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해사변이 발발한지 10일째인 8월 23일.
여전히 중국군이 상해 시가지 중심가의 일본조계를 포위한채 쌍방이 일진일퇴의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을때, 상해 북쪽의 오송해안가에 대규모 일본 함대가 출현합니다. 바로 마쓰이 이와네 대장이 지휘하는 "상해파견군" 2개 사단이었습니다.
이들은 두군데의 지점에서 상륙을 시도하였는데, 제3사단은 상해 북쪽 20km 지점의 오송만에 그리고 제11사단은 그보다 좀 더 북쪽으로 15km 떨어진 천사진에 각각 상륙합니다. 원래 이곳은 1차 상해사변의 패전이후 중국에 불리한 정전협정에 따라 중국군은 어떤 방어시설도 설치하지 못하는 비무장지대로 남아 있었으나 일본의 침략이 점점 노골화됨에 따라 장개석의 명령으로 35년말부터 이른바 "젝트라인"이 구축되면서 이곳에도 두꺼운 콘크리트로 만든 다수의 토치카와 방어진지가 설치하였고 야포와 기관총을 배치하여 매우 강력한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 앞에는 넓은 지뢰밭과 철조망과 같은 온갖 장애물들이 펼쳐져 있었죠.
이렇게 양자강 하류와 주요 해안가 곳곳에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한 수많은 장애물이 펼쳐져 있었죠.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g17/150039716662
더욱이 진성의 건의에 따라 장개석은 본격적으로 이 방면에 중국군의 주력을 집결시켜 적의 후방 상륙을 저지하면서 나아가 적극적으로 적의 주력을 섬멸시키기로 결정합니다. 따라서 8월 20일부터 병력을 대거 보강하여 19개사단, 6개 여단 등 20만명으로 대폭 증강되었고 오송만 일대에는 진성이 직접 지휘하는 제18군이 배치되어 일본군의 상륙에 대비하고 있었습니다. 그동안 중국군을 막연하게 멸시해 온 일본군 수뇌부는 이 정보를 가볍게 여기고 충분한 준비도 없이 무턱대고 정면에서 상륙을 시작하지만 당연히 중국군의 강력한 반격으로 시작부터 고전의 연속이 됩니다.
상해사변 발발후 일본정부는 군부의 건의에 따라 부랴부랴 일단 2개 사단을 급히 차출하여 파견했으나 무기도 장비도 심지어 탄약도 충분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더욱이 후속부대의 증원이나 병참에 대한 구체적인 계획과 준비도 없이 일단 있는 것부터 보내고 보자는 식이었죠. 육군 수뇌부의 이런 무책임과 무계획성, 무능함은 전쟁 끝날때까지 반복되는 모습이죠.
상륙 제1진에 투입된 제3사단 병사들은 일인당 겨우 200발의 탄약만을 배정받고 함포의 엄호하에 상륙용 주정을 타고 해안가로 돌진합니다. 그들을 향해 격렬한 포격과 기관총 사격이 집중되었고 해안가는 금새 일본군의 시체로 뒤덮히고 피로 붉게 물듭니다. 총알을 모두 소모한 일본군은 탄약 부족으로 밀집대형으로 적의 토치카를 향해 총검 돌격했으나 화력의 열세와 견고한 방어선때문에 도저히 중국군의 진지를 돌파할 수 없었으며 오히려 사상자만 늘어납니다.
상륙전에 참가했던 일본군 병사는 다음과 같이 당시의 처절한 광경을 회상합니다.
"오송의 해안절벽 아래에 펼쳐진, 나의 눈에 들어온 풍경은 마치 지옥도와 같았다. 수라의 항도 이렇게 심하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될만큼 잔혹한 것이었다. 해안벽 아래의 일면은 완전히 시체의 산으로, 바닥도 보이지 않을만큼 차례차례 겹쳐 있었다. 마치 시장에 쌓아진 마구로처럼 수천 병사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던 것이다. 그와 동시에 구역질이 나올만큼 썩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중략) 이것이 10일전 상륙했던 나고야 제3사단 장병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이땅에 중국군 대부대가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던가, 알지 못했던 것인가. 상륙하자 말자 차례차례 죽어간 것이 틀림없다. 병사들은 뭐가 뭔지도 모른채 죽어갔던 것이다."
