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의 흐름이라는 측면에서 봤을때, 중일전쟁은 400여년전에 있었던 임진왜란과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짧은 기간의 일본군의 우세, 그리고 금새 공세종말점에 다다른후 전선이 교착화되고 장기간의 지루한 소모전이 반복되었다는 것, 어느쪽도 상대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고 일본군은 병력과 물자 부족에 허덕이며 점과 선으로 근근히 점령지를 유지하면서 점차 열세로 몰렸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국에게 있어 중일전쟁은 임진왜란 이상으로 힘겨운 전쟁이었습니다. 통상 중일전쟁의 1기라 부르는 "노구교사변이래 무한 함락까지" 1년 반정도의 시간동안 많은 영토와 병력을 상실하고 후퇴를 거듭하였고 중국 전토(3,204,588㎢, 티벳과 만주 제외)의 47%(1,515,696㎢)에 달하는 영토를 상실하였습니다. 특히 북평과 천진, 상해, 남경, 무한, 광주 등 중국이 상실한 지역들의 대도시들은 중국에서 가장 근대화된 정치, 경제, 공업의 중심지였습니다. 게다가 관세수입(국민정부의 최대 수입원이었던)의 91%, 공업능력의 94%, 전력생산의 96%, 방직공업의 75%와 함께 총인구의 40%가 일본의 손에 떨어졌습니다. 특히 철도의 84%와 동부지역 해안가에 있는 주요항구의 상실은 해외 의존도가 높은 중국에게는 치명적이었습니다.
아직 점령되지 않은 서부지역은 중국에서도 가장 낙후되고 빈곤한 산악 오지로, 천연자원은 풍부했지만 거의 개발되어 있지 않았고 근대공업이나 발전시설도 미미했습니다. 대부분의 지역에서 땅은 척박한 반면 인구는 과잉상태였고 많은 농민들이 적은 농토에 매달려 근근히 농사를 지으며 기근을 면하고 있었습니다.
병력 손실도 엄청났는데, 1938년 12월 26일 일본 대본영 육군부가 발표한 전과에 따르면 중국군의 피해는 전사 81만 3300명(부상, 포로까지 포함하여 200만 이상), 군함 19척 격침 및 3척 포획, 공군기 격추 1503기에 달했으며 노획물은 소총 20만 8천정, 기관총 1만1000정, 청령도 1만2000개, 대포 680문, 폭격포 1200문, 전차 및 트럭 560량, 소총탄 1360만발, 포탄 1만7000발, 박격포탄 171만8000발이었습니다.
※ 물론 이것은 당시 일본군이 선전의도로 일방적으로 주장한 것이기에 신뢰성은 상당히 의심스러우며 당시 중국 국방부장이었던 하응흠의 회고록에서는 38년말까지 중국군의 전사자는 37만 4천명 정도였다고 기술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그야말로 대재앙에 가까운 것으로, 어느 나라도 이정도의 손실을 입은 상태에서 압도적인 적의 공격을 장기간 버텨낸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입니다. 흔히 서방측 학자들은 독소전쟁당시 소련이 독일군의 공격에 대해 최초 6개월동안에만도 상비군의 2/3를 상실하고 가장 근대화된 서부지역과 주요 광공업지대의 75%, 철도망의 1/3을 빼앗겼음에도 예상을 엎고 독일의 공격을 막아냈고 나아가 반격하여 최종적인 승리를 거두었다는 사실에 대해 소련의 역량과 인내심에 대한 경이로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의 격차가 소련과 독일의 격차에 비해 훨씬 컸다는 것과 소련은 중국과 비교도 안될만큼 공업화되고 중앙집권화된 국가였다는 것, 특히 영, 미측의 막대한 물적지원과 독일에 대한 양면작전을 강요함으로서 독일의 역량이 분산되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사실상 완전히 고립된 상태에서 적은 자원과 원조에만 매달려 홀로 싸워야 했던 중국이 무한함락이후에도 6년을 더 싸웠다는 것이야말로 소련 이상으로 경이로운 것입니다. 러시아가 2차대전에 있어서 독소전쟁의 비중과 소련인민의 희생과 투지를 강조하지만 만약 소련이 중국과 같은 상황(서부지역 전체를 빼앗긴채 시베리아만 가지고 싸웠다면)에 처했어도 과연 버티어냈을 것이라고 어느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분명 중국은 여전히 싸울 능력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무한함락전인 38년 9월 6일 중지나방면군 사령관 하타 슌로쿠는 대본영에 제출한 '무한, 광주 작전후의 정세판단'에서 "개전이래 중국군은 수차례의 타격에도 불구하고 중국군의 주력은 여전히 존재하고 있으며 국민정부의 통제력도 유지되어 장기항전을 기도하고 있다. 반면 아군은 이미 전진한계점에 직면하였고 경제적으로도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라 전장을 확대하기보다 정략과 모략이 필요하다."라고 주장합니다. 무한이 함락되면 중국은 항복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중국군이 무너지기는 커녕 대규모 반격의 가능성까지 있다는 사실을 일본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죠.
