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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113. 미 원조의 격감과 그 영향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6.06|조회수1,754 목록 댓글 2

파리 회담의 진행 동안 그리고 조인 후에도 닉슨 대통령은 남베트남 지원을 계속 약속하였다. 협정내용을 가지고 티우(Thieu) 대통령이 반대하자 닉슨은 “협정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보다 중요한 것은 북베트남이 침략을 재개할 때의 대응조치이며 이 같은 사태가 발생 시는 강력히 그리고 신속히 대응”할 것을 다짐하였다.

1973년 1월 중순 닉슨은 애그뉴(Agnew) 미 부통령을 남베트남에 보내어 티우를 설득하도록 하였고 친서에서도 ‘협정 후에도 원조를 계속할 것과 북베트남이 협정을 위반할 경우 전력으로 대응할 것을 보장’하였다. 협정이 조인된 후에 티우 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하도록 초청하였다.

1973년 4월 2일 티우 대통령은 미국을 방문하여 샌클레멘트(San Clemente)의 서부 백악관에서 닉슨 대통령과 회담하였다. 미국의 계속지원이 가능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점점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중동전쟁으로 인한 석유파동으로 미 국내에도 인플레와 실업률이 높아갔다. 문제는 미 의회의 태도였다. 잘못된 지역에서 잘못된 전쟁을 치른 남베트남에는 이제 관심이 없었다. 때마침 터진 워터게이트 사건은 닉슨을 궁지로 몰아넣었다. 부패한 독재정권인 티우 정부를 지원해서는 안 된다고 반대가 빗발쳤다. 티우 대통령도 카오 반 비엔(Cao Van Vien) 참모총장을 1974년 4월에 미국에 보내어 지원을 호소하였으나 미 의회는 1975년 회계연도 분으로 7억 달러의 군사원조만을 승인하였다.

카오 반 비엔 참모총장

 

※ 휴전 후 미국의 대베트남 군사원조액 단위 : 억 달러

회계년도

1973

1974

1975

요청액

29.24

11.85

14.5

의회 승인액

25.62

9.07

7.0

감소량

-3.62

-2.78

-7.5

 

이 7억 달러 내에는 4,600만 달러의 주베트남 미 국방무관실의 운영비가 포함되어 있어 실제는 6.54억 달러인 셈이다. 미 국방부가 요청한 액수의 절반도 안 되는 군사원조는 남베트남군의 전쟁수행 능력에 심각한 영향을 미쳤다.

긴축조치가 취해졌다. 탄약은 1972년도 북베트남군 춘계공세시를 기준으로 가용 보급률은 대략 1/4수준으로 저하되었다. 그래도 추가군사원조가 없으면 재고량은 1975년 6월이면 다 소모될 전망이었다. 유류도 1973년도 소모량을 기준으로 30%를 감소시켰으나 이것도 1975년 5월까지의 저장량 밖에 없었다.

각종 장비의 가동률은 70~90% 선이었으나 부품부족으로 시간이 지날수록 저하되었다. 장비증강은 불가능하였고, 민병대(PF)의 PRC-10 구형 무전기도 PRC-25로 교체하지 못하고 그대로 사용해야 했다.

PRC-10

 

PRC-25

 

공군도 200대 이상의 항공기를 가동시킬 수 없었고, 이미 구매 발주한 36대의 F-5E 전투기는 취소되었다. 미국에서 교육중인 조종사, 정비요원 등을 귀국시키고 1,000여 명의 공군병력을 육군으로 전환하였다. 비행시간의 감축으로 1973년도와 비교하여 화력지원이 50%, 정찰임무가 58%, 헬기수송도 70%로 감소되었다. 공수능력의 감소로 신속한 병력증원, 탄약 및 물자 재보급, 의무후송 등이 미군이 있을 때와 같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자 지금까지 ‘부자의 전쟁방식’에 젖어있던 남베트남군에게 심리적 충격을 주었다. 해군활동도 평균 50%로 감소되었다.