제3사단은 당초 상륙당일날 오전까지 중국군 진지를 제압하고 교두보를 마련한후 내륙으로 진격할 계획이었으나 이것이 얼마나 안이한 오산인지 금새 깨닫게 됩니다. 오히려 그날밤 중국군의 반격을 우려하여 사단장인 후지타 스스무 중장은 해안의 교두보를 포기하고 도로 함선으로 철수까지 고려할 지경이 됩니다. 단지 해상에서의 함포사격과 항공 엄호로 간신히 버티며 상륙후 17일째까지도 해안가에서 고작 3km를 전진합니다. 이들의 전진속도는 일일 100~600미터에 불과할 정도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죠.
한편, 천사진에 상륙한 제11사단 역시 똑같이 고전을 면치 못하였는데 상륙후 6일째까지 5km를 전진하여 일단 교두보는 마련했으나 이후 한달동안 단 한발짝도 더 이상 전진하지 못합니다. 선봉에 선 제44보병연대는 중국군의 토치카를 향해 육탄돌격을 하고 심지어 가미가제식 자폭조까지 조직해 폭탄을 들고 적진으로 돌격하여 8월 28일 간신히 중국군의 요충지인 나선진을 점령합니다. 또한 제12보병연대는 10일만에 병력이 3400명에서 900명으로 격감할 정도로 큰 희생을 치룹니다. 중국군은 마지막까지 저항을 하면서 질서정연하게 다음 방어진까지 후퇴하여 일본군의 공격에 대비합니다. 따라서 도저히 그들의 능력으로는 공격을 지속할 수가 없어 교착상태가 됩니다.
메이지 이래 오랜 전통을 자랑하는 이 2개 사단은 일본군에서도 최정예로 손꼽히는 사단들로, 100% 현역으로 구성된 갑종사단(상설사단)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충분한 준비없이 무리한 공격으로 막대한 희생만 치룬채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하는데 완전히 실패합니다. 이런 대참패는 일본군으로서는 청일전쟁이래 단 한번도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죠.
상륙후 1주일만에 일본군의 피해는 2개 사단 합해 4천에 달했고 한달째에는 제3사단이 전사 1080명, 부상 3589명, 제11사단이 전사 1560명, 부상 3980명으로 토탈해 1만명이 넘는 사상자를 내었고 이는 전체병력 3만여명중 1/3에 달하는 것이었습니다.
9월말까지의 상해전투 상황도. 붉은색이 일본군의 공격이고 푸른색이 중국군의 주요 방어진지입니다. 중국군의 방어선이 얼마나 두꺼웠는지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죠. 총검에만 의존한 일본군이 겨우겨우 한개의 방어선을 돌파하면 그 뒤에 다음 방어선, 그 다음 방어선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이런 희생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의 방어선은 여전히 견고했으며(물론 중국군의 피해도 극심했지만) 현지를 시찰한 팔켄하우젠은 장개석에게 "비록 적을 완전히 섬멸하는데는 실패했으나 계속해서 수비한다면 적의 전진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장담합니다.
겨우 2개 사단 3만명으로 20만에 달하는 중국군을 제압하고 상해 북쪽에서 남하할 생각이었으나 이제 도저히 중국군을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한 마쓰이대장은 본국에 급히 병력의 증원을 요청하였고, 상황이 예상외로 돌아가자 당황한 일본 참보본부는 9월 7일 3개 사단의 증파를 결정합니다. 5년전 제1차 상해사변 당시에도 중국군을 만만하게 보고 소수의 육전대만으로 무모하게 공격을 시도했다가 패하자 결국 3번에 걸쳐 병력을 축차로 찔끔찔끔 증파함으로서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아직 정신 못차리고 그 때의 실수를 새삼 반복하는 것이죠.
