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작림 폭사 4개월뒤인 1928년 10월 여순의 관동군 사령부 입구에 군용차량에 멈추고 어깨에 중좌 견장을 단 젊은 장교가 내립니다. 그가 바로 군내에서 소위 "천재 전략가"라 불리우던 이시하라 간지였습니다. 봉천군벌의 수장 장작림을 폭사시킨 황고둔사건의 주동자 고모토 다이사쿠 대좌가 그 책임을 물어 본국으로 소환되자 그 대신으로 관동군 작전과장으로 부임한 것이었죠.
이 양반이 문제의 인물 이시하라 간지(1889~1949) "일본 최고의 전략가"라고 불리었는데 당시 일본군에서 이런 말은 서구에서 일반적으로 말하는 그 군사전략이 아니라 음모와 책략의 달인(바꾸어 말해서 잔머리의 대가)라는 의미입니다. 덧붙여 비슷한 류의 인물이 바로 츠지 마사노부이죠. ※ 사진출처 : 위키백과
그런데 이 이시하라 간지라는 양반은 "곧 인류최후의 아마겟돈 전쟁이 일어날 것이며 여기에 대비해 국가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먼저 만몽을 장악해야 한다"라고 노골적으로 선동하고 있던 위인이었습니다. 여기다 그의 사고는 히틀러에 비견될만큼 4차원이었는데 "이것은 결코 일본의 권익을 위한 침략이 아니다. 일본인, 중국인, 조선인 3국의 민족이 공존하는 아시아의 이상국을 만들기 위함이다. 그것이 바로 왕도낙토인 것이다."라고 주장합니다 . "침략으로 어떻게 공존이 가능한가"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여지껏 그렇게 해본적이 없을뿐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는 황당무계한 궤변을 늘어놓습니다.
이시하라는 이런 자신의 뇌내망상을 머리속에만 두지 않고 동경의 참모본부에 여러차례 건의합니다. 그러나 당시 정부와 군부에서는 "방법이 너무 성급하다. 중국과 소련과의 관계 악화는 물론이고 자칫하면 국제적으로 고립될 수 있다"고 반대하죠. 이것은 근본적으로 만주 침략 자체를 반대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조급증으로 자신을 주체할 수 없었던 인간에게는 결코 만족스럽지 못한 대답이었습니다. 그의 뇌속은 오로지 일본민족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선민사상으로 가득차 있었으며, 나중에 이 4차원 또라이를 우상으로 떠받드는 인간들에 의해 소위 "대동아공영권"이라는 말로 미화됩니다.(만화 "지팡구"에서도 뭔가 개념인으로 묘사되죠.)
허락도 없이 멋대로 사고를 친 고모토에 대해 천황이 분노하고 다나카 내각이 총사퇴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면서도 막상 군부에서는 그를 대신해 보낸 사람이 바로 이런 양반이었던 것이죠. 고모토의 행위는 명백한 명령불복에 테러사주, 직권남용으로 원칙대로라면 군법회의에 회부되어 사형에 처해질 일이었으나 "애국이 지나쳐"운운하며 단지 예비역으로 편입하는 것으로 끝내고 남만주철도주식회사의 이사로 낙하산으로 내려옵니다.
여기에다 29년 5월에는 이타다키 세이치로 대좌가 관동군 참모로, 31년 8월에는 혼조 시게루 중장이 새로운 관동군 사령관으로 여순으로 옵니다. 만주침략의 음모자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이죠. 혼조 시게루는 부임직전 정부에는 비밀로 한채, 군내 강경파와 군원로들과 몰래 협의하여 유사시 관동군이 움직이면 조선군도 즉각 개입하여 병력을 지원하기로 약속하였고 3만엔의 비자금까지 지원받습니다.
