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개석의 퇴각 명령이 내려진 이후, 상해와 남경 사이에는 수십만에 달하는 중국군 패잔병들의 물결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공포에 사로잡힌 그들은 이미 군대가 아니라 피난민 행렬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이것은 1차대전당시 30만명이 포로가 되고 30만이 탈영하여 전군의 절반을 잃었던 이탈리아 카포레토 전투이래 최악의 상황이었습니다. 중국군 수뇌부는 공황상태를 바로잡고 후퇴를 막기 위해 독전대를 투입하여 이들을 위협하고 심지어 기관총을 무차별로 난사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패주의 물결을 멈추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상해전역의 패배는 단순히 전술적 관점에서 한개 전투의 패배가 아니었습니다. 장개석은 화중과 화남에서 동원가능한 거의 모든 자원과 병력을 무리하게 쏟아넣었고 그 중간에는 예비전력이 없었습니다. 상해-남경에는 독일 군사고문단의 도움을 받아 구축한 견고한 방어선이 있었으나 이런 상황에서는 무용지물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이제 수도 남경은 물론이고 화동전선 전체가 붕괴될 위기에 직면합니다.
덧붙여서, "장제스 일기를 읽다"에서 레이황은 3개월간의 상해전역 덕분에 그나마 동남 연안가에 집중된 다수의 공장설비를 내지로 옮길 시간을 벌었다고 설명하지만 실제로는 그다지 큰 성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어쨌거나 당의 명령에 따라 다수의 국민들과 공장설비를 우랄산맥 동쪽으로 강제 이전시켜 전시생산을 계속할 수 있었던 소련과 달리 남경정부의 권위로는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실제로 중국 경제의 중심지인 상해에서 내지로 이동한 것은 전체의 겨우 2.75%에 불과했습니다.(출처 : 중일전쟁기 중경정부의 물가통제정책, 김지환) 소수의 공장만 거의 반강제로 이전할 수 있었으나 이조차도 중요도가 매우 떨어지는 3, 4급의 소규모 공장들이었고 대부분은 상해에 그대로 남거나 보다 안전한 홍콩으로 옮깁니다.
총칼로 집행할 수 있었던 스탈린정권과 달리, 남경정부의 관료들은 기업가들을 일일이 설득해야 했는데 기업가들은 "상해의 외국 조계에 있으면 결코 적을 이롭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며 거부합니다. 또 상해의 금융과 화교들의 자본 역시 내지로 옮기는데 실패합니다. 이것은 적어도 이때까지만 해도 대륙의 관변학자들이 일반적으로 비판하듯 "남경정부의 중국 경제가 소위 4대가문에 의해 지배된 것"이 아니며 실제로는 전체 경제에서 정부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미미했다는 것입니다.
※ 소수의 국유기업이 독점적 지위에 있는 현상은 당시 장개석정권보다 공산당이 통치하는 지금의 중국이 훨씬 심합니다. 더욱이 이 국유기업들은 권력 핵심층과 밀접하게 연계되어 있어 사실상 이들의 정치자금줄이나 다름없으며 이로 인한 부정부패와 권력층내 파벌다툼도 극심합니다. 최근 중국을 떠들석하게 했던 보시라이사건도 단순히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는 권력 핵심층간의 파벌싸움이죠.
대신 그들의 말대로 주요공장들과 자본이 집중해 있는 상해의 조계에 대해서는 일본도 손을 댈 수 없었고 중국은 여전히 상해에 대해 직간접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거액의 전쟁공채를 이들에게 판매하여 세수를 확보하고 내지에서 필요한 물자가 상해를 통해 지속적으로 수송됩니다. 일본도 나름대로 이를 단속하고 물자 수송을 통제하지만 그럼에도 완전히 차단하는데는 실패한 원인은 바로 내륙과의 무역에서 가장 큰 이익을 보는게 일본 자신이었기 때문이죠. 중일전쟁은 여전히 공식적으로는 "분쟁"일뿐 "전쟁"이 아니었기에 이런 특수한 상황이 연출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죠.
