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협정은 문서상으로는 베트남 전쟁을 종식시켰으나 실제로는 환상에 불과한 평화였다. 베트남에 미군이 있는 한 무력통일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인식한 북베트남이 미군 철수의 명분을 주는 문서에 불과한 것이 남베트남에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없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인 것이다. 지금까지의 전쟁과 달라진 것은 미군이 미군포로와 함께 남베트남에서 철수한 것 뿐이었다. 그런데도 키신저(Kissinger)와 레둑토(Le Duc Tho)에게 노벨 평화상이라는 것이 수여되었다.
이 협정으로 북베트남은 그토록 심혈을 기울였던 정치, 외교전의 목표였던 미군철수를 얻어냈으며 그들의 위장단체인 민족해방전선(NLF), 임시혁명정부(PRG)의 국제적인 인정을 받아냈고 그들의 군대는 남베트남 내에 주둔할 수 있게 되어 이제 그들이 속박받을 제약은 아무것도 없게 되었다.
미국은 그렇게 진절머리 났던 베트남 전쟁에서 손을 뗄 수 있는 명분이 생겨 미군을 철수시킬 수 있었고, 전쟁포로도 송환되었으며 닉슨도 쉽게 대통령에 재선될 수 있었다.
소련은 북베트남을 발판으로 동남 아시아에 영향력을 증대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중국도 1972년 닉슨의 방문 이후 파리 협정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국제무대에 나설 수 있게 되었다.
오직 패배자는 남베트남뿐이었다. 그들이 원했던 원하지 않았던지간에 또는 외부의 조종에 의했던 의하지 않았던지간에 그동안 그렇게 전쟁의 구호로 내걸었던 평화와 민족자결의 시대가 온 것이다.
미국과 북베트남의 비밀협상으로 협상의 내용이 베일에 가려졌었고 1972년 10월 18일 협정내용이 남베트남에 통보된 이후에도 불리한 협정내용 때문에 티우(Thieu) 대통령은 이 협정내용의 발표나 토론을 통제하였다.
그러나 북베트남은 비밀협상이 진행되는 가운데도 그 내용을 남베트남 내 지하공작원에게까지 하달하여 문제점을 토의시키고 차후 대비책을 세우도록 하였다. 현상동결 휴전에 대비하여 임시혁명정부의 기를 사전에 대량 제작하여 휴전 발효와 동시에 베트콩 점령지역이라는 표시로 기를 게양토록 준비시켰다. 파리 협정의 당위성과 파리 협정은 베트남 국민의 자결권에 대한 위대한 역사적 승리임을 주민에 홍보할 수 있도록 요원들을 교육시켜 놓았다. 협정이 조인되자 북베트남은 지하방송을 통하여 회담은 베트남 국민의 위대한 승리라고 발표하였다. 1972년 10월에 민족해방전선(NLF) 중앙위는 캄보디아로부터 철의 삼각지로 이동하였다. 앞으로 구성될 민족화해 단결 협의회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북베트남이 이 기구가 구성되어 통일을 위한 서거를 실시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그렇게 되기를 바라지도 않았지만, 이를 강요하는 고도의 정치선전을 전개하여 티우를 고립시킬 준비를 시작한 것이다.
휴전협정이 발효되기 시작하자마자 시작된 것이 깃발전쟁이었다. 남베트남과 베트콩이 서로 자기 지배지역임을 표시하기 위하여 자기네 기를 게양하였다. 그래야 국제 관리감시위원회(ICCS)의 인정을 받아 각각 자기네 영역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베트콩들이 주민을 위협하고 도로를 차단하여 놓고 임시혁명정부 기를 게양하면 남베트남군이 공격하여 지역을 확보하였고 베트콩도 남베트남기가 게양된 지역을 공격하여 이를 확보하는 식의 지역 및 주민장악 쟁탈전이 끊임없이 계속되었다. 오직 평화를 누릴 수 있는 곳은 북베트남 지역 뿐이었다.