심지어 2년후인 41년 2월에 루즈벨트의 특사로 중경을 방문한 큐리에는 "현재의 중국군은 37년보다 훨씬 강력해졌으며 병력과 장비, 훈련상태도 양호하고 사기도 높아 일본의 공격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라고 보고하였습니다. 반면 중국 주둔 일본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사기와 전투력이 명확하게 약해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당시 일본은 손쉽게 끝나리라 생각했던 전쟁이 장기화되고 점령지가 확대됨에 따라 병력도 대폭 증강되어 개전전 17개 사단 30만명에서 39년에는 41개 사단 150만명으로 늘어났고 이중 중국전선에 배치된 병력이 25개사단 100만명에 달했습니다.(이와 별도로 만주에는 9개사단이 배치되어 소련군과 대치) 이런 양적 팽창에 반비례하여 훈련도와 군기가 형편없이 떨어집니다. 특히 장교와 부사관의 양성은 장시간을 필요로 하는데 그 속도를 따라갈 수 있을리 없었죠.
따라서 중국전선에서 일본군의 공세는 점점 둔화되어, 37년 7월부터 12월까지 일일 평균 진격속도가 15km였던 것이 38년에는 8km, 39년에는 3.2km, 40년에는 1.6km로 떨어져 사실상 교착상태가 됩니다. 쌍방은 국지적이고 소모적인 전투를 반복했으나 전선은 큰 변화가 없었으며 일본군은 월등히 우세한 전력을 가지고도 매번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한채 사상자와 물자 소모만 늘어납니다.
38년말 중국전선의 상황. 붉은 실선 안쪽이 37년 7월~12월사이의 일본군 점령지역이며 파란 실선 안쪽이 38년 1월 ~12월까지의 일본군 점령지역. 일본군은 최대 인구 밀집지역과 곡창지구, 주요 철도의 대부분을 장악했으나 병력을 대대적으로 증강했음에도 여전히 병력이 부족하여 대도시와 철도에 대해서만 근근히 유지함으로서 대부분의 농촌지역에서는 여전히 국민정부의 통제력이 미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군비지출은 36년에 313백만달러에서 37년에는 940백만달러, 38년에는 무려 1,740백만달러로 급격하게 증가하였는데 이런 부담은 일본의 경제능력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덕분에 군수산업은 비약적으로 발전했으나 전적으로 민수경제의 철저한 희생아래 이루어진 것이며 정상적인 경제발전에 필요한 기초인프라까지 거덜냄으로서 군수산업의 발전은 일시적인 것일뿐 언제 무너질지 모르는 사상누각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일본으로서는 러일전쟁때와도 비교가 되지 않을만큼 심각한 부담이었습니다. 당초 중국과의 개전을 결정했을때 이렇게 수렁에 빠지게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죠. 당시 일본이 중국군을 극단적으로 경시하고 "길어야 1년안에 끝날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었던 것은 중국 내전기의 군벌군대의 허약함에 대한 인식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이 시기만 해도 중국내 대부분의 군벌군대란 농토에서 쫓겨난 농민들이나 실업자들이 단지 생계유지를 위해 가장 쉽게 선택한 길이었습니다. 