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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135. 티우의 사임과 그 후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7.01|조회수1,915 목록 댓글 2

국가 존망의 기로에서 전 국민의 힘을 결집하여 풍전등화와 같은 남베트남의 운명을 타개해 나가야 할 대통령 티우(Thieu)의 입장은 완전히 사면초가였다. 북베트남군이 사이공 지역으로 계속 이동을 하면서 포위망을 죄어오고 있는 것과 같이 사면에서 티우의 사임을 요구하고 있었다. 북베트남의 선전대로 두옹 반 민(Duong Van Minh)이 집권하면 북베트남과 협상이 가능할 것이라고 모두 생각하였다. 어쩌면 현 상태로는 군사적인 패배가 시간문제이기 때문에 이제는 한 가닥 남은 그들의 마지막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4월 8일 북베트남에 침투되어 있는 믿을만한 미 CIA 첩자가 협상은 위장전술이며 연립정부를 구성한다는 것도 허구이고 호치민 생일인 5월 19일 이전까지는 사이공을 함락시킬 계획이라는 정보를 보내왔다. 그리고 북베트남군이 다낭(Da Nang)에서 노획한 남베트남 공군기로 공격훈련 중이라는 것도 제보하였다.

4월 18일에는 티우의 사임을 재촉하는 여러 가지 사건이 터졌다. 미 상원 외교 소위원회는 4월 11일 포드(Ford) 대통령이 의회에 요청하였던 7.22억 달러의 긴급추가 군사원조를 부결시켰고 대신 남베트남에서 미국인의 철수 비용 3억 달러는 승인하였다. 미 국무부도 지금까지 남베트남인에게 심리적 타격을 고려하여 유보했던 철수작전을 개시하도록 지시하였다.

합동 군사위원회(JMC)의 임시혁명정부(PRG)의 대변인과 북베트남 외상은 티우의 사임을 요구하고 미국인과 미군의 즉각 철수를 요구하였다. 해상에 배치된 미 함대의 존재에 불안을 느꼈던 북베트남은 미국이이 철수 시에 해병대나 헬기를 운용할 필요 없이 안전하게 철수할 수 있도록 보장하겠다고 하였다. 소련 UN 대표 도블리닌(Doblynin)과 키신저(Kissinger) 간에 중재가능성을 타진하는 회담이 시작되었다는 외신이 들어왔고 뉴욕 타임즈지는 믿을만한 소식통을 인용하여 북베트남 주재 소련 대사관에서 4월 13일, 14일 양일 간 모스크바로 타전한 바에 의하면 북베트남은 사이공을 점령할 의사가 없으며 또한 전국에 병력이 분산되어 있어 조기 승리가 어렵다고 보도하였다.

아나톨리 도블리닌

 

4월 19일에도 임시혁명정부와 헝가리 대표도 티우가 사임하고 민이 대통령이 된다면 협상하겠다고 발표하였다. 헝가리 대표는 한술 더 떠서 임시혁명정부는 미국에게 굴욕을 주기를 원치 않으며 티우가 신속히 사임하고 미군이 완전히 철수하면 협상이 가능하고 미 대사관도 그대로 잔류할 수 있다고 하였다. 4월 20일에는 마틴(Martin) 미 대사도 티우의 사임을 종용하였다. 티우는 참모총장 비엔(Vien)과 3군단장 토안(Toan)을 불러서 전황을 확인하였다. 토안은 병사들이 불도저로 티우의 부친 묘소를 밀어버린 것도 보고하였다. 티우는 화를 낼 기분도 아니었다.

3군단장 구엔 반 토안

 

티우는 더 이상 버틸 수가 없게 되었다. 미국의 원조도 이제는 완전히 희망이 없어졌고 북베트남군의 공격을 저지할 능력도 없었다. 그렇게 대통령 자리에 연연했던 티우는 마지막 남아있는 며칠간의 아쉬움을 떨치고 사임을 결정하였다. 4월 21일 12:00 티우는 후옹(Huong) 부통령과 전 수상 키엠(Khiem)을 불러 헌법절차대로 후옹 부통령에게 대통령직을 인계하고 사임할 것을 통고하였다. 티우는 민에게 대통령직을 인계하는 데는 부정적이었다.

