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9년 미국 뉴저지 주 뉴어크에서 앨런 긴즈버그가 태어났다. 훗날 그는 1960년대 미국에서 주요한 문화적 인물로 성장해 스스로 동성애자임을 밝히고, 동성애자 차별철폐 운동에 앞장섰으며 20세기 말 가장 영향력 있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보다 2년 앞서, 같은 이름을 가진 한 아이가 영국 리버풀에서 태어났다. 이 아이 역시 역사에 이름을 남겼다. 다만 그는 시 때문에 유명해지거나 성에 대한 관용의 상징으로 이름을 떨치지도 않았다. 자신의 성 지향성을 증오하고 두려워하며 고통받은 앨런 긴즈버그는 현대 역사에서 가장 무시무시한 살인자로 성장했다. 그는 잔혹한 살인광이었으며 ‘토막 살인자’라는 별명이 붙었다.
훗날 그는 자신의 문제를, 다소 편리하게, 1943년에 일어난 사건의 탓으로 돌렸다. 당시 그는 군에 복무했는데, 방공호 안에서 동료 군인에게 강간을 당했다는 것이었다. 그렇지만 그 사실은 증명할 방법이 없고, 사실상 긴즈버그는 이미 그 사건이 발생하기 훨씬 전에 정신분열증 진단을 받은 상태였다.
1947년 군에서 제대한 긴즈버그는 스코틀랜드에 있는 정신병원에 위탁되었다. 그는 횡설수설하는 정신병자들과 함께 몹시 추운 병실에 감금되었고, 날마다 충격요법 치료를 받으며 악몽같은 6개월을 보냈다. 정신병원에서 나온 직후 그는 영국을 떠났고, 처음에는 캐나다, 그 다음에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이민을 갔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그는 자신의 원래 이름을 버리고, 범죄의 역사에 영원히 오명으로 남을 윌리엄 맥도날드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1960년, 36세의 맥도날드는 브리즈번에서 살았고, 55세의 알콜 중독자인 아모스 허스트를 차에 태운 후 처음 살인을 저질렀다. 허스트와 함께 싸구려 호텔에 묵은 맥도날드는 침대에 앉아서 함께 맥주를 마시다가 그를 목 졸라 죽였다.
이 경험은 맥도날드에게 큰 자극을 주었고, 그를 더욱 열광하게 만들었다. 1961년 초에 그는 시드니로 이사를 갔다. 그는 낮에는 우체국에서 편지를 분류했고, 밤에는 공원과 공중 화장실을 배회하며 동성애자를 낚으려 했다.
시드니에 도착한 지 6개월이 지났을 때 살인 충동이 몰려왔다. 그는 기다란 칼과 가벼운 비옷을 가방에 넣어다니다가 알프레드 그린필드라는 41세의 부랑자를 유인해 외딴 수영장으로 데려갔다. 부랑자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맥주를 마시게 한 다음 맥도날드는 비옷을 걸치고 의식을 잃은 부랑자의 얼굴과 목을 10여 차례 이상 찔러 상처를 입혔고, 급소를 베었다. 또 그린필드의 아랫도리를 벗긴 후 성기를 잘라냈고, 나중에 항구에 던져버렸다.
그 후 6개월이 지나자 - 범죄학 용어로 냉각기가 끝나자, 맥도날드의 피에 대한 굶주림은 또다시 극에 달했다. 1961년 11월, 그는 어니스트 코빈이라는 이름의 41세 남성을 도살했다. 이번에는 공중 화장실에서 그의 목을 베었고, 거세한 다음 그 으스스한 전리품을 비닐봉투에 담아서 나중에 시드니 항구에 버렸다.
1962년 3월에도 이와 거의 동일하게 잔혹한 짓을 저질렀다. 이 무렵 경찰은 ‘토막 살인자’로 알려진 미치광이를 찾으려고 대규모의 수색을 벌였다. 그런데 얼마 뒤 맥도날드는 집주인에게 쫓겨났으며, 직장에서도 해고되어 시드니 교외로 이사를 가야 했다. 그는 앨런 브레넌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짓고 샌드위치 가게를 열었다. 끔찍한 마지막 범행은 11월에 발생했다. 당시 그는 42세의 부랑자 제임스 해캣을 자신의 가게에 데려갔다. 그리고 술로 인사불성이 된 그를 도살하고 토막냈다. 그는 시체를 지하실에 감추었고 다시 브리즈번으로 달아났다.
심하게 부패한 시체는 한 달이 훨씬 지나서야 발견되었고, 시체의 신원은 가게 주인인 앨런 브레넌으로 잘못 알려졌으며, 사망원인은 우발적인 감전사로 전해졌다. 맥도날드가 멀리 벗어나 있었더라면 그는 계속해서 마음껏 살인 행각을 벌일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는 시드니로 돌아왔고, 그와 안면이 있는 존 매카시를 길에서 우연히 마주쳤다. 매카시는 죽은 줄 알았던 브레넌이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을 보고 당연히 놀랄 수밖에 없었다. 맥도날드는 달아났고, 매카시는 이 사실을 언론에 알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요 신문에는 ‘걸어다니는 시체이야기’라는 표제로 기사가 실렸다. 치안 당국은 ‘브레넌’의 유해를 발굴했고, 실제 사망자가 제임스 해캣으로 칼에 찔리고 성기가 절단되어 죽었다고 발표했다. 결국 브레넌이 악명 높은 ‘토막 살인자’라는 사실이 밝혀졌으며, 얼마 후 그는 멜버른에서 체포되어 시드니로 이송되었다.1963년 재판에서 그는 살인 네 건에 대해 유죄가 확정되어 종신형을 선고 받았다. 그는 감옥에서 고전 문학을 읽고 쇼팽, 리스트, 길버트와 설리반의 음악을 들으며 나날을 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