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 6월 22일, 프랑스는 항복을 선언하였고 25일 0시 35분을 기해 모든 전투는 정지됩니다. 5월 10일 독일이 저지대 국가들에 대해 최초의 공격을 시작한지 고작 6주만의 일이었습니다. 독일군의 이른바 "전격전"앞에서 프랑스군을 비롯한 연합군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한채 속수무책으로 붕괴되었고 6월 14일에는 파리가 함락됩니다. 거대한 연합군 전체가 붕괴되자 레이노를 대신해 수상이 된 페탕은 독일의 모든 요구조건을 수락할 수 밖에 없었죠.
휴전협정을 체결중인 독-프 양측 대표들. 왼쪽의 독일 대표는 카이텔원수이고 오른쪽 중앙의 프랑스 대표는 제2군 사령관인 욍치제르 대장(후에 비시정권 육군총사령관을 맡음)
※ 사진출처 : http://kk1234ang.egloos.com/2652601
당대 유럽 최강을 자랑했던 프랑스가 그렇게 손쉽게 와해되리라고는 어느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심지어 히틀러와 독일군 최고 수뇌부들조차) 5월 15일 아침 7시 30분 레이노 수상은 처칠에게 전화를 걸고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We are defeated, we have lost the battle!" 당황한 처칠이 급히 파리로 날아가 레이노수상과 달라디에 국방장관 등이 참석한 가운데 프랑스군 총사령관인 가믈렝 장군에게 "당신은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독일군의 측면을 공격할 계획입니까?"라고 묻자, 가믈렝은 "수적으로 열세하고 장비도 열세하며 방법까지 열세해서 공격할 수 없다"라고 대답합니다.
1차대전 당시의 프랑스군은 독일군에 비해 국력, 상비군의 규모, 야포 등 모든 면에서 열세했고 서전에서 참패하여 한때 파리마저 함락의 위기에 빠졌음에도 전 국민이 일치단결함으로서 마른에서 독일군의 전진을 막아내는데 성공합니다. 프랑스군이 보불전쟁의 참패를 재현하지 않고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던 것은 총사령관인 조프르의 냉정함과 포슈, 페탕, 레베르 등 현지 지휘관들의 용맹한 분전 덕분도 있지만 무엇보다 당시 수상이었던 조지 클래망소의 강력한 리더쉽과 카리스마, 용기, 그리고 국정 장악력에 있었습니다. 당시 76세였던 그는 "나는 생에 집착하지 않는다. 나는 완전한 승리를 할때까지 최선을 다할 것을 맹세한다"라고 선언하여 정부의 강한 의지를 국민들에게 명확히 보여주었고 정부와 군부내의 패배주의자들을 과감하게 밀어냄으로서 국론을 통일시켰습니다. 마른전투에서 포슈가 단호하게 "퇴각은 없다! 모두 나가 싸우라"라는 명령을 내리며 병사들의 무너지는 사기를 바로잡고 과감하게 반격을 가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지도자가 강한 리더쉽으로 국가의 중심을 바로 잡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2차대전 당시의 프랑스군을 주축으로 한 연합군은 1차대전때와는 정반대로 독일군을 완전히 압도하고 있었습니다. 연합군 152개 사단에 대해 독일군은 135개 사단이었고 전차에서는 연합군이 4,204대에 대해 독일군은 2,439대였으며 항공기에서도 연합군 4,981대, 독일군 3,369대, 야포에서 연합군이 13,974문을 보유한 것에 비해 독일군은 7,378문에 불과했습니다. 해군에서는 아예 비교 자체가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즉, 병력은 물론 전차, 야포, 해공군력 모든 면에서 연합군이 우세했습니다. 가믈렝이 처칠을 향해 참담한 표정으로 "더이상 예비대가 없다"라고 말했을때조차 프랑스군은 여전히 100만이상의 병력이 남아 있었습니다.
후에 페탕은 패배원인에 대해 "너무 적은 병력, 너무 적은 무기, 너무 적은 동맹국"이라고 변명했으나 이는 한낱 억지 궤변에 불과했으며 근본적인 원인은 지도자의 리더쉽 결여에 있었습니다. 레이노는 내각에 대해 북아프리카로 수도를 옮겨서라도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했으나 패배주의가 만연했던 각료들 대부분은 이를 거부하고 항복할 것을 주장하였습니다. 레이노는 국가 수장으로서 그야말로 무기력했으며 본인부터 공황상태에 빠져 국정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채 무책임하게 사퇴를 선언한후 페탕에게 수상직을 넘겨버렸습니다. 가믈렝은 독일의 공격 직전만 해도 "독일이 우리를 공격하는 호의를 보인다면 독일에게 10억프랑을 주겠다"는 호언을 했음에도 정작 독일군이 공격하자 1주일도 되지 않아 싸울 의지 자체를 상실했으며 조프르나 포슈와 달리 끝까지 싸워서 이기겠다는 어떤 의지도, 노력도 없었습니다.
