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년 4월 29일 상해 공동조계내의 홍구공원에서는 일본 상해파견군의 "전승행사"가 열립니다. 행사장에는 상해에 거주하는 수많은 일본인들이 모여 삼엄한 경계속에서 거행되는 축하식을 지켜보는 가운데, 단상위에는 상해파견군 사령관 시라카와 요시노리 대장을 비롯해 제3함대 사령관 노무라중장, 제9사단 우에다중장, 시게미츠 주중공사, 무라이 상해총영사 등 상해사변을 일으키고 지휘했던 수괴들이 죄다 모여서 욱일승천기앞에서 도열해 있었습니다. 일본 국가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 청년이 단상위로 폭탄을 던졌고 그 폭탄은 노무라와 시게미츠 전면에서 터집니다. 이것이 바로 윤봉길 의사의 "홍구공원 폭탄투척사건"이었습니다.
그가 던진 한발의 폭탄으로 시라카와대장과 카와바다 상해거류민단장이 즉사했고 노무라중장과 우에다중장을 비롯해 단상위에 있던 모든 이들이 중상을 입었습니다.
현장에서 체포된 윤봉길 의사. 스스로도 자폭할 생각이었으나 실패하였습니다. 그는 당초에는 심한 고문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정체를 밝히지 않았으나 김구의 한인애국단에서 "우리가 주도한 일"이라고 대외적으로 공포합니다. 보통 저런 일이 발생하면 해당 행사의 경비책임자는 군법에 회부되어 엄중한 처벌을 받게 되지만 당시 행사의 경비 책임자는 근신 3일이라는 관대한(?) 처벌만 받습니다.
※ 사진출처 :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contents_id=5241
윤봉길의사는 현장에서 체포되어 결국 12월 19일 25살의 나이로 총살당했습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장개석의 말대로 "100만 중국군조차 하지 못했던 일을 단 한명의 한국청년이 해냈다"고 할만큼 유례없는 사건으로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고 한 사람의 희생으로 침체되어 가던 한국 독립운동에 다시 불을 지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백범일지를 보면 김구는 장개석의 최측근이자 CC단의 지도자였던 진과부의 도움으로 장개석을 직접 대면하였고 장개석은 즉석에서 임시정부에 대한 자금지원과 황포군관학교 낙양분교에 매회 100명씩의 한인 장교를 교육시켜 주기로 약속하였습니다. 그리고 이청천, 이범석은 교관으로 임명됩니다. 물론 중국의 지원은 일본의 강력한 항의로 지속되지는 않았고 곧 흐지부지되었으나 이 사건을 잊지 않고 있던 장개석은 중일전쟁이 발발한후 임시정부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됩니다.
일부 몰지각한 이들은 이런 행위를 "테러"로 규정하고 IRA나 이슬람의 "자살폭탄"과 다를바가 무엇인가, 라고 비난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는 말도 안되는 억지로, 윤봉길은 많은 인파가 붐비는 시장통에서 자살 폭탄을 떠뜨리지도 않았으며 이로 인해 대중적인 공포심을 유발하려고 했던 것도 아닙니다. 이는 전적으로 의미가 다른 것이죠.
영화 "테이큰"에서 인신매매범에게 딸을 납치당한 리암 니슨은 딸을 구해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험을 무릅쓰고 결국 딸을 구해냅니다. 그가 법대로 경찰에게 의존하지 않았다고, 또 인신매매범을 구타하거나 고문하는 등의 불법을 자행했다고 과연 누가 이를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누구라도 그런 상황에 처하면 그렇게 할테니까요. 법이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면 내 자신은 스스로 지킬 수 밖에 없죠. 일본의 침략과 이를 묵인한 국제사회에 대한 비판이 선행되지 않고 힘없는 자들이 할 수 밖에 없었던 부득이한 행동에 대해서만 비난하는 것은 비겁한 매도에 불과한 것입니다.
