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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사]20세기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 중일전쟁사 3화 < 상해사변과 만주국 건설 >

작성자푸른 장미|작성시간13.07.12|조회수1,461 목록 댓글 7

남만주를 석권한 관동군은 여세를 몰아 북만주마저 단숨에 장악하지만, 정치적으로 분열되어 있던 중국으로서는 국제연맹에 제소하고 과거 청일전쟁 당시처럼 열강들이 일본을 견제해 줄 것을 기대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일본의 침략에 상투적인 비난만 했을 뿐, 실질적으로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미, 영, 프는 오히려 일본의 입장을 대변하기까지 하였고, 스탈린이 철권통치를 시작한 소련 역시 중동로사건때의 그 강경한 모습과는 달리 일본이 소련을 선제공격하지 않는 한 중일 양국의 분쟁에 개입할 의사가 없다고 분명히 합니다. 북만주에 막대한 이권을 가지고 있던 소련은 만주국 건국후 일본에게 중동철도를 비롯한 이권들을 죄다 팔아버리고 손을 떼버립니다. 강대국들의 이해관계가 그 무엇보다 최우선이 되는 국제기구의 무기력함은 국제연맹만이 아니라 현재의 유엔 역시 전혀 다르지 않죠.  

 

32년 1월 17일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 이사회 회의에서도 중국대표의 비난에 대해 일본측은 "겨우 1만5천명에 불과한 군대로 그 광대한 만주 전체를 장악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 아닌가. 관동군은 결코 영토적 야심이 없으며 단지 비적을 토벌하고 철도 운영을 정상화하려는 것뿐이다."라고 응수하였고 열강들은 일본측 입장을 지지하거나 묵인합니다. 이런 태도가 일본측을 더욱 기고만장하게 만든 것은 틀림없었죠. 

 

그러나 장학량은 일본 시대하라 외상과의 회담에서 "일본군은 단지 철도의 안전을 확보하는데 목적이 있을뿐 곧 철병할 것"이라는 말만 믿고 부저항 지시를 했으나, 관동군은 그 약속을 깨고 장학량의 임시정부가 있는 금주까지 공격해 32년 1월 3일 거의 무저항으로 간단하게 장악함으로서 열하성까지 세력을 뻗힙니다. 장개석이 장학량에게 "일본군이 지속 남하할 경우 전력으로 금주를 방어하라"고 명령하였음에도 화북군벌들에게 배후를 위협받고 있던 장학량으로서는 일본군과의 승산없는 싸움보다는 자신의 남은 병력과 기반이라도 유지하는 쪽을 택하고 스스로 산해관 이남으로 철수합니다. 

 

※ 당시 남경정부내에서도 금주를 사수하기 위해 일본과 결전을 할 것인가를 놓고 논란이 벌어집니다. 군사위원회 참모장인 주배덕은 당시 왕정위와 광서, 광동군벌들의 반란에다, 화북이 중앙으로부터 반독립된 군벌들이 지배하고 있는 실정에서 현실적으로 중앙군이 장학량군을 지원할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자존심만 내세워 질 것이 뻔한 싸움을 고집할 것인가, 일본과 협상하여 다른 방법을 강구할 것인가 둘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럼에도 남경정부측은 국내 여론을 생각해서라도 장학량이 사생결단으로 싸워주기를 원했으나 장학량은 그 명령을 결국 묵살합니다. 

 

관동군은 처음에는 만주에 대해 군정을 실시할 계획이었으나 참모장 미야케 소장은 이시하라, 이타다키등과 짝짜꿍하여 본국 정부와는 아무 상의도 없이 독단적으로 아예 만주를 중국으로 분리독립시킬 음모를 꾸밉니다. 이를 위해 만주사변 당시 동3성 행정장관이었던 장경혜를 비롯해 원금개, 장해붕, 희흡 등 친일파들을 포섭하여 만주국 건설 계획을 추진하고, 천진의 영국조계에서 할일없이 뒹굴거리던 "마지막 황제" 부의를 꼬드겨 11월 13일 여순으로 오게합니다. 여기에 대해 당시 와카스키수상과 시대하라 외상은 "내 힘으로는 군을 통제할 수 없다"라고 통탄해 했다고 하지만, 일본의 만주침략의 야욕은 결코 몇몇 관동군 장교들의 독단적 행동이 아니라 오랜기간 추진되어 온 일관된 정책이었습니다. 단지, 그 시기와 수단, 방법에서 이견이 있었을 뿐이죠. 그의 "통탄"은 평화가 깨져서가 아니라, 멋모르고 책임도 못질 짓을 하고 있는 풋내기들의 폭주에 대한 것이었죠. 

