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북전체를 노리는 망상에 빠져있던 관동군의 수원성 침공, 이른바 "수원성사건"은 36년 11월 백령묘전투의 참패로 철저하게 실패로 끝납니다. 이 사건은 제1차 상해사변을 뒤에서 조종했다가 이후 관동군 제2과(정보) 과장으로 부임한 다나까 류키치중좌가 꾸몄던 일입니다. 그가 직접 육성한 내몽골괴뢰군은 1만3천여명에 달했으나 그 대부분이 오합지졸에 불과했음에도 중국군을 얕보고 성급하게 수원성을 침공했다가 부작의가 이끄는 수원군의 반격을 받아 대참패를 당하죠. 부작의는 여세를 몰아 내몽골군의 사령부가 있는 백령묘로 진격합니다. 36년 11월 20일부터 24일까지 4일간의 전투에서 내몽골군은 약 700여명의 사상자와 함께 300여명이 포로가 되어 완전히 와해되어 버립니다. 반면 중국군은 약 300여명의 사상자를 내죠.
다나까는 이런 참패에도 불구하고 자기 체면을 내세워 곧장 내몽골군을 재차 규합한후 관동군 특무장교인 구와하라소좌의 직접 지휘하에 4천여명의 김갑산군을 앞세워 백령묘탈환에 나섰으나 극심한 추위에다 훨씬 잘 훈련되고 무장한 부작의군의 기병대를 만나 단숨에 괴멸됩니다. 게다가 이들은 반란을 일으켜 군사고문인 고하마대좌를 살해한후 부작의에게 투항해버리죠. 또한 장개석은 수원사건에 적극 대응할 것을 명령하여 약 20만명의 중앙군을 비롯해 지방군까지 포함한 대규모 병력을 낙양에 집결시킨후 수원성으로 북상시킵니다. 북상하는 중국군이 만리장성까지 진격하여 관동군을 격파하고 열하를 탈환할 것, 이라는 풍문까지 떠돌자 관동군과 지나주둔군(천진군)은 바싹 긴장하죠.
2.26사건이후 군부에 의해 급격히 우경화된 일본은 중국에 대해 더욱 노골적으로 압박합니다. 조무래기들의 칼부림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진 오카다 케이스케가 총리에서 사임하자 외상인 히로다 고키가 새로 총리가 되었으나 그는 군부의 꼭두각시에 불과했고 기존의 온건책을 버리고 중국에 대해 배일운동의 철저한 단속과 정부내 반일론자의 추방, 친일정책, 만주국의 승인, 화남의 주요도시와 해남도에 일본군수비대의 배치를 강요합니다. 이는 중국으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억지요구였고 되려 중국은 만주에서 일본군의 무조건 철수가 선결과제라고 맞섭니다.
최대의 위협이었던 공산군을 산간오지에 몰아넣은데다 이종인의 광서파마저 굴복시킴으로서 통일을 99% 달성한 장개석은 이전과 달리 매우 강경한 모습을 보입니다. 37년 3월 중국 상해를 방문한 일본 경제사절단은 "중국은 과거와 달리 장개석을 중심으로 매우 안정되고 일사분란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라고 놀라워 하였으며(37년 3월 20일자 아사히 신문), 이후 열린 간담회에서도 중국내 지일파들조차 일본의 화북침략을 격렬히 비난하면서 "중국인은 99%가 배일이다"라고 대놓고 말하자 이들은 큰 충격을 받습니다. 따라서 귀국후 "일본의 거듭된 침략이 중국의 반일감정을 부추기고 있으며 경제적으로도 중국시장에서 영, 미, 독에게 밀리고 있는 이상 더이상의 침략은 중단해야 한다"라고 정부에 건의할 정도였죠.