※ 출처 : 중일전쟁기 중경정부의 물가통제정책, 김지환
이 표에서 볼 수 있듯, 전쟁발발이후 39년까지는 인플레이션이 그나마 어느정도 완만하게 진행되지만 일본이 본격적으로 중국의 숨통을 쥐는 40년부터 급격한 인플레이션 현상이 일어납니다. 특히 태평양전쟁 발발로 일본은 상해를 완전히 장악하였고 중국돈인 법폐를 대량으로 내륙에 뿌려서 인플레이션을 조장하죠. 이에 대해 중국은 나름대로 강력한 물가통제와 매점매석을 단속하여 이를 어긴 성도시장 양정우를 비롯한 최고위급 관료들을 사형에 처하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실패하여 심각한 물자 부족에 허덕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추후 다시 설명토록 하겠습니다.
한편, 상해사변이 한창이던 8월 30일 중국의 국제연맹 대표 고유균은 국제연맹에 정식으로 일본의 침략을 제소하고 이에 대한 제재를 요구합니다. 9월 13일부터 개최된 제18회 국제연맹총회에서는 이 문제를 의제로 다루어 28일 "일본의 행위는 9개국조약 및 파리부전조약 위반"이라는 결의안이 통과됩니다. 물론 일본은 강력하게 반발하죠.
또한 11월 13일 벨기에 브뤼셀에서 개최된 회의에서 고유균은 국제연맹 회원국들이 공동으로 일본에 대한 경제적 제재와 중국에 대한 원조를 요청했으나 독-일-이 방공협정에 참가했던 이탈리아가 강경히 반대합니다. 또한 프랑스가 일본에 대한 석유 수출 금지를 제의했으나 미국은 "브뤼셀회의는 어디까지나 평화적인 해결을 위함이지 제재가 목적이 아니다"라고 반대합니다. 열강들의 이해관계와 국제연맹의 무기력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었죠.
상해전역에서 점차 주도권을 쥐게된 일본은 디르크센 주일독일대사를 통해 화평조건을 전달하고 독일이 중일 양국을 중재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 주요 요구사항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1. 내몽고에 자치정부 수립
2. 만주국 국경으로부터 천진, 북평 남방까지 비무장지대 확대
3. 상해의 비무장지대 확대
4. 항일정책 폐지
5. 일본에 대한 관세율 인하
이런 일본의 요구사항은 중국에게 만주와 화북을 일본에게 넘기라는 것과 같은 말이었죠. 특히 2항의 내용은 중국이 가장 민감하게 생각하는 "만주국의 존재"를 승인하라는 것이었습니다. 11월 5일 트라우만 주중독일대사는 이 요구조건을 장개석에게 전달합니다. 바로 이날이 일본 제10군이 항주만에 상륙하여 중국군의 방어전략에 허를 찌른 날이었죠. 그러나 장개석은 트라우만에게 "전쟁 전 상태로 회복하지 않는한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이에 대해 일본측 히로다 외상은 "앞으로 상황이 더 악화되면 우리의 요구조건 역시 더 가중될 것"이라며 압박을 가합니다.
백숭희, 고축동 등 주요 참모들은 화북과 화동 양 전선에서 전황이 점점 악화되어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진격해 오고 있는 상황에서 일본과의 화의를 적극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건의했으나 장개석은 "여론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11월 12일 상해파견군 산하 제3사단에 의해 상해가 완전히 함락되었고 다음 목표는 상해 서쪽 300km 떨어진 남경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일본 수뇌부는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는데, 당초 출병 명분이 "상해에서 중국군을 몰아내고 거류민을 보호한다"는 것이었기에 이 목적은 달성된 셈이었죠. 일본은 제1주적이 소련이었고 중국과의 전면전은 애초에 상정조차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급히 7개 사단을 추가 증편하여 17개사단에서 24개사단으로 늘어났으나 일본의 역량으로는 중국에게 국지적인 승리는 거둘 수 있어도 광활한 대륙 전체를 장악하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병력도 무기도 물자도 부족한 상황에서 소련과의 전면전까지 발발한다면 일본으로서는 최악의 상황에 직면하는 것이었죠.
따라서 고노에와 히로다를 비롯한 내각은 일단 모든 작전을 중지하고 외교로 해결하자는 신중론이 대세였고 육군 참모차장 오오다중장을 비롯한 군 최고 수뇌부들 역시 병참의 한계와 대소전 대비를 이유로 대체적으로 이에 동조하는 쪽이었습니다. 그러나 작전부장인 시타무라소장 등 강경파들은 남경 공략을 강력히 주장하여 격렬한 의견충돌이 일어납니다. 더욱이 대본영에서 일시 작전 중단을 명령했음에도 승리에 도취된 중지나방면군사령관 마쓰이 대장과 제10군 야나가와 중장은 이를 무시한채 독단적으로 예하 각 부대에 진격명령을 내립니다.