  

장경혜(1871~1956) : 장작림이 마적시절부터 최측근이었던 인물로 장작상과 함께 동북군내 구파의 우두머리였습니다. 매우 무능한 인물이었으나 장작림과의 오랜 의리로 요직을 두루 거칩니다. 장작림 폭사후 정권을 장악한 장학량이 구파를 푸대접하자 불화가 깊어졌고 만주사변이 터지자 장학량을 배신하고 친일로 돌아섭니다. 관동군에 의해 흑룡강성장이 되었다가 만주국 건국후 부의밑에서 총리가 되지만 부의와 마찬가지로 허수아비에 불과하여 "두부총리"라고 불립니다. 일본 패망후 부의와 함께 시베리아로 끌려갔다가 중공으로 송환되어 강제수용소에서 최후를 맞이하죠... 

※ 사진출처 : 위키백과  

 

한편, 일본의 침략에 반발하여 중국 전국 곳곳에서 반일시위와 일본물품 불매운동이 벌어져 대일 수출입은 일시적으로 90%이상 격감합니다. 여기다 32년 1월 3일 복건성 복주 일본총영사관 경찰관사에 방화미수사건에다 일본인 소학교 기숙사에서 일본인 교사 부부가 살해되는 일이 발생함으로서 만주에 이어 화남에서도 일촉즉발 상황까지 치닫습니다.  

 

그러나 만주에서처럼 일본이 무력침공을 감행할 것을 우려한 복건성정부가 사과하고 반일운동 중지를 약속했는데, 문제는 이 사건이 사실은 대만군 사령부의 정보장교가 중국인 부랑자에게 돈을 주고 사주한 것으로 밝혀집니다. 그는 복주시에서 각종 방화, 암살 사건을 저지르고 이를 명분으로 대만군을 출병시켜 복건성을 침략할 계획이었습니다. 대만군 사령부의 승인도 없이 일개 대위가 독단으로 저지른 것이었으나 그 방법에서 바로 같은 달 상해에서 일어난 일본 승려 살해 사건과 유사했다는 점입니다.  

 

이른바 "일본화상사건", 1월 18일 상해에 있는 일본인 사찰인 묘법사의 승려가 백주 대낮에 괴한들의 공격을 받아 살해당하는 일이 발생합니다.(일설에는 단지 부상당했을 뿐인데 살해되었다고 일본측이 의도적으로 허위소문을 퍼뜨렸다는 말도 있습니다.) 흥분한 일본 거류민들은 항일단체와 연계되어 있다고 알려져 있는 중국계 공장인 삼우실업사에 불을 질렀고 중국측 경찰과 충돌해 순경 2명과 일본인 1명이 죽는 참사가 벌어집니다. 또한 격렬한 반중시위를 벌이고 중국인 상점을 약탈하고 거리의 기물과 차량을 파괴합니다.

 

이 사건 역시 상해총영사관 소속 무관 다나카 류기치 소좌와 몇몇 위관급 장교가 짜고 꾸민 일이었습니다. 나중에야 알려지게 되지만, 전세계의 이목이 만주로 집중되자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리기 위해 관동군의 이타다키 대좌가 다나카에게 막대한 뒷돈과 함께 "사고 한번 크게 터뜨려 달라"고 개인적으로 부탁한 것이었습니다. 무슨 아프리카 듣보잡 국가도 아니고 일개 대좌, 소좌따위가 국가와 군대를 좌지우지하던 것이 바로 당시 일본이었습니다.  