왜 이들은 만주를 노리고 있었는가. 만주사변의 원인에 대해 흔히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첫번째로, 27년이래 일본내 불경기와 세계공황으로 경제가 악화되고 정부의 긴축정책으로 인한 군내 불만분자들과 군산복합체들이 손을 잡아 침략전쟁으로 돌파구를 찾으려고 했던 것, 둘째로 장학량정권의 반일운동과 일본으로부터 자립을 꾀하기 위해 일본이 소유한 남만주철도(만철) 부근에 별도의 새로운 철도를 건설하려고 한 것이 관동군을 결정적으로 자극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일본의 만주 지배에 대한 야욕은 뿌리깊은 것이었으며 메이지유신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1880년에 이미 러시아의 남하와 서구 열강의 침략으로부터 국가를 방위하고 열강의 반열에 오르기 위해서는 한반도와 만주를 식민지로서 경영해야 한다는 주장이 공공연히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러일전쟁에서 승리하고 포츠머스조약을 통해 여순과 대련의 조차권, 남만주철도부설권을 획득함으로서 그들은 만주에 침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여순과 대련의 조차지를 통칭하여 "관동주(關東州)"라고 부르며 관동대도독부를 설치하였고 1919년에 관동청으로 개칭하면서 여기에 주둔한 부대를 "관동군"이라 부르게 되었죠.
열차위에서 경비중인 관동군의 모습.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soni2000/120010931462
당초 관동군의 임무는 관동주와 일본이 경영하는 남만주철도(장춘↔여순, 봉천)의 경비였습니다. 그런데 일본이 조선을 합병하고 만주에도 욕심을 내기 시작하면서 관동군이 바로 이 첨병의 역할을 맡게 되었죠. 남만주를 사실상 반식민지화한 일본은 이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자 1만 2천명의 병력을 동원해 시베리아와 북만주로 세력을 확대하지만 실패로 돌아갑니다. 또한 1920년대 동북 3성을 통치하며 "왕노릇"을 하던 장작림의 스폰서 역할을 했고, 막대한 돈을 만주와 봉천군벌에게 투자하여 만주의 외국인 투자금의 70%이상을 일본이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만주사변 직전 관동군의 편제 및 배치는 다음과 같았습니다.
관동군 사령부(여순)
제2사단 사령부(요양)
- 제3보병여단(장춘) : 제4보병연대(장춘), 제29보병연대(봉천)
- 제15보병여단(요양) : 16보병연대(요양), 제30보병연대(여순)
- 사단직속 : 제2야전포병연대(해성), 제2기병연대(궁장령)
독립수비대(봉천), 제2공병대대(봉천), 1개 중포병대대(여순)
총병력 : 1개 사단(2개 여단, 6개 연대), 1개 독립수비대(6개 대대), 1개 중포병대대, 10,400명
여순의 옛 관동군 사령부 건물. 지금은 박물관이라는군요...-.-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jangwan2/140132028786
보시다시피 관동군은 남만주를 관통하는 만철의 보호를 명분으로 주요 도시와 전략 요충지를 죄다 장악함으로서 동북은 사실상 일본의 위성국이나 다름없는 실정이었으며 이들이 마음만 먹는다면 얼마든지 동북을 좌지우지 할 수 있었습니다.
파란색이 일본이 운영하는 만철, 위의 빨간색이 소련의 중동철도. 여기에다 만주 곳곳에 일본자본으로 건설한 지선들이 관통하고 철도 주변에는 일본군이 1km당 15명단위로 배치되어 있었으니 만주는 일본의 반식민지나 다름없었습니다.(※ 사진출처 : 만철 - 일본제국의 싱크탱크, p87)
더욱이 이들은 고작 철도경비대에 불과하면서도 국방의 최전선에 있다는 것을 명분으로 근거없는 엘리트 의식에 빠져 독단적 행동에다 하극상을 일삼으며 자신들의 세력을 확대할 기회만 노립니다. 군 상층부는 이 망상환자들의 전횡을 강력하게 처벌하여 기강을 잡는 것이 정상임에도 자신들의 위신 실추와 정부의 간섭으로 군의 독립성이 침해될 것을 두려워하여 되려 질질 끌려다니는 추태를 보입니다. 그렇다보니 더욱 간이 배밖으로 나와 중앙의 지시를 마음껏 생까고 만주에서 황고둔사건을 비롯해 만보산사건, 나카무라 사건 등 굵직굵직한 사고를 치며 결국 일본 전체를 파멸의 나락으로 끌고 나가게 되죠.