36년 11월 25일 일본은 군부의 주도로 베를린에서 나치독일과 이탈리아와 함께 독-일-이 삼국방공협정을 체결합니다. 이것은 일본 국내에서도 큰 충격을 주었는데, 왜냐하면 전통적인 우방인 영, 미 대신 독일, 이탈리아와 손을 잡은 것은 누가 보더라도 납득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군부는 런던과 워싱턴 두개의 군축조약과정에서 영, 미가 일본의 해군력을 자신들의 60%로 억제한 것은 굴욕이라고 여겼고 이때문에 반대를 무릅쓰고 독일과의 동맹을 강행한 것이었습니다. 히로다는 방공협정 체결에 대한 격렬한 반발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뒤를 이은 하야시 센주로 내각도 4개월만에 퇴진하는 등 일본 정국은 혼미를 거듭합니다.
이 영감님이 히로다 고키(1878~1948). 외상시절에는 대중 온건론을 주장했으나 군부의 입김이 강화되는 36년부터 외무성은 사실상 군부의 꼭두각시로 전락하였고 군부의 독주에 대해 아무런 견제도 하지 못한채 단지 대세에 수동적으로 따르는 모습만 보이게 됩니다. 총리에서 물러난 후 고노에 내각에서 다시 외상으로 취임했으나 "나 혼자 반대한들 무엇이 바뀌겠는가. 흘러가는대로 지켜볼뿐이다."라고 말하며 매사 아무것도 하지 않고 손을 놓아 버립니다. 태평양전쟁말기에 와서 뒤늦게 소련의 참전을 막기 위해 히로다가 특사로 파견되어 스탈린을 만나려고 했으나 이미 미국과 비밀리에 참전을 약속한 스탈린은 면담 자체를 거부합니다. 이후 일본 패망후 동경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도죠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집니다. 그가 군부에 편승해 적극적으로 전쟁을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서 보신주의에만 급급한 것에 대해 책임이 없다라고 말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죠.
방공협정에 서명하는 독일측 대표 리벤트로프 외상과 독일주재 일본 대사 무샤코지 긴토모. 독일로서는 이 인간들과 손을 잡은 것이 최악의 실수였다는 것을 뒤늦게서야 깨닫게 되겠지만 어차피 힛총통이 직접 주도한 일이니 누구를 원망하겠냐는... ※ 사진출처 : http://kk1234ang.egloos.com/2795630
물론 일본 군부내에서도 중국 침략을 반대하는 이들이 없지 않았습니다. 서안사변직후 참모본부 전쟁지도부와 해군을 중심으로 장개석정권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중국과의 관계 개선 및 주권 존중, 화북에 대한 침략 중단을 내각에 건의합니다. 이들은 중국에서 장개석의 주도로 통일을 거의 이룩한 이상 이전의 청조나 군벌정권을 상대하듯 해서는 안되며 변경지역을 분리 독립시킬 수 있다는 것은 중국의 실태를 모르는 시대착오적 발상이라고 주장합니다. 되려 일본이 압박을 가할수록 중국내 반일감정만 악화시키고 내부적인 단결을 공고하기 할 뿐이라고 주장하죠.
이는 매우 냉철한 판단이었으나 관동군을 중심으로 군부 강경파는 여전히 수구적인 사고를 버리지 못한채 이런 타협책을 결사반대하였고 무력을 사용해서라도 화북을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들은 화북을 지배하는 주요군벌이자 기찰정무위원장인 송철원을 지속적으로 압박하는 한편, 화북에 대한 경제적 침략을 통해 반식민지화를 꾀합니다.
37년 2월 관동군 참모부에서 작성한 "대중국 및 몽골 정세판단"에서도 "대소전을 대비하여 내몽골과 북중국에 대한 공작을 강행하고 구 북양군벌의 수장이었던 오패부를 괴뢰로 내세워 북지정권을 확립한후 산서, 수원성까지 장악해야 한다"라고 주장하고 "경제공작만으로는 결코 우리가 바라는 것을 얻을 수 없다"라며 노골적으로 무력사용을 지지합니다. 히로다를 대신해 총리가 된 하야시 센주로는 대중 타협을 추진했으나 이들의 강력한 반발로 결국 6월 4일 취임 4개월만에 쫓겨났고 고노에가 새 총리가 되지만 갈수록 더 유약하고 군부의 눈치만 보는 이들이 자리 나눠먹기식으로 총리가 되다보니 리더쉽은 없고 목소리 큰 놈들에게 휘둘릴 수 밖에 없었죠. 이런 상황에서 일어난 것이 바로 7월 7일 이른바 "노구교사건"(중국에서는 7.7항전, 일본은 북지사변이라고도 부름)이었습니다.