 

당시 상해는 동아시아 최대의 국제도시이자 중국 경제의 중심지였습니다. 열강들은 상해에 각각 치외법권의 조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막대한 이권도 걸려있었죠. 투자금액에서 가장 큰 나라는 영국(5억 3천 4백만원)이었고 다음이 일본(3억8천만원), 미국(1억6천3백만원), 프랑스(1억3백만원) 순이었습니다. 수출입에서도 영국과 미국은 일본을 훨씬 능가했습니다. 이점이 바로 만주와는 다른 점이었죠. 만주에서는 일본과 소련을 제외하고는 열강들로서는 이렇다할 이해관계가 없었습니다. 그렇기에 시큰둥했지만 상해에서 전쟁이 터지는 것은 전혀 얘기가 다른 것이었죠. 관동군은 바로 이 점을 노린 것이었습니다. 당장 만주국 건설을 강행한다면 국제사회에서 비난과 중국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그 전에 각국의 이익이 걸려있는 상해에서 전쟁을 일으킨다면 국제사회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중국군도 상해방어에 집중하느라 만주국 건설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고 계산합니다. 

 

1930년대 상해의 모습입니다. 동시기 파리나 뉴욕과 다를바 없어 보일 정도로 발달해 있는 대도시였죠.

※ 사진출처 : http://cafe.naver.com/mamj8836/23010 

 

상해주재 일본 영사관은 "일본화상사건"과 양측의 충돌을 명분으로 중국측을 의도적으로 압박하면서 병력을 증원하기 시작합니다. 당시 일본은 3개 파견함대를 중국에 배치하여, 제1파견함대는 화중, 제2파견함대는 화남, 제3파견함대는 화북에 배치되어 중국의 연안과 주요 항로를 통제하고 있었습니다. 만주사변이 발발하자 해군은 상해와 양자강 일대에 배치된 제1파견함대를 강화하고 항공모함을 비롯해 제1수뢰전대와 육전대까지 증파합니다.  

 

일본측이 군함을 동원해 상해 앞바다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오송-상해간 항로를 통제하여 중국국적 선박을 강제로 억류하자 중국측 역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제3차 초공전 당시 모택동의 공산군에게 강력한 일격을 먹였던 제19로군은 남경-상해 철도 경비 임무를 맡고 있었으나 남경정부의 명령에 따라 상해로 이동합니다.  

 

제19로군은 중앙군에서도 장개석 직계는 아니고 방계군에 속하는 부대였으나, 손문시절 광동정부 산하의 월군(월=복건성) 제1사단 제4연대에서 시작하여 이후 장개석의 북벌전쟁에서 광동군벌 이제심의 제4군으로 편성됩니다. 주로 광동, 광서, 복건성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북벌전쟁에서도 "철군"이라 불릴만큼 용맹하게 싸웁니다. 중원대전 이후 초공전에 투입되었다가 상해의 상황이 악화되자 상해방어를 위해 배치된 것이죠. 

 

일본이 군함으로 무력시위를 하고 조계내 병력을 증원하자, 제19로군 3개사단(제60사, 제61사, 제78사)도 군장 대리인 채정해의 명령에 따라 공동조계밖 중국측 방어지역에 병력을 전개하고 철도를 따라 참호를 파고 토치카를 설치하고 지뢰를 매설하는 등 방어태세를 갖춥니다.  

 

채정해(1892~1968) : 최종계급은 이급상장. 광동출신으로 북벌전쟁부터 초공전, 중일전쟁 등 수많은 전투에서 잔뼈가 굵은 명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상해전투에서 패배후 복건성으로 이동하여 초공전에 다시 투입되지만 이에 반발하고 국공합작을 주장하며 반란을 일으킵니다.(이른바 "복건사변") 그러나 장개석의 지휘하에 압도적인 중앙군의 공격으로 단숨에 패퇴하고 해외로 튀었다가 35년에 다시 귀국합니다. 정상적으로는 총살감이었지만 장개석은 그의 영향력을 고려해 실권이 없는 명예직을 맡깁니다. 따라서 국공내전 말기 공산측으로 전향하였고 한국전쟁때는 항미원조위원회 상무위원을 맡기도 합니다. 그러나 문혁때 홍위병 애들한테 구박받고 비참한 말로를....

 

이에 대해 일본 파견함대 사령관인 시오자와 소장은 제19로군에게 1월 28일 오전까지 방어시설 철거 및 병력을 철수할 것을 통첩합니다. 그러나 어차피 관동군이 정한 각본대로 행할 뿐인 일본측은 1월 28일 일방적으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밤 11시 30분, 공동조계 북쪽 경계도로 북사천로에서 제19로군에 대해 20대의 전차와 장갑차를 앞세워 공격을 개시합니다. 이것이 바로 일본에서는 "제1차 상해사변", 중국에서는 "1.28항전"이라고 부르는 전투의 시작이었습니다. 

