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사변 이래 관동군은 그야말로 기고만장했습니다. 고작 1만 남짓한 오지의 철도 경비대에 불과했던 그들은 이제 군부내에서 가장 막강한 세력을 가진 실세였습니다. 이시하라 간지를 비롯해 만주사변의 주모자들은 군원로들과 정재계의 우익들의 비호를 받은 덕분에 월권행위에 대한 책임추궁은 고사하고 오히려 출세가도를 달렸죠. 따라서 출세욕과 공명심이 넘치는 젊은 장교들에게 이들은 그야말로 우상이었고 전쟁을 한낱 흥미진진한 모험이나 출세의 수단쯤으로 생각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였죠.
2류에 불과했던 일본경제로서는 조선과 만주를 경영하는 것조차 만만치 않은 일이었으며 만주에서의 대규모 병력 증강은 물론, 육군은 소련을, 해군은 미국을 가상적으로 삼아 이를 핑계로 매년 터무니없는 군사비를 증액하여 국가 재정에 심각한 부담을 주고 있었습니다. 세계공황의 여파에다, 중국과의 관계 악화로 인한 대중수출의 격감도 경제적으로 치명적이었죠. 따라서 정부와 외무성으로서는 관동군이 더이상 일을 크게 벌리지 말고 자중해 줄 것을 원했으나 한껏 우쭐해진 관동군에게는 귀신 신나락 까먹는 소리에 불과했습니다.
27~35년까지 일본 국방비 연간 증강 현황. 20년대까지는 그나마 20%대에서 건실하게 유지되고 있었으나 만주사변이후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으며 37년~38년에 오면 폭발적으로 늘어나 70%를 돌파합니다. 이것은 일본 경제가 감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죠.
※ 자료출처 : 일본군사사 p.215, 요미우리신문사
34년 7월 해군출신의 오카다 게이스케가 31대 총리대신의 자리에 오릅니다. 군원로 출신의 온건파로서, 군의 폭주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단으로 그 자리에 추대되었습니다. 우리와 달리 일본은 국민들이 선거로 지도자를 뽑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정치 원로들이 오로지 자기들의 판단에 적절하다 싶은 인물을 낙점하는 일종의 정치적 타협의 산물이며 오카다 총리 역시 다르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오카다를 자기 후계자로 밀어준 것은 전임 총리인 사이토 마코토였습니다.
그와 함께 35년 1월 외상이 된 히로다가 소위 "히로다외교"라는 대중 온건책을 추진하는데, 그동안 극도로 경색되었던 중일관계의 개선을 위해 양자는 적극적으로 접촉합니다. 히로다는 중국정부가 배일운동에 대해 보다 적극적인 단속과 무기수입의 중단을 요구했고 이에 대해 행정원장이자 중국측 대표였던 왕정위는 선결과제가 "만주국 문제의 해결"과 "일본이 중국침략을 중단할 것을 보장하는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히로다는 여기에 대해 명확한 답변은 피하면서도 그렇다고 이전처럼 강압적인 태도로 만주국을 무조건 인정할 것을 강요하지도 않았습니다.
이시기 장개석정권으로서는 상해사변이나 열하사변때 일전조차 불사하며 강경했던 자세와 달리 가능한 대일타협을 추구했는데 가장 큰 원인은 바로 재정문제였습니다. 우선 충분한 준비없이 감정만 앞세운 일본과의 전쟁은 참담한 결과만 낳을 뿐이라는 것이 이미 전년의 싸움에서 충분히 증명이 된데다, 이전에도 이미 제가 언급한 바가 있지만 공산군 토벌과 연이은 내전으로 인한 막대한 군비 부담과 미국의 은 국유화 정책으로 인한 막대한 은 유출로 중국경제는 거의 파탄직전에 직면해 있었습니다. 장개석은 송자문을 통해 영국이 운영하는 홍콩은행에 2천만 파운드의 차관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합니다. 이는 장개석정권으로서는 목줄을 죄는 것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의 온건적인 태도는 설령 일시적인 것이라 해도 장개석으로서는 당연히 반기지 않을 리 없는 일이었죠.