홍구공원사건 일주일뒤인, 5월 5일 어린이날 상해정전협정이 체결됨으로서 일단 일본과의 전면전 위기는 피할 수 있었으나, 31년 9월 18일 만주사변과 뒤이은 상해사변, 그리고 동북3성의 분리와 만주국의 건설에서 속수무책이었던 중국인들은 자신들의 무기력함을 그 어느때보다 철저하게 깨닫게 됩니다. 그 비난의 화살은 죄다 장개석-왕정위정권에게 향하지 않을 수 없었죠. 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이런 치욕이 정부의 소극적인 부저항정책과 굴욕적인 대일타협때문이라고 생각했고 남경에서는 대일 선전포고와 전면항전을 요구하는 시위를 격렬하게 벌였습니다. 협상 수석 대표인 곽태기가 물컵으로 싸다구를 당하고 외교부 건물이 공격을 받았으며 이를 진압하는 경찰과 곳곳에서 충돌합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제대로 저항한번 못해봤던 장학량의 동북군과 달리 제5로군과 제19로군이 분전했던 상해전투는 중국에게 있어 새로운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중과부적으로 패퇴하였으나 중국군은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3차례에 걸친 일본군의 강력한 공격을 막아내었습니다. 속전속결로 승리할 것을 예상했던 일본군으로서는 러일전쟁당시 여순공방전이래 유례없는 고전이었습니다. 반면, 청일전쟁이래 일본에 대해 막연한 패배주의에 빠져있던 중국군도 힘을 집중시킬 수 있다면 얼마든지 효과적으로 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습니다.
1931년 11월 국민당 제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장개석은 "우리가 단결할 수 있다면 비록 열개의 일본이 있어도 우리를 동요시킬 수 없을 것이다"라고 당원들부터 앞장서 단결할 것을 호소합니다.
그러나, 그가 처한 상황은 아마 중국 5천년 역사이래 가장 불리한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비록 북벌에는 성공했으나 그의 앞에 놓인 것은 장미빛 미래가 아니라,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 지 한치 앞조차 내다볼 수 없는 암담함 그 자체였습니다. 현실적으로 일본의 침략에 맞서기 위해서는 군사력이 있어야 했고 그 군사력을 갖출 경제력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루아침에 이루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장 일본의 침략에 맞서면서 또 분열된 정치상황을 타계하면서 나중을 위해 힘을 비축해야 하는 것이 그에게 주어진 전략적인 딜레마였죠.
비록 중원대전에서 승리했지만 왕정위를 비롯한 당내 분파주의자들에 의해 장개석의 지위는 여전히 취약했으며 그의 명령에 복종하고 신뢰할 수 있는 군사력은 전체 중국군의 1/10에 불과했습니다. 특히 대외정책을 좌우하고 있던 왕정위는 노골적으로 친일성향을 드러내며 일본에 대한 제재나 강경노선이 일본을 자극하여 더 큰 침략을 불러올 것이라며 반대하였습니다.
또한 남경정부의 통치권이 닿는 지역은 광대한 중국전역에서도 화중, 화남 동쪽의 몇몇성에 불과했고 이조차도 33년 10월에 있었던 복건사변(복건정부와 제19로군이 "항일반장"을 외치며 반란을 일으켜 "중화공화국"을 건설한 사건)이나 36년 9월의 제2차 양광사변처럼 군벌이 다스리는 지방정부들은 언제라도 중앙에 적대적으로 돌변하였습니다. 사천이나 운남은 물론 화북은 사실상 군벌들의 반독립된 왕국이나 다름없었죠. 여기다 강서성을 비롯해 호남, 호북, 안휘, 복건 등 곳곳에서 공산반군이 이른바 "소비에트지구"라 부르는 알박기를 하면서 정부군과 충돌하였습니다.
정치적 혼란만큼이나 경제적으로도 외세에 예속되어 있었고 국가 재정은 심각한 적자에 허덕였습니다. 세입은 세출의 절반도 되지 못했습니다. 20년대 이래 중국의 공업이 화북과 화남의 동남연안가를 중심으로 발달하면서 산업혁명의 초기모습을 보이고 있었으나 대부분 방직공장같은 경공업이었고 중공업은 전무했습니다. 여기다 세계공황에다 30년대초 황화강과 양자강의 범람, 가뭄, 홍수 등 계속되는 대규모 자연재해는 농촌을 심각하게 파괴하고 전국이 기근과 기아로 허덕이게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 전체를 장악하는데 성공한 관동군은 다음 단계로 열하성을 침공합니다.
만주국이 수립된 이후에도 만주 각지에서는 구 동북군을 중심으로 치열한 항일투쟁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32년 9월만 해도 만주 전역에는 약 22만에 달하는 항일게릴라들이 있었고 도처에서 일본군과 접전하고 철도를 파괴하는 등 저항을 계속합니다. 관동군은 이들에 대한 토벌을 명분으로 병력을 대폭 증강합니다.
