남베트남군의 병력을 분산, 고착시킨 후 주력을 DMZ, 중부고원지대의 닥토(Dak To), 사이공 북쪽에 있는 록닌(Loc Ninh)의 3개 지역에 집중하고 사전 침투한 1개 사단은 취약한 빈딘(Binh Dinh)성 내 지방군과 민병대가 방어하는 봉송(Bong Song)을 공격한다.
• 제2단계 : 제1단계 작전이 성공적으로 종료되면 중부 고원지대에 부대를 증원하여 빈딘 성을 점령한 부대와 연결하여 남베트남을 양분한다.
• 제3단계 : 제2단계 작전으로 남베트남이 양분되면 북부의 전 지역을 점령한다.
• 제4단계 : 남베트남 북부의 점령을 공고히 한 후 남부지역에 공격을 개시하여 전 베트남을 통일한다.
이 공세를 위하여 북베트남군은 전 전력을 총동원하여 총 15개 사단 중 호치민 통로에 배치된 2개 사단과 북베트남에 예비 1개 사단을 제외하고 총 12개 사단을 투입하기로 하였다. 지압은 남베트남군이나 미군이 북베트남지역은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고 북베트남에 1개 사단만을 남겨놓는 모험을 하였다.
지압의 공격방법은 정규사단이 정면에서 보병, 전차, 포병 협동으로 공격을 하면서 게릴라에 의한 배후 공격, 베트콩 하부조직 및 동조자에 의한 내부 교란작전 등을 동시에 병행하는 3면 배합전술을 구사하는 것이었다. 정면에서 공격하는 방식은 화력과 기동을 연결하여 강력한 포병화력으로 방어 측을 무력화시키고 강력한 보병, 전차 협동의 선두부대가 적 방어진의 취약한 지점이나 부대 간격으로 신속히 돌파하여 목표를 점령하는 것이다. 미군의 항공지원을 고려하여 기동화된 방공부대가 선두부대를 엄호하며, 부여된 목표는 방공부대 엄호거리 내에 있어야 했다. 지압은 남베트남군들이 지금까지 북베트남군의 강력한 협동 공격을 방어해 본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대규모 부대에 의한 신속한 공격으로 남베트남군은 와해될 것으로 판단하였다.
지압의 공세 최대목표는 남베트남군이 결정적으로 패퇴한다면 전 북베트남군을 투입하여 제4단계까지 공세를 계속하는 것이었고, 최소의 목표는 제1단계에서 남베트남군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여 베트남화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남베트남군의 자신감을 상실하게 하며 현상동결 휴전에 대비하여 조금이라도 유리한 상황을 조성하고 회담에서 미국의 양보를 얻어내는 것이었다.
이제 베트남에서의 전투는 남베트남군이 수행하여야 했다. 주 베트남 미군은 1971년 말에 18개 대대 158,300명이었고 북베트남군의 공세가 시작될 때는 95,500명으로 전투대대는 총 8개 대대 뿐이었고 이 대대도 정찰, 경계 등의 자위적인 작전만 수행하였을 뿐이고 8월까지는 모두 철수하도록 계획되어 있었다.
북베트남군의 공세징후는 1971년 12월 중순 경부터 미, 남베트남 정보기관에 포착되었다. 호치민 통로에 적의 활동이 급격히 증가하고 항공사진에도 수천대의 트럭이 보급품을 적재하고 있는 것이 확인되었으며 도로를 개설하거나 보수하는 작업이 현저히 늘어났다. 북베트남군 제324사단이 남베트남군 제1군단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것이 새로이 확인되었고 지대공미사일 기지도 많이 구축되었음이 확인되었다.
연합군측은 북베트남군의 작전기도는 정확하게 판단하고 있었다. 적의 침공은 북베트남군의 계획대로 3개 지역으로 지향될 것이며 이중에서도 콘툼(Kontum), 플레이쿠(Pleiku) 지역에 적의 주공이 지향될 것이라고 정확하게 판단하였다. 북베트남군의 계획은 남베트남의 지형과 여건상 누구나 예측이 가능한 전형적인 공격계획인 것이다.
그러나 공격 시기는 판단하지 못하여 기습을 받았다. 연합군은 1968년도와 같이 구정에 공세를 취할 것으로 판단하여 남베트남군은 전 군이 비상경계 태세에 돌입하였다. 1968년도 구정공세 시에는 적의 공세예측에 대한 사전 홍보가 없어 국민들의 심리적 충격이 컸기 때문에 이번에는 미국과 남베트남 양국이 공세의 가능성을 홍보하였다. 이렇게 사전에 준비하고 있는데 공격할 적군은 없는 것이다.
1972년 구정은 아무 일 없이 지나갔고 3월에 들어서도 적의 동태에 새로운 징후나 변동이 나타나지 않았다. 닉슨 대통령이 1972년 2월 21일부터 일주일간 중국을 방문하였고 5월 22일부터 닉슨이 소련을 방문하여 미, 소 정상회담이 이루어진다고 발표되었다. 이제 동,서 양 진영 간에 본격적으로 화해 분위기가 조성되어 이러한 강대국의 화해기류가 베트남전에 영향을 주어 중국과 소련이 북베트남의 공세를 중지시켰다는 관측이 나돌았다.
이러한 분위기하에서 벙커(Ellsworth Bunker) 미 대사는 부활절 휴가차 주 네팔 미 대사를 방문하였고 에이브럼스(Abrams) 대장도 태국으로 휴가를 떠났을 때 북베트남군의 공세가 시작된 것이다.
또한 연합군은 북베트남군의 공세규모와 공격방법을 예측하지 못하여 기습을 받았다. 북베트남군의 공세규모는 3개 주요지역에서 1968년 구정공세 수준 이하로 판단하였으나 12개 사단을 투입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하였다. 또한 공격방법 면에서 보병, 전차 협동으로 당당하게 공격하리라고도 상상하지 못하였다. 전과 같이 산악지역으로부터 해안지역으로 보병부대만으로 공격할 것이라고 판단하였다.
북베트남군의 전차 4~500대가 공세에 투입되었는데 이를 사전에 판단하지 못하여 미, 남베트남 정보기관의 허점을 드러냈다. 항공사진의 판독도 이를 트럭으로 오판하였다. 이는 북베트남군의 철저한 위장과 분산, 그리고 작전보안이 우수하였음을 말해주는 것으로, 북베트남이 호치민 통로를 따라 전차를 이동시켜 사이공 북쪽 록닌 지역에까지 전차를 투입하리가고는 생각지도 못하였다.
3월 20일 미국이 휴전협상의 재개를 요구하자 북베트남도 이에 동의하였으나 북베트남은 4월 15일에 회담을 갖자고 제의해왔다. 키신저(Kissinger)가 4월 24일로 수정제의하자 이에 대한 응답은 공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