특히 마쓰이의 참모부장인 무토 아키라 대좌는 노구교사변당시 참모본부 작전과장이었던 인물로 노구교사변이 일어나자 "신나는 일이 시작되었다"라고 말했을 정도로 대표적인 꼴통이었는데 군의 상층부는 물론이고 직속상관인 마쓰이한테도 보고하지 않고 제일 먼저 나서서 예하 제16사단에게 당장 남경으로 진격하라고 명령합니다. 다른 나라였다면 그야말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바로 이것이 당시 막장 일본의 모습이었습니다.
아직 본국의 내각과 대본영에서 남경 공략에 대한 결정이 나기도 전인 11월 13일, 중지나파견군 산하 상해파견군과 제10군은 남북에서 서로 경쟁적으로 남경을 향해 레이스를 시작합니다. 또한 항모에서 출격한 해군항공기의 전투기와 폭격기들도 도주하는 중국군 행렬을 폭격하고 남경, 소주, 항주 등 주요 도시와 중국군 진지를 정신없이 두들깁니다.
< 중지나파견군 전투서열(37년 12월) >
○ 중지나파견군(사령관 : 마쓰이 이와네 대장, 참모장 : 쓰가타 오사무 소장) - 상해파견군(아사카 야스히코 친왕) : 제3사단, 제9사단, 제11사단, 제13사단, 제101사단, 시게후지지대, 야전 중포병 제5여단, 야전 중포병2개 독립연대, 전차 제5대대, 비행 제3여단 등 - 제10군(야나가타 헤이스케 중장) : 제6사단, 제16사단, 제18사단, 제114사단, 야전중포병 제6여단, 후비보병 2개단, 쿠니사키지대 등 ○ 병력 : 9개 사단, 2개 독립 보병연대(지대), 2개 야전중포병 여단 등 약 30만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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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대항해 중국군도 태호를 사이에 두고 방어군을 두개로 나누어, 태호 북쪽에 좌군(제 15군, 제 19군, 제 21군)이, 태호 남쪽으로 우군(제 8군, 제 10군, 제 23군)이 전개하고 수백개의 토치카로 구성된 "젝트라인"을 이용해 방어선을 겹겹히 구축합니다. 그러나 중국군 방어부대들은 사전에 치밀한 방어계획도 없이 급히 투입되거나 패잔병을 재편한 것이라 병력도 불충분한데다 상해에서 몰려오는 패주의 물결에 휩쓸려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없었습니다.
복산-소주-오강-가여를 있는 제1선에서 격렬한 전투가 벌어지고 중국군은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토치카를 방패로 삼아 나름대로 교묘하게 저항합니다. 일본군으로서는 이 토치카들을 일일이 격파해야했고 그 과정에서 큰 희생을 치룹니다. 그러나 11월 18일 상숙이 함락되고 19일에는 소주, 가여의 방어선이 무너져 이른바 오복전선(복산-오강을 잇는 선)이 돌파됩니다. 27일에는 태호 북방의 전략 요충지인 무석이 함락되고 28일 상주가 함락됩니다. 남쪽에서는 제10군이 11월 24일 호주를 점령하고 11월 30일에는 광덕에 도달하죠. 일본군의 진격속도는 일일 평균 15~20km에 달할만큼 맹렬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속도를 병참부대가 뒤따를 수가 없었고 따라서 일본군은 진격과정에서 온갖 약탈과 학살, 방화, 강간을 일삼습니다. 남경대학살의 전초나 다름없었죠. 이런 일본군의 행태에 대해 "일본군사사(시사일본어사)"에서는 "일본군이 상해에서 고전한 것에 대한 보복"이라거나 "일본이 중국인을 경멸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일본군의 군기가 문란해진 것에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약탈과 학살이 일상적이었던 전근대와 달리 현대에서는 군의 약탈과 학살행위를 군법으로 엄격하게 금하는 이유는 이런 행위가 군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현지민들의 감정을 악화시킨다는 간접적인 이유와 함께 직접적으로 군의 작전에 지장을 끼치고 무엇보다 군의 기강이 실추되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일본군은 이런 행위를 묵인하거나 되려 권장하기까지 했는데 중국만이 아니라 태평양전선에서도 마찬가지로 가는 곳마다 포로와 현지민들에게 온갖 만행을 저지릅니다. 일본군은 청일전쟁이래 중국군을 소위 "지나군", "당군"이라 부르며 군기가 형편없는 오합지졸이라고 경멸했으나("당나라군대"라는 말이 여기에서 나온 것입니다.) 오히려 그들이야말로 군기가 형편없는 "당나라군대"라 할 수 있죠. 이런 상태는 중국에 장기간 주둔하면서 더욱 군기가 이완되어 하극상의 만연은 물론이고 사병들간의 사적 제재가 묵인되었으며 심지어 술먹고 만취한 병사들의 병영 반란도 종종 일어날 정도로 엉망이 됩니다.