한편, 금주를 버리고 잔존병력을 거느리고 관내로 후퇴한 장학량은 아직 자신의 세력권인 하북성과 열하성을 기반으로 재기를 노립니다. 그러나 만주를 상실한 상황에서 심각한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고 자신의 지위 또한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중앙정부와의 갈등 또한 악화되었는데 왕정위가 장학량에게 모든 책임을 지고 하야하라고 하자 "나도 하야하고 싶지만 많은 부하들과 북중국의 치안을 책임져야 하는 막중한 책무가 있다. 당신도 함께 물러난다면 나도 물러나겠다"라고 응수합니다.
열하성은 장학량의 부하인 탕옥린이 주석으로 있었는데 관동군은 그를 매수하는데 실패하자 무력으로 열하성을 침공하기로 결정합니다. 관동군 스파이가 조양사라는 절에서 비적에 의해 살해된 이른바 "조양사원사건"이 일어나자 관동군은 이를 장학량의 소행이라 주장하고 32년 8월 22일 제8사단을 열하성으로 출병시켜 탕옥린휘하 동북군을 격파합니다. 또한 12월에는 제6사단을 추가 파병하죠.
탕옥린(1871~1937) : 장작상, 장경혜 등과 함께 소시적부터 장작림과 함께 마적질을 했던 멤버중 하나입니다. 장작림휘하에서 출세가도를 달렸고 장학량이 동북역치을 선언한후 열하성 주석으로 임명됩니다. 열하사변에서 패퇴한후 도주했다가 풍옥상등과 손을 잡고 항일동맹군 결성을 주도하기도 했고 제29군 군장 송철원 휘하에 잠시 들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특별한 활약을 하지는 못한채 37년 5월 천진에서 병사합니다.
당시 강서성에서 모택동을 상대로 4번째 초공작전을 친히 지휘하고 있던 장개석은 장학량에게 열하성을 사수할 것을 지시하고 중앙군 6개사단을 파견하겠다고 말합니다. 실제로 파견된 것은 4개 사단이었고 이중에는 장개석 직계 3개사단(제2사단, 제25사단, 제83사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장학량 역시 휘하 동북군을 증원하고 의용군까지 합해 열하성에는 20만이 넘는 병력이 집결한채 쌍방은 대치합니다.
만리장성의 요충지인 산해관과 진황도에는 의화단의 난이래 각각 1개 중대 100명과 50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다 천진의 조계지에도 이른바 "천진군"이라 불리는 일본군 1개 대대가 주둔하고 있었으니 전략적으로 중국이 얼마나 불리한 입장에 놓여 있었는지 알 수 있죠. 33년 1월 1일 산해관 남문밖에 있는 일본헌병소에 누군가가 수류탄을 던지고 총격을 가한 일이 발생했고 관동군은 즉각 "중국군의 도발"이라며 산해관 인근에 주둔한 중국군을 공격합니다. 쌍방간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으나 진황도에서 구축함의 함포사격에다 19문의 야포, 7대의 항공기, 수대의 전차의 지원까지 받은 일본군은 중국군을 제압하고 1월 3일 산해관 전역과 인근 임유현의 현성까지 점령합니다.
"천하제일문"이라 적혀 있는 현재의 산해관. 중국 역사에서 만주에서 중원을 침공하는 외적을 막는 최대의 요충지였죠. 명말 산해관에 주둔하고 있던 오삼계는 조국을 배반하고 청에게 붙음으로서 청군은 이자성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중원을 장악할 수 있었죠.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산해관사건 당시 일본군의 공격
※ 사진출처 : http://ww1.m78.com/sinojapanesewar/mukden%20incident.html
관동군은 산해관에서의 충돌을 빌미로 열하성 금주 부근에 있던 동북군 제16여단과 제19여단을 폭격하고 1월 10일에는 산해관 북쪽 13km에 있는 관내와 열하를 연결하는 장학량군의 병참선인 "구문"을 공격해 점령합니다.