굴욕적인 당고협정과 하메협정 체결로 청조의 수도였던 북평은 거의 무방비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일본군은 만리장성부터 북평 동북지역을 죄다 장악하여 북평을 사실상 삼면에서 포위합니다. 북평과 내륙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는 서쪽에 흐르는 영정하에 놓인 다리인 노구교뿐이었죠. 당시 북평-천진 등 하북성에 대한 수비는 하메협정으로 동북계의 우학충이 남쪽으로 철수한후 뒤이어 진덕순-도히하라협정에 의해 찰합이성에서 철수한 송철원의 서북군(제29군)이 포진하고 있었으며 총병력은 4개 보병사단, 1개 기병사단, 3개 독립여단 등 8만명에 달했습니다. 또한 북평 서쪽의 노구교를 비롯한 영정하와 완평성의 수비는 제29군 산하 풍치안의 제37사단이 맡고 있었죠. 이들은 관동군의 도발이 점점 심화됨에 따라 노구교 사건 직전까지 노구교를 비롯한 방어지역에 대한 방비를 대폭 강화하고 있었습니다.
노구교 사변 직전 화북의 상황. 당고협정과 하메협정으로 북평-천진 이북 지역은 중국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비무장지대가 되었는데 일본은 이 지역에 이른바 "기동방공자치정부"라는 괴뢰정권을 수립하고 점점 영향력을 확대하고 있었습니다. 여기다 천진과 풍대에도 지나주둔군이 주둔하고 있어 북평은 서쪽을 제외하고는 삼면이 포위되어 전략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태였습니다. 아래의 기동정무위원회는 송철원의 영역입니다. 그외에 북평과 천진의 조계에는 영, 미, 프, 일 4개국군도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 사진출처 : 위키백과
노구교사변당시 노구교를 수비하는 중국군 제37사단 제219연대 병사들.
※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han0114/17044415
사건전날인 7월 6일 당시 풍대에 주둔한 지나주둔군 제1보병연대소속의 이치키 기요나오소좌가 지휘하는 제3대대 500여명이 사전 협의도 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일본군 수비선을 넘어서 노구교 동북쪽의 황무지에서 실탄 사격을 하며 군사훈련을 실시합니다. 이 지역은 중국군 수비지역으로 일본군이 침범하는 것은 명백한 당고협정 위반이었지만 애초에 중국군을 도발하고 이들을 공격하여 전쟁을 일으키기 위한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현지 부대가 의도적으로 벌인 짓이었습니다. 이렇게 일본군이 무단으로 침범하여 중국군 구역에서 훈련을 실시하자 중국군측도 완평현성에서 회의를 열고 경계를 엄중히 하는 한편 일본군의 움직임을 감시하면서 만약 이들이 중국군 진지 100미터 이내로 진입할 경우 자위를 위해 발포하여 격퇴할 것을 결의합니다.
이치키 기요나오. 그는 노구교사건에서 독단행동을 문책받기는 고사하고 되려 중좌로 승진합니다. 이후 과달카날전투 초반에 압도적인 미 해병대를 상대로 무모한 "반자이돌격"을 시도했다가 괴멸당하고 본인도 할복자결하죠.
7월 7일 밤 10시 40분. 야간훈련중이던 제8중대를 향해 몇발의 총성이 들립니다. 중대장인 시미즈대위가 급히 병사들을 집결시켜 점호했는데 이등병 한명이 빈 것을 발견하자 이것이 중국군의 공격때문이라고 성급하게 판단하고 풍대의 본대로 무전을 때려 이치키소좌에게 "노구교에서 중국군이 선제공격하여 아군 1명이 실종되었다"라고 보고하고 병사들에게 실종된 병사를 수색할 것을 명령합니다. 보고를 받은 이치키도 8일 새벽 0시 연대장인 무다구치 렌야대좌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죠. 무다구치는 병력을 즉시 출동시키고 완평현성에 주둔한 중국군과의 교섭을 명령합니다. 새벽 4시 완평현장 왕냉제와 일본측 특무기관장 마쓰이 다쿠로가 만나 실종된 병사를 찾기 위해 완평현성을 합동 수색키로 합의합니다.