포로가 되어 수용소로 향하는 프랑스군 장병들. 처칠은 프랑스군의 전선을 시찰한후 "그들은 만사 냉랭하게 나 몰라라 하는 분위기가 만연했다"라며 극도로 저하된 무기력증과 무력감에 대해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대부분의 프랑스군은 초전에 패배하자 급속도로 사기를 상실했고 독일군과 대면하자 총 한발 쏘지 않고 무기를 버리고 투항해 버렸습니다. ※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pzkpfw3485/2242227
이런 점에서 국가가 외부의 침략을 받아 국난에 직면했을때 지도자의 리더쉽과 승리를 향한 의지가 전쟁 전체에 얼마나 결정적인 영향을 주는 것인지 단적으로 보여준다고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프랑스의 항복은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극동에서도 큰 영향을 주게 됩니다. 일본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시작으로 본격적으로 남방 침략을 시작하기 때문이었죠. 이로 인해 미, 영과의 관계도 결정적으로 악화되면서 결국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이어지게 됩니다.
동부연안지역을 상실한 중국의 주된 군수물자 획득 루트는 홍콩을 경유하는 루트, 버마와 운남을 경유하는 루트, 신강성을 경유하는 루트, 그리고 하노이를 경유하는 루트였는데 이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것이 바로 하노이 루트였습니다. 점점 장기화되어 가는 중국과의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기 위해서는 이 중국의 생명줄을 봉쇄하는 것이 급선무였지만, 무작정 강경하게 나설 수도 없는 입장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중일전쟁은 "전쟁"이지만 서로 정식으로 선전포고를 하지 않았기에 국제법상으로는 "전쟁"이 아닌, 어디까지나 "분쟁"이었기 때문이죠. 바로 이것이 일본의 전략적 딜레마였는데, 이때문에 미, 영, 프, 소 등 열강들에게 대중 무기수출의 중단을 강력하게 요구할 명분이 없었고 그렇다고 이들 국가의 선박이나 화물을 강제로 단속하거나 압류한다면 당연히 심각한 마찰이 생길 수 밖에 없었죠.
그런데 일본이 38년 10월 광주를 점령한후 39년에는 중불국경에서 가까운 해남도와 남녕, 용주를 차례로 점령하자 프랑스는 이를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하였고 양국의 관계는 급격하게 악화되기 시작합니다. 게다가 메이지이래 전통적인 우방국이었던 영국에 대해서도 일본의 대중봉쇄로 인해 경제적 피해에다 39년 6월 천진의 영국 조계에 대한 일본군의 봉쇄, 일본과 중국 점령지에서 전개된 반영운동, 운남 철도(버마 랑군-운남 곤명간 철도)에 대한 폭격 등으로 점점 적으로 돌리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일본은 관계회복에 노력하기보다 경직되고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여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죠.
이런 긴장관계가 40년 6월 프랑스가 패망하자 또다시 반전되게 됩니다. 영불 연합군이 "덩케르크 철수"를 단행하고 프랑스가 만신창이가 되자 40년 6월 12일부터 일본 참모본부의 작전과장을 비롯한 주요 실무자들을 중심으로 유럽 정세의 급변에 따른 향후 전쟁방침에 대한 연일 회의가 개최되어 7월 3일 육군에서는 이른바 "세계정세의 추이에 따른 시국처리 요강"을 작성하여 해군과의 조정을 거친후 7월 22일 고노에 내각에 정식으로 제출됩니다.
그 주요내용은 바로 일본의 본격적인 남방침략의 개시를 결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1. 전쟁개시는 기습을 원칙으로 한다.
2. 필리핀에 대해서 가능한 충돌을 회피하되 부득이한 경우 무력을 사용한다.
3. 우선 싱가포르를 공격한다. 다음으로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급습하여 점령한다. 이를 위한 공략기지로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및 태국에 항공기지의 건설을 고려한다.
4. 적당한 시기에 홍콩을 점령한다.
5. 만약 가능하다면 영국, 네덜란드를 분리시켜 싱가포르를 점령하지 않고 직접 네덜란드령 동인도를 기습하여 중요 자원을 확보한다.
6. 이를 위해 사용하는 병력은 수개 사단 이하로 통제한다.
이와 같은 군부의 계획에 대해 고노에 내각은 7월 27일 원안 그대로 승인합니다. 노몬한에서 패배한후 소련의 역량을 재평가하게 된 일본은 소련과의 전쟁은 승산이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고 그동안 계획해 왔던 "북진계획"을 사실상 포기하고 있었습니다.