상황이 점점 확대되자 2월 10일 북평에 있던 장학량은 장개석의 처남이자 남경정부에서도 가장 반일로 이름난 재정부장 송자문과 함께 열하성의 성도 승덕으로 사령부를 이동시키고 모든 수단을 다해 열하성을 사수할 것을 선언합니다. 관동군 역시 이번 기회에 열하성 전체를 장악할 생각으로 "열하성은 만주국의 영토"라고 일방적으로 선언한후 제6사단, 제8사단, 혼성 제14여단, 기병 제4여단 등에다 장경혜가 지휘하는 구 동북군출신으로 구성된 만주괴뢰군까지 동원하죠.
10만이 넘는 일만 연합군은 3방향에서 중국군을 공격하여 압도적인 화력과 공중폭격으로 무장이 형편없는 동북군을 일방적으로 격파합니다. 2월 24일 개로를 수비하던 최흥무는 관동군과 내통하여 싸우지도 항복했고 조양의 수비군도 싸우기도 전에 태반이 도주합니다. 3월 2일에는 능원이 함락되었고 이를 구원하려던 우광린의 제130사단은 일본군의 급습을 받아 괴멸되고 우광린도 전사합니다. 다음날 탕옥린은 자신의 사재를 차량에 실고 북평으로 도주하였고 4일 아침 승덕마저 간단하게 함락됨으로서 열하성 전역이 일본의 수중에 떨어집니다.
장학량은 병력을 장성을 중심으로 배치하여 일본군의 남하에 대항하였으나 3월 10일 북평 북쪽의 관문인 고북구가 일본군의 손에 넘어가면서 북평을 비롯한 화북전역이 위협받게 됩니다. 3월 26일에는 열하성과 하북성 사이의 만리장성 전역이 일본군에 의해 장악됩니다. 이 과정에서 동북군과 함께 장성을 방어하던 장개석 직계군 역시 큰 피해를 입습니다.
열하사변에서 장학량과 동북군의 무능함은 또한번 증명되었는데, 장개석은 제4차 초공을 중지하고 즉시 보정으로 올라와 군정부장 하응흠에게 모든 지휘권을 맡깁니다. 3월 12일 장개석과 독대한 장학량은 패전의 책임을 지고 모든 직책에서 사임하고 하야를 선언합니다. 그리고 한동안 유럽으로 외유를 떠나게 되죠. 이로서 그는 사실상 독자적인 군벌로서는 몰락한 셈이었죠. 그의 동북군은 해체된후 4개군으로 재편되어 하응흠의 지휘를 받게 됩니다.
당시 제네바에서 열린 국제연맹에서 중국의 입장을 호소하고 있던 고유균은 열하전투에서 중국군이 최대한 선전하여 전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켜 주기를 바랬습니다. 고유균은 국제연맹 규약 제16조 "전쟁에 호소한 연맹국은 다른 모든 연맹국에 대해 선전포고한 것으로 간주하고 통상, 금융 등 모든 관계를 단절한다"를 통한 대일 제재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국제연맹이 중국이 일본과 단교하지 않은 이상 제16조의 발동은 불가능하다고 답변하자 고유균은 본국에 일본과의 단교를 건의합니다. 그러나 동북군은 무기력하게 연패를 당한데다 패배주의에 빠져 있던 왕정위는 어차피 열강들이 중국문제에 무관심한데다 일본과 단교할 경우 일본을 저지할 능력이 없는 이상 상황만 더 악화되어 최악의 경우 북평, 천진까지 속수무책으로 함락될 수 있다는 이유로 단교를 반대함으로서 일본에 대한 제재는 수포로 돌아갑니다.
영, 미, 프 등 열강들은 만주사변때만 해도 그다지 무관심한 입장이었으나, 중국의 적극적인 외교 노력과 일본이 당초의 철병 약속과 달리 되려 만주에 괴뢰국을 세우며 침략주의를 노골적으로 드러내자 리튼조사단의 보고서를 근거로 32년 2월 24일 국제연맹은 42대 1로 만주국 불승인 및 일본군의 철수를 결의합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가볍게 생까고 도리어 국제연맹 탈퇴를 선언하죠. 그럼에도 국제연맹은 일본에 대해 직접적인 어떤 제재도 가하지 못하며 무력함을 그대로 드러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장성이북을 일단 점령한 이상 사태를 더 악화시키지 말 것을 관동군에게 지시했음에도 기왕 칼을 빼들은 관동군은 이를 묵살하고 3월 27일 관동군 사령관의 독단적인 명령으로 "관동군 작전명령 제491호"를 발동시켜 4월 11일부터 장성이남으로 전장을 확대합니다. 중국측도 하응흠이 중앙군을 중심으로 약 5만의 병력을 북평, 천진에 집결시켜 방어선을 구축하고 반격을 준비합니다. 또한 송철원의 제29군도 가세하였고 일본군의 측면을 위협합니다.