트란 반 후옹

 

트란 티엔 키엠

 

19:30에 200여 명의 남베트남 고위인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티우는 그의 사임을 발표하고 TV와 라디오로 중계되는 가운데 90분 동안 국토의 반이 공산지배 하에 있었던 1965년 그가 국가 원수직을 맡은 이래 지금까지의 경과를 회고하고 미국의 배신에 대한 비난을 끝으로 사임연설을 마쳤다. 티우의 부인은 4월 24일 일반여객기로 출국하였고 티우는 4월 25일 밤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에서 자신의 망명을 받아준 대만으로 출국하였다. 후옹도 티우의 충성파 때문에 불안하였고 민도 티우가 있으면 거추장스럽게 여겨 티우의 출국은 서둘러진 것이다.

퇴임 연설을 하는 티우

 

대통령직을 승계한 후옹에 대한 모두의 인식은 병약하고 이 난국을 헤쳐나갈 인물은 못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후옹의 생각은 달랐다. 민에게 인계하라는 성화를 외면하고 민에게 수상으로 입각하도록 교섭하였다. 민이 응할 리 만무한 일이었다. 4월 25일 키(Ky)는 탄손누트에서 지지 군중들을 모아놓고 전 카톨릭 신자들은 일어나 반 공산, 반 정부 운동에 나서야 하며, 지금까지 북베트남군의 승리는 싸우기 전에 도망치는 장군과 장교들 때문이라고 중하고 떠나갈 사람은 다 떠나가고 우리는 소련의 스탈린그라드 항전과 같이 최후의 한 사람까지 싸우자고 떠벌렸다. 자기에게 대통령직이 오지 않은 불만을 토로한 것이다. 그의 부인과 자식들은 이미 출국하고 없었다.

티우가 사임한 후 사이공 거리는 철수 분위기에 휩싸이고 인심은 흉흉하였다. 화폐란 세상풍조를 나타내는 척도이다. 하루 전에 1달러 당 3,000피아스타 하던 것이 5,000피아스타로 올랐다. 북베트남군이 사이공을 점령하면 처녀들을 불구가 되어 전역한 북베트남군과 결혼시킨다는 소문이 나돌아 결혼선풍이 불었다. 음식점에 사람들이 붐볐다. 북베트남군이 점령하면 맛있는 음식을 다시는 맛보지 못할 것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은 유사시에 사용할 수면제를 다량 구입하기도 하였다. 4월 24일까지는 남베트남의 은행, 외국은행 모두 거의 문을 닫았다.

티우가 사임하고 후옹이 승계하자 북베트남의 태도는 한 술 더 떴다. 후옹은 티우의 일당이며 반동분자로서 후옹과는 어떤 협상도 있을 수 없으며 후옹과 티우 일당은 모두 물러나고 미국은 24시간 내에 전부 철수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소련, 프랑스, 임시혁명정부를 통하여 민이라면 협상 가능성이 있다고 계속 연막을 쳤다.

미국인과 남베트남인의 철수가 가속되었다. 하루에 3,000명씩 철수시켰다. 미 상원도 1개 국가에 2만 명이 최고 입국한도이나 남베트남인 입국 비자는 5만을 인가하였다. 4월 25일 미 의회는 미국인 철수 경비로 3억 달러를 승인하였다. 긴급 추가군사원조는 추후 논의사항으로 보류하였다. 마틴 대사는 남베트남 중앙은행에 있는 금괴 16톤을 뉴욕에 있는 연방준비은행에 예탁하도록 티우 대통령을 설득한 적이 있었다. 다른 나라도 합법적으로 금을 예탁한 예를 들었다. 티우의 동의는 없었으나 전쟁지역에서 금괴를 후송하는 데에 따른 보험금 문제로 지연되어 미 특별 군용기가 4월 25일에야 탄손누트에 도착하였다.

남베트남의 마지막 경제장관은 촐론(Cholon) 상공회의소 회장이었던 중국계 구엔 반 하오(Nguyen Van Hao)였다. 하오는 금괴의 후송을 반대하였다. 마틴은 후옹의 동의를 받지 못하였다. 하오는 마틴의 제의를 거절하면서 이 금괴를 끝까지 지켰고 특별기는 27일까지 대기하다가 돌아갔다. 하오가 이상주의자였기 때문에 금괴 후송을 거절하였든 아니면 북베트남의 앞잡이였거나, 그들의 권고에 의해서 그랬든 하오는 남베트남 패망 이후 1년 동안 남베트남의 경제문제에 대하여 고문역할을 하였다.

구엔 반 하오

 

후옹도 협상을 추진하기 위하여 지난 2월에 티우가 구금했던 언론인 18명을 포함한 정치범을 석방하였고 남베트남군에게는 오직 방어만 하도록 참모총장 비엔에게 명령하였다. 약자가 군사적 패배를 시인하면서 협상을 구걸하는 성의표시의 방법인 것이다. 탄손누트에 있는 합동군사반(JMT)의 북베트남 대표에게 휴전협상 대표를 북베트남에 파견하자고 제의하였으나 대답이 없었다.