그러나 문제는 정작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총리대신인 오카다도, 외상인 히로다도 아닌 바로 육군과 관동군이었다는 것입니다. 열하사변이후 동북 4개성에 괴뢰 만주국을 건설한 관동군의 다음 목표는 화북이었습니다.
35년 1월 대련에서 열린 이른바 "대중국몽골참모관계자회의"에서 관동군 참모부는 중국의 대일태도 변화는 중국경제의 피폐함과 정치적 상황에 따른 일시적인 궁여지책일뿐이라며 장개석정권에 대해 극단적인 불신감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즉, 장개석이 결코 친일적이지 않다는 것을 일본 군부에서는 판단하고 있었다는 것이죠. 이것은 중국에 대한 직접 침략을 위한 명분일수도 있었으나, 이전에 중국을 통치했던 원세개, 단기서나 장작림같은 친일군벌보다 장개석을 훨씬 다루기 어렵고 만만찮은 상대로 보고 있었습니다. 향후 방침에 대해서도 "모든 수단을 다해서 남경정부를 붕괴시키고, 화북의 독립을 꾀하는 세력을 지지하고 원조하되 이들을 복종시켜 화북을 본토로부터 분리독립시킨다"라고 정합니다. 한마디로 화북5개성(하북성, 수원성, 차하르성, 산서성, 산동성)에 제2의 만주국을 세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1935년 5월 2일 밤부터 다음날 새벽사이에 천진의 일본 조계에서 친일계열의 신문인 국권보와 진성보의 사장들이 연달아 살해되는 "하북사건"이 일어납니다. 이 신문사들은 일본 육군의 특무기관의 지원을 받는 어용신문으로 당연히 중국인들에게 매국노라고 지탄을 받고 있었죠. 여기다 그동안 열하성에서 항일활동을 펼치던 동북의용군 산하 손영근의 부대가 관동군에게 쫓겨 장성을 넘어 천진 동북쪽에 있는 난주에 진입하는 일이 발생합니다. 여기는 당고협정에 따라 중국군이 주둔할 수 없는 비무장지대였죠.
이 사건은 관동군에게는 그야말로 아주 좋은 시비꺼리였습니다. 관동군은 1개 혼성여단을 급파해 손영근부대를 완전히 괴멸시켜버렸지만, 천진군(북지파견군) 참모장이었던 사카이 대좌는 이 과정에서 중국군이 일본군을 지원하지 않았다면서 하북성 정부를 격렬히 비난합니다. 이때문에 하북성 주석인 우학충은 일본의 압박에 못 이겨 결국 5월 25일 천진의 하북성 정부를 훨씬 남쪽인 보정으로 이동시킬 것을 결정합니다. 그럼에도 5월 29일 천진군 사령관 우메즈 요시히로소장은 북평에서 군사위원회 북평분회 위원장대리인 하응흠을 만나서 다음과 같이 따집니다.
1. 장개석은 겉으로만 친일인척하면서 사실은 항일을 준비하는 등 이중외교를 하고 있다.
2. 천진의 조계내에서 일어난 기자 살인 사건은 명백한 테러로서 남의사(장개석 직속의 비밀특무경찰)가 관여했다는 증거가 있다.
하응흠 앞에서 우메즈와 사카이는 매우 고압적인 자세로 "반일을 주도하는 것이 장개석인가, 아님 당신인가" 라고 외치면서, 하북성 주석인 우학충은 만주국의 치안을 어지럽히는 자이며 장학량의 심복이므로 즉각 파면할 것과 하북성에서 중국측의 모든 정부기관 및 국민당조직의 해체, 하북에 주둔중인 헌병 제3단, 중앙군 제2사단, 제25사단, 남의사, 우학충의 제51군을 하북성에서 당장 철수시킬 것을 협박하고 이를 따르지 않는다면 일본군은 즉시 행동에 들어갈 것이라고 통첩을 날립니다. 이것은 말그대로 하북성을 무장해제시킨후 일본이 먹겠다는 말이었습니다. 다음날인 30일에는 하북성 정부 청사앞에 장갑차와 야포, 기관총 등 병력과 화기를 배치하고 천진 시내에서 무단으로 실탄사격과 전투훈련을 하는등 무력시위를 합니다.