먼저 대만주둔군에서 1개연대(이른바 시게후지지대)를 차출하여 투입하였고(이들은 9월 18일에 천사진에 상륙하여 제11사단과 합류함) 이어서 제9사단, 제13사단, 제101사단, 야전중포병 제5여단 등 3개사단과 1개포병여단이 증파됩니다. 그런데 이중 제13사단과 제101사단은 상설사단이 아닌 급조된 소위 "특설사단"으로 병력도 대부분 30대이상의 중장년의 예비군과 신병으로 구성된 부대였습니다. 따라서 훈련도 제대로 받지 않았고 장비도 형편없었으며 전투력도 의심스러웠죠. 더욱이 예비군들이 그러하듯 다들 한 가정의 가장인데 제대한지 10년만에 느닷없이 소집영장 한통 받고 끌려 나왔으니 무슨 전의와 군기가 있었겠습니까. 간부들 역시 제대한지 오래된 예비역출신들이었습니다.
당시 일본은 상비병력의 대부분이 소련을 대비해 만주에 알박혀 있는 상황에서 빼낼 수 있는 병력이 부족하다보니 본토와 식민지(조선, 대만)에서 병력을 급히 차출하여 중국과의 전쟁을 무작정 시작하기는 했으나 개전 1달만에 벌써 한계에 직면한 것이죠.
어쨌든 이들 3개 사단과 1개 여단은 9월말에 도착하여 제11사단과 함께 최일선인 나선진에 배치됩니다. 마쓰이 대장은 요충지인 대양진의 공략을 일차 목표로 하고 소주하까지 단숨에 남하하여 중국군 주력을 포위한후 상해의 육전대와 협공함으로서 이들을 완전히 섬멸할 계획을 수립합니다. 우측부터 제9사단, 제3사단, 제101사단을 차례로 배치하고 제13사단은 예비대로 하여 10월 8일부터 공세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야전중포병 여단까지 별도로 투입되었음에도 정작 포탄이 부족하여 충분한 화력지원을 할 수가 없었고 주로 보병의 총검 돌격에 의존합니다.
중국군은 나선진에서 대양진에 이르는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있었고 수백개의 콘크리트 토치카들이 줄줄이 배치되어 있었습니다. 이 토치카들은 작게는 5m에서 크게는 200m에 달했고 다수의 야포와 기관총좌가 배치되어 있었으며 각각의 토치카들은 서로 사각이 없도록 매우 교묘하게 배치되어 일본군이 결사적으로 돌격해 그 중 하나를 격파하거나 점령해도 주변의 토치카에서 화력이 집중되어 그들을 사살하였습니다. 또한 불리할때는 철퇴가 용이하여 다음 방어선까지 물러나 새로운 방어선에서 다시 싸울 수 있었죠. 마치 쿠르스크 전투당시 소련군의 방어진지를 연상케 할 정도이죠. 그러니 일본군이 고전을 면치 못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대신 제해권과 제공권에서는 압도적인 우세를 점하고 이들의 강력한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 유일한 이점이었습니다.