파죽지세로 진격하는 일본군 앞에서 수도 남경마저 위태롭게 되자 장개석 주도로 군사위원회와 참모회의가 개최됩니다. 그러나 이미 더이상 투입가능한 전략 예비대가 없고 상해-남경 사이의 "젝트 라인"조차 와해된 상황에서 남경은 물론 무한과 중경까지도 무방비상태나 다름없었습니다. 게다가 남경은 지형적으로도 방어에 매우 불리했습니다. 백숭희를 비롯한 대부분의 참모들은 현실론을 내세워 "남경은 군사전략상 가치가 없고 방어가 어렵기에 포기하여 주력을 보존해야 한다"고 건의합니다. 그러나 당생지가 싸우지도 않고 수도를 버릴 수는 없으며, 남경 교외에 국부인 손문의 묘가 있다고 주장하자 장개석은 그 말이 옳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당생지에게 "당신과 나 둘중 한사람이 남아서 이곳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자 당생지는 자신이 남아서 목숨 걸고 사수하겠다고 장담하죠.
그리하여 11월 19일 남경의 포기와 중경으로의 천도가 결정되었고 다음날 정식으로 선포됩니다. 또한 26일에는 당생지가 남경위수사령관으로 임명됨과 함께 남경 수비대의 전투편성과 병력배치를 결정하고 각 부대를 요소에 포진시키며 방비를 강화합니다. 그러나 남경은 완전히 혼란에 빠져 온갖 유언비어에다 심지어 쿠테타설까지 유포될 정도였습니다.(동아일보 37년 11월 26일자 기사)
이미 트라우만의 중재를 거절했던 장개석은 상황이 악화되자 다시 12월 2일 트라우만을 만나 화북에 대한 중국의 주권을 존중해준다면 일본의 모든 요구사항을 받아들이겠다고 제의합니다. 그러나 이미 일본은 12월 1일 남경을 공격해도 좋다는 뒤늦은 결정을 내린 상태였습니다. 이때 일본군 선두부대는 남경에서 겨우 100km 떨어진 곳까지 진출한 상태였고 "크리스마스 전까지 남경을 점령하겠다"고 호언하며 남경을 3방향에서 점점 포위망을 압축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승리에 도취된 일본 내각과 군부는 장개석의 제안에 "패배자 주제에 건방지다"라고 일축하였고 답변조차 하지 않았고 남경이 함락된 후인 12월 22일에야 훨씬 가혹한 조건을 내겁니다.
당생지는 "최후의 일인까지 싸우겠다"며 결사항전을 다지며 남경방어를 준비하는데 수비병력은 총 13개 사단에 정규군, 헌병, 병참부대, 경찰, 비정규군, 노무자까지 합해 약 15만명정도였습니다. 또한 장갑병단(단장 두율명) 제3대대 산하의 소수의 경전차도 있었죠. 하지만 대부분이 상해에서 패주해온 패잔병들을 긁어모은 것으로 장비도 빈약한데다 지휘계통도 엉망이었으며 온갖 부대의 잡군들이 마구 뒤섞여 구분조차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오합지졸이나 다름없었죠. 이런 부대로 항공지원을 받으며 중포와 전차까지 보유한 일본군 정예부대에 맞선다는 것은 처음부터 무리였습니다. 그러나 제87사단과 제88사단 등 독일식 사단을 중심으로 수도를 지키겠다는 전의만큼은 매우 높았습니다.