그러나 남베트남군의 근본문제는 탄약, 유류의 재고량이나 장비의 가동률에 있는 것이 아니라 심리적인 데에 있었다. 부자도 아니면서 어느 날 부자가 와서 그 도움으로 부자의 생활방식으로 살다가 어느 날 부자가 떠나가자 가난한 자의 생활방식으로는 못 살겠다는 마음자세인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1974년 8월 8일 닉슨이 대통령직을 사임하였다. 남베트남에게는 대충격이었고 북베트남으로서는 희소식이었다. 1972년도 크리스마스 폭격과 같은 과감한 공격을 감행했던 장본인이 사라진 것이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포드도 취임 후 티우에게 친서를 보내어 의회의 제동 때문에 곤란을 겪고 있으나 이들을 설득시켜 곧 추가원조가 이루어지도록 노력하겠으며 현재의 중요한 시기에 키신저(Kissinger) 국무장관과 마틴(Martin) 주베트남 대사도 유임시켜 현 미국의 남베트남 지원정책을 계속하겠다고 다짐을 하였다.

워터게이트 사건

 

제럴드 포드

 

헨리 키신저

 

그래험 마틴 주베트남 미 대사

 

캄보디아에서 크메르 루즈군이 연말부터 공세를 취하고 1975년 1월 6일에 푸옥 롱(Phuoc Long) 성이 북베트남군에게 함락당하자 키신저는 1월 7일 위기조치반을 소집하여 인도차이나 사태를 논의하였다. 아직 전면공세는 아니라고 판단하였으나 명백한 휴전위반에 대응하기 위하여 남베트남에 3억 달러, 캄보디아에 2억 달러의 추가 군사원조를 의회에 요청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미 의회는 베트남 문제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 더구나 민주당 의원들은 부패한 독재정권의 지원을 반대하고 나섰고 남베트남의 탄(Thanh) 신부를 지원하고 있었다. 내년도 선거를 위해서도 포드 대통령의 입장을 약화시킬 필요가 있었으며 지금까지 종횡무진 비밀 외교협상을 주도한 키신저에 대한 반감까지 겹쳐서 이를 견제하고 의회의 입장을 강화시켜야 하였다.

의회가 승인하지 않자 미 행정부는 “우리는 티우의 독재정권을 지원하려는 것이 아니라 55,000여 명의 미군이 생명을 바쳐서 수호한 남베트남을 이제 와서 버릴 수 없는 것”이라고 설득하면서 의원들이 남베트남을 직접 방문하여 현지의 실정을 본 후에 판단하도록 권유하였다.

1975년 1월 하순부터 3월 초 사이에 상당수의 미 상, 하 양원 의원들이 조별로 남베트남을 다녀갔다. 각자 원하는 대로 순시하였다. 맥클러스키(McClosky) 하원의원은 최전방 1군단 지역을 헬기로 다녀왔다. 모든 곳이 평온하였고 위험하지도 않았다. 그가 보기에는 남베트남 사정이 그렇게 악화되지 않았다. 이미 북베트남은 미 의원들이 방문하는 동안 일체의 전투행위는 중지하도록 지시한 바 있었다.

추가원조 3억 달러는 남베트남, 북베트남 양측의 최대 관심사인 것이다. 남베트남은 필요했고 북베트남은 이를 저지해야 했다. 북베트남이 가진 미끼는 아직도 밝혀지지 않은 2,700여 명의 실종자에 대한 생사여부와 그들의 유해 송환이었다. 담당 북베트남 관리의 명의로 에드워드 케네디 미 상원의원에게 개인서신도 보냈다. 미국이 추가원조를 하지 않는다면 실종자에 대한 추가정보가 있다고 하였다.