어쨌든 일본군의 병력이 두배이상 증강되어 약 10만으로 늘어나자 장개석 역시 병력을 있는대로 다 보낼 것을 명령하고 스스로 지휘권을 맡습니다. 따라서 중국군은 당초 장치중의 제9집단군에서 추가로 6개 집단군(제8, 제10, 제11, 제15, 제19, 제21집단군)이 증강되어 모두 7개집단군과 독립 5개사단으로 늘어납니다. 장개석으로서는 그야말로 이 방면에 중국의 사활을 건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그의 명령에 따라 화중, 화남의 각지에서 병력이 대거 상해로 이동하여 매일 1~2개사단이 축차로 열차를 통해 도착합니다. 이들은 현지에 도착하는대로 최전선에 투입되죠. 최대 85개사단70~80만명이 동원되었는데 이는 전체 중국군의 거의 1/3에 해당하는 숫자인데다 독일식 사단을 비롯해 중국이 가진 정예병력의 거의 대부분을 쏟아넣은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일본군이 충분한 준비없이 성급하게 공격을 시도하여 큰 피해를 입었듯, 이것은 중국측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당초 "젝트라인"을 활용한 종심방어계획을 뒤엎고 장개석이 상해로 모든 병력을 "몰빵"하기로 한 것은 사실상 중국에게 가장 불리한 조기 결전을 시도하는 것이었죠. 사전에 충분한 병참 준비도 없이 무작정 병력이 도착하는대로 축차로 투입함으로서 무기와 탄약도 부족했고 좁은 공간에 너무 많은 병력이 밀집함으로서 지휘와 통신, 병참의 문제는 물론이고 전투의 효율도 떨어집니다. 각 사단들은 도착함과 동시에 말그대로 "녹아내렸"으며 심지어 일본 전함의 함포 사격 한방에 1개 대대에 해당하는 600여명이 한꺼번에 몰살한 예도 있었습니다. 10월 20일까지 일본군이 2만이상의 사상자를 낸 것에 대해 중국군은 그 6배에 달하는 무려 13만명의 사상자를 냅니다.
무엇보다 장개석을 비롯한 중국군 수뇌부는 여지껏 이정도의 대병력을 야전에서 지휘, 운용하여 현대전을 경험해본 적이 없었습니다. 중앙군과 지방군간의 격차와 복잡한 지휘계통으로 인한 극심한 혼란, 세밀한 계획의 부재 등 하드웨어도 소프트웨어도 없이 왠만한 대도시급의 인구에 해당하는 군대를 단일전구에 몰아넣어 지휘한다는 것은 당시 중국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었죠.
더욱이 이로 인해 당초 화북으로 증원할 병력까지 이쪽으로 죄다 털어넣는 바람에 반대로 화북전선에서 일본군은 그야말로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찰합이성과 수원성이 순식간에 함락되고 화북 전체가 위기에 빠집니다. 원래 중일 양쪽 모두 화북전선이 주전선이고 상해방면은 한낱 보조전선에 불과했으나 이제는 모든 관심사가 이쪽이었고 여기서 누가 이기는가에 따라 중일전쟁 전체의 향방이 좌우될 정도가 됩니다.
게다가 일본군의 병력이 대폭 증강되어 상해 북방을 강력하게 압박하고 제해, 제공권에서 압도적으로 열세해지자 이들의 저지가 최우선이 되었고 정작 상해에서 일본육전대를 밀어내는 것은 물건너갑니다. 10월 13일 광서군벌의 수장인 이종인을 만난 장개석은 "곧 모든 왜적을 황포강속으로 수장시킬 것"이라고 호언했으나 이미 공격의 주도권은 일본이 쥐게 되었고 쌍방은 일진일퇴의 치열한 소모전만을 거듭합니다.
10월 8일부터 새로 도착한 3개 사단을 주축으로 총공격을 시작한 일본군은 그럼에도 중국군의 방어선을 돌파할 수 없었고 일차 목표인 대양진에서 5km 떨어진 곳까지 전진하지만 1km를 전진하는데 10일이 걸릴 정도로 악전고투의 연속이었습니다. 10월 18일까지 일본군의 사상자는 2만을 넘어서고 있었습니다.