그런데 당생지는 남경 교외의 주택이나 건물을 모조리 불태우고 모든 병력을 남경으로 집중시킨후 남경성을 중심으로 반경 25km이내에 병력을 3겹으로 배치합니다. 남경성은 두께만도 13미터, 높이가 13~25미터, 둘레는 35km에 달했고 성내 면적은 약 70제곱킬로미터였습니다. 그는 남경 주변의 방어에 유리한 거점을 활용해 지연전술을 펼치며 병참선이 끊긴 일본군을 최대한 괴롭힐 수도 있었음에도 단지 남경성의 견고함만 믿고 진지전만 고수했는데 이는 그가 현대전에 매우 어두운 무능한 인물이라는 것이었죠. 어차피 전근대적인 성곽은 아무리 견고해도 중포와 전차, 항공폭격에 매우 취약했습니다. 게다가 배수의 진이라도 칠 생각이었는지 "남경과 운명을 함께 하겠다"라면서 양자강에 놓인 다리를 파괴하고 도로를 봉쇄하고 선착장의 배도 모조리 침몰시키는 등 모든 퇴로를 막아 스스로 고립무원의 길을 자초하죠.
더욱이 "결사 항전"만 내세운채 성안의 민간인들은 물론 성밖에서 성안으로 들어오는 피난민들에 대해서도 아무런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습니다. 이 점은 장개석도 마찬가지였죠. 당시 남경의 인구는 피난민들까지 약 100만에 달했으나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한채 완전히 무방비상태로 노출된 것이죠. 자국민은 방치한 반면 외국인들에 대해서는 8일까지 퇴거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때문에 "남경대학살"을 쓴 아이리스 장은 장개석과 당생지 역시 일본군의 남경대학살을 사실상 방조한 것이나 다름없다고 비난합니다. 물론 그 시절에는 영, 미 등 소수의 서구 민주국가를 제외하고는 민간인의 안전에 대한 개념자체가 없었다는 점에서(독일, 소련, 일본은 물론이고 우리만 해도 6.25때 이승만 역시 혼자 열차타고 부산으로 도주하고 서울시민들은 어찌되건 신경도 쓰지 않고 심지어 한강교까지 폭파시켜 버렸죠.) 현대의 관점에서 이들을 비난할 수는 없다해도 어쨌든 도의적인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없겠죠.
수비대의 배치는 제 72군의 제 88사단이 수서문, 중화문, 무정문, 우화대의 방어를, 제 78군 제 36사단이 현무문, 홍산, 막부산, 읍강문의 수비를 맡았습니다. 본대가 광화문, 중산문, 태평문, 자금산, 기린문, 천보성의 수비를 맡고, 제 71군 제 87사단이 통제문, 광화문 일대를, 헌병대가 정회문, 한중문, 청량산을 맡았습니다. 또한 상해방면에서 후퇴해온 병력에다 추가 증원된 부대를 재편하여 제 74군이 우수산에서 순화까지, 제 66군, 제 83군이 탕산 동쪽과 서쪽 양측에 배치되었습니다.
< 남경보위전 중국 수비군 전투서열 > ○ 사령관 : 당생지, 부사령관 : 나탁영
- 제2군(제41사, 제48사), 제66군(제159사, 제160사), 제71군(87사), 제72군(88사), 제74군(제51사,
제58사), 제78군(제36사), 제83군(제154사, 제156사)
- 교도총대(제103사, 제112사), 헌병대(제2연대, 제10연대, 교도연대), 장갑병단 제3대대, 고사포부대 등등
○ 총병력 : 7개군 13개 사단 10만~15만명, 전차17량(주로 T-26, 르노FT, CV33같은 경전차)
※ 당시, 중국군에 대한 정확한 데이터는 없으며 자료마다 천차만별이라 단지 참고만 가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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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6일 드디어 일본군이 남경성 교외까지 진출하여 중국군 외곽 방어선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집니다. 또한 양자강을 거슬러온 해군 함정들이 남경의 배후를 차단하고 해군항공대가 남경 시가지를 폭격하자 중국 공군기들이 이에 맞서 쌍방 수십대에 달하는 대규모 공중전이 벌어졌고 중국 해군의 잔존함들도 격렬하게 저항합니다. 이 과정에서 일본기들의 오폭으로 석유운반선을 호위중이던 미국 포함 "파나이호"가 격침되어 2명이 사망하고 48명이 중경상을 입었으며 이들을 구조하려던 영국 경비정 "레이디버드"도 반파됩니다. 이에 대해 영미 양국 정부가 강력히 항의하자 일본은 배상하기로 적당히 무마합니다.