대신 동아시아에서 영, 프의 영향력이 급격히 약화된 것을 이용해 "남진"을 꿈꾸게 됩니다. 특히 자원이 풍부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네덜란드령 동인도, 영국령 말레이는 그야말로 먹음직한 먹이였습니다. 그러나 군부의 계획은 대단히 낙관적이며 구체성이 결여된, 그야말로 모호하기 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더욱이 일본 경제는 중일전쟁의 장기화와 병력의 대대적인 증강으로 인한 노동력 부족으로 인해 39년말부터 점차 쇠퇴하고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철강과 중유의 생산은 1938년을 기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했고 식량 생산 역시 40년부터 감소하면서 국민들의 생활은 심각하게 궁핍해지고 있었습니다.
밑빠진 독마냥 자원을 쏟아부으면서도 중국전선 하나도 끝내지 못하는 상황에서, 기초 역량마저 허덕이는 일본이 전쟁을 남쪽으로 확대하겠다는 것은 누가 보더라도 무모한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군부는 태평하게도 유럽에서 독일이 승리하자 일본도 여기에 재빨리 편승해야 한다고 공공연히 주장합니다. 언론들 역시 "독일 승리의 버스에 늦게 타서는 안된다"라는 선동을 조장하고 있었고 중국전선과 심지어 소련군에게 완패했던 노몬한 전투조차 패배를 숨기고 "눈부신 승리"만을 떠들자 국민들 역시 군국주의적인 분위기에 상대를 경시하는 풍조가 만연하고 있었습니다.
즉, 일본의 남방침략은 스스로의 역량에 의한 것이 아니라, 향후 정세에 대한 신중한 검토도 없이 단지 막연하게 독일의 승리에 편승해 재미 좀 보겠다는 전형적인 기회주의적인 것이었고 이런 점에서 준비도 없이 "일단 공격하고 보자"는 식으로 시작했던 이탈리아 무솔리니의 무모함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 일본 군부가 대미개전을 결정한 것 역시 단순히 "강렬한 싸닥션 한방이면 미국이 협상에 응할 것"라고 생각해서만이 아니라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이런 기회주의적 낙관론에 있었습니다. 39년 9월 일본 참모본부에서는 최고 경제 전문가들로 "전쟁경제연구반"을 구성하여 미국과의 개전시 얼마나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가를 연구합니다. 1년6개월간의 치밀한 연구를 통해 나온 결과는 실로 참담한 것이었는데 쌍방의 국력 차이는 일본을 1로 보았을때 미국은 20에 해당했으며 결론은 "전쟁 불가"였습니다. 그럼에도 독일이 대소전에서 승리하고 이어서 영국마저 항복시킨다면 미국 역시 백기를 들 수 밖에 없을 것이며 그 전에 최대한 이익을 얻어야 한다는 강박감에 개전을 결정합니다. 한마디로 일본과 이탈리아는 독일 믿는 마음으로 이것저것 벌인 셈이죠.(히틀러 曰 "나 믿지마")
또한 일본은 프랑스가 패망하여 혼란에 빠진 것을 이용해 인도차이나의 프랑스 식민정부에 대해 하노이루트의 폐쇄 및 대중물자수송의 중단과 이를 감시하기 위해 중불국경에 감시단의 주재를 강요하였고 이에 프랑스측은 7월 7일부터 1개월간 대중물자수송의 중단을 약속합니다. 또한 영국 역시 일본의 압박에 못이겨 7월 17일부터 버마루트를 폐쇄합니다. 이는 중국에게는 그야말로 사활이 걸렸다고 해도 좋을만큼 치명적이었죠.
프랑스 식민정부의 양보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더욱 기고만장해져 북부 인도차이나 통행권 및 군사시설의 건설과 사용권, 3개 비행장에 대한 사용권을 요구하였고 여기에 저항할 능력이 없었던 장 드쿠 총독은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여 8월 30일 양국은 각서를 교환하였고 9월 6일에 정식으로 조인키로 합의합니다.
장 드쿠 제독. 조르주 카트루총독이 일본의 압박에 굴복하자 페탕은 그를 즉각 소환하고 극동함대 사령관인 드쿠제독을 신임 총독으로 임명합니다. 그러나 병력이라곤 식민지군까지 포함해 1만5천명에 불과한데다 본국의 지원을 받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그는 일본군의 인도차이나 침공을 어떻게든 막기 위해 영, 미, 중과 연합하는 방안을 구상하기도 했으나 현실적으로 이들은 자국을 방어하기에도 급급했고 남을 도와줄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따라서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지배권을 보장받는 선에서 일본의 모든 요구 조건을 받아들였으나 41년 7월 28일 일본이 남은 지역에 대해서도 장악하면서 프랑스 식민정부는 사실상 허수아비가 되었고 45년 3월에는 아예 프랑스군 전체를 무장해제시킴으로서 인도차이나 전역이 일본의 지배아래 들어갑니다.