철도 경비대라면 이정도는 되어야.... 은하철도를 지키는 SDF의 정예 멤버들. 관동군 따위와는 다르다고.
장학량의 동북군. 전적으로 일본의 원조에 의존하여 육성된 군대였기에 고위 지휘관들중에는 일본과 내통하고 있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2591?Redirect=Log&logNo=140088584837
이렇듯, 그의 역치는 반일이나 민족애국주의와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권력을 잡은 이후 역치를 선언할때까지 장개석과 일본을 놓고 어느 쪽에 붙는 것이 유리한지를 지속적으로 저울질합니다.
일본의 태도 변화를 확인한 장학량은 드디어 결단을 내리고 동북역치를 선언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비록 중앙에 복종하지만 동3성을 지키는 것이 아버지에 대한 효도"라면서 동북역치의 실체에 대해 스스로 인정합니다. 즉, 중앙에 복종을 선언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형식적인 것이며 자기 통치기반과 체제유지가 최우선이었던 것이죠. 중앙으로의 복속을 선언했다고 실제로 달라진 것은 청천백일기를 내걸었다는 것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당시 군축문제로 풍옥상, 이종인 등 신군벌들과 극심한 갈등을 빚고 내전상황에 직면한 장개석으로서는 장학량에게 어떤 간섭도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었습니다.
또한 자신의 왕국내에서 반일시위나 일본의 이권을 위협하고 주권회복이나 자주권을 찾으려는 그 어떤 행동도 엄격히 금합니다. 장학량은 단지 전형적인 군벌 독재자일뿐 일부에서 주장하듯 특별히 반일주의자라고 볼 수는 없었습니다. 민간과 학생들의 배일운동에 대해서도 강경하게 탄압하죠. 그런 그가 나중에 장개석보고 친일운운한 것은 어불성설이었으며 단지 동북을 빼앗긴 상황에서 자기가 생존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에 불과했습니다.
철저한 야심가였던 장학량은 권력을 잡자말자 자기 권력 지반을 강화하고 세력을 확대하는데 혈안이 됩니다. 역치 선언직후 아버지의 오른팔이었던 양우정을 전격 숙청한데 이어, 29년 7월에는 "중동로사건"을 일으킵니다.
청말, 제정러시아는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건설하면서 북만주의 흑룡강성과 길림성을 관통하여 블라디보스톡까지 연결하는 중동철도(동청철도라고도 함)를 건설합니다. 이 중동철도는 중소국경의 만주리부터 하얼빈을 거쳐 동쪽의 연해주 접경도시인 동녕 수분하까지 총 1500km에 달했으며 이후 장춘, 봉천, 대련까지 확대해 지선을 포함해 총연장 2400km에 달합니다. 이 철도에 대해 장학량은 일방적으로 철도 권리 회수를 선언했다가 소련군의 대규모 침략을 받게 됩니다. 9월 19일부터 11월 20일까지 전개된 양측의 전쟁은 소련군의 압도적인 전력으로 동북군은 일방적으로 아작났으며 만주리에서 동북군 제17여단은 단 한명만 빼고 여단장 이하 7천명 전원이 전사하는 대참패를 당함으로서 사실상 백기를 들게 됩니다.
만주리 점령후 소련군이 획득한 동북군 제15여단 독전대의 깃발
한편, 중원에서는 신군벌들간의 갈등이 결국 내전으로 번져 이른바 "중원대전"이 발발합니다. 29년 2월 광서군벌 이종인의 반란을 시작으로, 30년 3월에는 이종인, 풍옥상, 염석산을 비롯해 신구군벌들과 국민당내 불만세력들이 죄다 뭉쳐 일대 반장개석 포위망을 구축합니다. 쌍방 100만이상이 동원된 군벌시대 최대의 내전에서 양측은 일진일퇴를 거듭합니다.
장개석과 반장개석 진영 모두 동북에서 강력한 세력을 가지고 있던 장학량에게 추파를 던집니다. 장학량은 당초에는 중립을 지키며 상황을 관망하다가 점차 전황이 장개석측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30년 9월 18일 관내 출병을 결정하고 자신의 직계군을 중심으로 약 7만의 병력이 산해관을 넘어 북평-천진으로 진격합니다. 이것은 반장세력에게는 결정타였죠. 따라서 11월 중원대전은 장개석-장학량 연합군의 승리로 끝납니다.