남베트남은 미 의원들의 영향력을 감안하여 정중하고 따뜻하게 맞이하였다. 그러나 시기적으로 좋은 여건은 아니었다. 5개 일간지를 정간시키고, 공산주의자라는 명목으로 18명의 언론인을 체포하여 전 세계 언론들이 이를 대서특필한 바 있었다. 바틀렛(Bartlett) 상원의원과 맥클러스키 하원의원은 이 체포된 언론인들을 면담하자고 하였다. 할 수 없이 경찰국장이 수행하여 면담하였다. 그들은 자기네들이 공산주의자였다고 시인하였다. 경찰국장 없이 면담을 하고 싶다고 주장하였다. 논란 끝에 경찰국장이 나가자 그들은 고문을 많이 받아 그렇게 되었다고 번복하였다. 미 의원들은 티우 대통령에게 이 사실을 말하였다. 티우는 공산주의자들은 당연히 그렇게 대답하였을 것이라고 응수하였다.

미 대사관은 통역요원이나 안내를 제공할 필요가 없었다. 많은 의원들이 통역관은 반정부 인사나 정치범으로 구속되었던 인사들 중에서 선정하였고 만나고 싶은 사람들을 만났다. 티우 대통령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일부 의원들의 행동은 거만하였고, 건방진 질문도 던졌고, 마치 지배자처럼 행세하였다. 후에 마틴 대사는 티우 대통령에게 정중히 사과하였다.

미 언론들은 탄손누트(Tan Son Nhut)에 있는 군사 공동위원회와 공동 군사반을 방문하였다. 임시혁명정부(PRG)와 북베트남군 장교들은 이들에게 미국은 더 이상 남베트남인들의 자결권을 침해하지 말라고 일방적으로 선전하였고 실종자에 대한 문의는 전혀 답변이 없었다. 방문동안 펜윅(Fenwick) 여성 하원의원의 핸드백에 든 400달러가 없어졌다. 아마 이들을 맞은 북베트남 장교들 중 누군가가 이 돈을 해방(?)시켰을 것이다.

이들이 돌아간 후에도 추가원조 승인 소식은 없었다. 일부 의원들은 미 행정부가 또 다시 잘못된 장소에서 구제수단을 강구하고 있다고 이를 견제하려 하였다. 남베트남과 캄보디아 사태를 해결하기 위해서 소련, 중국과 협상하라고도 하였다.

미 의원들의 남베트남 방문은 남베트남인들에게 크나큰 실망을 주었고, 구구한 억측과 유언비어를 낳게 했다. 특히 티우 대통령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안겨 주었다. 더 이상 미국의 추가원조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들의 마지막 일행이 떠난 지 열흘도 안 되어, 중부 고원지대에서 북베트남군의 총공세가 개시되자, 미국의 추가원조 없이 현 전선을 지탱할 수 없다고 판단한 티우 대통령은 남베트남군을 재배치하기 위한 중부 고원지대의 철수를 결심하게 되었다고 남베트남군 참모총장 카오 반 비엔 대장은 말하였다.

남베트남은 휴전 후부터 일본, 프랑스 등의 국가에 사절을 보내어 원조를 요청하기도 하였다. 각국 지도자들은 검토하겠다는 외교용어뿐이고 대시 남베트남의 내정개혁 필요성만 역설하였다.

키신저는 제4차 중동전쟁 이후 중동 평화협상을 위해 분주하게 중동 각국을 순방 중에 있었다. 미국이 가장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는 지역이다. 그가 당면해야 하는 애로는 이집트나 이스라엘이 상호양보를 못하겠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이를 보장한다고 하나 남베트남에 대한 미국의 현재 태도로 보아서 믿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베트남군의 총공세가 시작된 후 키신저가 사우디 아라비아의 파이잘(Faisal) 왕에게 남베트남 지원의 의사를 넌지시 타진하자, 파이잘 왕은 미국 대신 사우디 아라비아가 남베트남에 거액의 원조를 제공하겠다고 나섰다. 뜻밖의 장소에서 해결사를 만난 셈이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파이잘 왕은 사흘 후에 조카에 의하여 암살당하고 말았다. 그것은 파이잘 왕의 개인의사로서 그가 죽은 후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파이잘 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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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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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리야스필 작성시간 13.06.06 갑작이 뜬금없는 사우디 왕이네요.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6.06 뭐 돈은 남아도니까 미국 한번 기쁘게 해주고 대신에 정권의 안정이나 기타 여러가지 잇속을 챙기겠다는 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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