이렇듯, 천진에서 양측은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대치상황에 직면합니다. 양측은 수차례에 걸쳐 회담을 열었으나 일본은 한치도 양보하지 않은채 고압적인 자세로 일관합니다. 또한 동경 주재 중국대사가 히로다 외상을 만나 외교적인 타협을 요청했으나 히로다는 이는 "육군의 문제이기에 외무성이 관여할 수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일본측의 철저한 이중적인 자세를 보여준 것이죠. 여기다 관동군은 6월 7일 혼성 제11여단과 제16사단 1대대, 기병 4여단을 산해관으로 출동시키고 비행 2개중대를 금주에 집결시킵니다. 천진군도 2개 대대에 출동대기명령을 내리죠. 심지어 신변에 위협을 느낀 하응흠은 북평을 탈출하여 북평과 천진 사이에 있는 통주로 도주해야 했습니다.
당시 사천성 성도에 있던 장개석은 보고를 받자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왕정위, 황부, 하응흠 등과 함께 대책을 논의합니다. 장개석은 일본이 요구하는 대로 중앙군을 철수시킨다는 것은 곧 북평, 천진 등 하북성을 일본에게 내주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더욱이 앞으로 같은 방법으로 내몽고, 차하르성 등 화북 전체를 빼앗길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렇게 되면 지방정부와 국민들로부터 중앙정부의 권위가 부정될 것이며 정권 자체가 몰락할 것이기에 일본의 요구는 단호히 거절해야 한다는 것이 장개석의 주장이었습니다. "일본의 목적은 어차피 남경정부의 전복과 중국을 해체시킨후 전토를 정복하는 것에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에 대하여 왕정위, 하응흠은 "일본의 요구를 거절한다면 일본군은 아군을 공격할 것이며 화북과 함께 양자강 하류의 상해, 남경, 광주 등에 대해서도 공격할 것인데 아군은 이를 방어할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북평, 천진과 남경, 상해 등 모든 지역에서 아군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붕괴될 것"라는 현실론을 펼칩니다. 따라서, 우선 국력을 보존하고 장래의 대일전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지금은 부득이 양보할 수 밖에 없다라고 주장하죠.
6월 10일 남경의 군사위원회에서는 일본의 요구를 거절하고 사생결단의 각오로 일전을 펼칠 것을 장개석에게 건의합니다. 그러나 왕정위는 모든 책임은 자신이 지겠다며 일본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할 것을 끝까지 주장하였고 결국 장개석은 이에 동의합니다.
7월 6일 북평에서 이른바 하응흠-우메즈협정(하메협정)이 체결됨으로서 중국은 하북성에서 사실상 모든 주권을 상실하게 됩니다. 당시 하북성에는 5만명에 달하는 병력이 있었으나 일본군과 일전 한번 해보지 못한채 남쪽으로 철수합니다. 또한 일본은 중국내 갈수록 심화되는 배일운동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단속할 것을 요구했고 중국은 "목린령"을 발표해 모든 배일운동을 금지시킵니다.