게다가 많은 군인들이 원래 비적이었고 전쟁에 패하며 군대가 해산되면 다시 비적으로 돌아갔습니다. 따라서 규율도 형편없었고 방화, 살인, 약탈, 강간은 비일비재했습니다. 1925년 7월 7일 군사위원회에서 장개석은 군벌군대에 대해 다음과 같이 비판하였습니다. "군대의 숫자는 서류와 실제가 다르며 총의 숫자도 다르다. 대오도 없고 계통도 문란하며 상벌에도 원칙이 없다. 멋대로 세금을 거두고 급여를 착복하며 아편을 밀매하고 밀수를 한다. 인민들은 군대를 토비보다 무서워 한다." 군벌시대의 군대는 근대적인 전문군인이 아니라 단지 적은 월급에 몸을 판 봉건시대의 "용병"이었습니다. 전투력 자체가 아주 형편없었기에 전투가 매우 빈번하게 일어났음에도 거의 형식적이었고 전투에 투입된 인원수는 많아도 실제 사상자는 아주 미미하였습니다. 군벌군대간의 전투를 본 서구인들은 "그들은 하늘을 향해 총을 쏘았고 마치 연습하는 것같았다"라고 평하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본연의 업무인 전투보다 전투가 끝난후에 양민들에게 저지르는 만행과 약탈에 더 적극적이었습니다.
20년대 대표적인 군벌중 하나였던 장종창의 산동군. 장종창의 부대는 특히 규율이 문란하고 오합지졸이기로 유명했습니다.
이런 중국군의 실상은 장개석의 북벌이후 30년대 초반까지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특히 북방출신군대들일수록 남방에 비해 훨씬 형편없었습니다. 29년 9월부터 11월까지 진행되었던 중소분쟁에서 장학량의 동북군은 소련군에게 무기력할만큼 일방적으로 패퇴하였습니다. 소련군의 사상자가 800여명정도였던 것에 비해 동북군은 여단장 1명이 전사한 것을 비롯해 4천명의 사상자와 7천명이 포로가 되었습니다. 이후 만주사변에서 장학량이 제대로 싸우는 시늉도 하지 않고 물러선 것도 동북군이 숫자만 많을뿐 제대로 전투력을 갖춘 부대가 없는데다 저항의식도 낮아 현실적으로 일본군에게 대항하는게 불가능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약 중국군이 37년에도 이런 군대로 싸워야 했다면 일본군의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을 것이며 일본의 예상대로 1년안에 중국 전토를 내주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30년대 중반부터 장개석은 독일 군사고문단의 적극적인 협조를 받아 우선 중앙군 30개 사단에 대해서 군을 근대적으로 개편합니다. 이들은 일급 부대로서 잘 훈련되어 있었고 특히 8개의 독일식 사단은 비록 화력에서는 열세해도 병사 개개인의 역량에서는 일본군과 거의 대등할 정도였습니다. 노구교사변 당시 참모본부 작전과장이었던 이시하라 간지는 만주사변을 일으킨 장본인임에도 중국과의 전면전을 강력하게 반대하고 "과거의 중국군이 아니다. 그들은 근대적인 장비를 갖추고 근대전에 대비하고 있다. 그들을 이디오피아의 부족군대와 동일시한다면 큰 오산이다"라고 주장하였으며, 30년대 중반 중국을 방문했던 에드가 스노우 역시 그의 저서인 "중국의 붉은 별"에서 중국군의 정예부대는 군벌군대와 달리 근대전에 익숙하며 "더이상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군대가 만들어질 날도 머지 않았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실제로 중일전쟁 초반 일본군은 화북전선에서 송철원, 염석산, 한복구, 부작의 등 지방군벌군을 상대로는 손쉽게 승리하였으나, 장개석의 중앙군이 중심이 된 화중전선에서는 고전을 면치 못했고 피로서 길을 씻는다고 할만큼 막대한 사상자를 냈습니다. 