19세기이래 인도차이나에 주둔하고 있던 프랑스 외인부대의 행진모습
※ 사진출처 : http://blog.naver.com/sundin13/140011077203
그런데 정식 조인을 체결하기 직전 당시 남녕과 중불 국경에 주둔하고 있던 제5사단 일부 병력이 명령도 없이 무단으로 월경하여 프랑스군과 충돌하는 상황이 빚어집니다. 이는 당초 양국이 체결한 합의사안을 현지 부대가 멋대로 무시한 것이었음에도 일본 내각은 도리어 일방적으로 9월 23일 0시를 기해 제5사단 및 해군육전대 3개 대대의 인도차이나 침공을 결정하였고 이에 대해 프랑스군이 저항할 경우 무력을 사용해도 좋다, 라고 명령을 내립니다. 따라서 23일부터 24일까지 일본군과 프랑스 식민군간의 소규모 충돌이 곳곳에서 벌어졌고 육군 비행대가 하이퐁을 폭격하여 37명의 민간인이 사망하기도 합니다. 일본은 약 2만 5천의 병력으로 북부인도차이나를 점령한후 이곳에서 운남, 귀주 등 중국 남부를 무차별로 폭격하는 한편, 대량의 식량을 강제로 징발하였는데 40년 9월부터 12월까지 3개월간 징발한 쌀만도 46만8천톤에 달했고 이후에도 식량 수탈은 더욱 늘어나 전후 베트남정부가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일본의 수탈로 인해 북부 델타지역에서 2백만명이상이 아사하였다"라고 합니다.
인도차이나로 진입하는 일본군. ※ 사진출처 : http://blog.ohmynews.com/gompd/154027
북부인도차이나 점령 3일후인 9월 27일에는 또 한번의 큰 사건이 벌어지는데, 독-일-이 삼국 군사동맹의 체결이었습니다. 10년을 유효기간으로 하는 이른바 "추축동맹"은 37년 11월에 체결된 삼국 방공협정과는 명확히 차이가 있었습니다. 이 조약은 독일,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일본은 동아시아에서의 배타적 지배권을 서로 인정함으로서 일본의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의 건설을 명문화합니다.
베를린에서 열린 삼국군사동맹 조인식. 주독일본대사인 구루스 사부로, 이탈리아 외상인 갈레아초 치아노, 독일 외상인 요하임 폰 리벤트로프가 각각 대표로 조인하였습니다.(그런데, 사진의 오른쪽 사람은 리벤트로프가 아닌 히틀러로 보임)
그러나 여기에 대해서는 일본내부에서도 많은 반대가 있었습니다. 독일, 이탈리아와의 관계 강화와 남진정책은 당연히 미, 영, 프와의 관계 악화로 직결될 수 밖에 없는데 특히 미국에 경제적 의존도가 대단히 높은 일본으로서는 아무 대책없이 미국과 무역이 단절될 경우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죠. 따라서 39년 아베내각에서 외상이었던 노무라 기치사부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주장하고 미일 통상 조약의 갱신을 위해 중국에서의 미국의 권리존중과 양자강에서 제3국 선박의 통행을 재개할 것을 제안합니다.
또한 전 해군상이자 40년 1월부터 수상이 된 요나이 미쓰마사 역시 미국과의 관계 악화를 우려하여 추축동맹의 결성을 강력하게 반대했으나 이에 불만을 품은 육군에 의해 요나이는 7개월만에 수상직에서 물러나야 했고 제2차 고노에 내각이 결성됩니다. 고노에는 "북진"을 고수했던 요나이와 달리 "북방남진(北防南進)"을 방침으로 하였고 독일과의 동맹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마쓰오카 요스케를 외상으로 임명합니다. 그는 8월 이른바 "대동아 공영권"을 공식 선언하였는데 그는 "이는 동아신질서와 같은 것이며 여기에는 네덜란드령 동인도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포함한다"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일본이 독일, 이탈리아와 손을 잡은 것은 상징적인 의미외에는 지리적으로 보더라도 서로 어떤 도움도 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오히려 미, 영은 일본에 대해 극도의 경계심을 품었고 관계는 심각하게 악화됩니다. 영국은 일본의 압력으로 7월 17일부터 대중원조루트인 버마루트를 폐쇄하고 있었으나 삼국추축동맹이 결성된 직후인 10월 4일 할리팍스 외상은 장개석에게 버마 루트의 재개를 통보합니다. 또한 처칠은 하원에서의 연설에서 "추축동맹은 일본에게 대단히 불리하다"라고 지적하면서 이해할 수 없다는 식으로 의문을 표하기도 하였습니다.