그러나 어이없는 것은 그 실종되었다는 병사는 설사때문에 무단으로 자리를 비웠을 뿐이고 20분후 자기 자리로 복귀했다는 것입니다. 중대장은 그 사실을 나중에 알았지만 이미 연대장까지 보고가 올라가 국제 문제로 비화된 상황에서 이제와서 도로 대대장한테 "착각했다"라고 보고하는 것은 체면 문제였기에 함구해 버립니다. 당시 일본군의 군기가 얼마나 "당나라"였는지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죠. 더해서 중국쪽 역사서에는 총성이 들렸다는 것 자체가 아무 증거없는 일본의 날조라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어쨌든 쌍방이 합의하여 그럭저럭 무마되는 것처럼 진행되고 있는데 갑자기 새벽 4시 50분, 무다구치의 명령에 따라 출동한 병력이 포격을 가하며 노구교를 지나는 평한철도 철교를 기습 공격하고 일문자산과 노구교 북쪽의 용왕묘를 점령합니다. 또한 영정하를 도하하여 장신점의 중국군 진지도 공격하죠. 이는 무다구치가 "사무라이정신"운운하며 상부의 허가도 없이 무단으로 중국군을 응징하라는 명령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8일 하루동안 쌍방이 일진일퇴를 거듭하며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십수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중국군은 전사 20명, 부상 60여명의 피해를 냅니다.
사건 당일 쌍방의 전투 상황도. 당초 공격한 일본군은 풍대에 주둔한 고작 1개 대대에 불과했으나 사태를 확대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은 중국군은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채 수세 일변도로 소극적인 저항만 하다가 철수함으로서 우세한 상황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이때 강력한 의지로 강력하게 저항하여 지나주둔군을 격퇴해버렸다면 이후 북평과 천진을 쉽게 빼앗기지는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장신점의 평한철도 철교위에서 공격을 준비중인 일본군. ※ 사진출처 : 위키백과
사건 당일 고향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던 송철원은 보고를 받자 겉으로는 "단호하게 적을 섬멸하라"라고 지시했으나 뒤로는 "일본이 전면 침공을 꾀한 것은 아니라고 판단되는 이상 상황을 불필요하게 악화시켜서는 안되며 필요하다면 약간의 양보를 해도 좋다"는 애매모호한 명령을 내립니다. 따라서 중국군은 숫적으로 월등히 우세하면서도 겨우 1개 대대에 불과한 일본군을 상대로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못한채 수세 위주로 싸울 수 밖에 없었습니다.
9일 새벽 2시 진덕순과 마쓰이간에 정전을 합의함에 따라 쌍방은 전투를 중지한후 일단 병력을 원래대로 철수시킵니다. 그리고 11일 저녁 8시 노구교사변 현지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제29군은 일본군에게 사과하고 책임자를 처벌할 것, 노구교 일대에서 중국군의 철수, 배일운동의 단속 등을 약속합니다. 또한 13일 송철원은 북평을 통과하는 열차의 정상 운행과 계엄해제, 전투태세의 완화를 지시하였고 일본측의 요구에 따라 북평 수비를 제37사단을 천진에 있는 장자충의 제38사단으로 교체시킵니다.
이는 일본이 억지를 부리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들의 요구를 모두 받아들인다는 것으로 중국으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것이기도 했지만, 관동군과 지나주둔군으로서도 어떻게든 꼬투리를 잡아 아예 전면전으로 확대시킬 생각이었으면서도 일단 중국의 양보를 마지못해 수락하는 것처럼 한 것은 지나주둔군은 겨우 2개 연대 5천명에 불과한데 반해 중국군의 숫자가 워낙 압도적인데다 아직 전면전의 준비가 부족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시간을 벌기 위함이었습니다.