특히 태아장의 승리나 서주, 무한회전이 대표적으로, 일본군은 군벌군에 대해서는 "잡군"이라며 무시한 반면 중앙군에 대해서는 훈련과 장비가 우수하고 항일의식도 매우 높아 결코 경시할 수 없었습니다. 주요 전투에서 핵심은 항상 중앙군이었으며 때때로 사기와 전의가 매우 낮은 군벌군의 무단 도주를 막기 위해서 독전대가 투입되어 전투를 강요하지 않으면 안되기도 하였습니다. 또한가지, 중국의 항전능력을 지탱해준 것은 바로 "법폐"였습니다. 39년 장개석은 "만약 일본의 침략이 폐제개혁 이전에 시작되었다면 우리는 훨씬 빨리 패망하거나 혹은 치욕을 참고 화평을 구걸해야 했을 것이다. 법폐제도가 존재한 덕분에 금융과 경제적 질서를 유지하고 장기 항전의 기초를 다질 수 있었다"라고 말하였습니다.15 35년 11월 전격적으로 단행한 "폐제개혁"으로 그동안 마구 난립했던 수많은 지폐를 통일시켰고 근대국가로서의 경제공동체와 통일된 시장을 이룩할 수 있었습니다. 중국 시장에서 법폐는 신속하게 전파되어 37년 7월까지 중국내 화폐유통액의 80%를 차지할만큼 안정적인 가치를 유지합니다. 덕분에 일본의 "엔블록공세"는 실패할 수 밖에 없었고 일본은 "중국의 폐제개혁은 노골적인 배일행위다"라고 강력하게 반발하기도 하였습니다. 전쟁기간중에도 일본은 중국 경제 붕괴를 위해 엔화를 사용하고 새로운 화폐인 "연은권"을 발행하기도 했으나 도리어 엔화의 가치만 폭락했으며 법폐를 붕괴시키는데는 상당히 오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되어야 했습니다. 국민정부는 영, 미측의 지원을 받아 일본의 경제공세에 적절히 대응했으며 심지어 일본조차 점령지에서 법폐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어 아이러니하게도 그들 자신이 법폐의 가치를 어느 정도 유지시켜주기도 하였습니다. 45년 중국 중앙은행에서 발행한 1000원권 법폐. 장개석정권은 법폐(法幣=법정화폐)발행을 통해 중국 경제를 통일시켰고 진정한 의미에서의 "통일"에 거의 근접합니다. 비록 중일전쟁의 발발과 전쟁의 장기화로 그간의 성과가 상당부분 퇴색될 수 밖에 없었으나 중국이 장기간의 항전을 할 수 있는 경제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duck1044/70041982222 일본은 뒤늦게서야 중국의 역량이 만만치 않다는 것과 전쟁의 조기종전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속전속결전략 대신 장기전략으로 바꾸게 됩니다. 38년 12월 6일 일본 육군부에서 하달한 향후 대중전략방침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조급함을 경계하고 치안회복을 제1목표로 삼아 특히 중대한 필요가 발생하지 않는한 점령지역의 확대를 꾀하지 않으며 점령지역내의 항일세력의 궤멸에 중점을 둔다." 이로서 중일전쟁은 두번째 단계로 접어들었다고 할 수 있는데, 장개석이 중경으로 천도한 38년 12월부터 태평양전쟁이 발발하는 41년 12월까지 국내외적으로 많은 사건이 일어납니다.
