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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전쟁사]베트남 전쟁사 - 138. 사이공 함락(3) - 미국의 철수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7.04|조회수5,343 목록 댓글 2

미국의 철수작전은 4월 19일부터 공식적으로 시작되었다. 심리적 요인을 고려하여 야간에 C-130, C-141 등의 대형 수송기들이 운용되어 임시 캠프인 괌으로 수송되었다. 철수시킬 남베트남인들은 공산화됨으로써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 사람, 각종 미국기관에 근무하였던 고용인, 현지 미국인이 추천하는 인원 등이다. 탄손누트(Tan Son Nhut) 공항에서의 철수는 4월 28일로서 끝나고 이후는 헬기에 의해 해상에 대기하고 있는 미군 함정으로 철수시켰다.

4월 29일부터 미 대사관에서 최고 70명까지 탑승시킬 수 있는 CH-53으로 철수를 시작하였으나 연료가 다하여 18:30 이후에는 12명까지 탑승시킬 수 있는 UH-1 헬기로 야간철수를 계속하였다. 북베트남군은 미국의 철수를 방해하지 않았다. 4월 29일만 해도 남베트남 공군기 4대가 북베트남군 대공화기에 의하여 격추되었었다. 북베트남군은 미군 철수를 방해하여 미 제7함대의 공격을 자초할 필요는 없었던 것이며 자기네들에게 방해가 되는 사람들은 한 사람이라도 더 철수시키는 것이 바람직했던 것이다.

후속 헬기들의 착륙을 위해 버려지는 헬기

 

미국의 철수 인원에 포함되지 못하는 남베트남인들은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해안으로 나가 거룻배를 이용하여 미군 함정이 있는 곳까지 도달하여 구조를 요청하였고 미군은 이들을 전부 받아주었다. 피난민을 가득 실은 배들이 계속 줄을 이었다.

4월 28일 남베트남의 3일 대통령 두옹 반 민(Duong Van Minh)에게 협상이 안 될 경우에 철수할 의향을 묻자, 그는 웃으면서 고개를 흔들고 “남베트남 사람들은 내 민족이다. 나는 떠날 수 없다.”고 말하면서 그의 손자, 그의 딸과 대령인 사위, 조카들의 철수를 부탁했다. 그의 오랜 친구였던 해군 참모총장 디에프 쾅 퉁(Diep Quang Thung)이 같이 철수하자고 4월 29일 마지막으로 종용하였을 때도 민은 거절하였다.

해군 참모총장 디에프 쾅 퉁

 

남베트남군 제2군단장이었던 팜반푸(Pham Van Phu) 소장은 가족들의 철수를 부탁하고 자신은 그대로 남았다가 북베트남군이 점령한 2일 후에 권총으로 자살하였다. 남베트남군 제1군단장 트룽(Truong)은 키(Ky)의 자가용 헬기로 미 함정에 안착하였고, 남베트남군 제3군단장 토안(Toan), 티우(Thieu)의 안보담당 보좌관이었고 부정으로 이름난 당 반 쾅(Dang Van Quang) 중장, 참모총장이었던 비엔(Vien)이 떠난 후옹이 후임으로 임명한 빈록(Vinh Loc) 중장 등도 다 탈출하였다.

팜 반 푸 소장

 

피난하는 고위인사.. 전투복 차림이 고 쾅 트룽 1군단사령관,  콧수염이 구엔 카오 키 부통령 겸 공군 원수

 

당 반 쾅 중장

 

빈 록 중장

 

병약한 마틴 미 대사는 끝까지 신의를 지켰다. 4월 28일 부인을 먼저 철수시키자는 직원들의 건의에 남베트남 사람들에게 심리적인 영향을 준다고 거절하고 공관에 사물들은 그대로 놔둔 채 4월 30일 03:45에 마지막 두 번째 헬기로 부인과 같이 철수 헬기에 올랐다.

그래험 마틴 주베트남 미 대사

 

미 대사관에는 기다리는 사람이 400여 명도 더 넘었다. 때로는 질서가 흐트러지기도 하였으나 미 해병대가 강권으로 질서를 바로 잡았다. 마틴 대사가 떠나면서 6대를 더 요청한다고 하였으나 미국인 철수완료를 초조하게 기다리는 미 국무부 상황실에서 작전을 종료시키라는 지시가 내려와 마지막 헬기가 05:24에 이륙하고 철수작전은 끝났다. 키신저(Kissinger)는 자랑스럽게 미국의 철수작전이 종료되었다고 기자들에게 발표하였다.

대사관으로 몰려든 피난민들을 제지하는 미 해병대

 

주베트남 한국대사 이대용(李大鎔) 외 140명의 한국인이 탑승을 하지 못하였고 이 대사는 이후 5년 동안 북베트남 치하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억류생활을 해야 했다.

주베트남 한국공사 이대용

 

미군들은 4월 29일 23:30부터 장비를 폭파하기 시작하였고 마지막 남은 미 해병대는 폭약에 지연신관을 장착한 후 4월 30일 07:30에 밖에서 철수를 기다리는 사람들에게 개스탄을 던지며 문을 폐쇄하고 07:53에 대사관 옥상에서 이륙함으로써 모든 미국인은 이제 사이공을 떠났다. 잠시 후 미 대사관 건물 내부는 폭파되었다.

사이공 함락 직전, 미국 대사관 옥상을 통해 탈출하는 사람들

 

헬기에 타려는 베트남인을 주먹으로 제지하는 모습

 

4월 29일, 30일 양일 18시간 동안 헬기 70대, 630쇼티로 미국인 1,373명, 남베트남인 5,595명, 제3국인 83명을 철수시킴으로서 사상 최대 규모의 헬기 철수 작전이 단시간 내에 이루어졌다. 4월 중 미국인 6,763명, 남베트남인과 제3국인을 포함하여 45,125명, 거룻배 어선을 이용하여 미 함정에 탑승한 6,000여 명이 남베트남을 탈출하였다. 기타 민간 항공기를 이용하거나 비밀리에 수송된 인원도 4,000명 가까이 되어 패망 직전까지 남베트남을 탈출한 남베트남 사람들은 65,000여 명으로 추산되었다.

헬기로 철수하는 미국인들

 

미국의 철수작전은 마틴 대사 지침 하에 미군이 수행하였다. 미 의회는 철수 후에 미군과 군용장비를 운용하여 남베트남인을 철수시킨 것이 못마땅하였다. 대통령이 해외에 주재하는 미국인을 보호하는데 필요한 조치를 할 수 있는 권리는 인정하나 남베트남인을 철수시키는 데에 대통령이 의회의 승인 없이 함선, 항공기, 해병대를 운용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느냐 없느냐를 따지는 논쟁이 의회에서 벌어졌다.

포드(Ford) 대통령은 끝없는 논쟁에 지쳐 백악관 대변인을 통하여 “남베트남인을 철수시키는데 미군을 운용한 것은 합법성을 따져서 운용했던 것이 아니라 도의적인 측면에서 미군을 운용했고 남베트남인들을 철수시켰다. 그들은 공산화 이후 죽을 것이기 때문에 구해주었고 지금도 그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라고 발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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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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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3.07.04 지금 부유층이나 권력층들이 원정출산하는 이유가 그거 아니겠어요?
  • 작성자centurion | 작성시간 13.07.11 " 주베트남 한국대사 이대용(李大鎔) 외 140명의 한국인이 탑승을 하지 못하였고 이 대사는 이후 5년 동안 북베트남 치하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억류생활을 해야 했다. "
    선진국과 후진국의 차이 ㅉㅉ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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