사실, 추축동맹의 가입을 적극 주도했던 마츠오카는 국운이 걸린 일임에도 충분한 준비도, 연구와 검토도 없이 그의 독단으로 졸속적으로 추진된 것이나 다름없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외무차관과 외무성 간부들은 물론 주독, 주이탈리아 대사의 의견조차 한번 들어보지 않았으며 독일, 이탈리아의 국내사정이나 군사력에 대해서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채 막연히 과대평가하였습니다.
일본의 추축동맹 가입은 미국을 견제하기는 커녕 반대급부로 미, 영의 대중 원조 강화로 이어졌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미국은 중일전쟁에 대해 중립을 고수한채 직접적인 개입은 회피하고 있었으며 37년 12월에 있었던 "파나이호 사건"에 대해서도 적당한 선에서 타협합니다. 미국으로서는 중일전쟁이 중국내 미국의 이익을 침해하지만, 그보다 일본에 대한 이해관계가 월등히 컸기 때문에 굳이 일본과 대립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죠. 그러나 39년부터 영일간의 관계가 악화되자 미국내 대일여론 역시 악화되기 시작했고 일본군의 북부인도차이나 무력 점거와 추축동맹의 결성은 본격적으로 대일강경으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됩니다.
루즈벨트는 7월 26일에 영국, 네덜란드와 연계하여 이미 전쟁물자의 대일수출을 허가제로 전환하였고 11월에는 중국에 대해 1억 달러의 차관 제공을 결정합니다. 영국 역시 12월 10일 500만 파운드의 차관과 500만 파운드의 신용차관을 제공키로 하죠. 장개석이 전투기 500대와 파일럿의 지원을 요청한 것에 대해서도 직접적인 원조 대신 별도로 5천만달러의 차관을 공여하여 이 돈으로 P-40 전투기 100대를 구입케하고 미육군 항공대 장교들을 대상으로 의용군을 모집할 수 있도록 승인합니다. 바로 이것이 미국인 제1의용대대(AVG), 이른바 "플라잉타이거스(비호대)"였습니다.
날개에 "청천백일기"를 마킹한 커티스사 P-40 워호크 전투기와 플라잉타이거스의 파일럿들.
※ 사진출처 : http://blog.daum.net/pzkpfw3485/2242146
노구교사변이래 중국과 일본으로 국한되어 있었던 전쟁은 어느듯 동아시아 전체로 확대되기 시작하고 있었습니다. 일본은 본연의 목적은 잊어버린채 관심사가 중국에서 동남아로, 그리고 태평양 전체로 이동하고 있었죠.
그럼 이시기 중국전선의 상황은 어떠했는가. 39년 12월부터 40년 4월까지 장개석의 야심찬 "동계공세"가 실패로 끝난후 중국은 수세로 전환합니다. 동계 공세에서 많은 인력과 물자를 상실한 중국은 이에 대한 보충과 재편성이 절실했으나 유럽에서의 전쟁발발과 프랑스의 패배, 그리고 하노이루트와 버마루트가 폐쇄됨으로서 심각한 차질이 빚어진데다 소련의 원조 역시 9월 일소정전협정 체결후 격감하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내부적으로는 왕정위 괴뢰정권의 수립에다, 팔로군의 세력이 급격히 확대되면서 국공간의 갈등도 심화되어 무력충돌이 점점 빈번해지는 등 정치적인 분열의 양상마저 보이고 있었죠.
일본의 지나파견군 역시 대본영의 장기전략방침에 따라 물자와 인력의 소요가 큰 대규모 작전은 배제하는 대신, "장개석정권에 대한 봉쇄", "점령지역의 치안 강화", "적 후방에 대한 전략폭격", "제한적 공격"을 향후 전쟁 방침으로 정합니다. 사실 38년 10월 무한 회전이후 공세종말점에 도달한 일본은 45년 8월 전쟁이 끝나는 그 순간까지 근 7년동안이나 중일전쟁의 향방을 좌우할만한 결정적인 공격을 하지 못한채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일본군의 가장 취약점은 바로 병참능력의 결여에 있었습니다.