일본기의 폭격으로 격침된 미해군 포함 "파나이호"(만재배수량 470톤). 일부에서는 일본이 미국을 시험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도발한 것이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즉, 중일전쟁에 대해 열강들이 간섭할 의도가 있는지 말이죠. 그러나 당시 루즈벨트행정부는 일본과의 마찰을 우려하여 일본 정부의 사과와 배상금을 받는 선에서 적당히 타협합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mig17/150033795166-
12월 7일 마쓰이 대장은 중국군에게 10일 오전을 기한으로 무조건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당생지는 이를 거부하고 모든 성문을 폐쇄시킵니다. 일본군은 총 4개사단(제6사단, 제9사단, 제16사단, 제114사단) 10만의 병력으로 남경을 삼면에서 포위하였고 제10군의 쿠니사키지대가 양자강을 건너 남경의 퇴로를 차단하기 위해 북상하고 있었습니다. 이미 주요 정부 부처들과 군사위원회는 한구로 옮긴 상태였으나 장개석은 포위되기 직전까지 남경에 남아 있다가 결국 이날 노산으로 탈출합니다.
12월 10일 오후 1시. 일본군은 전차와 중포를 앞세워 남경성의 각 성문에 대해 총공격을 개시합니다. 제6사단과 제114사단이 중화문을, 제9사단이 광화문을, 제16사단이 중산문과 태평문을 공격합니다. 여기에 대해 중국군의 저항도 맹렬하였고 특히 손문의 묘가 있는 자금산은 2일에 걸쳐 쌍방의 백병전이 벌어질만큼 혈전이 벌어집니다. 전투는 외곽 성벽을 사이에 두고 한동안 교착상태가 되었으나 12일 오후 제 9사단 36연대 공병대가 광화문의 일부를 폭파시키고 1개 대대가 남경 성벽을 돌파하는데 성공합니다. 이것을 본 종군기자가 "남경공략"이라고 속보를 보내어 NHK가 그대로 방송하여 일본 거리는 그야말로 축제분위기가 되었습니다만 실제로는 그때까지도 남경은 대혈전중이었고 간신히 광화문을 돌파한 부대조차도 중국군의 저항으로 좀처럼 성내로 진입하지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12일 저녁이 되면서 남경 최대 요새였던 자금산이 함락되고 요지들이 줄줄이 떨어지자 광화문, 중화문, 중산문을 돌파해 돌입한 일본군과 중국 수비대간의 시가전이 벌어집니다. 또한 쿠니사키지대가 남경에서 양자강 맞은편에 있는 통구를 점령하여 중국군의 퇴로를 완전히 차단합니다.
오후 8시 상황이 절망적이 되자 당생지는 "본대는 포위망을 뚫고, 나머지는 양자강을 도강해 퇴각하라"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이미 퇴로는 차단되었고 그의 명령 역시 전투중인 부대에 제대로 전달조차 되지 않은 상태에서 당생지는 소수의 참모들만 대동한채 민간인복장으로 갈아입고 탈출합니다. 그러나 상세한 후퇴계획이 각 부대에 제대로 전달되지도 않고 또 "무단 후퇴 금지"의 명령도 그대로 유효한 상태에서 "남경 사수"를 외치던 지휘관부터 도주해 버리자 그때까지 잘 싸우고 있던 장병들이 동요하고 사기가 급격히 떨어집니다.
13일 중국군이 후퇴하는 것을 감지한 일본군이 성내로 돌입합니다. 오후 4시. 중산문을 통해 들어온 제16사단이 국민 정부 청사를 점령하고 일장기를 내걸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남경함락의 순간이었습니다.
중국군의 조직적인 저항이 붕괴되자 잔존부대의 일부는 "비무장"으로 선포되어 있던 외국인 조계지역로 도망치고 대다수는 매탄항의 선착장으로 밀려듭니다. 수십만에 달하는 민간인들과 병사들에 의해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가 되지만 뒤로는 일본군이 밀려오고 포탄이 피난민들 위로 떨어집니다. 그들은 포탄과 기관총세례를 받으면서 양자강을 뗏목이나 또는 헤엄쳐서라도 탈출하려 하지만 그 앞에는 이미 우회해 온 일본군의 기관총이 이들에게 불을 뿜자 양자강은 수만의 시체들로 붉게 물들게 됩니다. 또한 일부 중국군은 파괴된 잔해속에 숨어 산발적인 저항으로 일본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며 남경전투는 14일까지 지속됩니다.