이보다 조금 앞인 6월 5일에는 차하르성 북부에 있는 장북현의 현성 북문에서 수상한 일본인 4명이 무단으로 들어오려다가 중국군 위병이 통행증을 요구했으나 이것을 제시하지 못하자 그들을 체포하여 하루동안 억류한 사건이 벌어집니다. 사실 이들은 관동군 특무대원들이었고 어떤 임무를 띄고 장가구로 향하고 있었는데 중국군이 자신들을 끌고가 욕설과 구타를 했다고 주장합니다. 중국군으로서는 여권도 없는 정체불명의 일본인이 멋대로 성문을 통과하도록 내버려둘 이유가 없었기에 전적으로 일본측의 억지였습니다. 그럼에도 하북성과 함께 차하르성 침략의 구실을 찾고 있던 관동군은 얼씨구나하면서 차하르성 주석인 송철원의 파면과 제29군의 철수를 요구합니다. 그러면서 차하르성으로 병력을 출동시켜 위협합니다. 이것은 위의 "하메협정"과 똑같은 내용의 재현이었죠. 결국 송철원은 파면되었고 6월 23일 밤 신임 차하르성장인 진덕순과 관동군 특무기관장 도히하라 사이에 "하메협정"과 동일한 내용의 "진토협정"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로서 만주사변과 열하사변으로 동북지역을 상실한 중국은 이제 차하르성의 동부지역을 빼앗기고 하북성에서도 북평, 천진을 포함해 이북지역은 무방비상태가 되어 본토마저 위협받는 처지가 된 것입니다.
사실 전후에 밝혀지는 사실이지만, 이때 친일기자 살해사건이든 특무대원 억류사건이든 모두 관동군이 꾸민 자작극이었습니다. 중국을 위협하고 필요하다면 전쟁조차 불사하겠다는 음모였죠. 시게미쓰 마모루 전 외상(상해에서 윤봉길의사한테 다리 잃은 인간)은 여기에 대해 "중국에 대해 한꺼번에 모든 것을 요구하기보다 하나씩 하나씩 순차적으로 위협해 나가며 중국측을 질질 끌고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하였는데 바로 그들의 수법을 그대로 설명해 주는 것이죠.
※ 소위 "진주만 공격 유도설"은 미국 일부 학계에서 처음 주장되어 일본 극우론자들에게 좋은 구실을 제공하였지만, 오히려 음모를 꾸미고 상대를 도발하여 전쟁을 유도하는 수법은 청일전쟁이래 태평양전쟁까지 반복된 일본 군부의 상투적인 방식이었음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여지껏 억지스러운 물타기로 자신들의 전쟁 책임을 희석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죠.
모처럼 호전되는 것같았던 중일 관계 개선에 찬물을 끼얹은 관동군의 행동에 대해 당시 일본 정부와 외무성, 심지어 육군 중앙은 어떻게 반응했는가. 관동군의 음모에 처음부터 정부와 군 중앙차원에서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당초 시작은 관동군의 독단적인 행동에서 시작된 것은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이미 화살이 활을 떠났다면 이를 지지할 수 밖에 없다"라며 사후 승인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즉, 일개 부대가 사전 허락도 얻지 않고 월권행위를 해도 체면을 생각해서 무조건 묵인하는 것이 일본군부의 관행이 되었고 총리대신인 오카다는 사면에서 가해지는 압박에 그 어떤 강력한 리더쉽도 보여주지 못한채 어정쩡한 입장만 취하며 질질 끌려다닙니다. 군부는 오카다에게 "군부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면 육해군 대신 모두 사임하겠다"고 협박합니다. 오카다는 워싱턴 군축조약에 대해 탈퇴를 선언하였고 군축회의에 대해서도 탈퇴했으며 군부가 요구하는 모든 예산을 승인하였습니다. 정부든 외무성이든 군부를 억제하고 통제할 힘을 가진 이는 그 누구도 없었습니다.
오가타 게이스케(1868~1952) : 일본 31대 총리대신. 해군출신으로 연합함대 사령관과 해군대신을 지낸후 사이토 마코토의 추천으로 총리대신의 자리에 앉습니다. 그는 해군의 수장으로서 군부를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었으나 일본 군부의 주도권은 해군이 아니라 육군에게 있었는데다 육해군 모두 그에게 복종하지 않고 오히려 자기들의 요구를 강요하였습니다. 군축조약이 폐기되자 육해군은 경쟁적으로 군비를 늘려가며 군사력을 확장했고 그럼에도 오가타는 극우세력들의 공격의 대상이 되어 결국 2.26사건에서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뒤 자리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그의 뒤를 이어 총리대신이 된 히로다는 사실상 군의 꼭두각시나 다름없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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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보다도 애초에 그들 역시 그 방법과 시기에 있어서 이견이 있었을뿐 원칙적으로 중국에 대한 침략과 식민지화에 대해서는 결코 반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전후 동경재판에서 히로다는 "외교노력을 하되, 중국이 우리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는다면 무력을 행사하는 것에 찬성하고 있었다"라고 대답합니다. 그것이 일본의 참모습이었던 것이죠.