한편, 노산에서 중앙군의 하계훈련을 주관하고 있던 장개석은 양군이 충돌했다는 보고를 받자 송철원에게 완평현성의 고수와 총력을 다해 일본군의 공격을 저지하고 빼앗긴 지역을 탈환할 것을 명령합니다. 또한 유치와 서영창에게 각각 중앙군 1개 사단을 출동시키고 서주에 주둔한 손연중의 제26군에게도 석가장 및 보정으로 병력을 북상시킬 것을 명령합니다. 그리고 군정부장인 하응흠에게 전국에 계엄령 및 총동원의 선포를 지시하고 "일본은 교활하여 속셈을 알 수 없는 이상 무력침략에 대비하여야 한다"라는 성명을 발표하는 등 전에 없던 초강경 자세를 취합니다. 장개석은 지나주둔군이 현지에서 정전협정을 체결했음에도 정작 일본 정부는 당일날 본토에서 3개사단과 조선군 제20사단을 증파할 것을 결정했다는 보고를 받자 일본의 평화운운은 눈속임일 뿐이고 이번 일을 기회삼아 사태를 확대하려고 들 것이 틀림없다고 판단합니다.
따라서 신속하게 30대의 전투기를 비롯해 약 30개사단에 달하는 대규모 병력을 북상시키고 송철원에게도 "왜구는 신의를 중시하지 않는다. 상해사변당시에도 우리와 이미 평화조약을 체결하고도 8시간만에 상해를 공격했다."라며 일본군을 철저히 경계할 것과 중앙정부의 지시없이 임의로 현지에서 일본과 협상하지 말 것을 지시합니다. 그럼에도 송철원은 사태를 대수롭지 않게 판단하고 "이미 상황은 안정되었으니 병력 증원은 필요없다"라고 답변합니다. 도리어 19일에는 북평으로 돌아와 북평성내에 설치된 방어시설을 철거하고 성문을 열도록 명령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측에게는 북상하는 중앙군을 보정 이남에서 정지시키겠다고 약속합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매국적인 행동이었죠.
이것은 하-메협정으로 하북성에서 중앙군이 철수한후 남경정부의 통제력이 미치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송철원은 열하사변때만 해도 대도대를 투입하여 일본군을 상대로 승리했고 이때문에 "항일명장"이라 불리울만큼 명성을 떨쳤으나 이때에 와서는 일본의 비위를 맞추기에만 급급했습니다. 그는 일본군의 침략보다 자신의 세력이 축소되는 것을 더 두려워 했고 일본의 요구를 무조건 수용하고 사태를 축소하는데만 급급합니다. 만주사변 당시 장학량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다가 쫄딱 망했음에도 송철원은 구태의연하게 같은 짓을 반복하는 것이었죠. 이런 군벌들의 이기주의가 당시 중국의 최대 취약점이었습니다.
그러나 송철원의 바램과 달리, 상황은 더욱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이시하라 간지 이래 만용 부리는 것이 관행처럼 되어버린 관동군은 그토록 원하던 기회를 포착했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이번 기회에 화북 전체를 먹어야 한다며 즉각 독립 혼성 제1여단 및 제11여단을 출동시키고 11일에는 산해관에 집결시킵니다. 특히 쓰지 마사노부 중좌는 노구교로 달려가 무다구찌앞에서 "관동군이 뒤에서 밀어줄테니 걱정말고 마음껏 설쳐달라"라며 자기들이 더 흥분해 설치자 도리어 지나주둔군측이 "저 양반들은 전쟁을 너무 쉽게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라고 어이없어 할 정도였습니다.
노구교 사변 발발 한달전에 하야시를 대신해 45세의 나이로 신임총리가 된 고노에는 젊다는 이유로 군부를 견제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매우 유약하고 우유부단한 인물이었죠. 노구교를 사이에 두고 중일 양군이 소규모 충돌을 벌였다는 보고를 받자 당초에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라며 상황을 확대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고 9일 임시 각의에서도 "불확대" 방침을 결의하고 외교로 해결하기로 합니다.