10월 23일 드디어 중국군의 전략 요충지인 대양진을 삼면에서 포위하고 4개 사단(제3, 제9, 제11, 제13사단)이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중국군 역시 주력을 이곳에 집중함으로서 쌍방은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일본군은 야전중포병 여단이 보유한 155mm 곡사포를 비롯해 중포 120문을 집결시켜 격렬한 포화를 쏟아부었고 결국 2일간의 격전끝에 25일 대양진이 함락되고 중국군은 남쪽으로 후퇴하여 소주하 남안에 포진합니다. 또한 그동안 포위되어 있던 육전대도 대양진 점령 소식을 듣자 드디어 반격으로 전환하여 북정거장과 갑북의 중국군을 공격하여 상해 시가지에서 중국군을 밀어내는데 성공합니다.
갑북 지구를 공격중인 일본 육전대 병사들. 중국군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점차 주도권은 일본측으로 넘어갑니다.
※ 사진출처 : 일중전쟁, 태평양전쟁연구회 저
이어서 10월 31일 일본군은 소주하를 도하하여 중국군 진지에 대한 공격을 시작합니다. 그러나 일본군은 수십만이 밀집해 있는 중국군 방어선을 도저히 돌파할 수 없었고 중국군 역시 좁은 지역에 너무 많은 인원이 몰려 있어 일본군의 폭격과 포격에 큰 희생을 치룹니다. 따라서 서로 엄청난 사상자만 반복할뿐 다시 교착상태가 됩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참모본부는 10월 20일 3번째로 병력 증원을 결정합니다. 화북전선에서 제6사단을 빼내고 본토에서 새로 창설된 소위 "특설사단"인 제18사단, 제114사단, 야전중포병 제6여단, 독립산포병 제2연대, 2개 후비보병단으로 새로이 제10군을 편성하고 사령관에는 야나가와 헤이스케중장을 임명합니다. 총병력은 약 8만에 달했습니다.
일본은 상해의 두꺼운 방어선에 정면으로 공격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것인지 2달만에야 깨닫고 이번에는 중국군의 주력이 몰려 있는 상해 남쪽을 크게 우회하여 항주만을 기습키로 합니다. 이곳은 중국군의 방어선에서 크게 벗어난 곳이면서 동시에 중국군의 퇴로를 단숨에 차단함으로서 포위 섬멸이 가능한 곳이었습니다. 나아가 그 여세를 몰아 수도 남경까지 단숨에 공략하여 전쟁을 조기에 종결시킨다는 계획이었습니다. 여기다 별도로 화북전선에서 제16사단을 추가로 빼내어 장강상류에 있는 백묘구라는 곳에 상륙하여 상해 북쪽의 중국군에 대해서도 포위한후 협공키로 합니다. 그리고 상해 방면의 모든 병력을 통합 지휘하기 위해 이들을 "중지나방면군"으로 편성하고 마쓰이 대장이 방면군 사령관으로 임명됩니다.
11월 5일 새벽, 상해 남쪽 60km 떨어진 항주만 북안에 일본군 함대가 모습을 드러내고 해상, 공중 엄호하에 금산위일대의 해변가에 제10군이 상륙합니다. "일군100만 항주만 상륙"이라고 커다랗게 애드벌륜까지 공중에 띄워놓고 자축하면서 수십량의 전차부대를 앞세워 내륙으로 단숨에 진격해 들어갑니다.
항주만에 상륙중인 제10군의 병사들. 이곳에는 중국군의 방어시설이 없었기에 저항은 극히 미미했습니다. 이전에 투입된 부대들이 얼마나 큰 희생을 치루었는가와 비교한다면 이들은 그야말로 행운아들인 셈이죠. 물론 그 행운이 그리 오래 가지는 않았겠지만...
※ 사진출처 : 일중전쟁, 태평양전쟁연구회 저
제10군의 항주만 상륙은 중국으로서는 완전히 허를 찔린 격이었습니다. 장개석은 그때까지도 일본군이 제1차 상해사변때처럼 전장을 상해인근으로만 국한할 것이라고 생각했고 멀리 우회하여 배후를 차단할 것이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않았습니다. 중국군 수뇌부에서 가장 유능한 지휘관이자 참모차장인 백숭희가 "더이상 상해로 병력을 증원해서는 안된다"고 건의했음에도 그는 끝까지 정면 공격만을 고집합니다. 왜 그가 적의 대규모 우회 상륙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지 항주만을 비워두었던 것인가. 이유가 어찌되었건 이는 치명적인 오판이자 중일전쟁을 통틀어 장개석 최대의 실수였습니다.