관동군은 5월 7일 대규모 공격을 개시하여 중국군을 도처에서 격파하고 북평, 천진 북쪽 50km선까지 진출합니다. 결국 5월 25일 중국은 일본에 정전을 요청하였고 5월 31일 천진 외항인 당고에서 정전협정이 체결됩니다.
당고정전협정을 체결하는 양국(왼쪽이 중국, 오른쪽이 일본)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당고협정은 중국에게는 그야말로 굴욕적인 내용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장성이북으로 철수하되, 장성이북 전체가 일본군의 수중으로 들어갔고 만주국의 존재 또한 명문화되지는 않았으나 사실상 묵인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여기다 산해관을 비롯한 장성의 주요 요충지에 일본군의 주둔을 인정하였습니다. 중국측은 적어도 만리장성에 대해서는 오랜 상징성을 내세워 일본군의 철수와 중국으로의 반환을 필사적으로 요구했음에도 관동군에 의해 일언지하 거부됩니다. 더욱이 장성에서 북평 이북은 비무장지대화되어 중국군은 철수해야 했습니다.
열하사변 당시 양측의 상황도. 제대로 된 지도가 없어서 어설픈 그림솜씨에다 악필로 직접 그려봤습니다. 그래도 대충 이해는 되시리라 생각됩니다. ㅋㅋ
중국으로서는 만주사변과 상해사변이후 또한번의 치욕이었습니다. 군사적으로 완전한 참패였고 외교적으로도 패배한 셈이었죠. 아무리 저항해도 힘이 없다면 이길 수 없음을 또한번 증명한 셈이었습니다. 또한 만주와 열하를 빼앗긴데다 북평, 천진 이북의 주권을 상실하고 무방비상태가 됨으로서 화북의 안전마저 보장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연운16주를 요나라에게 빼앗겼던 북송시절의 재현이 된 격이었습니다.
열하사변에서 동북군은 그야말로 무기력함을 보여주었습니다. 장학량의 지휘는 매우 졸렬했으며 탕옥린을 비롯한 고위 지휘관들은 도주하거나 일본과 내통하였고 병사들은 일본 항공기의 폭격을 받자 제대로 싸우지도 않고 도주했습니다. 여기다 많은 동북군 출신들이 일본의 괴뢰군이 되어 옛 전우들을 공격하였습니다. 몇년뒤 그들이 섬서성에서 공산군과의 싸움에 동원되었을때 "일본과 싸우겠다"며 반발했지만 막상 싸울 기회가 있었을때 제역할을 하지 못하고 한심한 모습을 보여준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오히려 큰 희생을 내며 용전한 것은 중앙군과 송철원의 제29군이었습니다. 송철원은 이른바 "대도대"라는 결사대를 조직해 일본군 포병진지로 돌격시켜 점령함으로서 "항일명장"으로 이름을 떨칩니다.
장개석의 이른바 "일면 저항 일면 외교"는 그가 만주사변이래 서안사변직전까지 고수했던 전략이었습니다. 여기에 대한 역사적인 평가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이지만, 어쨌든 협상을 하건 저항을 하건 그럴 힘이 있을때의 얘기였죠. 그로서는 좀 더 유리한 입장에서 일본과 협상을 하기 위해서는 중국군이 그만한 역량을 보여주기를 기대했음에도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리 재야에서 "항일"을 외쳐도 단지 감정적인 외침일뿐 현실적인 힘이 없다면 무의미한 것이었죠. 장개석은 그 어느때보다 중국을 통일시키고 경제개발과 군사력 정비가 절실하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됩니다.
일주일전쟁에서 참패를 당한후 연방군 재건계획을 추진했던 레빌. 그는 "공간을 버리고 시간을 번다"라는 전략을 선택함으로서 결국 피아간의 격차를 뒤집어 최후의 승리를 거두게 됩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치욕적인 연패와 후퇴를 계속 용납해야 하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남들에게 설득하는 것이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이런 레빌의 고뇌가 바로 당시 장개석이 처한 입장이었죠.(사진출처 : 플스판 "기렌의 야망"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