이어서 일본은 본격적으로 제2의 만주국 건설을 위한 화북 5성 자치운동을 전개합니다. 북지파견군 사령관 타다 하야오는 공공연히 "화북 독립"과 "화북5성의 연합"을 주장합니다. 비무장화되고 무정부상태가 된 하북성 동부지역에는 일본의 지원을 받는 친일파들에 의해 소위 "기동방공자치위원회"가 구성되어 일본의 괴뢰정권화됩니다. 송철원, 염석산, 한복구 등 화북군벌들에 대해서도 매수의 손길을 뻗쳐 이들이 독립을 선언할 것을 권유하지만 이들은 거부합니다.
또한 일본은 화북에 대해 경제적으로 침투하고 적극적인 밀수와 아편판매로 중국 경제에 큰 타격을 가합니다. 35년 한해만 해도 화북에 대한 일본 밀수금액은 3억 2천만원에 달하여 이로 인해 남경정부의 주요 세수인 관세수입이 10%이상 감소합니다.
관동군의 야심은 갈수록 부풀어, 다음 차례로 내몽고에 대해서도 침략의 손길을 뻗히기 시작하는데 내몽고에 이어서 청해성과 신강성 등 서부 변방지역에까지 식민지로 만들려는 계획을 수립하고 먼저 덕왕의 내몽고 자치정부를 매수하여 괴뢰몽골군을 구성한후 "대원제국" 건설을 운운하며 이들을 부추겨 수원성을 침공하게 합니다.
이런 일본의 음모에 대항하기 위해 장개석은 일본 주중대사인 가와고에 시게루에게 "일본의 화북 침략을 결코 묵인하지 않을 것"임을 명확히 전달하는 한편, 당시 북평에 있던 송철원을 기찰정무위원회 위원장으로 임명하고 하북성의 업무를 맡도록 합니다. 또한 화북이 독립을 선언하는 사태에 대비해 중앙군을 중심으로 한 10만여명의 병력을 하남성으로 이동시킨후 농해철도(강소성 연운-섬서성 보계)와 평한철도(북평-한구)에 집결시킵니다. 공산군을 섬서성의 산간오지로 몰아넣는데 성공한 장개석은 초공전을 거의 마무리했다고 판단하고 일본의 침략에 대해 점차 강경한 입장으로 변화해 갑니다. 따라서 이전의 유약한 태도와 달리, 관동군이 내세운 내몽골 괴뢰군의 수원성 침략을 단호하게 격퇴함으로서 모처럼 관동군에게 쓴맛을 보게 합니다. 또한 중앙군을 차하르성과 하남성으로 대거 북상시켜 관동군과 대치함으로서 쌍방은 다시 일촉즉발의 상황에 직면하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서안사변 직전의 상황이었습니다.
위의 "우란차부"가 당시 덕왕의 내몽골괴뢰군과 부작의의 수원군간의 치열한 백령묘전투가 있었던 곳입니다.
※ 사진출처 : http://doopedia.co.kr
부작의의 수원군(제35군)의 모습. 이들은 무장과 전의가 형편없는 내몽골군을 간단하게 대파한후 내몽고자치구로 진격하여 이들의 사령부가 있는 백령묘를 점령합니다. 이 승리는 그동안 패배주의와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던 중국 국민들에게 모처럼 자신감을 불러넣어주었고 그동안 굴욕외교로 고수하여 비난받았던 남경정부의 신뢰회복에도 많은 영향을 줍니다. ※ 사진출처 : http://tc.wangchao.net.cn/baike/detail_2647219.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