국제 관리감시위원회의 구성 국가였던 캐나다는 대표단의 장교 3명이 북베트남군에 억류되었던 사건을 계기로 철수하고 이란으로 대치되었다. 협정 준수를 강요할 수 있는 강제수단이 없는 국제기구는 유명무실한 형식적인 기구에 불과한 것이다.
이 국제기구도 베트남의 평화를 위해서 어떤 구실을 할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한 것이며 기여한 것이 있다면 폴란드와 헝가리 대표가 때로는 북베트남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해 준 것이었다.
국제 관리 감시위원회의 폴란드 대표단
국제 관리 감시위원회의 헝가리 대표단
협정에 따라 4자 공동 군사위원회의 공식적인 활동이 종료됨에 따라 이를 대신하여 협정 당사국인 남베트남과 임시혁명정부(PRG)의 장교로 구성된 군사 공동위원회가 설치되어 탄손누트(Tan Son Nhut)에 있는 미국의 캠프 데이비스(Camp Davis)에 위치하였고 실종자를 계속 확인할 필요성을 느낀 미국은 북베트남과 양국군 장교로 구성된 공동 군사반을 설치하였다. 이 기구의 활동명목으로 공산측 장교들은 사이공에서 공공연하게 활동할 수 있게 되었다.
1973년 12월까지 1972년도 춘계공세 이전의 수준 이상으로 전력을 회복한 북베트남군은 남베트남군의 전초기지에 대하여 공격을 개시하였다. 이는 총공세를 주장하는 북베트남 정치국의 강경파들이 공세의 여건을 조성하기 위한 것이었다. 티우 대통령도 이에 강경하게 대응하여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전초기지를 확보하도록 전 군에 훈령을 내려 특히 북베트남의 보급로를 감제하는 전초기지에는 밀고 밀리는 접전이 계속되었다.
휴전 이후 티우 대통령의 정책은 4대 불가론으로 요약될 수 있다. 영토 양보 불가, 정치적 양보 불가, 공산당 인정 불가, 대북 교역 불가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자유세계에 남베트남의 체면을 유지할 수 있고 미국의 계속적인 원조와 유사시 미군의 항공지원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러나 미군의 철수로 군사력의 균형이 기울어진 상황 하에서 군사적인 견지에서는 무모한 조치였다. 전국에 신장배치된 남베트남군에 비하여 적은 원하는 시간과 장소에 전투력의 집중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전에는 미군의 강력한 지상 및 항공화력 지원으로 버틸 수가 있었고 결정적인 장소에는 공중기동으로 신속하게 병력을 지원할 수 있었으나, 이제는 그와 같은 부자의 전쟁방식으로 전투를 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부분, 부분의 전투에 얽매어 전투력과 시간을 소진하는 가운데 결정적인 시간은 자꾸 다가오고 있었다. 바둑에 비유한다면 이곳 저곳에서 상대방의 선수에 따라 후수만 두면서 생사에만 얽매이는 가운데 바둑 전체의 대세는 계속 한편으로 기울고 있는 판국과 같았다.
군사작전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북베트남의 정치전이었다. 남베트남 정국을 뿌리채 흔들어 놓아야 하는 것이다. 민족화해 단결 협의회를 조속히 구성하여야 한다고 끊임없이 주장하였다. 하노이 방송, 임시혁명정부 자유의 방송은 선전을 계속하였고 대학교, 고등학교의 세미나 주제도 ‘민족의 화해와 단결’이었다.
계엄령을 해제하고 야간통금을 없애고 진정한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달라고 선동하였다. 끊임없이 유언비어가 만들어 졌고 티우의 독재와 부정이 계속 규탄되었다. 또한 부패한 독재정권을 지원하는 미국을 공박하였다. 이제 북베트남의 국제외교전의 목표는 미국의 남베트남 원조중지였다. 남베트남 국민들에게는 모두 솔깃한 주장이었다.
1973년 12월 사이공 근처 나베(Nha Be)에 있는 거대한 유류 저장고가 폭파되어 그 검은 연기가 사이공 하늘을 뒤덮었다. 장차 남베트남의 운명을 예고하는 것처럼 이 검은 연기를 바라보는 시민들의 심정은 참담한 것이었다.
1973년 폭발하는 나베 저장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