"보급전의 역사"에서 크레펠트 교수는 2차대전중 독일의 빈약한 병참 준비와 차량의 심각한 부족을 지적하면서 "거대한 작전으로 인한 병참상의 문제는 상상을 초월함에도 독일군의 대응은 그야말로 평범했다"라고 비판하고 있으나, 사실 이는 독일군에게만 국한된 문제라기보다 미군을 제외한 동시기 모든 나라의 군대가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던 시대적 한계였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 것입니다.(그나마 독일군은 나은 축에 속했다는 것은 틀림없습니다. 영국과 소련은 스스로의 역량보다도 미국이라는 거대한 보급창이 있었기에 기동력과 병참에서 독일을 점차 능가할 수 있었습니다.)
물론 일본의 병참능력은 독일과 비교할 수 없을만큼 형편없었습니다. 당시 일본군의 병참실태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연구한 사료는 없으나, 예를 들어 41년 9월 제2차 장사작전에 참전한 제40사단의 사사키 하루타카 소위는 다음과 같이 회상하며 열악한 상황을 지적하고 있었습니다.
"(중략) 각자가 30kg나 되는 장구와 병기를 메고 밤낮없이 걸었으며 휴식시에는 노상에서 자고 숙영시에는 민가로 달려가 쌀, 소금, 부식을 약탈한후 식사를 하고 출발 전 두끼분의 도시락을 준비하여 걷고 또 걷는다. 공격 개시시에는 7~10일분 식량을 등에 지고 출발하지만 이후의 추가 보급이 없어 돌아올때 역시 약탈할 수 밖에 없었다."
개전초만 해도 철도를 이용해 쾌속진격했던 일본군이었으나 중국군이 서부 오지로 후퇴하자, 별도의 수송수단도 없고 비축 물자도 빈약하여 공격부대에 대해 지속적인 보급을 할 수 없다보니 일본군은 주둔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채 일정 거리에 있는 중국군 진지를 공략하고 퇴근하듯 돌아오는 것을 무한 반복할 수 밖에 없었으며 따라서 적을 추격하여 전과를 확대하지도, 결정적인 일격을 먹일 수도 없었습니다. 단지 그 과정에서 병력과 물자만 무한정 소모할 뿐이었죠.
이에 대해 장개석 역시 41년 10월 20일 주요 지휘관들이 참석한 남악 군사회의에서 일본군이 한계에 도달했음을 강조합니다.
"일본군의 사기는 무한회전 이후 점차 하락하여 이제 교육, 훈련, 기술, 체격 어느 면에서도 이전보다 크게 뒤진다. 질적으로도 이전과 차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양적으로도 한계에 도달하여 있다. 우리는 현재 그들을 타파할 자신이 있다. 일본군은 어느 지점으로 진격하더라도 2주가 한계이며 2주가 넘으면 스스로 철퇴하지 않으면 안된다."
물론 그럼에도 일본군은 여전히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였습니다. 중국은 수세였고 공세를 취하는 쪽은 일본이었습니다. 일본군은 "주변의 위협을 제거하고 중국군의 전력을 소모시킨다"는 명분으로 주로 무한과 장강 일대에서 전략적으로는 큰 의미가 없는 국지적이고 제한적인 단기공세를 축차적으로 취하였고 주된 공격대상은 제1전구와 제3전구, 제5전구, 제9전구였습니다. 그러나 매 작전마다 중국군의 강력하고 끈기있는 저항에 직면하여 고전의 연속이었고 이들을 격파하고 많은 손실을 입힐 수는 있었으나 이를 유지할 능력이 없어 공세종말점에 도달하면 도로 반전(反轉)하여 귀환함으로서 전선의 변동은 거의 없었습니다. 또한 일본군이 철수하면 즉시 중국군의 반격과 추격을 받았고 철수과정에서 게릴라들의 거듭된 습격으로 많은 손실을 입었습니다.
태평양전쟁의 발발까지 전개된 주요 작전으로는, 1940년 10월 제13군이 장강 남쪽의 안휘성, 강소성 북부에서 제3전구에 대해 공격한 "강남작전", 11월말 제11군이 호북성 한수 주변의 제5전구에 대해 공격한 "한수작전", 41년 1월말 탕은백의 제31집단군이 양양에서 의창을 위협하자 제11군이 이를 공격하여 격퇴한 "예남작전", 41년 5월 제2차 장사작전의 전초작전으로 재차 신양과 양양 일대에서 제5전구를 공격한 "강북작전" 등이 있었습니다.
특히 북지나방면군 산하 제1군은 산서성 남부에서 지속적인 유격전을 펼치고 있었던 위립황의 제1전구에 대해 41년 5월 "백호작전(중조산전투)"을 개시하여 이들의 포위섬멸을 시도하였고 중국군은 주력이 괴멸되어 4만이 넘는 사상자를 내는 대참패를 당합니다. 이로 인해 이 방면에서 국민정부군의 유격활동은 급격히 약화된 대신, 이 공백을 팔로군측이 잠식해 나갑니다.