일본의 항주만 상륙은 그때까지 팽팽하던 쌍방의 교착상태를 단숨에 무너뜨립니다. 중국군은 뒤늦게 병력을 투입하여 적의 전진을 저지하려고 했으나 일본군에게 격퇴됩니다. 일본군 제10군이 황포강을 도하하고 북쪽에서는 상해 파견군이 소주하를 돌파하자 중국군은 남북으로 협공을 받게 됩니다. 11월 8일 장개석은 작전 실패를 솔직하게 인정하고 신속하게 전군의 퇴각을 명령하고 새로운 방어선으로 복산-소주-가여를 연결하는 선을 새로운 방어선으로 설정합니다.
그러나 원래 군사작전이란 전진보다 후퇴가 어려운 법이기도 하지만, 좁은 구역에 수십만에 달하는 대군이 밀집해 있는 상황에서 이런 상황에 대비한 사전 계획이나 훈련도 전무하였고 그동안의 전투로 지칠대로 지친데다 수송수단도 불충분했습니다. 더구나 적에게 삼면에서 포위되어 퇴로마저 차단될 위기에 처하자 지휘계통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중국군은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와해에 직면합니다. 덩케르크 철수 당시에도 영-프군의 해상철수는 혼란의 극에 달했으나 그나마 영국 해군과 공군이 침착하게 대처하고 영국해협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어느정도 확보했기에 비교적 성공적으로 철수할 수 있었으나 중국군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주력인 장치중의 제9집단군을 비롯해 각 부대들은 후퇴과정에서 엄청난 피해를 입었고 대부분의 부대가 군대로서의 질서가 완전히 붕괴되어 개별적으로 탈출하는 상황이 됩니다. 그들의 머리위에는 일본기들이 쉴새없이 폭탄과 기총을 퍼부었습니다. 11월 10일 상해가 완전히 포위되었고 12일 결국 상해 전역이 일본군에게 함락됩니다.
상해 점령을 알리는 11월 10일자 아사히신문입니다. 그러나 상해 곳곳에서 중국군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치열한 시가전이 벌어져 실제로 상해를 완전히 제압한 것은 2일후였죠. 밑의 사진은 항주만 상륙을 알리는 일본군의 에드벌륜.
※ 사진출처 : 일중전쟁, 태평양전쟁연구회 저
8월 13일부터 시작되어 3개월간의 치열한 공방전에서 일본군은 전사 1만에 부상 3만 등 4만이상의 사상자를 내어 러일전쟁 당시 5개월간의 공방전을 펼쳤던 여순전투이래 단일 전투로서는 최악의 피해를 냅니다. 병력도 최초 육전대 5천명에서 3차례에 걸친 병력 증원으로 30만명까지 늘어나죠.
중국군의 피해는 그야말로 파멸적이었는데 투입인원 75만명중 약 40%에 달하는 약 30만명의 사상자를 냈으며 정확한 집계조차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진격하는 일본군의 눈앞에는 중국군이 버리고 간 야포, 차량, 장갑차 등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습니다. 해공군 역시 괴멸적인 피해를 입었는데, 해군 주력이 있던 강음항이 집중 폭격을 받아 기함 영해를 비롯해 대부분의 함선들이 격침되거나 대파되어 스스로 자침하였고 일부는 나포됩니다.
상해전역에서 보여준 장개석의 작전술적 지휘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비판할 수 있습니다.
첫째로, 피아간의 전력차이와 아군의 열세함을 뻔히 알면서도 좁은 지역에 무리하게 많은 병력을 몰아넣고 화력에서 월등히 우세한 적의 전면에 병력을 축차 투입함으로서 성과없이 병력만 소모시켰습니다.