가장 중요한 사건은 바로 유럽에서 2차대전이 발발했다는 것입니다. 39년 9월 1일, 나치독일은 폴란드를 침공하였고 "몰로토프-리벤트로프 각서"에 따라 17일에는 동쪽에서 소련군이 침공하여 폴란드를 분할하였습니다. 9월 3일 영, 프는 독일에 선전포고를 합니다. 그리고 40년 5월 10일 드디어 독일은 서유럽을 침공하여 6주만에 일방적인 승리를 거두며 프랑스 전역을 석권하였습니다. 9월 27일 베를린에서는 독, 이, 일 삼국의 군사동맹이 체결되었습니다. 유럽에서의 전쟁은 중국에게는 결코 반가운 상황이 아니었는데, 이로 인해 전세계의 이목은 모두 유럽으로 집중되었고 극동에서 일어나는 전쟁은 부차적인 것이 되었습니다. 당초 장개석의 대일전략은 국력이 열세한 중국이 단독으로 장기항전을 하는 것은 불가능한 이상 서구 열강과의 동맹을 통해 승리를 거두겠다는 것이었고, 서구 열강들이 중국에 막대한 투자를 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때문에라도 일본의 독주를 언제까지고 방관하지만을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36년말까지 서구 열강의 대중 투자총액은 총 18억달러에 달했는데 이중 영국이 10억 8천만달러로 가장 많았고 다음으로 미국이 2억2천만달러, 프랑스가 1억8천만달러, 독일이 1억4천만달러였습니다. 이것은 일본의 대중국 투자액을 능가하는 것이었고 만주사변이래 중국내 일본제품에 대한 보이콧으로 수출입에서도 일본의 비중은 영국과 미국보다 월등히 열세했습니다. 그러나 중일전쟁은 서구 열강의 대중무역에 극심한 타격을 입혔는데, 중국 최대의 무역항인 상해의 37년 6월 수출입규모는 3천 1백만달러에서 38년에는 월평균 수출입규모가 겨우 830만달러로 격감하였습니다. 게다가 일본의 중국 해안선과 장강에 대한 해상 통제와 점령지에서의 배타적인 경제 독점은 서구 열강의 강력한 반발을 초래하였습니다. 게다가 일본의 무차별 공중폭격으로 인한 재중 외국인의 인명 피해와 열강 조계에 대한 경제 봉쇄, 각종 재산침해 등으로 서구열강과 일본간의 갈등은 점점 악화되고 있었습니다. ※ 39년 11월 4일 "제1차 미일국교조정 회담"에서도 미국측은 일본의 폭격으로 미국인 사망자 4명, 부상 50명에 달하고 있으며 203건의 재산침해와 모욕이 발생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일본의 경제독점과 무역제한으로 미국은 막대한 손실을 입었으며 중국에 대한 미국의 조약상 권리가 심각하게 침해되었음을 지적하면서 "이는 일본이 아시아대륙에 대한 지배권을 확립하고 배타적인 경제블록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비난합니다. 한편, 전쟁이 장기화됨에 따라 일본의 대미의존도는 점점 심화되어 각종 무기를 비롯해 군수자재의 절반이상이 미국에서 수입하고 원유, 기계류, 철강석 등 전략물자가 전체수입의 40%를 차지하고 있어 만약 미국이 일본에 대한 수출제재를 단행할 경우 일본으로서는 심각한 타격을 입을 수 밖에 없었죠. 따라서 서구열강들이 일본에 대해 적극적인 경제제재를 단행한다면 일본으로서는 손을 들 수 밖에 없는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이런 상황이 유럽에서 전쟁이 발발하자 당장 180도 뒤집어 졌는데, 당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영, 프는 극동에서 일본과 대립하기보다 독일에 맞서는 것이 최우선적인 과제가 되었고 따라서 일단 일본에 굴복하여 중국에서 물러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장개석은 믿을 구석이 소련밖에 없었는데, 마침 독일과 불가침조약을 체결하자 본격적으로 일본과의 전쟁에 개입할 것을 기대합니다. 그러나 그의 기대와 달리 39년 5월 노몬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스탈린은 일본과 정전협정을 체결하였고 41년 4월 13일에는 모스크바에서 일소중립조약이 체결됩니다. 불가침조약에도 불구하고 나치독일을 도무지 신뢰할 수 없었던 스탈린은 모든 전력을 독일에 대항하는데 집중하였고 따라서 극동에 대해서는 현상유지에 급급할 수 밖에 없었죠. 