영화 "남경, 남경"의 한장면. 당생지의 후퇴명령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휘계통이 붕괴되자 병사들은 개별적으로 탈출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성문에는 이들의 무단 도주를 막기 위해 배치된 독전대가 있었고 같은 전우들끼리 유혈충돌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습니다.
탈출에 성공하는 것은 역으로 동쪽으로 후퇴했던 2개연대를 비롯해 2만명 미만였고 나머지는 학살에 미친 일본군들에게 끝까지 쫓겨다니며 사살당하였습니다. 일본군은 심지어 중립구역인 조계까지 포위한후 일일히 색출해 처형하였으며 무려 7주동안 남경 시내에서 포로와 민간인 30만명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지릅니다. 이는 근세시대이래 한 도시에서 벌어진 가장 큰 학살극이었습니다.
남경시내에 있는 "남경대도살 기념관". 당시 피해자들의 모습을 재현한 조각상들을 비롯해 희생자들의 이름과 당시 만행을 보여주는 영상들이 있으며 입장료는 무료라고 합니다. 언젠가 한번 가보고 싶군요. 참고로 기념관에는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고 합니다.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 "과거의 일을 잊지 않으면 미래의 스승이 된다." 왠지 공산중국이 티벳이나 신강 위구르에서 저지른 만행이 떠오르는군요... 그런 의미였나.
※ 사진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3일간의 남경전투에서 중국군 병사들은 완전히 포위된 상태에서 장비의 빈약함과 통신의 마비로 인한 체계적인 저항이 매우 어려웠음에도 그 용전은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쉽게 낙승하리라 예상했던 일본군은 압도적인 우세에도 불구하고 고전을 면치 못하였죠. 중국군은 전투에서 약 8만명의 사상자를 내고 2만 가까이가 포로가 되었으나 이들 대부분이 살해되었습니다. 물론 민간인들의 피해는 더욱 커 30만에 달했죠. 반면 일본측은 약 1만여명의 사상자를 냅니다.
더욱이 일본군은 남경을 함락시킨후 그 여세를 몰아 무방비상태에 있던 내륙으로 단숨에 진격할 수 있음에도 무익한 학살과 약탈에만 광분한 나머지 후퇴한 중국군이 재편할 수 있는 여유를 주는 어리석음을 범합니다. 노구교사변 당시 스기야마 육군 참모총장은 "중국따위 3개월이면 끝장낸다"라고 호언했으나 이미 5개월이 넘었고 곧 끝날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 달리 본격적인 전쟁은 이제 시작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영화 "난징의 굿맨". 당시 일본군의 만행을 막기 위해 독일 지멘스사 중국지사장이었던 존 라베의 주도로 조계내에 "안전구역"을 만들어 20만명이 넘는 민간인들을 수용하여 이들의 목숨을 구할 수 있었습니다. 따라서 "중국판 쉰들러리스트"라고 불리고 있죠. 이 영화를 비롯해 "남경, 남경"이나 "진링의 13소녀들"과 같이 최근에도 남경대학살을 다룬 영화들이 잇달아 개봉하여 당시 일본의 만행을 비판하고 있죠.
남경함락후 4일뒤인 12월 17일 승전 퍼레이드를 벌이는 일본군. 임진왜란 당시 한양을 점령한 고니시가 그러했듯 그들도 전쟁에 다 이겼다고 생각했을지 모르나 진짜 전쟁은 막 시작되었을 뿐이었습니다.
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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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배달민족 작성시간 13.07.29 뭐 나폴레옹도 모스크바를 점령하면 이길것이라 생각한거랑 비슷하다고 봐야하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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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프리드리히대공 작성시간 13.07.29 남경과 상해 함락이라니... 중국인이 아닌 제가 봐도 기분이 안 좋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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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타메를랑 작성시간 13.07.29 분열된 중국을 상대로도 이렇게 애를 먹었다면, 중국이 굳건하게 통일된 상태였다면 일본은 아예 중국을 넘볼 엄두조차 내지 못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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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열혈청년 작성시간 13.07.29 전술 전략에 대해 잘 알지 못하는 미련한 자들이 군을 지휘하니 망할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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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가에서 작성시간 13.07.29 밀어붙인 일본도 대단한 놈들이네요..
중국의 지도부가 많이 안습일따름이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