 

당시 양측 병력은 19로군 3만 3천명에 대해 일본해군은 육전대 6천명이 군함 30척, 항공기 40대, 수십대의 전차와 장갑차의 지원을 받고 있었습니다. 육전대는 숫적으로는 열세했으나 화력과 제공권에서 중국군을 완전히 압도하였습니다. 따라서 시오자와소장은 기자들 앞에서 "우리가 공격하면 4시간이내 전투는 끝날 것"이라고 큰소리를 칩니다.  

 

그러나 막상 전투가 시작되자 제19로군은 철저항전을 외치며 채정해의 지휘 아래 풍부한 전투경험을 바탕으로 화력의 열세를 커버하며 치열한 방어전을 펼칩니다. 전투는 상해중심가 북쪽의 갑북일대로 확대되었고 일본 항공모함 호쇼에서 출격한 함재기들이 북정거장을 폭격하고 함포로 지원하였지만 육전대는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지 못하고 막대한 사상자만 냅니다. 

 

일본 최초 항공모함 "호쇼"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rejet/110140975961  

 

또한, 상해에서 일본군이 전면공격을 시작하자 남경정부는 철저항전을 결의하고 중앙군을 투입합니다. 상해는 수도인 남경에서 가까웠기 때문에 일본군의 상해공격을 중대한 위협으로 간주합니다.  

 

1월 29일 장개석 직계군인 고축동의 제2사단 7천명이 상해로 이동하여 상해경비사령부와 병기창, 상해비행장에 주둔하고 제19로군을 지원하죠. 또한 2월 14일에는 장치중이 지휘하는 중앙군 제5로군 2개사단(제87사, 제88사)도 항주에서 상해로 이동하여 중국군은 총 5만명 이상으로 증가합니다. 상해사변이 발발하자 곧 정계로 복귀한 장개석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남경의 주요 정부기관을 임시로 낙양으로 이동할 것을 명령합니다. 

  

상해시내를 방어하는 제19로군.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일본측은 "중국측이 먼저 우리를 공격하여 자위상 부득이한 결정"이라고 주장하면서, 육전대를 증파하고 또 시오자와 소장을 해임하는 한편 노무라중장을 사령관으로 제3함대를 급파합니다. 2월 2일 일본군은 총공세를 펼치지만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실패합니다. 노무라는 육전대와 해군만으로는 도저히 중국군을 제압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당일날 본국에 육군의 증원을 요청합니다. 

  

진격 중인 일본군의 89식 중전차. 일본이 제식화에 성공한 최초의 中전차지만 흔히 "깡통"으로 알려져 있죠.... 상해사변 당시 독립전차 제 2 중대에는 89식 전차 5량, 르노NC전차 10대가 배치되어 공격의 선봉에 섰습니다. 그러나 투입 수량이 적고 화력과 속도가 느린데다 고장이 잦아서 큰 활약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최초"라는 것외에는 이렇다할 특징도 장점도 없는 물건이지만 이 놈은 그렇다쳐도 그 뒤에 나온 물건들 역시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이 문제...-- 일본판 GM계열인가...(나르는 폭죽들)  ※ 사진출처 : http://big5.china.com 

 

이쪽은 중국군 제19군이 사용했던 2.5톤짜리 콩알장갑차. 나름 수륙양용도 되었다는군요.  

※ 사진출처 : http://big5.china.com  

  

일본군에 대항하는 중국군 박격포병. ※ 사진출처 :  http://big5.china.com  

 

우리나라 최초의 여류비행사인 고 권기옥 여사. 상해사변 당시 중국군에게 가장 불리한 것은 제해권과 제공권에서의 압도적인 열세였습니다. 이때만 해도 중국의 해공군력은 전무한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였기에 일본 전함의 함포와 항공기의 폭격에 중국군은 속수무책이었죠. 그런 상황에서 구식 복엽전투기를 몰고 일본군에게 기총소사를 한 것이 바로 권기옥 여사였습니다. 양측 항공기들간에 공중전이 있었다는 자료가 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용기는 대단한 것이죠. 권기옥 여사는 장개석의 북벌전쟁에도 파일럿으로 참전했으며 이후에도 중국공군 항주비행학교 교관으로 인재양성에 힘썼고 10년간 복무하면서 중화민국 공군 중교(중령)까지 진급하였습니다.  