그러나 강경파인 스기야마 육군대신이 재심을 강력하게 요구하자 11일 다시 각의가 열렸고 이번에는 육군의 강경론자들의 주장에 따라 "이번 사건은 중국군의 계획적인 도발임에 틀림없기에 자위권을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할 것이다"라고 기존의 결정을 완전히 뒤집은 내용을 발표합니다. 또한 "근본적인 문제는 중국의 반일사상에 있으므로 앞으로도 계속 반복될 것이기에 확실한 응징이 필요하다"운운합니다. 이미 당일날 현지에서는 진덕순과 마쓰이간에 정전협정을 체결하고 중국측이 무조건 양보하여 더이상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기로 약속했음에도 육군 강경파들에 밀려 협정을 스스로 뒤집은 것이죠.
당시 육군 참모본부에서는 의견이 둘로 나누어 대립했는데, 확대파는 적극적인 출병으로 화북을 제2의 만주국으로 만들자고 주장하였고 불확대파는 대소전의 위험이 있는 이상 중국과의 전쟁은 피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처음에는 불확대파가 우세했으나 중국군이 대거 북상중이라는 보고를 받자 확대파가 우세해져 결국 지나파견군을 지원하기 위해 관동군 2개 여단 및 조선군 제20사단의 출병을 승인하였고 추가로 본토에서도 3개 사단을 파병할 것을 논의합니다.
또한 고노에는 총리관저에서 언론계와 재계 대표들을 모두 불러모아 "중국의 반성을 촉구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병력을 출병시킬 수 밖에 없다"라며 정부와 군부를 적극 지지해 줄 것을 요구했고 이에 따라 우익계 신문들은 "거국일치"를 부르짖습니다.
이런 정부의 분위기에 대해 지나파견군은 처음에는 "이미 정전협정이 체결되었고 중국군이 일본군에게 대규모 공세를 가할 가능성은 적다"라며 굳이 병력을 증원하여 상황을 악화시킬 필요가 없다고 건의했으나 돌아가는 상황이 점점 극단적인 분위기로 흐르자 지나파견군도 대세를 따르기로 하고 정전협정을 깨고 제29군에 대한 전면 공격 및 북평 점령을 결정합니다. 또한 고노에 내각은 일단 보류하였던 본토에서 3개 사단(제5사단, 제6사단, 제10사단)에 대한 동원에 대해서도 7월 27일 최종 승인을 내립니다. 장개석이 예측했던 대로 강경파에 휘둘리는 일본 정부는 결국 노구교 사건을 확대하여 전면전의 기회로 삼은 것이죠.
여기다 돌이킬 수 없는 또 한가지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번에는 상해였죠. 8월 9일 일본 육전대 소속의 중위가 무단으로 중국 공군이 사용하는 홍교 공항으로 들어가려다 사살당하는 이른바 "홍교 공항 사건"이 일어납니다. 일본 해군은 이를 구실로 4일후 8월 13일부터 상해에 대한 전면적인 공격을 시작합니다.
한 병사의 설사가 8년간의 전쟁으로 이어지고 무려 2천만명이상의 사상자를 내는 동아시아 최대의 전쟁이 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생각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일본의 구실일뿐이고 어차피 관동군은 무엇을 꼬투리로 잡던간에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겠지요. 언제가 되었건 전쟁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은 틀림없었지만 "노구교사변"은 중일 모두에게 우발적인 일이었고 어느 쪽도 충분히 준비되지 않은 전쟁이었습니다. 따라서 쌍방 모두 결정타를 먹이지 못한채 소모전만 거듭하며 무려 8년이나 질질 끌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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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명일 작성시간 13.07.22 중령정도 계급이 편의에 따라 전쟁을 시작해서 일본전체가 뒤따라가는데 그런 놈은 군법재판을 해서 총살시켰어야지.전부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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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리블루 작성시간 13.07.22 그야말로 미친 전쟁이군요. 일개 대대장이 전쟁의 문을 열 수 있는 군대가 과연 군대인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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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열혈청년 작성시간 13.07.23 옛날부터 왜구들이 따로 놀았던 나라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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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2Pac 작성시간 13.07.23 엄청난 설사네요. 사실 설사는 핑계고... 언젠간 일어날 전쟁 아니었을까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