그러나 41년 3월 15일부터 4월 2일까지 강서성 북부 상고를 놓고 전개된 "상고전투"에서는 중국군 제19집단군이 일본군 제33사단과 제34사단의 공격을 격퇴하고 이를 측면에서 포위하여 큰 타격을 입혔으며 특히 제33사단 제20여단은 괴멸당합니다. 일본군은 탄약이 떨어져 공중보급까지 해야 했고 중국군은 후퇴하는 일본군을 추격하여 4월 2일까지 빼앗긴 모든 지역을 탈환합니다. 이 패배의 충격으로 제34사단 참모장인 사쿠라이 도쿠타로우대좌는 할복합니다.
중국측은 "공전의 대승리"라며 "일본군의 피해는 1만5천에 달했으며 포로 17명, 산포 6문, 경기관총 24정, 소총 400여정, 각종 탄약 11만발을 노획하였다"라고 대대적으로 선전하였습니다.(반면, 일본측은 약 1천여명의 사상자를 내었다고 주장) 또한 장개석은 제19집단군 사령관 나탁영에게 직접 승리를 치하하면서 15만원의 상금을 지급하였고 군사위원회에서는 상고전투에서 나탁영의 유인작전과 포위전술에 대한 연구보고서를 예하부대에 배포하고 향후 방어전략에 적극 활용할 것을 지시합니다.
이시기 최대규모의 전투는 41년 9월부터 10월까지 진행된 "제2차 장사전투"였습니다. 전해에 이미 장사 공략에 실패했던 일본 육군 중앙부는 41년 1월 16일 이른바 "대중국 장기작전지도계획"을 수립하였는데 중국의 저항의지를 꺾고 중국전선의 전황을 변화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제11군을 동원해 호남성의 성도인 장사를 공략하고 중국군의 주력인 제9전구를 격파하겠다는 계획을 수립합니다. 그러나 6월에 뜻밖에도 독일이 소련을 전면적으로 침공함으로서 독소전쟁이 발발합니다. 이는 일본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고 일단 작전을 일시 중단시킵니다. 대본영은 향후 정세가 어떻게 전개될지 일단 추이를 지켜본다는 것과, 남방진출을 본격적으로 계획함으로서 중국전선에서 대규모 작전의 수행을 중지하고 병력과 물자를 보존시켜 남방으로 전용하겠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대해 제11군은 강력하게 반발하고 제한된 공세를 취할 수 있도록 요구하자 대본영은 8월 26일 "장사작전"을 발동하여 "현작전지역에서 잠시 벗어나" 작전하는 것을 승인하되, "전선의 확대"과 "물자의 약탈"은 작전의 주된 목적이 아니며 제9전구에 대해 타격을 가한후 즉시 철수할 것을 재차 강조합니다. 동원된 병력은 제11군 산하 4개사단(제3사단, 제4사단, 제6사단, 제40사단)과 4개 독립지대(9개 보병대대 및 3개 포병대대로 구성), 제13 전차연대(주로 95식 경전차로 장비), 제14 야전중포병연대, 2개 비행대 등이었습니다.
중국군은 8월중순부터 일본군이 장사방면에서 병력과 물자가 대거 증강되고 있음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곧 장사에 대한 공세를 개시할 것을 예상하였습니다. 설악의 제9전구는 39년부터 41년까지 일본군과의 거듭된 전투로 손실이 누적되어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는데, 장개석은 설악에게 장사 북쪽에서 지연전과 유격전을 실시하고 주력부대는 적의 측후방으로 접근하여 포위 섬멸할 것을 명령하였고 제9전구를 지원하기 위해 인접한 제3전구와 제5전구, 제6전구에 대해서도 병력을 제9전구로 증원시키는 한편 유격전을 실시하여 제11군의 측면을 위협함으로서 병력의 증원을 차단하고 적의 시선을 분산시켜 제9전구의 부담을 경감시키도록 지시합니다. 중국군의 병력은 최대 50만에 달하였습니다.
일본군의 공세는 9월 7일 신장하(양자강의 지류로 장사 북쪽에서 호남성을 관통) 남안의 중국군의 전초방어선에 대해 332문에 달하는 막강한 포병화력으로 일제히 강타하면서 시작됩니다. 제6사단이 대운산을 공격하고 일본군 주력부대는 18일 신장하를 도하한후 중국군 제4군의 방어선을 돌파합니다. 이어서 골수(汨水) 주변에서 방어선을 구축한 중국군 제26군과 제37군에 대해 포위섬멸을 시도했으나 중국군은 다수의 토치카를 방패로 삼아 강력한 저항을 하였고 일본군은 고전을 면치 못합니다. 중국군은 3일간의 전투끝에 25일 남쪽으로 퇴각합니다. 또한 이들의 지원을 위해 복상중이던 제10군 역시 일본군 제3사단에게 패퇴하였고 동쪽에서 일본군의 측면을 위협하는 제74군도 제3사단, 제6사단의 공격을 받아 2일간의 치열한 전투끝에 27일 동쪽으로 퇴각합니다.