 

해군의 요청에 따라 일본 내각은 2월 9일 제9사단과 제24혼성여단을 증파하였고 이들은 16일날 오송에 상륙합니다. 그러나 20일부터 시작된 일본군의 세번째 공격 역시 참담한 실패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만주에서 장학량의 동북군을 상대로 손쉽게 승리를 거두었던 일본으로서는 완전히 예상을 뛰어넘는 것이었죠. 일본 육군은 제11사단과 제14사단을 다시 증파하면서 시라카와 대장을 사령관으로 "상해파견군"을 창설합니다. 2월 29일 상해파견군이 양자강구에 상륙하고 일부 병력은 중국군 후방으로 진출합니다. 기 작전중인 제9사단 등과 함께 3월 1일부터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이 네번째 공격으로 일본군은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고 제5로군의 배후를 포위함으로서 일개월이상 잘 버티고 있던 중국군 방어선은 완전히 무너져 20km나 후퇴합니다. 제19로군을 비롯해 중국군은 이미 그동안의 피해로 큰 타격을 입은 상태였으며 한계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무엇보다 남경정부는 일본군의 2개 사단 증원 정보를 사전에 파악했음에도 더이상의 병력을 증원하거나 방어선을 보강하지 않았습니다. 

 

중국군 방어선을 돌파하고 상해시내로 공격중인 일본군.

※ 사진출처 : http://club.kdnet.net/dispbbs.asp?boardid=1&id=7587733&page=47&uid=5445743&usernames=%BA%EC4%CD%C5%C0%CF%D5%BD%CA%BF&userids=5445743&action=  

  

이에 대해 다나카 소좌가 청나라 숙친왕의 딸이라는 여인을 이용해 중국군 지휘관들에게 허위정보를 퍼뜨림으로서 중국군의 철수를 유도케 했다, 라는 주장도 있으나 이는 너무 드라마틱한 얘기인지라 신빙성이 의심스럽습니다. 그동안 중국군이 매우 용맹하게 싸우기는 했으나 압도적인 화력의 열세에다 이미 한계에 직면한 상태에서(제19로군과 제5로군의 각 사단들은 절반 이상의 손실을 입음) 일본군이 병력을 대규모로 증원하여 배후가 위협받고 삼면에서 포위공격당하는 이상 더이상 버틸 수 없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사실 피아간의 차이를 생각한다면 그때까지 버틴 것도 기적에 가까울만큼 중국군이 용전한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당시 남경정부의 쌍두수장이었던 장개석과 왕정위는 당초의 예상과 달리 일본군이 계속해서 병력을 증원하자 장기전에 대비되어 있지 않은 중국군으로서는 일본과 전면전으로 이어지는 상황만큼은 피해야 한다고 판단합니다. 더욱이 일본이 어디까지 전쟁을 확대할 생각인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가용가능한 모든 병력을 상해에 죄다 투입했다가 방어선이 돌파당해 남경정권 자체가 붕괴되는 상황을 가장 두려워하였습니다. 따라서 채정해의 병력 추가 증원 요청을 거부하고 소극적인 자세로 돌아섭니다.  

 

또 한가지 문제점은 공산군이었습니다.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공산군은 말로는 "항일"을 외치면서도 정작 거국일치적인 모습을 보이기보다 강서성에서 공산군 포위에 동원했던 병력중 4개사단을 장강유역으로 이동시키자 모택동은 이 기회를 이용해 적극적으로 정부군을 공격하고 강서성의 소비에트지구를 확대하여 31년 11월 27일 강서성 서금에 자기들끼리 모여서 "중화소비에트공화국"을 건설합니다. 이는 명백히 "이중적"인 행태이죠. 