게다가 41년 6월 독일의 바바롯사작전이 개시되자 소련의 대중원조마저 중단되었고 소련의 원조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던 중국으로서는 치명적이었습니다. 만약 나치독일의 위협이 없고 소련이 중국과 연합하여 만주를 침공했다면 국력에서 1/4에 불과한 일본으로서는 속수무책이었을 것입니다. 만주는 물론이고 한반도까지 단숨에 무너져 본토마저 위협받았을지도 모릅니다. 또한 39년초부터 유럽에서 전쟁의 위기가 고조됨에 따라 영, 프, 독 등 서구 열강들은 자국군을 무장시키는데 급급하였고 따라서 이들 국가로부터의 무기 수입과 원조가 감소합니다. 게다가 영국은 일본의 압력에 굴복하여 홍콩과 버마루트를 일시적으로 폐쇄하거나 무단으로 물자를 압류하기도 했습니다. 미국은 일본의 전쟁 수행 능력에 가장 큰 영향을 주고 있었지만 복잡한 이해관계와 중립 노선의 고수로 일본에 대한 견제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았습니다. 즉, 서구 열강은 일본을 제재하고 간섭하기보다는 오히려 일본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유화정책으로 일관함으로서 장개석을 실망시켰습니다. 미일의 관계가 본격적으로 악화되는 것은 좀 더 시간이 지나야 했습니다. 비록 점차적으로 피폐해지기 시작하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중국의 항전능력이 비로소 약화되기 시작하는 것은 태평양전쟁의 발발이후였습니다. 독소전쟁의 발발로 소련의 원조가 중단되고 일본이 홍콩과 버마를 침공하여 중국이 외부와 연결되는 통로가 완전히 차단되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무한 함락 이전의 수세일변도였던 중국의 전략은 교착상태를 활용해 군을 재편성하였고 점령지에 대한 탈환을 위해 적극적인 반격을 거듭하였습니다. 특히 39년말부터 40년초까지 전개된 동계공세는 전 전선에 걸쳐 100만명이 투입되어 최대의 반격이었습니다. 물론 일본군은 철도를 통해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반면 중국군은 교통과 통신의 열악함으로 각 전구간의 협동작전이 제한될 수 밖에 없어 중국군의 반격은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한 것처럼 보였으나, 이로 인해 일본군의 통제력은 급격히 악화되었고 주요 대도시를 제외한 대부분의 농촌지역은 여전히 국민정부군의 강력한 통제하에 성정부부터 말단행정조직까지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따라서 왕정위가 임명한 현장이 현성에 부임조차 할 수 없는 경우도 많았습니다. 일본군은 단지 지도상으로만 광대한 공간을 점령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뿐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지역은 일본군이 대거 주둔하는 대도시와 철도에만 국한되어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소수의 병력을 농촌 지역에 분산 배치할 경우 중국군의 기습을 받아 섬멸되거나 큰 피해를 입기 일쑤였습니다. 그럼에도 그동안 대부분의 서적들, 주로 대륙쪽 시각을 무비판적으로 답습하고 있는 좌파계열의 서적들은 이 시기의 국민정부의 항전노력에 대해 소극적인 자세로만 일관했다는 식으로 기술하고 지휘관들의 무능함과 부패함 등 부정적인 부분에 대해서만 집중적으로 부각시켰습니다. 반면 공산군의 유격전에 대해서 매우 높이 평가하고 마치 그들이 전쟁의 대부분을 전담한 것처럼 기술하였습니다.(이케다 마코토의 "중국현대혁명사"에서도 "공산군은 일본군 및 괴뢰군의 80%이상을 상대했으며 해방구가 항전의 주전장이었다"라고 식으로 중공의 역할만 일방적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지극히 편파적인 것이며 사실을 왜곡한 것일뿐입니다. 