중원대전당시의 상황. 붉은색이 장개석과 장학량의 공격이고 검은색이 반장세력의 공격입니다. 중원대전은 군벌시대 최대의 격전이었고 사실 숫적으로는 장개석의 중앙군이 월등히 불리했지만, 중앙군은 장개석에 의해 일사분란하게 지휘된 반면 반장측은 이합집산으로 뭉친 잡동사니군대다보니 서로 제대로 협조도 되지 않아 각개플레이를 하고 점령지를 놓고 자기들끼리 치고박고 싸우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초반에는 반장측이 우세했지만 곧 장개석측이 우세해져 산동 제남에서 결정타를 먹였고 장학량이 개입함으로서 승패는 결정납니다. 서북군의 거두 풍옥상은 몰락하고 그의 세력지는 그의 휘하에 있던 군소군벌들이 독립했지만(손연중, 송철원, 한복구 등) 나머지들은 세력은 약화되었어도 여전히 상당한 군사력을 여전히 보유한채 할거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만주사변 직전에는 왕정위와 광서, 광동군벌들을 중심으로 이른바 "양광사변"이 발발했고 장개석은 하야하죠. 만주사변당시 남경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채 소극적으로 국제연맹에 호소한 것도 실상 공산당 토벌보다는 이런 이유가 컸습니다.
이런 장학량의 출병은 말로는 장개석의 요청에 의한 것이라고 했지만, 실상 그의 속셈은 바로 중원 진출의 야심이었습니다. 그는 이미 한창 중원대전으로 쌍방이 피터지게 싸우고 있던 5월 17일 비밀회의에서 "지금의 전란은 우리가 관내로 세력을 확대할 절호의 기회"라고 단언하였고 출병할때도 "아버지의 유지를 잇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중원대전의 승리로 장학량은 중화민국 육해공군 부사령관이라는 장개석 다음의 지위를 차지한데다 동북3성외에 열하성과 하북성, 산동성, 찰합이성, 수원성까지 망라하는 광대한 지역을 단숨에 차지합니다.
이때 그의 기분은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것같았겠지만 곧 그 댓가가 결코 만만치 않음을 깨닫게 됩니다. 곧 염석산을 비롯한 여러 화북군벌들의 반격에 직면하게 된 그는 산동성과 찰합이성, 수원성에서 물러나야 했고 하북성에서도 북평-천진지역만 간신히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장학량은 애써 차지한 이 지역을 포기하지 않으려고 만주에서 병력을 추가로 빼내어 최대 15만명까지 늘립니다. 전해의 대소전쟁의 패전에다, 야심에 눈먼 장학량으로 인해 만주는 군사적으로 공백지가 됩니다. 더욱이 장학량은 자신의 왕국에 장개석이 간섭하는 것에 대해 극도로 반응함으로서 중앙정부와의 관계도 악화됩니다. 국가보다 오로지 군벌 개인의 이익만 생각하는 것이 바로 만주사변 직전의 중국이 처한 현실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을 이용해 관동군의 이시하라 간지가 만주를 통째로 장악하려는 음모를 꾸미게 되죠.
이시하라 간지는 만보산 사건과 나카무라 사건을 조작하여 만주에서 중일 양측의 갈등을 유발합니다. 관내진출에만 혈안이 되어 있던 장학량으로서는 관동군과 마찰을 빚고 싶지 않았고 무조건 저자세로 나갑니다. 동북정부위원회 주석 겸 동북변방군사령관으로서 장학량을 대신해 동북3성을 맡고 있던 구파의 우두머리 장작상이 북평의 장학량에게 전보를 쳐 "관동군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출병중인 병력을 돌려 동북으로 돌아올 것"을 거듭 건의하였고 나카무라 사건당시 중국측 대표였던 고유균(나중에 남경정부의 외교부장이 됨)도 관동군이 뭔가를 꾸미고 있음을 경고하였으나 장학량은 묵살합니다. 오히려 8월 6일에는 동북군에게 "일본이 어떤 트집을 잡더라도 반항해서는 안된다"라고 지시합니다.
