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2년도 춘계공세는 북베트남이 전력을 다하여 마지막 승부를 겨룬 공세였으나 남베트남군에 대한 미군의 강력한 항공지원과 공세의 지속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강력한 북폭으로 북베트남은 제1단계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채 6월부터는 공세를 중단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북베트남군의 공세가 중단되자 뒤이어 피탈된 지역을 회복하려는 남베트남군의 반격작전이 전개되었으나 그 성과는 지지부진하여 휴전직전까지 전투는 계속되었다.
공세 동안 정확한 쌍방피해는 밝혀지지 않았으나 북베트남군의 피해는 병력손실 10여만 명, 장비손실 50% 이상, 남베트남군의 피해는 병력손실 25,000여 명으로 추정되었다.
북베트남은 이 공세로 투입된 전투부대는 물론 국내의 주요 산업시설까지 파괴되는 엄청난 피해를 자초하였다. 북베트남이 실감한 것은 미군의 항공지원이 있는 한 군사적 승리는 불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북베트남이 획득한 군사적 성과도 미미한 것이었다. 단 한 가지 성과는 DMZ 남방에 있는 동하(Dong Ha)를 확보한 것뿐이다. 휴전협상에서도 그들이 그렇게 주장했던 연립정권 수립도 관철시키지 못하였다. 닉슨 미 대통령의 소련 방문에 영향을 미치지도 못하였고, 결과적으로 닉슨의 재선을 도와준 꼴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북베트남이 이 공세에서 거둔 성과는 유형적인데 있지 않고 심리적인 데에 있었다. 즉 미군의 막강한 항공화력에도 불구하고 악착같이 공세를 취하고 끝까지 도로차단 지역을 고수하는 북베트남군에 대하여 남베트남군은 두려움을 갖게 되었고 미군의 항공지원이 없으면 이길 수 없다는 패배의식을 남베트남군은 물론 남베트남 국민들에게까지 심어주었다. 또한 점령지에서 북베트남군의 잔악한 만행은 남베트남 국민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차후에 엄청난 피난민 사태를 야기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한 것이다.
이 공세에서 남베트남군의 무능이 적나라하게 노출되었다. 미군의 항공지원 하에서도 쾅트리(Quang Tri) 시를 탈환하는데도 몇 달이 걸려야 했고, 여타 북베트남군의 점령지역도 탈환하지 못하고 그대로 방치하였다. 미군의 항공지원이 없었으면 콘툼(Kontum)이나 안록(An Loc)을 확보할 수 없었다는 것도 남베트남군은 잘 인식하고 있었다.
남베트남 정부는 공세기간에 전국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징집 연기조치 제한, 17세부터 43세까지의 남자들에 대한 해외여행 금지, 대통령에 비상대권 부여 등의 정치적인 조치를 취하였으나, 이와 같은 정치적인 조치만으로 북베트남과의 대결에서 지탱해 나갈 수는 없는 것이다. 공세의 결과를 면밀히 분석하여 보다 근본적인 문제부터 개선해 나가야 했으나 이러한 움직임은 없었다.
미국은 이러한 남베트남군의 무능에는 관계없이 8월 11일에 마지막 전투부대도 철수하였다. 이제 남베트남 주둔 미군은 10월에 32,000명, 연말에는 24,000명 정도로 마지막 철군 정리요원만 잔류하게 되었다.
이제 북베트남의 끝내기 승부수에 대한 마지막 전투도 끝나가고 더 이상 지속할 여력도 없었던 북베트남은 협상 테이블로 돌아가지 않을 수 없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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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레이* 작성시간 13.05.30 이렇게 북베트남이 박살이 났는데 남 베트남이 공산화된다는게 참;;ㄷㄷ
남 베트남 답도 없는듯.... -
답댓글 작성자지옥괭이 작성시간 13.05.31 정치시스템의 차이죠. 국가 전체의 자원을 철저하게 통제하는 공산주의 시스템덕이에요. 만일 북베트남이 공산주의 국가가 아니었다면, 아마 정권이 붕괴하거나 반정부 사태에 시달려서 전쟁을 포기했을 겁니다. 구소련이 독소전 초기에 그 엄청난 피해를 보면서도 버틸 수 있었던 걸 생각해보면, 답이나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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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싸이코 투투★ 작성시간 13.06.02 미군없이는 이길 수 없는 전재이었는데, 미국까지 철수하다니... 남베트남의 운명도 정해져있었네요..
비록 피해는 많았짐나, 미국을 상대로 이렇게 까지 싸울 수 있었던, 북베트남도 대단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