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명 높은 조디악 살인범이 체포되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사람들, 특히 뉴욕 시민들은 놀랍다는 반응을 보인다. 결국 그들은 1998년에 체포되어 유죄선고를 받은 것으로 신문 기사가 났던 조디악 총잡이만을 제대로 기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에 체포된 인물은 1960년대 말 샌프란시스코를 공포에 떨게 한 뒤 종적을 감춘 살인자가 아니었다. 그는 단지 뉴욕에 거주하던 젊은 사이코패스로 헤리베토 세다라는 인물이었다. 그는 최초의 조디악 살인자를 멋모르고 존경한 탓에 점성술을 주제로 살인을 벌인 대표적인 모방범죄 살인범이었다.
22살 때부터 살인행각을 개시한 세다는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어머니, 여동생과 함께 살았다. 그는 친구가 없이 외톨이로 지내면서 공중전화와 자판기 등에서 돈을 털었다.딱히 직업도 없고, 사회 생활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을 방에 틀어박혀 <솔저 오브 포춘> 잡지와 연쇄살인범에 대한 책을 읽었다. 세다는 총기광으로 총을 숨기고 다니다가 그만 걸려서 학업을 중단하게 되었다. 그는 특히 조디악 살인범에게 집착했는데, 조디악이 총기를 사용한 보기 드문 연쇄살인범이라는 것이 집착의 부분적인 이유였다. 한편 세다는 광신자였고, 조디악이 사후의 노예로 삼으려고 살인을 저지른다고 보냈던 편지의 신비주의적인 가짜 문양에도 매료되었다.
세다는 조디악에 관한 책에서 영감을 받아 1989년 11월에 지역 경찰서의 방범대에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이것은 조디악(황도대)이다.
제1궁은 죽음이다.
조디악은 황도광이 비칠 때 12궁을 모두 없앨 것이다.
조디악은 공포를 퍼뜨릴 것이며
나는 자메이카 도로와 엘덴 골목에서 무수한 경찰을 보았는데
그러나 소용이 없다. 너희는 조디악을 잡을 수 없다.
오리온만이 조디악과 묘성(昴星)을 제지할 수 있다.
평소 주기적으로 기괴한 편지들에 시달리던 경찰로서는 이 황당한 편지를 딱히 신경쓸 이유가 없었다. 그들은 편지를 철해서 치워버렸다.
편지의 둘째 줄은 세다가 이미 편지를 보낼 때 살인을 저질렀음을 암시했지만, 사실상 최초의 총격 사건은 이듬해 3월에 일어났다. 당시 세다는 권총으로 무장을 하고서 브루클린에서 몇 주 간격을 두고 두 사람을 습격했다. 습격을 당한 두 사람은 모두 살아남았다. 이 무렵 경찰은 총기 사건 두 건이 연관된 것인지 알지 못했고, 강력범죄가 빈번한 뉴욕시티에서 단순히 총기 사고 두 건이 늘어났다고만 생각했다.
그러나 5월 31일에 세다는 다시 범행을 시도했으며, 밤중에 산책을 나온 브루클린의 한 노인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혔다. 한편 그는 희생자의 옆에 기이한 표시를 남겨두었다. 그리고 곧 <뉴욕 포스트> 신문사에는 조디악을 자칭하는 인물의 편지가 더 많이 배달되었다. 결국 6월 19일 신문에는 ‘조디악 총잡이의 수수께끼’라는 기사를 1면에 실었다. 경찰과 대중들은 ‘샘의 아들’사건이 일어난 지 22년이 지나서 또다시 뉴욕에 유령 살인자가 돌아다닌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점성가는 살인범이 6월 21일 이른 새벽에 범행을 감행할 것으로 예상했고, 범인을 잡으려는 경찰이 브루클린 거리에 대거 배치되었다. 그렇지만 세다는 경찰을 속였고, 범행 장소를 맨해튼으로 옮겨 센트럴 파크에서 부랑자를 쏘았다. 다음날 그는 신문사에 편지를 또 보냈고, 자신이 샌프란시스코의 조디악과 동일인물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전설적인 서부 연안의 미치광이 살인범이 느닷없이 뉴욕시티에 나타났다고 하는 말을 믿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편 브루클린 총격범을 목격한 몇몇 사람들은 범인이 60년대의 미치광이치고는 아주 젊다고 말했다. 따라서 이 범행은 사악한 모방범의 소행이라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온 도시가 범인 색출에 신경을 쓰고 있을 때, 세다는 자신의 범행 기사를 스크랩북에 열심히 오려 모았으며, 범행을 일시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한편 점성학에서 범행이 일어날 만한 날이 되어도 아무 일도 발생하지 않자 사람들은 곧 안심하게 되었다. 얼마 후 조디악은 거의 잊혀졌다.
이듬해인 1992년 6월 4일에서 10월 2일 사이에 세다는 브루클린 공원에서 네 사람을 공격했고, 2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한참 지난 쥐 1994년 6월, 같은 공원에서 다섯 번째 총질을 했다. 이 일이 있고 한달이 지났을 때 그는 <뉴욕 포스트>지에 마지막 조디악 편지들을 보냈다. 그는 마지막에 죽은 사람들의 이름을 나열하고서 ‘죽은 자들이여 잠들라. 우리는 그들을 얼마나 혐오한단 말인가’라고 적었다.
세다가 다른 사람을 공격한 것은 그 후 2년이 지나서였다. 이번에 그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총을 겨눴다. 격렬한 말다툼을 벌인 뒤 등 뒤에서 수제 권총으로 쏜 것이다. 여동생은 부상을 입은 채 아파트 주민에게 사실을 알렸고 구급차가 달려왔다.
경찰서에 잡혀간 세다는 사건 경위를 작성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그는 서식을 채운 뒤 자신이 조디악의 편지를 보낼 때 썼던 (십자가 하나와 숫자 7 세 개로 그린)비밀스런 문양으로 서명을 했다. 형사들은 바로 이 청년이 오랫동안 찾던 총잡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얼마 뒤 그들은 세다에게서 모든 자백을 받아냈다.
1998년 6월, 헤리베토 세다는 유죄가 확정되었고, 최소 80년 형을 살게 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성경을 탐독하며 시간을 보냈고, 동료 죄수들에게 성경을 읽어주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