초토화된 평양 화교거리. 만보산 사건(수로이용문제로 중국측과 재만조선인들간의 충돌이 중일양국의 문제로 비화됨)으로 흥분한 조선인들이 조선내 화교들을 무차별로 공격합니다. 이는 일본이 의도적으로 중한간의 갈등을 조장하고 이를 이용해 만주에 개입하려고 음모를 꾸민 것이죠.(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2591/140088584837)
※ 참고로, 흔히 알려져 있는 장개석의 "부저항지시"는 만주사변 직후가 아니라 만보산 사건과 나카무라사건과 관련해 7월과 8월 두차례 보내진 것입니다. 전문에서 장개석이 "일본의 도발에 저항하지 말 것"을 권고한 것은 사실이지만 당시 초공전과 양광사변 등 정치적 내환으로 일본의 도발에 중앙정부가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것과, 애초에 장개석과 관계없이 장학량은 내부적으로 부저항지시를 내려놓고 있었다는 점에서 장학량에게는 변명거리가 될 수 없는 것이죠.
이시하라 간지, 이타다키 세이치로는 관동군 사령관인 혼조 시게루와 함께 만철 폭파사건을 조작한후 이를 빌미로 관동군을 출동시켜 동북군을 무장해제시키고 남만주 전역을 단숨에 장악할 계획을 수립합니다. 만주에 남아있는 동북군의 숫자가 15만에 달하여 1만에 불과한 관동군을 압도하지만, 일단 장학량이 부재중인데다 숫자만 많을뿐 오합지졸이기에 손쉽게 제압이 가능할 것이며 또한 소련이나 서구열강들 역시 나카무라사건에서 볼때 개입할 가능성은 없을 것이라고 판단합니다. 심지어 본국정부가 관동군의 행동을 저지한다면 본국의 세력을 선동해 쿠테타까지 불사할 생각이었습니다. 한마디로 기왕 일 저지를 것 갈데까지 가보자는 것이었죠.
그리하여 1931년 9월 18일 밤 10시 20분. 이른바 "유조호"사건이 일어납니다. 바로 관동군의 만주침략의 신호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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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7.09 그래서 1920년 5월 니코라예프스크항에서는 일본군 수비대와 거류민 등 720명이 소련군의 공격으로 몰살당하는 참사가 벌어지죠. 이에 대한 보복으로 일본군은 민간인들을 학살하고 부녀자를 강간하는 사건이 자주 발생합니다. 그 결과 이때부터 위안소라는 것이 공식적으로 설치가 됩니다. 병사들은 자신이 왜 싸워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도 없었고 방한복조차 부족하여 추위에 떨다가 전의를 상실하고 대대병력 전체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기도 했습니다. 군기위반과 탈영사건도 비일비재했습니다. 각지에 흩어진 부대를 제대로 통솔하기가 어렵다보니 각 단위부대가 상급부대의 지시를 무시하고 독단적 행동도 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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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7.09 결국 철수로 끝이 났지만 이때의 경험은 두고두고 일본 육군에 트라우마로 남게 되고 훗날 일본군의 막장화에 기초를 제공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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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댓글 작성자지후선배 작성시간 13.07.09 오 감사합니다 ㅋㅋ 당시출병병력이9만명이면 상당한규모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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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타메를랑 작성시간 13.07.13 이시하라 간지, 일본 만화가 모토야마 히로시가 그린 <나라가 불탄다>에서도 잘 나왔죠. 참고로 모토야마 히로시는 보수 우익이지만, 그렇다고 일본 극우파처럼 싸이코 수준은 아닙니다. <나라가 불탄다>에서 일본군이 저지른 남경 대학살을 생생하게 묘사했다가 일본 극우들의 반발을 사서 서둘러 만화를 끝내 버린 일도 있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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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달민족 작성시간 13.07.21 하기사 만선사관이 만들어졌던걸 생각하면;; 예전에 일본사학 논문집에서 '서양인이 일본에 유학와서' '조선의 수직여진인'에 관한 논문을 썼던것을 확인했을때의 놀라움이란 대단한 것이었죠 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