둘째로, 3개월이나 질질 끌면서 적이 후방에 상륙할 가능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아무런 근거도 없이 적이 1차 상해전처럼 전장을 상해 일대로만 제한할 것으로 막연히 낙관했습니다. 구원군도 상해에 투입하리라 생각했지 훨씬 후방인 항주만에 우회하여 상륙하리라고는 예상하지 않았고 아무런 대비도 하지 않았습니다.
셋째로, 후퇴나 종심방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수십만에 달하는 병력을 적의 추격과 포위를 피해 체계적으로 철수시킬 계획도 없이 병력만 몰아넣었다가 무계획적으로 "철수"명령을 내렸고 그 과정에서 군 조직 자체가 완전히 와해되어 버립니다. 모든 차량과 중장비가 버려졌고 철수과정에서만 1만이상이 희생되었습니다. 이러다보니 상해-남경 사이에는 그동안 막대한 비용을 들여 다수의 견고한 토치카를 구축했음에도 방어작전에서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습니다.(방어군까지 패잔병들의 물결에 휩쓸리는 바람에)
중국군의 무질서한 후퇴 모습은 마치 한국전쟁초반 서울 실함후 철저히 붕괴되어 패주하는 한국군을 연상케 할 정도였는데 장개석 스스로도 나중에 "자아비판"과 "자기반성"으로 실수를 인정합니다.
한마디로 "내살을 발라내고 적의 뼈를 자르기 위해" 시작한 전투가 결과적으로 도리어 "적의 살만 발라내고 내 뼈를 자른 격"이 된 셈이었습니다. 그나마 장개석은 42년 12월 스탈린그라드에서 보여준 히틀러와는 달리 신속하게 후퇴명령을 내림으로서 전군이 포위 섬멸되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일본군의 아마추어성과 전략적 무계획성 역시 비판하지 않을 수 없는데 충분한 사전 정보 수집이나 준비도 없이 되는대로 축차적으로 병력을 투입하여 큰 희생을 냅니다. 여기다 중국군 주력을 포위 섬멸하는데 집중하기보다 수도 남경 공략에 급급하여 각 부대들은 서쪽으로 경쟁적으로 진격합니다. 이 과정에서도 정찰과 사전 준비를 매우 게을리 했고 쉽게 측면을 노출했으며 지휘관끼리의 경쟁으로 우군 부대간 협조도 제대로 되지 않아 불필요한 희생을 치룹니다. 어쨌든 이기기는 했으나 양국의 국력차이와 일본군의 압도적인 전력을 생각한다면 일본군의 승리는 단지 "피로스의 승리"에 불과한 것이었습니다. 중국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기는 했어도 어쨌든 상당한 병력을 구출하여 재편할 수 있었습니다. 바바롯사작전 초반 60만명의 소련군이 키에프에서 독일군에게 대규모로 포위되어 항복한 것과는 대조되는 것이죠. 만약 상해에서 최정예부대를 비롯한 70만이 포위되어 항복하는 사태가 벌어졌다면 중일전쟁은 그냥 그기서 끝났을 것입니다.
이제 중국으로서는 종심방어는 고사하고 수도 남경의 방위조차 장담할 수 없는 지경에 이릅니다.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배달민족 작성시간 13.07.28 요즘도 우리나라 군에 많이들 뵈죠;; 군인들을 많이 투입하기만하면 어떻게든 될거라는 판단하는 님네들 ㅜㅜ
-
작성자2Pac 작성시간 13.07.29 왜 갑자기 저기서 군대를 몰빵했을까요. 종심방어 통한 지구전이 기본 전략이었을텐데... 그나저나 함포 무섭네요 한 방에 600 명 끔살이라니.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7.29 일본군이 생각보다 고전을 하니까 여기서 좀만 더 밀어붙이면 전세를 뒤엎을 수 있겠다 생각한거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