장사전면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설악은 장사에서 철수명령을 내렸고 일본군 제4사단이 27일 저녁 장사성내로 진입합니다. 그러나 중국군은 제11군에 대해 외곽의 광범위한 지역에서 대규모 포위망을 형성하였고 9월 26일 총반격을 명령하는 한편, 제6전구에 대해서 의창의 탈환을 명령합니다. 10월 1일 일본군은 장사를 버리고 철수를 시작합니다. 그러나 중국군 4개군(제4, 제20, 제58, 제72군)의 강력한 공격을 받아 한때 퇴로가 차단될 위기에 처했으나 간신히 돌파하였고 10월 6일 신장하 이북으로 철수하여 원 주둔지로 퇴각합니다. 일본군의 피해는 그들이 인정한 것만도 전사 1,670명에 부상 5,184명에 달했습니다.
또한 장개석의 의창 탈환 명령에 따라 9월 28일 제6전구 15개 사단이 삼면에서 의창을 포위 공격합니다. 중국군은 의창 탈환을 위해 중포를 비롯한 각종 야포 140문을 집결시켜 일본군 제13사단을 강타하였고 제13사단은 전 병력의 1/3을 상실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는 등 전멸의 위기에 처합니다. 일본군은 중국군에 대해 항공폭격을 하는 한편 제39사단을 급히 증원합니다. 더욱이 일본군 포병은 2천5백발에 달하는 대량의 독가스탄을 무차별로 발사하여 중국군은 큰 피해를 입었고 결국 의창 공략을 포기하고 10월 10일 퇴각합니다.
40년~41년 중국전선의 대치 상태 및 주요 작전 현황
레이황은 동계공세이후 중국군에 대해 "지독히도 형편없는 상황에 몰려 있었다"라고 표현하고 군기의 문란함과 사기의 저하, 허위보고의 만연, 장교들의 부정부패함을 신랄하게 비판합니다만, 그러나 중국군은 적의 공격에 대해 여전히 강력한 인내심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장개석의 권위는 흔들리지 않았으며 그의 명령에 따라 각 전구는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여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반격하였습니다. 장기간의 누적된 피해에도 불구하고 그 적극성과 인내심, 전술역량은 오히려 개전 초반보다 개선되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의창탈환작전은 동계공세이래 첫번째 대규모 반격작전이었으며 일본군의 허를 찌르고 전략적 요충지인 의창을 탈환직전까지 밀어붙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중국군은 1차대전당시 전의를 상실하고 내부에서부터 붕괴되기 시작했던 제정러시아군과는 명백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일본군은 중국군을 격퇴하기 위해 국제법으로 금지된 독가스 공격에 의존했으며 시간이 지날수록 그 빈도는 점점 늘어납니다.
레이황이 지적한 "중국군의 문제점"은 오히려 일본군에게서 더 심각하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간부와 병사들의 심각한 질적 저하는 물론이고 장기 주둔에 따라 군의 기강이 점점 문란해져 군의 퇴폐화와 범죄가 급격하게 늘어나고 있었고 심지어 음주한 병사들이 병영에서 폭동을 일으키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하였습니다. 허위보고 역시 만연하여 패배하여 후퇴한 작전에 대해서조차 "당초 목적을 달성하고 자발적으로 철수하였다"고 선전하였고 자신들의 피해는 축소합니다. 그런 상황에서 천운과 요행에 걸고 자포자기식으로 시작한 것이 바로 미국과의 전쟁이었죠.
댓글
댓글 리스트-
작성자centurion 작성시간 13.08.20 프랑스가 그토록 무기력하게 무너진 이유가 뭘까요? 1차대전의 지옥을 경험하고 난후 염전주의에 빠진건지...
-
답댓글 작성자Vv아마게돈vV 작성시간 13.08.20 무능한 지휘부와 재수 없음? 이정도?
-
답댓글 작성자푸른 장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작성시간 13.08.20 죽을둥 살둥 싸워서 이겨봤더니 별로 좋아진 거 없더라~ 그리고 전쟁에서 져도 별로 손해난 거 없는 거 같은 독일을 보니...... 거기다가 큰 희생을 치르고 전쟁에서 이겼더니 정작 빛을 본 것은 미국이라는...... 아마 이런 생각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겠죠.