또한, 모택동이 "인민은 물이고 홍군은 물고기다"라고 말하며 민중의 광범위한 유격전을 전개한 반면 장개석은 인민의 역량을 두려워하여 이들을 무장시키기를 거부했다라는 주장 역시 왜곡된 것입니다. 38년 11월 28일 호남성 남악에서 개최된 제1차 군사회의에서 장개석은 유격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전체 병력의 1/3을 적 후방에 대한 유격전에 투입한다"라고 말합니다. 특히 광동성을 담당하고 있는 장발규의 제4전구와 우학충의 노소전구(강소성과 산동성), 노종린의 기찰전구(화북지구)는 유격전구로 지정하였는데, 이들의 주임무는 적 후방에 대한 적극적인 유격전의 전개와 광범위한 유격 근거지의 건설이었습니다. 6차례에 걸친 초공전에서 보여준 공산군의 유격전술에 주목한 장개석은 유격간부훈련과정을 신설하면서 연안의 공산정부에 교관의 파견을 요청하였고 제8로군 참모장인 섭검영을 비롯한 30명의 교관이 파견됩니다. 이들은 군사위원회 직속으로 배치되어 탕은백이 주임을 맡고 섭검영이 부주임을 맡았습니다. 이어서 장개석이 직접 주임을 맡았고 백숭희, 진성이 부주임, 탕은백이 교육장, 섭검영이 부교육장으로 임명됩니다. 각 전구 대대장급 이상과 전구사령부 참모들중에서 전투경험이 비교적 풍부하고 전술지식을 갖춘 중급장교들을 대상으로 우선 선발하였고 3개월 과정으로 유격전술과 폭파기술 등을 배웁니다. 섭검영의 공산당 대표단은 국공간의 갈등이 점차 심화되면서 40년 2월 연안으로 철수하였으나 국민정부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간부들을 교육시켜 배출합니다. 38년 12월 당시에 이미 국민정부군의 유격부대는 80만명을 넘어섰으며 이는 공산군의 3배가 넘는 숫자였습니다. 이 시기의 중국내부의 항쟁, 즉 국민정부군과 공산군간의 갈등과 알력 역시 기 서적들이 주장하는 것과 같이 그렇게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41년 1월에 있었던 환남사변은 최악의 사건으로 국공합작이 거의 결렬될뻔하기도 했지만, 대내외적인 여론의 악화를 우려한 장개석과 아직까지는 압도적으로 열세에 놓여있던 연안측의 입장이 서로 일치하여 더이상 사건은 확대되지 않았습니다. 물론 그렇다고 양측의 모순과 갈등이 해소된 것도 아니지만 적어도 양측이 완전히 갈라설 정도는 아니었으며 이 점에 대해서는 일본조차 "중국이 곧 분열되어 붕괴될 것이라는 견해는 희망적인 관측일뿐"이라고 인정하였습니다. 한편, 무한 함락후 일본의 대중 전략은 단기간에 중국을 굴복시킬 수 없다고 판단하고 인적, 물적 소모가 큰 대규모 공세를 중지하는 대신 장기적인 관점에서 중국의 저항 의지를 꺾고 "내부적 붕괴"를 유도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즉, 첫번째로 기 점령지의 치안 확보에 중점을 두면서 중국에 대한 경제봉쇄를 강화하여 보급선을 차단시키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 하문, 남녕, 남창 등 철도요지와 항구를 점령하여 중국을 봉쇄하였고 중경, 곤명, 서안, 성도 등 대도시에 대해 무차별로 폭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습니다. 두번째가, 왕정위를 회유함으로서 국민정부를 분열시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두가지 모두 결과적으로 성공하지 못했습니다. 중국은 곧 새로운 대외루트를 개척하였고, 일본군의 공습은 독일의 런던공습과 마찬가지로 중국인의 저항 의지를 꺾기는 커녕 반일의식만 강화하였습니다. 왕정위정권 역시 여기에 동조하는 세력은 극히 미미했고 따라서 일본군의 힘에 의해서만 존립할 수 있는 명목상의 정권에 불과하였습니다. 게다가 대본영의 "점령지의 불확대 방침"에도 불구하고 현지부대들은 전술적인 승리에 급급하여 이런저런 이유를 갖다붙이며 전선을 무의미하게 확대해 나감으로서 병력과 물자만 소모할뿐 전쟁의 승패에는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습니다. 결국 일본은 중국을 넘어서 전쟁을 확대할 수 밖에 없다고 판단하게 되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