 

따라서 하응흠이 강서성의 병력을 추가로 상해로 증원하려고 하자 강서성 주석이었던 웅식휘는 "일본을 상대로 한두개 사단을 더 보낸들 무슨 의미가 있겠으며 오히려 그 전에 공산군에 대한 방어선이 무너질 것"라고 반대하였죠. 이것이 당시 중국이 처한 상황이었습니다. 일본이라는 외적을 앞에 두고도 말로만 "항일"운운할뿐 서로 협조하기는 커녕 되려 이를 악용하는 것이 당시 지방군벌들이나 공산군의 태도였고, 어차피 서로간의 타협과 양립이 불가능한 이상 장개석이 국내외에서 비난을 받으면서도 "선안내후외양"정책을 고집한 것은 솔직히 당연한 것이기도 했습니다.  

 

양측의 싸움으로 당장 경제적으로 막대한 피해를 보게된 열강들 역시 사태 확대를 반대하며 양자의 중재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였고 결국 3월 3일 양측은 일단 정전에 합의합니다. 그러나 현지 일본군은 정전협정을 무시하고 중국군을 계속 공격하여 갑북 전역을 점령하는 등 국지적인 충돌은 계속 이어집니다. 3월 14일 영국공사 람프손의 중재로 영,미,프,이의 합석하에 양측은 쌍방이 먼저 병력을 철수할 것을 주장하며 첨예하게 대립합니다. 그러나 어차피 일본의 목적은 상해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만주로부터 시야를 돌리기 위함이었고 따라서 막대한 배상금이나 영토를 할양하라는 식의 무리한 요구를 하지는 않은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합니다. 그러나 당시 반일감정으로 격앙된 중국인들로서는 어쨌든 일본이 사죄해도 부족할 판에 타협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굴욕"으로 비추어지지 않을 수 없었고 따라서 비난의 시선은 당연히 죄다 장개석, 왕정위한테 향합니다.

 

그보다 문제는 상해에서 치고박고 싸우는 동안 결국 관동군의 의도대로 만주에서 괴뢰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입니다. 3월 1일 동북3성을 주관하는 동북행정위원회가 입헌공화제의 만주국 건국을 선포합니다. 수도는 신경(구 봉천)으로 하고 집정에 부의가, 총리는 정효서가(나중에 장경혜로 교체) 임명됩니다. 영토는 동북3성에다 아직 장학량측이 장악하고 있는 열하성까지 일방적으로 포함시키죠.(이를 핑계로 몇달 후 관동군은 열하사변을 일으킵니다.)  

 

이렇게 모여서 만주국 건국을 선포하는 친일관료들과 관동군...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0169543/140096443018 

 

인구는 약 3천만 명에 달했고 이중에 일본인이 59만명 정도였습니다. 국방, 치안은 물론 철도, 항만, 수로 등 모든 군사 행정에 대해 관동군이 담당하며 그 경비를 만주국이 지불하는 협약을 체결함으로서 사실상 만주국은 일본의 괴뢰정권이나 다름없었습니다. 물론 남경정부는 즉각 괴뢰정권으로 규정하고 국제연맹에 제소하죠.  

 

그러나 당장은 관동군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지만 결국 국제연맹이 리튼조사단의 보고서를 근거로 만주국을 괴뢰정권으로 규정함으로서 일본은 33년 3월 27일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스스로 고립과 수라의 길을 걸어가게 됩니다. 이는 그토록 국제 고립과 비난을 두려워했던 일본정부로서는 결과적으로 최악의 선택이 된 셈이었습니다. 게다가 일본내에서도 극우장교들이 5.15쿠테타를 일으켜 어떻게든 군을 통제하려는 이누카이 츠요시 수상을 암살합니다. 그로서 더이상 식견있는 정치가는 없어졌고 일본은 완전히 통제불능이 되어 태평양전쟁까지 파멸의 길을 향해 달리게 되죠. 

 

이누카이 츠요시(1855~1932) : 만주국 건국 후 만주에서 관동군의 세력을 축소시키려고 하자 이에 반발한 군부에 의해 수상관저에서 어처구니없이 살해됩니다. 여기다 35년에는 갈수록 요구가 늘어나는 군부의 예산(35년 당시 총예산의 46.1%)을 축소하려고 했던 다카하시 고레키요 대장성 장관이 암살되자 더 이상 목숨걸고 군부를 걸고 넘어질 용기를 가진 사람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1월 28일부터 3월 3일까지 근 한달 간의 전투에서 양측은 어느 정도의 피해를 입었는가. 