4월 25일 밤에 국제 관리감시위원회(ICCS)의 폴란드 대표가 떠나는 동료를 위해 칵테일 파티를 열었다. 마틴 미국대사가 나타나자 아직 마틴이 사이공에 있음을 확인한 참석자들이 우성거렸다. 마틴과 폴란드 대표 피알코프스키(Fialkowski) 간에 의미심장한 대화가 오고 갔다.

“지금이야말로 이 피비린내 나는 전투를 종식시키기 위하여 모두 같이 협력하여야 한다.”

“미국이 그렇게 평화를 원한다면 왜 미 함대를 해상에 대기시켜 놓았는가?”

“북베트남이 우리의 철수를 방해하려 한다면 저 함대가 왜 해상에 대기하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그런데 북베트남은 SA-2지대공미사일을 왜 사이공 근교에 추진 배치하였는가?”

“그것은 다만 … 방어목적으로 그렇게 했을 것이다.”

피차 관심사항이었다. 북베트남에게 미 제7함대의 존재는 매우 껄끄러운 것이었다. 언제 저곳에서 함재기들이 전과같이 날아와 자기네들을 공격할지 모른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철수하는 항공기에 대해서 공격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미군 개입에 대한 불안은 지금까지 기우에 불과한 것이었다.

부수상 겸 국방장관인 트란 반 돈(Tran Van Don)은 임시혁명정부(PRG) 측과 계속 접촉을 유지하면서 연립정부 구성을 제의하였다. 임시혁명정부 내 순수민족주의자로 자처하는 비공산주의 계열은 찬성하였다. 그들이 구상하는 것은 각 부서의 책임자와 부책임자를 균등하게 안배하여 연립정부를 구성하면 북베트남도 사이공을 공격하여 점령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그 연립정부는 북베트남의 조종을 받는 정부가 되겠지만 그래도 북베트남군이 완전한 군사적 승리를 달성한 후 사이공을 점령하는 것 보다는 훨씬 낫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이루어 질 수 없는 꿈에 불과한 것이었다. 이미 사이공 공격을 시작한 북베트남의 방송은 사이공 정부와 그 군대를 철저히 섬멸하라고 말하고 있었고 합동군사반의 북베트남측 대표는 협상전망 물음에 “우리 군대는 전진을 계속하고 있다.”고 대답하였다.

트란 반 돈

 

돈과 비엔도 후옹의 사퇴를 권고하였다. 4월 27일 오전에 후옹은 사임을 결심하고 상하원 합동회의에서 후임 대통령을 선출하도록 하였다. 19:30에 국방장관 돈, 비엔, 경제장관 하오가 현 상황을 보고한 후 민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였다. 즉각 취임을 권고하였으나 민은 내일 하겠다고 거절하였다.

민은 마틴에게 내일 대통령 선서 시까지 전 미국인은 철수하도록 종용하였다. 마틴이 30일까지 전 미국인을 철수시키겠다고 합동군사반을 통하여 하노이에 통보하였다고 말하여 민은 양해하였다. 하노이 야간방송은 그들이 그렇게 사탕발림으로 내세웠던 민이 대통령으로 선출되자 “미국은 그들의 추종자 후옹과 민을 내세워 사이공 정부를 구하려고 발버둥을 치고 있다. 협상을 원한다면 남베트남 군대를 해산하라.”고 요구하였다.

민의 취임식은 4월 28일 17:00에 거행되었다. 취임연설에서 민은 모든 정치범을 석방한다고 말하고 즉각 휴전을 제의하였다. 취임식이 끝나자 탄손누트 공항에 북베트남군 항공기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북베트남군이 노획한 A-37 5대가 4월 8일 독립궁을 폭격하였던 트룽(Trung) 중위의 선도로 공격을 한 것이다. 6대의 항공기가 화염에 휩싸였다. 남베트남 사람들은 처음에는 키가 쿠데타를 주도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고 한다.

대통령에 취임하는 두옹 반 민

 

북베트남 공군 소속으로 작전하게 된 조종사 트룽 중위

 

이제 남베트남의 마지막 추태는 끝이 났다. 더 이상 추태를 부릴 수도 없었고 이제 제각기 살길을 찾아 남아있기로 하는 사람은 남고 남베트남을 떠날 사람은 미국에 매달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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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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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이리야스필 | 작성시간 13.07.01 떠날사람은 떠나라!..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7.01 저 때 이미 떠날 수 있는 사람은 대충 다 떠났을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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