 

당시 동아일보 5월 13일자 기사를 본다면, 일본 육군 중앙은 공식적으로 만주사변에서 관동군은 전사 498명, 부상 998명에 대해 상해사변에서는 전사 634명, 부상 1,791명으로 발표합니다. 중국군에 대해서는 의용군까지 포함해 약 10만 명이 투입되어 최소 2만 5천 명의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하죠. 그러나 이는 자신들의 피해는 축소시키고 전과는 확대시킨 상투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일본군은 상해전역 초반에 이미 만주사변에서 입은 피해를 훨씬 능가했다고 인정하였습니다. 한편, 중국측은 일본군이 5천여 명의 피해를 입었으며 자신들은 1만 3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명확한 기록은 없으나 이 중간 정도로 봐야하지 않겠나 싶습니다. 

 

※ 참고로, 현재 야스쿠니 신사에 합사된 만주사변 희생자는 1만7천명에 달하는데 이는 만주사변만이 아니라 이후의 상해사변, 열하사변 등 중일전쟁 발발전까지 모든 희생자를 합한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상해사변을 놓고 장세노의 "중국현대사 1911~1949"에서는 "제19로군만 분투했을뿐 남경정부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고 기술하고 있는 반면, "장제스 일기를 읽다"에서 레이황은 장개석이 매우 적극적으로 상해에서 항일전을 주도한 것처럼 기술하여 서로 완전히 상반된 시각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는 서로 부분적으로만 맞는 말일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진실을 말한다면 장개석은 적극적인 면도, 소극적인 면도 다 함께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상해사변을 강건너 불구경하지 않고 휘하 직계군을 상해로 투입하였고 그가 할 수 있는 한 제19로군을 최대한 지원하였습니다. 제2사단과 제5로군은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그러면서도 사태가 확대되는 것에 대해서는 두려워하여 추가 증원을 거부하고 반일 시위도 탄압한 것도 어쨌든 사실입니다.

 

그러나 흔히 간과되는 사실이지만, 그가 단기서처럼 "친일"을 목적으로 한 것이 아니라 중국이 분열되어 있는 현실과 그가 처한 딜레마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기에 타협을 선택했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장개석을 미화하자는 것은 아니지만, 이를 "비굴함"이라고 비난할 수는 없는 것이죠. 사실 왕정위의 광동정권에 대해서도 이를 "반란"으로 규정하고 군사적 우세함을 이용해 단숨에 진압해 버릴 수 있었지만 그는 전쟁에서 패한 것도 아님에도 왕정위의 요구대로 국가 주석을 비롯한 모든 권력을 스스로 내놓고 두번째 하야를 선택함으로서 내전을 피하였습니다. 이는 20년대 북양군벌들이 북경을 놓고 치열하게 벌인 전쟁과정에서 이기기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외세를 끌어들임으로서 중국에게 득이 되기보다 해가 되었다는 점을 상기했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남경정권은 그가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고 곧 군사위원장으로 복귀합니다. 왕정위나 이종인 등 광서, 광동군벌들이 어차피 장개석의 하야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몰랐을리도 없죠. 그럼에도 그들은 반란을 일으켰고 이런 행위가 국론을 분열시키고 일본 관동군의 오판을 불러옴으로서 직간접적으로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을 유발시킨데다, 일본에 대한 대응전략에서도 불리할 수 밖에 없었다는 점에서 진짜 비판받아 마땅한 것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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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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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레이* | 작성시간 13.07.12 본격 막장테크가나효.......
  • 작성자Ironside | 작성시간 13.07.12 이래도 중국공산당이 진정 조국을 위해 항일했다고하는 멍청한놈들이 있으니...
  • 작성자타메를랑 | 작성시간 13.07.13 장개석도 시대를 잘못 만난 인물이었죠. 뭐, 미국이나 중국 공산당은 그를 지독히 폄하했지만, 나름대로 잘 싸운 인물이고... 상해 임시 정부를 대폭적으로 도와준 점을 감안하면 나쁘게 볼 수만은 없죠.
  • 작성자2Pac | 작성시간 13.07.16 이런 걸 보면 국가 내부의 적부터 소탕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겠네요.
  • 작성자배달민족 | 작성시간 13.07.21 장개석군대의 '부패'를 옹호하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그렇다고 해서 공산당이나 다른 세력들이 더 나을 것도 없었던것이 그 당시의 현실이었었군요. 좋은글 잘보고 갑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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